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화
“무대 위에서도 계속 무표정인 건 아니잖아요?”
“그……렇죠.”
평소엔 표정이 많지 않아도 카메라 앞에선 다양한 표정을 구사할 줄 아는 해랑이다.
만호 또한 일정상 끝까지 다 보지는 못했어도 모노크롬 팬미팅 무대를 직접 보지 않았던가.
팬미팅에서 본 해랑은 무표정한 런웨이 위의 모델이 아니라 무대 위의 아이돌이었다.
‘표정이 별로 없길래 원래 그런 줄 알았는데 아마 낯설어서 그랬나 보군.’
원래 차분한 이미지였기에 크게 이상하단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멤버들과 팬들 사이에 있는 그는 예능에서 봐왔던 모습보다 확실히 더 편해 보였다.
‘그렇긴 해도 남들만큼 잘 웃지 않는 것도 맞단 말이지.’
다른 모노크롬 멤버들이 주저앉으며 크게 폭소할 때도, 해랑만큼은 ‘잘생긴 웃음’을 유지했다.
남들만큼 재미를 느끼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에겐 그게 최대한의 웃음인 것으로 보였다.
팬들은 그가 조금만 웃어도 아주 좋아했고, 본인을 포함해 모두가 그 정도의 웃음에 익숙했다.
만호는 이전에 방송에서 만나 면식이 있는 하범과 함께 공연을 관람했다. 해랑을 잘 아는 하범은 예전 이야기를 해 주기도 했다.
[지금은 진짜 많이 나아진 거죠. 처음 봤을 땐 감정이 없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래서 어쩌다 한번 웃으면 같은 연습생 애들이 백해랑 웃는다고 호들갑을 떨었어요. 그러니까 다시 표정 굳히고.]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 정도로 자연스럽게 웃게 되기까지 시간이 꽤 걸린 듯했다.
누구든 무표정이기는 쉽다. 다만 웃는 데에는 연습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오히려 무표정한 얼굴을 개그 코드로 이용하는 것도 좋지만, 웃어야 할 상황에서도 버릇이 들어서 활짝 웃지 못하는 거라면?
코미디언인 만호는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일을 25년간 해 왔다. 그러니 활짝 웃지 못하는 그를 보고 도전 정신이 들 수밖에.
“나도 처음엔 해랑 씨가 딱딱한 사람인 줄 알았거든. 그런데 그게 아니란 걸 아니까 하는 말이에요.”
다른 예능 멤버들이 만호가 댄스 교육을 받는 것을 보고 부러워한 것처럼, 만호도 다른 멤버들이 댄스 트레이닝을 받으며 힘들어하는 것을 봤었다.
천진난만한 표정의 재민은 웃는 얼굴이 무섭게 느껴질 정도로 엄하게 굴리고, 오히려 냉한 인상의 해랑이 자상하게 잘 가르쳐주었다.
첫인상만큼 딱딱한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니 그도 좀 더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해랑도 만호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귀 기울여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제 첫인상이 안 좋아 보이나요……?”
“아니, 안 좋은 건 아니고. 오히려 좋은 편이지. 다만 거리감이 조금 느껴진다고 할까요.”
해랑도 무슨 소린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컬러즈도 ‘입덕하기 전엔 차가운 줄 알았다’라고 말하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컬러즈는 그가 친해지는 데 오래 걸리는 사람이란 것을 알아서 더욱 특별하게 생각했다.
남들에겐 곁을 잘 내주지 않는 길고양이가 스스로 다가오면 당장 집으로 데려가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니까.
“우리 코미디언도 말이야. 안 웃으면 엄청 무섭게 생긴 사람들 많아요.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 먼저 웃는단 말이야. 그러면 사람들이 친근하게 보거든.”
“다들 별말 안 해서 이 정도면 괜찮은 줄 알고 있었어요.”
“그래. 그게 문제야! 덜 웃어도 얼굴이 완성형이라 넘어가게 된다는 거! 왜냐하면 무표정일 때도 그냥 좋거든! 카메라 감독님도 봐. 나 단독으로 찍을 땐 안 그러더니 지금은 흐뭇한 얼굴이잖아.”
갑자기 지목된 카메라 감독이 찔린 듯이 입가의 웃음을 갈무리했다.
그의 말대로 해랑은 화면에 어떻게 들어가도 잘 나오니 자신이 잘 찍고 있는 것이라는 착각까지 들어서 만족스럽게 촬영 중이었다.
“어쩌면 잘생긴 게 오히려 한 차원 더 올라갈 길을 막고 있는지도 몰라요. 외모로 뭐든 커버가 되니까 지금에 안주하고 마는 거지!”
만호는 뭔지 모를 사명감에 불타올라 열변을 토했다.
자신의 외모가 어쩌면 다른 방향으로의 성장을 막았을 수 있다는 색다른 해석에 해랑은 미미한 충격을 받았다.
수더분하지 못한 성격이 이 직업에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은 한 적이 있었다. 애초에 성격 때문에 데뷔하지도 못할 뻔도 했으니까.
그러나 옆에 시끄럽고 잘 웃는 멤버들이 있는 덕분에 마침 밸런스가 잘 맞아서 자신은 성격을 무리하게 바꾸려 하지 않고 이대로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데에는 얼굴이 한몫한 것 같기도 했다.
설득력 있는 이야기라고 판단한 해랑은 더욱 진지한 표정이 되어 경청했다.
까칠했던 예전보다는 지금이 더 활동하기 편하단 것은 본인도 느끼는 명백한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니까 한번 제대로 웃어봐요.”
“네……?”
잠시 당황했으나 기대가 담긴 시선을 모른 체할 수가 없어서 해랑이 입꼬리를 슬쩍 올리자 만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냐. 뭔가 부족해. 좀 더 사랑스러운 걸 보는 눈빛이었으면 좋겠어요. 자, 귀여운 강아지가 앞에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이, 귀여워~.”
그렇게 말하며 만호는 자기가 그 강아지 역할을 해주겠다는 듯 낑낑대는 강아지 소리를 냈다.
오히려 몰입을 방해했지만 연예계 대선배가 이렇게 노력하는데 어쩌겠는가.
그의 말에 동감하는 부분도 있었고 자신을 위해서 이러는 것을 아니 상황에 몰입해 볼 수밖에.
‘강아지…….’
귀여운 강아지를 떠올려 보니, 얼마 전에 재민이 회사 소속 엔지니어네 집 강아지를 선물로 그려주겠다며 그린 그림이 생각나 웃음이 피식 나왔다.
“좋다. 이거다!”
만호가 이번 웃음엔 만족했는지 박수를 짝짝 치고 카메라가 해랑을 클로즈업했다.
원래 지금은 비주얼이 아니라 랩의 기초에 관해 설명해주는 시간.
그러나 만호의 뛰어난 행동력이 하필이면 지금 발휘되는 바람에 거하게 옆길로 새어버렸다.
예능 초보인 해랑은 대화할수록 그의 화술에 휘말릴 뿐이었다.
***
보컬 트레이닝 장소로 정해진 녹음실엔 이담과 한이 그리고 라솔이 모였다.
방송에 내보낼 장면을 구하러 온 촬영팀 몇 명도 함께였다.
“내가 한이 후배 일 뺏은 거 아닌지 모르겠네.”
“선배님 옆에서 견학할 수 있으면 영광이죠!”
“견학이 아니라 같이 하는 거지.”
한이가 라솔을 처음 만났을 땐 오랜 팬이라며 긴장한 모습으로 인사했는데, 여러 번 보다 보니 제법 편한 선후배 관계가 되었다.
선배와 대선배가 하하호호하는 장면을 앞에 두고 이담은 어색하게 눈치만 보았다.
그래도 이들이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이담의 트레이닝 장면을 찍기 위해서였으니 그가 메인. 화제는 바로 이담에게로 옮겨갔다.
“작곡가님이 평소와는 조금 다른 스타일로 불러보면 좋겠다고 했거든요. 그러면 곡에 되게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한이가 카메라를 의식하며 성운이 미리 요청한 사항을 먼저 이야기했다. 이게 바로 오늘 트레이닝의 주제였다.
이전에도 성운이 메인 보컬 파트로 이담을 점찍으면서 몇 번 이야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담은 감을 잘 잡지 못했는지 알쏭달쏭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오늘 라솔과 한이가 그 도움을 줄 예정이었다.
“중요한 파트를 맡았으니까, 오늘 같이 집중적으로 파헤쳐서 완벽하게 만들어 보자!”
한이가 용기를 주듯이 파이팅 포즈를 취해 보이자 이담이 비장한 얼굴로 끄덕였다.
이담이 녹음 부스 안으로 들어가서 본인의 파트를 부르고, 라솔과 한이가 녹음 디렉팅을 하는 것처럼 부스 밖에서 들으며 조언했다.
“신나는 노래긴 한데, 후렴에서는 더 부드러운 느낌으로 가도 좋거든. 지금은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다고 해야 하나.”
“다시 해 보겠습니다.”
이담이 굳은 얼굴로 같은 파트를 다시 불렀다.
힘을 빼라는 요청과 다르게, 이담은 라솔의 지적을 받을수록 점점 더 긴장하는 것 같았다.
“으음……. 내가 조금 어렵게 말하나? 한이 후배는 어떤 느낌인지 알지?”
“네. 아무래도 후렴이라 좀 더 터트리는 식으로 부르는 것 같은데, 조금 튀는 느낌이죠?”
“응. 성운이가 가성으로 불러보라고 했던 걸 보면 확실히 더 부드러운 느낌을 원하는 것 같거든.”
라솔은 혹여나 자신이 깍듯한 선배라 더 긴장하는 것일까 봐 한이와 자리를 교대했다.
“자아, 자. 지금 바로 녹음 들어가는 거 아니고 연습이니까 좀 더 편하게 불러보자.”
“……네.”
한이가 좀 더 편하게 하라며 어르고 달래면서 같은 파트를 부르고 또 불렀지만 진전은 없었다.
“다시 해 보겠습니다.”
“으음…….”
같은 자리만 빙빙 도는 기분에 라솔이 작게 소곤댔다.
“확실히 실력 문제는 아닌데……. 아무래도 긴장 많이 한 것 같지?”
“혹시 촬영팀이 있어서 그런 걸까요?”
두 사람은 촬영팀에게 슬쩍 시선을 보냈다.
라솔이 있기에 이쪽으로 배정된 메인 작가는 잠시 다른 스태프들과 의견을 나누고 말했다.
“생각했던 만큼 분량은 안 나오긴 했는데 다음번도 있고, 다른 멤버들도 있으니까요. 혹시 저희가 방해되는 거라면 촬영은 여기까지 해도 될 것 같아요.”
같은 과정을 길게 반복해봤자 비슷한 그림만 나와서는 방송에 활용하지 못한다.
예정된 촬영 시간도 있었기에 촬영팀이 철수를 결정했다.
“너무 무리해도 목에 안 좋으니까 잠깐 쉬고 하자.”
녹음 부스에서 나온 이담의 표정이 너무 시무룩해서 한이는 일부러 웃으면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이 안 좋다는 건 아니야. 그런데 예전에 편하게 불렀던 가이드 버전이 원하는 느낌에 더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그때처럼 긴장 안 하고 편하게 부르……면…….”
한이는 말을 하다가 점점 느려졌다. 이담의 상태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너, 너 울어?!”
“죄송합니다…….”
“아니, 사과할 건 아니고……?”
갑작스러운 그의 감정 변화에 라솔과 한이는 당황한 얼굴로 굳어 버렸다.
***
멤버들은 각자 맡은 임무를 잘할 테고, 사람도 많은데 내가 기웃거리면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이사실에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호출이 들어왔다.
녹음실에 도착하니 촬영이 끝났는지 제작진은 보이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있는 이담 주위로 라솔과 한이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이담은 입에 사탕을 물고 있는지 작게 입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이건 한이가 사탕으로 무마할 상황이 있었다는 건데…….’
라솔이 구원자라도 마주한 듯 환한 얼굴로 나를 반겼다.
“혹시 바쁘신데 부른 거 아니죠? 저희끼리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어서……. 컨셉 관해서 의견을 좀 나눠봐야 할 것 같아요.”
“뭔가 문제 있나요?”
“아뇨. 그게 아니고…….”
라솔은 이담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는 말이 없는 채였다.
방송이 서툰 건지, 원래 성격이 그런지, 이전 촬영에서도 말수가 많지는 않던 그였다.
‘어쩌면 멘트 경쟁에서 져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거친 인상을 생각하면 해랑만큼이나 과묵한 게 오히려 잘 어울리긴 했다.
아무튼 그런 그가 뭘 했는지 사탕을 물고 있고 라솔과 한이가 당황한 이 상황이 무엇 때문인지 짐작할 수가 없어서 이어지는 말만 기다렸다.
“그……. 이담 후배가 하고 싶은 게 있었대요.”
“아! 혹시 그 친근한 컨셉?”
내가 곧바로 알아듣고 먼저 말하자, 정답이었는지 이담이 처량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왜 갑자기 불쌍해 보이는 거지.
‘그런데 이미 그걸 수용해서 악동 컨셉으로 타이틀곡을 만든 건데?’
그가 원하는 친근한 컨셉이라면 이미 적용되었다. 그런데 무슨 문제인 걸까.
이담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내놓았다.
“제가 말해놓고 정작 저는 여기에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
“아니야, 인마! 너 잘하고 있어!”
한이가 그의 옆에 앉아서 어깨를 토닥토닥해 주자 이담은 거의 한이의 어깨에 기대서 울먹였다.
‘뭐야, 이 그림은……?’
피곤해서 눈이 충혈된 줄 알았는데 잘 보니까 그게 아니라 눈가가 빨간 것이었다.
갑자기 눈물을 보이는 그를 보니 내 머릿속엔 단 한 가지 생각만이 들었다.
아. 우형이 타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