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화
“이사님 무슨 생각 하시는지 제가 맞혀볼까요?”
“아냐. 굳이 입 밖으로 안 꺼내도 돼.”
내 표정을 보고 한이가 재밌는 생각이라도 난 것처럼 웃으며 말했다. 이담의 이런 모습을 보고 한이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어째서 자존감 떨어지고 우는 사람의 대표가 우형이가 됐는지…….’
지금은 많이 나아졌는데도 역시 한번 각인된 기억은 강렬하게 남았다.
아무튼 지금은 우리가 이렇게 장난스러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우리의 대화는 신경도 안 쓰고 혼자 침울해져 있는 이 아이부터 어떻게 해야 했다.
“네가 제작진 눈에 들었으니 방송에도 뽑힌 거고, 노래를 잘해서 메인 파트를 맡은 건데 왜 안 어울린다고 생각해?”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정말 어울려서 파트를 받은 건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하는 걸 더 좋아할 것 같은데…….”
우리 멤버들은 직접 소통하는 팬들 외의 다른 쪽 반응은 일부러라도 별로 보지 않는데, 이담은 보기도 많이 보고 신경도 많이 쓰는 듯했다.
‘이런 성격이면 차라리 안 보는 게 마음 편할 텐데…….’
이렇게 쉽게 생각하지만 나도 커뮤 중독이니까 그 마음 알지. 안 보고 싶다고 바로 끊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금단 증세가 나타나서 못 끊는 건 아니지만, 접근하기가 너무 쉬운 게 문제였다.
현대인의 특성상 항상 손 닿을 곳에 스마트폰이 있고, 시간이 나면 자연스레 커뮤니티에 들어가서 원치 않는 것들까지 보게 된다.
이담은 한번 터져 나온 설움을 추스르지 못하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도…… 제가 제대로 못 해서 선배님들, 제작진분들까지 곤란하게 한 것 같아요.”
“아냐! 원래 촬영 시간이 정해져 있었대. 어차피 끝까지 촬영 못 할 거였어.”
“역시 파트를 포기하는 게…….”
한이가 열심히 격려해도 그는 끊임없이 땅으로 파고들어갔다.
그가 처음에 파트를 포기하겠다고 제작진에게 연락했던 일이 떠올랐다.
본인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소속사에서 포기하도록 강제한 건 아닌 듯해서 다행이지만.
다른 팬덤이 견제하는 상황에 그에게 메인 보컬 파트를 주기로 강행한 탓에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 선배와 제작진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압박감까지 겹쳐서 결국 터져버린 듯했다.
“어쩐지 긴장을 좀처럼 못 풀더라고요.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해 줬으면 좋았을걸. 그렇게 많이 부담 느끼는 줄 모르고 계속 힘 빼고 노래 부르란 소리밖에 못 했지 뭐예요.”
라솔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곤란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조언하는 것이 원래 그녀의 할 일이긴 했지만 이렇게 정신적으로 몰린 상대라면 사정이 좀 달랐다.
한이도 그의 편한 형이라도 되는 듯이 어깨에 팔을 두른 채로 믿음직하게 말했다.
“그래. 언제든 불편하거나 힘든 게 있으면 편하게 말해. 도와주려고 우리가 있는 거니까.”
“저……. 카메라 앞에선 좀…….”
지금은 카메라가 없어서 속마음을 털어놓은 건가.
확실히 제작진들이 있을 때의 그는 그리 말을 많이 하는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지금은 평소보다 말수가 많았다. 그 내용은 부정적인 쪽이었지만.
“혹시 소속사에서 말 많이 하지 말라고 하니……?”
“그건 아닌데 이미지는 지키라고 하셔서…….”
소속사가 그렇게 당부한 것도 이해는 갔다.
지금 이 모습이 본모습인 것 같은데, 내가 아는 더클랜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였으니까.
이담은 그룹 이미지와 많이 다른 본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평소에 더 긴장해 왔던 게 아닐까.
그게 이 날카로운 눈매와 시너지를 일으켜서 사나운 이미지가 되어버린 거고.
류현이 가끔 그와 눈을 마주치고 흠칫거렸던 것이 기억났다.
‘근데 센 인상만 강조하지 말고 적당히 편한 모습도 보여주면 좋을 것 같은데.’
온오프의 갭이란 게 있잖아. 오히려 무대 위 모습과 본모습이 다르면 팬들이 좋아할 텐데.
물론 컬러즈의 반응만 많이 봐 왔던 내 주관적인 의견이지만.
그뿐만 아니라 애초에 신셋의 앨범 컨셉은 악동이다. 신셋 활동을 하면서 혼자만 더클랜 이미지를 고수하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이 부분은 여러모로 대화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이렇게 혼자 끙끙 싸매고 있는 게 정답이 아니란 것은 확실했다.
“‘잘해야 하는 것’보다는 ‘하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더 좋지 않을까? 하고 싶어 했잖아. 이런 친근한 컨셉.”
컨셉 회의 때 그가 꺼냈던 말을 인용해서 말하자 이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원래 네가 하고 싶은 건 정확히 어떤 거였어?”
지금은 외부 요소들 때문에 부담감이 더 커져 버렸지만 원래는 그도 의욕을 내서 참여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점을 꼬집으며 정말 자신의 속마음, 초심에 귀 기울여보도록 대화를 유도했다.
“활동하는 걸 좀 더 많은 사람한테 보여주고 다양한 감상을 듣고 싶었어요. ……무섭다는 말 말고.”
“무섭다니…….”
더클랜은 다크하고 강렬한 힙합 컨셉 그룹이라 활동하면서 무섭다는 감상을 많이 들어왔던 모양이었다. 아마 사람들은 대충 이미지만 보고 지나가면서 그런 반응을 남긴 거겠지.
선보일 기회가 없으면 제대로 평가받기도 어려운 법. 그건 나도 절실히 실감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예전의 모노크롬이 그랬으니까.
‘그래도 이담이 원하는 건 여기서 충분히 이룰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나 걸리는 게 있다면 이 거친 힙합 스타일.
각 멤버들의 스타일링은 소속사가 책임지다 보니 아직 통일감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튀는 게 이담의 스타일이었고.
원래 성격을 알고 보니까, 눈매가 올라가긴 했어도 본판이 그렇게 사납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이 메이크업 때문에 눈매가 더 날카롭게 강조되어서 그렇지.
‘한 그룹으로 활동하려면 이미지는 통일해야 하니까 제작진이나 다른 소속사 사람들이랑 말해봐야겠다.’
프로듀서 위치를 모노크롬이 선점한 만큼, 비주얼 컨셉이나 뮤직비디오 같은 부분은 우리의 발언권이 가장 컸다.
한 멤버 소속사의 힘이 큰 것보다야 우리가 진두지휘하는 게 가장 평등하니까.
다만 우리가 멤버들의 스타일을 마구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의논을 거치긴 해야 했다.
이담의 소속사와 대화할 책임은 내게 있다는 뜻이다.
아마 라솔과 한이가 날 호출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그들끼리 처리할 수 없는 여러 복합적인 문제가 엮여 있어서.
“여기 모인 사람들은 다 같은 목표로 모여 있는 거야. 신셋의 활동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거. 그러니까 넌 멤버로서 최선을 다하면 되고, 나머지는 우리한테 맡겨. 그게 우리 일이거든.”
이담은 너무 많은 것을 자신이 짊어져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 더 힘들어했다.
가끔 선이 모호해지기도 하지만, 아티스트가 할 일과 회사가 할 일은 다르다. 지금은 확실히 그 선을 그어줄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서포트할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엔 복잡하게 마음 두지 말라고 하니 그는 고분고분하게 내 말을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주변에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도 조금 진정된 듯했다.
방금까지 내내 한이에게 기대있던 몸이 똑바로 선 것을 보니 흔들렸던 마음이 조금 중심을 찾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야 겨우 원점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이 분위기를 틈타 한이가 다시 노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말야, 혹시 아이돌 준비하면서 창법 바꾼 적 있어? 다른 쪽으로 노래를 배웠다거나. 예를 들면…… 성악 같은 거?”
“어릴 때부터 성가대 선생님께 꽤 오래 배웠는데 그분이 성악 전공이었어요.”
피어싱 네 개는 기본인 센 힙합 컨셉 그룹의 메인 보컬이 성가대 출신이라……. 알면 알수록 의외인 캐릭터였다.
“지금 네 실력으로 분명 가능한데 마음대로 잘 안 나오는 이유가, 의식적으로 다른 스타일을 배제하려고 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거든. 대중음악 스타일로 맞추려던 게 습관이 되었다고 해야 하나?”
“아. 연습생 때 아이돌 스타일이 아니라고 많이 지적받았었거든요.”
“그룹마다 어울리는 스타일이 있으니까. 그리고 여긴 또 다른 그룹이니까 조금 다른 스타일이 더 어울리는 거고. 한번 창법을 바꿔본 적이 있다면, 어떤 스타일이건 익숙해지면 잘할 것 같은데?”
한이가 솔루션을 제시하며 격려까지 같이 보내자 이담이 맞는 것 같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라솔이 든든하다는 듯이 웃었다.
“한이 후배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나보다 더 트레이닝 선생님에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저도 대중적인 스타일이 어떤 건지 고민 많이 했었거든요. 공부하면서 선배님 노래도 엄청 많이 들었어요.”
“성악까지 알아맞히는 건 나도 좀 놀랐어.”
“제가 보컬이다 보니까 연습생 때부터 보컬 지망 친구들 많이 봐 왔잖아요. 성악 입시 준비하던 친구들도 있어서요.”
마음을 털어놓고 소통하니 해결법이 보이기 시작했다.
보컬끼리 통하는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여긴 여기대로 맡기면 될 것 같고.
“근데 인터넷으로 사람들 반응 보는 건 잠시 끊자.”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조언도 빼놓지 않았다.
***
“쟤 왜 저러냐?”
“몰라. 또 공포 체험이라도 하러 가나.”
러너스하이의 연습실. 초점 없는 눈으로 의자에 거의 눕듯이 앉아 있는 류현을 보며 다른 멤버들이 수군거렸다.
그가 이렇게 힘이 빠져 있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바로 어제, 신셋의 타이틀곡 녹음 현장에서 이담이 노래 부르는 모습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내가 하룻강아지였지.’
같은 메인 보컬이었으니 잘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잘 부르는 줄은 몰랐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의 실력은 단기간에 더욱 발전해 있었다. 자신은 그대로 머물러 있었고.
서바이벌을 거쳐서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류현은 남과 자신의 실력을 비교하며 누가 더 나은지 판단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얼마 전까지 경쟁하다가 한 그룹으로 데뷔한 탓에 언제 자신의 메인 보컬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있었다.
그 와중에 자신이 메인 보컬로서 특출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처음엔 솔직히 질투 났는데, 확실히 알겠어요. 형 진짜 잘해요. 메인 보컬 해도 될 만큼.]
격차가 뚜렷이 보이는데도 굽히지 않는 게 자신을 더 못나게 만드는 것 같아서 솔직히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이담은 말없이 미소로 응답했다. 1년 차이나는 선배는 그렇게 어른스러운데 자신만이 애처럼 느껴졌다.
차라리 인정하고 포기하고 나니까 마음은 편했다. 그러나 불안감은 이제 외부가 아니라 내면으로 향했다.
“류현! 눈 뜨고 자는 거 아니지?”
“그만 쉬고 모이래.”
러너스하이는 연말 무대 준비로 한창이었다. 주목받는 신인이었으니 부르는 곳도 많았다.
처음 서는 연말 무대. 특별 무대를 준비하려니 기존 안무에서 수정된 부분이 많아서, 촬영일이 아닐 땐 이렇게 연습실 붙박이 신세였다.
한차례 안무를 맞추고 또 맞추다가 다시 돌아온 쉬는 시간. 옆에 있던 멤버가 숨찬 와중에도 류현을 보며 조금 놀란 얼굴로 말을 건넸다.
“야. 너 갑자기 춤이 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