# 186화
“……신인이요.”
뉴마도 일단 아이돌 기획사이다. 아이돌 기획사는 보통 한 그룹만 만들어서 평생 이끌어가지 않는다.
아이리스를 데리고 나갔던 뉴레인도 연습생들을 모으는 걸 보면 아마 차기 그룹을 육성할 생각이 있는 것 같고.
그러나 우린 모노크롬 단 한 그룹만을 지원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중이다.
종종 그룹 한 팀만을 위해 회사나 레이블이 따로 생기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뉴마는 그러기 위해 세워진 회사가 아니었다.
‘이런 얘기가 한번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신인 아이돌을 육성한다면 아티스트 레이블인 뉴레인이 하는 게 맞겠지만, 뉴마에도 아티스트팀이 남아 있다.
실상은 뉴레인으로 옮겨가지 못한 나머지가 어쩌지도 못하고 남은 모양새였으나, 아마 일부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아티스트를 기획하기 위해 둘로 나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새로 신인을 육성하려는 기미를 전혀 내보이지 않았고, 현재 연습생도 배우 지망으로 채워져 있어서 지금 이 형태가 암묵적으로 합의된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신인 육성이라는 게 저희가 하고 싶다고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그래서 혹시 생각만이라도 있으신지 여쭤본 겁니다. 계획을 공유해 주시면 회사도 같이 고민해보고 지원할 수 있을 테니까요.”
“저보단 실장님이 원하셔서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요.”
정곡이었는지 권진헌 실장은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언제는 사장이 직접 와서 모노크롬에 많이 투자할 순 없다고 눈치 주더니, 이제는 또 신인을 같이 만들어보자고?
‘배우팀 눈에도 모노크롬이 전보다 잘나가는 것 같긴 한가 봐.’
바로 조금 전까지는 배우팀 직원들도 모노크롬을 인정해주는 것 같아서 뿌듯했는데,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리고 난 다른 신인까지 키울 생각이 없다. 퀘스트라도 생기지 않는 이상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모노크롬도 워낙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겨우 이 정도로 정상화한 거라, 지금은 다른 쪽에 집중을 분산시킬 여력이 없네요.”
“아티스트 담당 인원이 소수라 바쁘신 건 알고 있습니다. 아티스트 부문 사업을 제대로 확장하고자 한다면 대대적으로 충원해 볼 수도 있고요.”
현장 매니저 딱 한 명 두고 활동시킬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사람 더 뽑아주겠단 소리야.
사람이 워낙 자주 바뀌던 자리라 그 한 명이 퇴사하면 사람을 새로 뽑을 때까지 전담 매니저가 없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비활동기라서 티가 안 났을 뿐이지.
바쁜 건 맞지만 중간 관리자가 많아질수록 지금 이 업무 속도로 일을 진행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지금처럼 필요한 인원만 데리고 있는 게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저희 모노크롬 팀은 이대로 괜찮은 것 같고, 따로 팀을 더 꾸리신다면 저야 말릴 수는 없죠.”
난 모노크롬 팀의 책임자라고 선을 그었다. 새로 신인개발을 하고 싶으면 사람 많이 뽑아서 하든지 말든지.
솔직히 난 지금 모노크롬 팀을 맡는 것만으로도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한다. 돈 못 버는 것도 아니고, 회사 이미지도 개선됐고.
그러나 권 실장은 이미 머릿속에 생각해 온 그림이 있는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사람을 뽑으면 이사님도 좀 더 큰일을 맡으셔야죠. 언제까지고 사소한 일까지 일일이 직접 하실 수는 없잖습니까.”
이사면 이사답게 책상머리에나 앉아있으란 소리인가.
내가 원해서 이사 직급을 골라 들어온 것도 아닌데 가끔 이런 시선을 받고는 했다.
‘이사답고 아니고가 문제가 아니야. 내 인생이 달렸다고.’
모르니까 하는 소리겠지만, 난 이유가 있는데 그대로 말할 수가 없으니 나 혼자만 답답하고 끝날 뿐이었다.
대신 난 치트키 변명을 꺼냈다.
“이게 제가 배운 외국 스타일이에요.”
거의 1년을 지낸 후에야 난 내게 부여된 설정을 이용해 대충 얼버무리는 방법을 깨우쳤다.
이 사람은 국내 배우 기획사 일만 해 왔으니 해외 아티스트 기획사가 어떻게 일하는지 모를 터. 물론 나도 모른다.
“그리고 대표님이 절 뉴마로 부르신 건 제 방식대로 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했는데요.”
곰곰이 생각할 시간을 주면 뭔가 이상하다고 알아챌 것 같아서 바로 2연타를 날렸다.
지금은 부재중이지만, 대표를 절대적으로 따르던 회사니까 대표 이름을 대면 효과가 있겠지.
팬들에게 회사가 욕먹을 때도 그렇고, 대표는 가장 강력한 방패였다.
내가 이리저리 피하기만 하니까 대화가 진행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권 실장은 이번엔 직설적으로 말을 꺼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사님 주도하에 진행하고 싶단 생각입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이 정도로 이끌어온 이사님이 계시기 때문에 저희도 긍정적으로 판단하고 논의해 보려는 거고요.”
원래는 생각이 없었는데 내가 잘하는 것 같아 보이니까 좀 생각해 봤다, 이건가.
이쪽도 대화에 양보가 없기에 나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어필하기로 했다.
“애초에 뉴마는 신인을 키우기엔 너무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봐요. 그러려면 연습생부터 아예 새로 뽑아야 할 텐데.”
“왜 새로 뽑아야 하죠?”
“……지금 있는 회사 연습생들은 다들 배우 지망이잖아요.”
“다들 보컬 트레이닝도 받고 있습니다만.”
“아이돌이 꿈이 아니잖아요?”
“그게 많이 중요합니까?”
“네?”
이렇게 이야기가 허공에서 빙빙 돈다는 것은 서로 머릿속에 두고 있는 게 상당히 다르다는 뜻인데.
그의 의중을 찰떡같이 파악해서 내 입으로 직접 말해주길 바라나 본데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실장님이 원하는 신인 육성 방향은 어떤 거죠?”
“연습생들은 배우 지망생이라기보다는, 연예인 지망생에 가깝죠. 보컬 트레이닝을 받는 이유도 그거고요. 꼭 배우가 아니라 아이돌로 데뷔해도 상관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아이돌로 데뷔시켜서 연기자를 시키고 싶단 말씀이시네요?”
“요즘 연기와 가수 활동을 병행하는 연예인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꼭 한 길만 택하지 않아도 괜찮죠. 유한이 씨도 그러지 않습니까?”
……아이돌 배우가 탐이 나니까 아이돌부터 만들잔 소리를 하다니.
아이돌은 데뷔를 위한 빌미고 결국은 인지도를 얻은 배우가 가지고 싶단 말이었다.
‘장난해? 자기가 무슨 마이 엔터 유저야?’
아이돌이 그냥 연습생 중에서 몇 명 골라 데뷔시키고 아무 컨셉이나 골라서 곡 대충 만들어 활동시키면 끝인 줄 알아? 옛날 모노크롬처럼?!
황당해서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발상 자체는 아예 현실성이 없진 않았다. 사업적인 면을 생각하면 나올 수도 있는 아이디어였다.
아이돌 그룹의 수명은 짧은 게 보통이고, 연차가 찰수록 아이돌들의 개인 활동이 늘어나는 경우가 많다.
아예 배우로 전향하는 아이돌 출신 배우도 꽤 많고.
‘그렇다고 해서 아예 개인 활동을 전제로 데뷔시키면 아이돌은 그냥 발판인가 싶은 거지.’
아이돌로 데뷔한다고 팬이 알아서 모여드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배우팀이라고 해도 그룹 육성이 그렇게 간단히 되는 게 아니라는 건 알 터였다.
그래서 일단 의중만 떠보고자 업무 연락을 거치지 않고 직접 찾아온 건가.
“이게 다 회사가 하는 일이니까 혹시나 아티스트 사업을 쉽게 본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잘된다면 가수와 연기자를 병행하면서 안정적으로 길게 활동하는 좋은 케이스가 될 수도 있고…… 다른 직원들도 오래 근속하려면 할 일이 필요하니까요.”
“……모노크롬 재계약도 생각하란 말씀이시죠.”
“네. 맞습니다.”
모노크롬은 뉴마와 한 번 재계약했지만 다음에 또 재계약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일.
모노크롬이 뉴마를 떠난다면, 뉴레인 분리로 한번 휘청였던 아티스트팀은 이번에야말로 정말 할 일을 잃고 공중분해될 수도 있는 거고.
이사란 직함은 편리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책임도 따른다.
다 무시할 수도 있지만 얼굴 마주하고 일하는 사람들을 나 몰라라 하기엔 내 성미가 그렇지 못했다.
배우 매니지먼트가 더 강세인 현재 뉴마에서 아티스트팀이 공존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면 마냥 화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단 알겠습니다. 검토해 볼게요.”
권진헌 실장이 돌아가고 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소속 그룹이 하나뿐이라 모노크롬 팀 전담 직원들은 모노크롬의 거취에 따라 경력이 좌지우지될 수도 있다.
‘인원이 적어서 오히려 안심이려나.’
많은 이들의 근속을 책임져야 했으면 부담돼서 권 실장이 말하는 대로 조금 마음이 기울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나마 좀 더 차분히 생각할 여유가 있었다.
만일 직원들이 뉴마를 떠나는 상황이 오더라도 이 정도 인원쯤은 잘 이직할 수 있도록 내 선에서 챙겨줄 수도 있을 테니까. 그게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뉴레인으로 옮길 수도 있고, 모노크롬이 잘된다면 그 경력을 살려 이직할 수도 있고, 뉴마는 떠나더라도 모노크롬과 함께 일할 수도 있겠고…….
“하아……. 모르겠다.”
모노크롬의 재계약까지 약 1년. 음악대상 외에도 생각할 게 너무 많았다.
마침 연말이라 정리해야 할 일도 많은데 고민거리를 더하다니.
그 연말 업무 서류를 들고 온 최 비서가 내가 의자에 길게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잠깐 멈칫했으나 바로 자신의 할 일에 집중했다.
모노크롬 팀 중에서 유일하게 아티스트 담당 업무가 아닌 최 비서는…… 계속 뉴마에 남을까?
“최 비서…….”
“네. 이사님.”
내 목소리가 어두웠는지 그는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복잡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면 기분이 축축 처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최 비서는 말이야. 만일 뉴마를 나가게 된다면 뭐 할지 생각해 본 적 있어?”
내 말을 들은 최 비서는 눈썹 사이를 살짝 좁히며 눈을 끔뻑였다. 무슨 의도로 한 말인지 파악하는 얼굴이었다.
“아, 아니. 그냥 가정해서 물어본 거였어. 단순히 궁금해서.”
그 표정을 보고 뒤늦게 질문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채고 다시 말했다.
이 회사를 나가면 뭐 할지 계획이 있냐니, 해고하려고 넌지시 떠보는 것 같잖아. 큰 오해가 생길 뻔했어.
“오래가면 좋겠지만 사람 일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 아니면 막연하게 쉬고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고.”
“아직……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습니다.”
사실 소수 인원이란 것은 누구 한 명이 사직서를 내면 매우 곤란하단 뜻이기도 했다.
모노크롬을 위해 남았던 윤희나, 다시 돌아온 송 피디나, 우형이 데려온 민형이나, 다들 멤버들을 보고 모인 사람들인데 최 비서는 아니라서 궁금했던 건데.
최 비서는 지금 상황에서 딱히 변화를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나로서는 다행인 일이다.
갑작스러울 수 있는 질문에 최 비서는 조금 더 생각에 빠져 있더니 이번엔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반대로 여쭤보는 건 실례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사님은 혹시 그런 생각이 있으십니까?”
“흐음……. 나도 아직은 모르겠어.”
미래에 관한 질문에 정확한 답을 하지 못하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
<쉰셋돌>은 QBC 제작. 이 예능에서 기획하는 그룹 ‘신셋’의 소속 또한 QBC다.
QBC는 아이돌 사업을 하는 곳도 아니고 시청자들에게 ‘돈 버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기에 처음부터 음원 수익은 전액 기부한다며 홍보했다.
그러니 광고 등 제작 지원이 들어오긴 하지만 일반 아이돌 기획사만큼 고예산을 들이기는 어렵다.
‘그래서 우리처럼 돈 생각 크게 안 하고 먼저 지원한 곳들이 있었지.’
우리만 해도 작곡 비용 등을 안 받아도 그 이상의 홍보 효과를 얻을 수 있으니까 나선 거고.
노래나 안무는 우리가 만든다고 해도 뮤직비디오는 우리의 범위 밖이었는데, 다행히 참여에 의의를 두고자 기꺼이 나선 뮤직비디오 제작사가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최소 몇천만 원부터 억 단위까지 가는 엄청난 세트를 만들 순 없고, 기존 세트를 활용하거나 장소를 섭외해서 촬영해야 했다.
우리는 제작진들과 회의해서 원하는 느낌과 내용을 정해 전달하고, 장소 섭외 같은 세세한 부분은 제작사에 온전히 맡기려고 했는데.
“저……. 외부 촬영 장소는 제가 한번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뮤직비디오 기획안을 확인한 준해가 의외로 손을 들고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