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화
‘나도 어느샌가 순한맛 컬러즈에 익숙해졌나 봐.’
컬러즈는 예전처럼 분노에 차 있는 게 아니라 온화한 상태가 디폴트가 된 지 오래였다. 드라마를 시청하는 컬러즈를 보면서 그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뒤에서는 가끔 속 터지는 일이 생기기도 했지만, 겉으로는 컬러즈가 만족하는 활동이 계속 이어졌기에 그들이 딱히 비속어를 쓸 이유가 없었다.
물론 너무 좋으면 거친 언사가 튀어나오긴 하지만 그건 욕이라기보단 칭찬이니까.
‘그건 둘째 치고, 사람 마음은 다 똑같나 보네. 나도 대본 보고 상사부터 욕하긴 했지.’
컬러즈 중엔 드라마가 주 시청 타깃으로 삼은 직장인 여성이 다수 섞여 있다. 그래서인지 나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팬들이 있었다.
여주의 상사 캐릭터는 대놓고 욕하라고 배치된 캐릭터였다. 뻔하지만, 뻔하기에 더 와닿는 빌런 캐릭터.
이런 빌런이 현실에도 있기에 더 이입되어서 짜증 나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한이가 이 상사 캐릭터에 관해서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대본을 끝까지 본 건 아니라서 결말에 이 상사 캐릭터가 어떻게 되는지는 몰랐다.
그런데 한이는 처음 대본을 고를 때 내 속마음이 튀어 나간 것을 기억했는지, 촬영하던 시기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작가님이 해결 장면이 미적지근한가 고민하시길래, 주 시청자층의 의견을 전달해 드렸어요.]
[무슨 해결 장면?]
[보시면 알아요.]
그리고 이후에 공개된 드라마를 보고 한이가 한 말의 뜻을 알 수 있었다.
후반부에 상사 캐릭터는 제 버릇 못 고치고 새로 들어온 신입 사원에게 추근댄다.
철벽을 치는 데다가 회사 가까운 곳에 남자친구가 있어 보이는 여주에게서 타깃을 옮겨 또 만만한 상대를 찾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추파가 선을 넘으려 할 때.
[아악!]
[죄송해요, 발이 미끄러져서. 제가 방금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아니죠?]
신입 사원이 신경 쓰인 여주가 따라가서 그 장면을 목격하고, 지나가다 넘어지는 척 상사의 정강이를 차 버린다.
‘화, 화끈한데?’
초반엔 사회생활에 피로만 느끼던 여주가 조카와 남주의 영향을 받아 용기를 내게 된 것이었다.
누가 봐도 여주가 일부러 그런 것이었으나, 신입에게 추근댄 것을 들키면 회사 생활에 좋지 않을 것을 알아서 상사 캐릭터도 조심하라며 씩씩거리고 지나간다.
그 이후에는 신입 사원이 힘들었다며 여주에게 털어놓다가 다른 회사 사람들도 사정을 알게 된다.
심지어 오래 사귀었다는 여자친구가 나타나 머리채를 잡으며 소동이 일어나고 평소 행실이나 업무 태도도 그리 좋지 못했던 것이 발각되어서 결국 회사에서 쫓겨나는 엔딩.
‘깔끔하게 정리해 버리네.’
한이가 말한 게 이것이었다. 그가 작가에게 전달했다는 주 시청자층의 의견이란 내가 상사 캐릭터가 망하길 바란 것이었고.
아마도 원래는 이 정도로 깔끔하게 해결되는 전개가 아니었는데 한이를 포함하여 여러 사람의 의견을 받고 이렇게 수정된 모양이었다.
나처럼 컬러즈도 만족했는지 빌런 퇴치 장면을 웃으며 감상했다.
‘오히려 더 해 달라는 의견도 있었지.’
당장 감방에 집어넣어야 한다거나 머리채를 잡지 말고 대머리로 만들어야 한다거나. 현실이 아니란 것을 알기에 원하는 대로 말하는 듯했다.
컬러즈가 가끔 보이는 폭력성은 무서울 때도 있지만……. 나도 동감.
이후 공개된 비하인드에도 이 장면을 촬영할 때의 상황이 담겨 있었다.
[이렇게 제가 살짝 옆으로 차면…….]
[아니야. 내가 맞춰서 다리를 구부릴 테니까 진짜 차면 돼. 아, 감독님. 가면서 발도 한번 밟고 가는 건 어때요?]
[그거 괜찮은데요?]
여주인공을 연기하는 도아는 선배 연기자의 다리를 차기가 좀 그랬는지 소극적이었으나, 상사 역할을 맡은 배우가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서서 자신이 맞는 장면을 연출했다.
드라마 속에선 밉상인 캐릭터였는데 카메라 밖에선 이렇게 호쾌한 사람이었다니.
비하인드까지 보고 나니까 상사 캐릭터를 향한 찝찝함도 시원하게 풀리는 느낌이었다.
‘현실에선 이렇게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게 아쉽지만.’
그래서 드라마인 거겠지. 현실이 답답하니까 대리만족할 수 있도록 만든 작품.
나도 머리채나 한번 잡고 나올 걸 그랬나. 그땐 그냥 전부 피하고 싶은 마음만 들어서 도망쳤는데 지금은 왠지 가능할 것도 같은 기분이었다.
그냥 상상일 뿐이고 어차피 이 세계에 내 이전 회사는 없는 듯하니 이런 드라마로 만족해야겠지만.
‘나한테 과거를 바꾸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현재의 내가 조금 바뀐 것은 실감했다. 멘탈이 조금 단단해졌다고 해야 하나.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땐 내가 결국 미친 게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했었는데, 오히려 이곳에서 안정된 상태를 되찾았다.
가끔 고난이 있긴 하지만 이 세상 전체가 내게는 드라마 같은 대리만족의 세계가 아닐까.
‘……내가 평소에 TV나 드라마를 안 보고 살긴 했나 봐.’
오랜만에 본 드라마에 몰입해서 이런 생각까지 발전하는 것을 보면.
드라마는 남주를 만난 이후 여주의 변화에 초점을 맞췄지만, 두 주인공이 곧바로 연인 관계가 된 것은 아니었다.
이전에 한이가 카메오로 출연했던 <매일 아침 만나요>가 초반부터 달달하게 썸을 타는 장면이 나오던 것에 비해 이 드라마는 로맨스에 한해선 속도가 느리다고 할 수 있었다.
예고편을 보니 두 주인공의 관계가 제대로 발전하는 장면은 마지막 회에서나 나오는 듯했다.
그 마지막 회가 공개되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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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민씨 오늘 지나면 못 본다니 믿을수가 없다..
캐릭터 한이랑 찰떡이라 너무 좋았는데ㅠㅠㅠㅠㅠ
└ㄹㅇ.. 벌써 쓸쓸함ㅠㅠㅠㅠ
└웹드라마 기사 뜨고 빨리 나와서 좋다했는데 끝나는 것까지 빠를 일이냐구요
└현민씨 못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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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종영이 캐릭터와의 이별이기도 하구나.’
TV 드라마가 방영 시간에 맞춰 방영하는 것처럼 웹드라마도 최초 공개 시간이 있었다.
컬러즈는 벌써 커뮤니티에 모여 기대 반, 쓸쓸한 마음 반으로 마지막 회를 기다렸다.
공개되는 시간이 퇴근 시간 이후였기에 나도 느긋하게 집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시연이 연기하는 여주의 조카, 하늘은 아빠의 출장이 끝나 다시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는 바람에 조카 하늘은 피아노 학원을 그만뒀지만, 여주 서은이 대신 직장인반에 등록한다. 조카를 보고 어릴 때의 꿈이 생각난 것이었다.
[하늘이는 잘 지내요?]
[네. 원래 거기서 유치원 다녔으니까요.]
피아노 레슨을 담당한 남주 현민이 조카의 안부를 묻자 서은은 그렇게 대답한다.
조카가 원래 지내던 곳으로 돌아가는 건 처음부터 정해진 일이었지만 조금 쓸쓸한 얼굴이었다.
서은은 처음엔 어린 조카를 맡는다는 게 귀찮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정작 조카에게서 배운 것이 많았다며 회상한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 서은의 옆에서 현민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서은 씨는요?]
[네?]
[잘 지내요?]
서은이 고개를 돌려 현민과 눈을 마주친다.
단순히 안부를 묻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하늘의 고모가 아닌 서은이라는 사람이 궁금하다고 직접 표현하는 장면이었다.
서로 호감은 있었지만 항상 조카 얘기나 겉만 훑고 지나가는 대화를 하던 두 사람.
여주도 그 사실을 알아채고 잠시 말이 없었으나 시선은 피하지 않는다.
그리고 두 사람의 얼굴이 서서히 가까워지는 듯한 연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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갸아아아ㅏ가아아ㅏㅏ악ㄱ
└아ㅏㅏㅏㅏㅏㅔㅏ?!!??
└뭐야 나 실시간으로 못 보고있는데 무슨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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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으로 감상을 남기며 시청하던 몇몇 컬러즈가 텍스트로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여, 역시 로맨스 신은 호불호가 있네.’
그건 알고 있었는데 혈육의 애정 행각이라도 목격한 사람처럼 반응할 줄이야.
한이의 캐스팅 소식이 뜰 때, 로맨스 드라마라는 소식에 [혹시 드라마에 키스신 같은 거.. 나오려나?] 하는 글도 올라왔었다.
댓글 창에는 난 원래 드라마 볼 때 그런 장면 좋아한다, 그런 거 잘 못 본다, 눈 가리고 손가락 사이로 본다, 등의 다양한 반응이 있었다.
그런데 로맨스물인 걸 어쩌겠어. 누군가 죽거나 죽기 직전까지 가는 작품만 맡는 게 아니라면 연기하면서 이 정도의 로맨스 신은 피하기 어려운걸.
그러나 다음 장면에서 갑자기 분위기가 전환되었다.
[고모?]
시연이 연기하는 여주의 조카, 하늘이 피아노 학원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하, 하늘아?!]
분위기가 깨져서 잠시 당황했지만 반가운 얼굴의 등장에 두 사람은 곧바로 하늘을 반긴다.
하늘을 데려온 것은 그녀의 아빠, 즉 여주의 오빠였다.
곧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하는 하늘을 위해 좀 더 교육 환경이 괜찮은 이 동네로 이사 오기로 했다면서.
[그런데 두 사람은…….]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 맞는…….]
[아니, 저기, 좀!]
여주의 오빠는 두 주인공을 번갈아 보며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챈다. 하긴 아까 그 장면을 봤으면 모르는 게 바보지.
‘조금만 더 늦었으면 정말로 혈육의 애정 행각을 목격한 사람이 됐을지도.’
민망한 상황이 펼쳐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나는 공감성 수치를 못 참는 편이라서.
흐지부지 지나간 로맨스 장면에 방금까지 괴성을 지르던 컬러즈는 인간의 언어를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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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아니었네^^; 머쓱
└머쓱222 ^^;;
└하늘이 눈치가 좋은거니 나쁜거니..?
└아 전에도 조카 나와서 막았었짘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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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조금 기대했냐ㅜㅋㅋㅋㅋㅋㅋㅋ
└나도 보고싶긴 했는데 크흐흠
└어우 난 못봐라고 생각했는데 안 나오니까 좀 아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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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침착해진 컬러즈는 다시 차분하게 남은 장면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한이가 부른 OST는 엔딩 장면에 흘러나왔다. 제목과 발매 일시만 예고되었던 OST가 처음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웹드라마라서 짧게 끝나는 만큼, 생략된 두 주인공의 앞으로의 이야기가 OST로 연결되는 듯한 달달한 가사의 발라드곡이었다.
한이의 노래와 함께 스태프 롤이 올라가고, 드라마는 적당히 여운을 남기며 마무리되었다. 나는 재생이 끝난 태블릿의 화면을 잠시 응시했다.
‘캐릭터와 이별한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예전이야 연극도 보고, 영화도 보고 그랬는데. 한참을 안 보다가 오랜만에 처음부터 끝까지 챙겨 본 작품이어서 그런지 마지막이 시원섭섭하기도 했다.
공개된 OST에 흠뻑 취해 있던 컬러즈도 드라마의 여운을 즐겼다.
멤버가 제대로 출연하는 작품은 처음이라 그런지 다들 생각보다 더 몰입해서 감상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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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웹드라마라 크게 기대 안 했는데 진짜 재밌었다
└ㅇㅇㅠㅠㅠ 짧은거 넘 아쉽다
└로맨스물 잘 안 보는데 왤케 간질간질하냐
└난 다시 정주행하러 가야지..
└한이 진짜 연기 천잰가바.. 중간중간 한이란 것도 까먹고 집중해서 보고있었어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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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연기는 잘 모르지만, 한이가 연기를 잘한 것은 확실했다. 나도 한이가 아니라 현민이란 캐릭터로 보고 있었으니까.
좋은 반응뿐이라 흐뭇하게 보고 있는데 옆에 둔 스마트폰에서 진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OST가 바로 발매될 예정이라 그와 관련한 연락이 온 줄 알았는데, 진동이 울린 것은 업무용 스마트폰이 아니었다.
‘……이거 멤버들이랑 같이 있는 게 아닐 때도 알림이 오는 거였어?’
스마트폰에는 오랜만에 보는 알림, [마이 엔터: 아티스트의 능력치가 올랐습니다. 확인해 보세요!]라는 문구가 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