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화
“특기가 울기라고 적혀 있는데.”
“야. 현준해!”
“제가 안 적었어요!”
용의자가 손사래를 치며 부정하자 우형은 지켜보겠다는 듯이 눈을 흘기며 다시 몸의 방향을 바로 했다.
뒤돌자마자 “와. 내가 적은 거 어떻게 알았지?” 하는 혼잣말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크게 흘러나왔다.
“……저 오늘은 안 울 거예요.”
“오오오~.”
우형이 선언하자 컬러즈가 믿는 건지 안 믿는 건지 한마음 한뜻으로 반응했다.
‘쇼케이스 팬미팅 때도 우형이는 운다고 놀림만 당했지 실제로 울지는 않았었지.’
다만 최근에 팬 사인회에서 운 사건과 첫 1위 트로피를 받고 통곡했던 일 때문에 다시 그 이미지가 부각되었을 뿐.
컬러즈의 목소리가 잦아들려 할 때 스피커를 통해 목소리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오오오~.”
“죄송하지만 그쪽만 소리 너무 크거든요?”
“아, 관객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저거 마이크 뺏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거 마이크 아니고 응원봉이에요.”
한이가 마이크를 들고 응원봉을 흔드는 컬러즈를 따라 했다.
관객들도 관객 역할인 한이와 한편이 되었는지 마치 그를 지지하듯이 같이 응원봉을 흔들었다.
우형은 대꾸할 힘을 잃었는지 다시 면접관 역할인 해랑에게로 몸을 돌렸다.
“여우형 씨는 취미가…… 랩.”
“그래도 나 리드 래퍼인데 취미가 뭐냐?”
모노크롬 곡에서 메인 랩 파트는 전부 해랑이 맡았고, 우형은 보컬 파트를 맡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리더에 작곡가 이미지가 크다 보니 래퍼 포지션 이미지는 옅은 편.
그런 우형이 ‘나는 리드 래퍼다.’라고 당당하게 말하자 컬러즈는 또 “오오~”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메인 포지션이 고작 취미로 적힌 피해자는 우형뿐만이 아니었다.
“누가 내 이력서에도 랩 취미라고 적었는데.”
해랑도 이야기가 나오자 생각났는지 누구인지 색출하려는 듯 멤버들을 둘러봤다.
이번 범인은 재민이었는지 두 사람과 눈을 마주치고 혼자 찔려서 “하핫.” 하고 웃었다. 정말 거짓말은 못 할 타입이라니까.
이어서 우형이 오프닝 VCR에서 해랑이 했던 무반주 <미드나잇 블루> 랩을 똑같이 선보이자.
“탈락.”
“아, 왜!”
“조금 웃었어.”
“너도 뮤비에선 웃었잖아!”
우형이 황당한 탈락 이유에 반박했으나 해랑은 단호하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VCR에선 무표정으로 진지하게 불러서 오히려 웃겼는데, 그 무표정이 중요했던 모양이다.
칼같이 끊어내는 해랑과 달리, 컬러즈는 믹스테이프 곡의 색다른 버전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는지 환호했다.
“컬러즈 반응으로 평가하는 거 아니에요?”
“컬러즈 대리님인데 이름으로 막 부르면 어떡해요!”
입사 희망자가 이름을 막 불렀다고 몰아가는 준해에게 컬러즈가 또다시 환호했다.
결국 우형은 설정에 제대로 몰입하지 못한 죄로 의자를 들고 한이처럼 돌출 무대로 나가서 패자부활전을 기다려야 했다.
***
팬미팅의 세세한 요소는 우리 직원들이나 공연 기획사에서 준비하지만 멤버들이 직접 준비한 것들도 있었다.
바로 특별히 회사원 컨셉에 맞춰 준비한 코너.
“저희가 프레젠테이션을요?”
“응. 발표하는 형식으로 하려는데 PPT를 너희가 직접 만들면 재밌지 않을까 해서.”
함께 공연 회의를 할 때 내 아이디어를 전달하자 멤버들은 뭘 해야 하는 건지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항상 아이디어도 내고 회의도 하지만 그걸 받아 적어다가 정리하는 것은 직원들의 역할.
멤버들이 작곡, 작사 외에 본업으로 컴퓨터를 사용할 일은 별로 없었다.
사무 업무에 특화된 오피스툴을 사용할 일은 특히나 더 없을 테고.
“만들어 본 적이 없는 건 아닌데…… 마지막으로 써 본 게 고등학생 때?”
“요새는 그때랑 버전이 많이 달라지지 않았나?”
“그나마 준해가 좀 알 것 같은데.”
“나도 뭐, 기본만 할 줄 아는 거지. 거창한 건…….”
“저 다 까먹었어요.”
공연에 쓰인다니까 자신이 없는지 걱정하는 멤버들 사이에서 재민이 당당하게 ‘모른다’고 밝혔다.
그, 그래. 모르는 걸 모른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건 바람직한 태도지.
“거창하게 만들 필요 없어. 못 만들어도 돼. 그냥 진행을 보조하는 역할로만 쓸 거니까.”
아니, 오히려 어설프게 만드는 게 더 재밌을 거야!
완벽하게 준비해도 관객들이 회사 컨셉에 몰입할 수 있으니 좋겠지만, 팬미팅이다 보니 조금 더 가볍고 유쾌한 느낌이었으면 했다.
‘첫 팬미팅이라 의욕 넘치는데 대충 만들어도 된다는 말은 잘 와닿지 않으려나.’
표정들을 보니 너무 손을 놓은 지 오래된 분야라 막막한 듯했다. 그래도 일단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얼굴.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잘 모르는 툴을 붙잡고 밤새 끙끙대기라도 하면 안 되지.
내 아이디어 때문에 괜한 고생을 하는 것은 나도 원치 않았기에 멤버들의 걱정을 덜어줄 방법을 떠올렸다.
“못 만들까 봐 걱정되면 도우미를 한 명 붙여줄게.”
“윤희 누나요?”
한이는 모노크롬 팀에서 가장 컴퓨터에 능숙한 사람이 윤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인터넷 활용도로는 윤희를 따라갈 사람이 없긴 하지만.
“아니. 제일 잘할 것 같은 사람.”
내가 떠올린 것은 그녀가 아니었다.
뉴마에 사무 업무로 우수한 사람이 있지 않은가.
멤버들에겐 본인 의사를 물어본 뒤 알려주겠다고 하고, 나는 이사실이 있는 곳으로 올라와 그 본인에게 물었다.
“제가…… 말입니까?”
내가 찾은 사람은 바로 최 비서였다.
나도 이 회사에 처음 와서 온통 모르는 업무에 둘러싸여 막막한 적이 있지 않았던가.
그때 그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던 기억이 아직 강하게 남아 있어서 가장 먼저 떠올린 건데.
이런 요청을 받을 줄은 생각도 못 했는지 최 비서는 잠시 버퍼링에 걸렸다.
‘조금 뜬금없긴 한가.’
모노크롬 팀은 다들 팬미팅 준비에 집중했지만 최 비서는 조금 예외였다.
그는 내 비서라서 모노크롬 전담팀에 있을 뿐이지, 사실 업무 범위는 모노크롬이 아니라 내 일에 한정되어 있었다.
내 일이 모노크롬 관련된 일이니 뭐가 다른 건가 싶기도 하겠지만.
내가 아티스트 팀 책임자로서 해야 할 회사 일을 보조하고, 내가 알아야 할 사안을 정리해 주는 것뿐. 그가 모노크롬의 일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 아래의 팀원들이 얼마 없는 와중에도 유일하게 최 비서는 멤버들과 직접 엮일 일이 없다는 뜻이다.
“그냥 누가 물어보면 알려주고 그럴싸하게 보일 정도로만 체크해 주면 되는데…… 너무 업무 범위를 벗어났나?”
컴퓨터 학원도 아니고 갑자기 PPT 만드는 걸 봐 달라니 좀 황당하려나.
하긴 나도 상사가 내 담당이 아닌 일을 시키면 불만스러운 마음부터 들곤 했는데…….
나도 이런 상사 입장이 되어 본 것은 처음이라 혼자 찔려서 이리저리 말을 덧붙였다.
“강요하는 건 아니고…… 다른 직원들한테 부탁할 수도 있으니까.”
“아뇨. 저야 괜찮습니다만……. 간단한 일이니까요.”
약간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하긴 했지만 내가 일하는 방식을 따르겠다는 그답게 바로 수긍했다.
멤버들에게도 최 비서에게 물어보고 체크받으라 하자 이쪽도 내게 되물어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최 비서님한테요……?”
“말해 놨으니까 물어보면 잘 알려줄 거야.”
“어어……, 네.”
멤버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쩐지 어색한 표정으로 눈을 굴리며 서로 눈치를 봤다.
‘……이렇게 서로 어색할 일이야?’
이제 연말을 준비해야 할 정도로 시간이 꽤 지났는데, 업무상으로 나와 가장 가까운 최 비서와 멤버들 사이에 이렇게 벽이 있었을 줄은.
따지자면 굳이 친해질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좀 편한 사이인 게 좋지 않나.
‘뭐, 그건 내가 강제할 게 아니니 각자 편한 대로 하게 놔두고.’
그 이후로 종종 숙제 확인받듯이 최 비서에게 완성된 파일을 체크받는 멤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역시 대학생인 준해가 가장 무난하고 빠르게 완성했는지 먼저 체크를 받아낸 듯했고.
어느 날은 이사실 밖에서 뿅뿅거리는 소리가 나길래 나가보니.
“뭘 만든 거야?”
“앗, 이사님. 글만 있으면 좀 심심하지 않나 해서…….”
음악인이어서 그런 걸까. 우형의 PPT는 한 줄 한 줄 넘어갈 때마다 다양한 효과음이 튀어나왔다.
살면서 이런 프레젠테이션 자료는 처음 봤는지 최 비서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단 표정.
‘……생각보다 예능으로 잘 가고 있는데?’
이걸 괜찮다고 넘겨야 하는지 아닌지 고민스러워하는 최 비서의 시선을 받고 난 오케이 사인을 그려 보였다.
우형은 통과가 안 될까 봐 걱정했는지 작게 “휴.” 소리를 내며 작업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또 하루는 한이의 메인 보컬 특유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리길래 이번엔 또 뭘 가져왔는지 궁금해서 나가봤다.
한이가 들고 온 노트북 화면에는 자신의 셀카가 한가득이었다.
“그거 발표 자료 만든 거야?”
“네.”
“그게……?”
이번엔 나도 최 비서와 같은 표정이 되었으나 한이는 당당했다.
“주제가 그거잖아요. 컬러즈를 즐겁게 하는 방법.”
“그렇지.”
컬러즈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는 의미로 팬미팅을 여는 것이었으니 우리 공연과도 일맥상통하는 주제였다.
회사 컨셉이라고 정말 ‘몇 분기 매출 보고’나 ‘사업 추진 동향’ 같은 발표를 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컬러즈가 좋아하는 제 사진을 넣은 건데요.”
이 녀석…….
‘컬러즈를 정확히 간파했어.’
그리고 한이가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이렇게 만든 이유는 더 있었다.
“최 비서님이 해랑 형 PPT는 글이 너무 많다고 하셨다길래 글을 좀 줄여봤어요.”
들어보니 최 비서가 ‘글이 너무 많아서 다 못 읽고 지나갈 것 같다’라고 하자 해랑은 “저 래퍼라서…….”라는 말로 넘어갔다고 한다. 평소 말수가 없는 대신 글은 길게 쓰는 모양이었다.
다만 한이는 글을 좀 줄인 게 아니라 거의 없는 수준인 것 같은데. 최 비서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그 점을 지적했다.
“그렇다고 텍스트를 전부 없애버리면 무슨 내용인지 파악할 수가…….”
“괜찮아요. 제가 말로 설명하면 되거든요.”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한이는 딱 그런 타입이었다. 조별 과제 할 때 제일 먼저 자기는 발표를 맡겠다고 하는 타입.
본인이 확고한 의지가 있고 자신이 있다면 안 될 것도 없었기에 한이도 원하는 대로 사진 가득한 자료를 통과시킬 수 있었다.
‘역시 아티스트랑 사무직은 생각하는 게 근본적으로 다른가 봐.’
나도 멤버들이 이렇게 다양한 것을 만들어 올 줄은 몰랐기에 흥미롭기도 했다.
그리고 최 비서가 머리를 짚게 만드는 최종 보스는 따로 있었다.
의자까지 가져다 두고 최 비서와 재민이 길게 토론을 하고 있길래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가 하고 귀 기울여 보았다.
“이건 수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맞춤법을 지키는 건 기본이라…….”
모니터를 슬쩍 보니 재민은 그림 실력에 자신이 붙었는지 종이에 그림을 그려서 스캔한 것을 그대로 한 장씩 PPT에 옮겨두었다.
문제는 그림에 들어가 있는 글씨였다. 그림 위에 손글씨로 쓴 거라 이 자리에서 바로 수정도 불가능.
고치려면 디자인팀의 도움을 받거나 다시 쓴 것을 또 스캔해서 위에 덧붙여야 하는 수고가 필요했다.
현재 두 사람이 토론을 나누고 있는 부분은 재민이 ‘쩨밌자나’라고 쓴 부분.
“쩨미 제 별명인데요?”
“그럼 뒤에 ‘자나’라도.”
“그건 일부러 귀엽게 쓴 거예요.”
“귀엽게…….”
PPT를 귀엽게 만든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최 비서는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