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화
오늘도 나는 콘솔 옆에 자리 잡았다.
아직 무대 뒤편에 있는 멤버들보다 먼저 앞뒤로 찬 관객들을 보니 새삼스러운 기분이 몰려왔다.
‘조금이라도 다른 길을 걸었으면 오늘 이렇게 많은 사람이 여기 모이진 못했겠지.’
여러 우연과 노력이 겹쳐서 이렇게 오늘, 이곳에 공연자와 관객으로 모였다니 참 신기한 일이다. 이거야말로 운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람과의 관계에 거부감이 들 때도 있었는데, 거창한 이유 없이도 큰 호감을 주고받는 이런 관계를 지켜보면 뭔가가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그 관계에 내가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충만하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내가 사업 마인드가 아니라서 그렇겠지만.’
정각이 되고 공연장의 모든 조명이 암전되더니 전광판에 준비된 VCR이 재생되었다.
영상은 ‘주식회사 블랙 신입사원 면접’이라고 적힌 종이가 붙은 문을 비추면서 시작했다.
조명이 꺼지고 술렁거리던 컬러즈는 느닷없이 시작된 상황극에 조용히 집중했다.
[다음 면접자 들어오세요.]
이는 바로 회사원 컨셉에 맞춰 입사하는 것부터 보여주자는 취지의 오프닝 영상이었다.
컬러즈에게도 익숙한 민형이 면접관 역할로 목소리와 뒷모습만 출연했다.
이번 팬미팅이 정확히 어떤 컨셉인지는 밝히지 않은 상태였다.
다만 팬미팅 포스터와 굿즈로 나온 인형 옷이 전부 정장 차림이었기 때문에, 컬러즈도 수트와 연관된 뭔가를 하겠거니 예상은 했을 터.
“아아! 역시 회사인가 보다.”
“어쩐지 예전 화보랑 스타일이 비슷하다 했어요.”
면접이란 단어를 접하자마자 컬러즈들이 술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 술렁임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어서 면접용 정장을 입은 해랑이 화면 속 면접실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무대용 수트 의상도, 화보에서 입은 것 같은 오피스룩도 아닌 정말 깔끔하기만 한 칼정장.
기본 중의 기본인 그 심플한 옷이 오히려 그의 비주얼을 돋보이게 했다.
등장만으로 공연장 전체에 함성이 울려 퍼지게 만든 화면 속의 해랑이 의자에 착석하고 가상의 면접이 시작되었다.
[이력서 특기란에 ‘얼굴’이라고 적어 주셨는데.]
[제가요?]
[네. 이력서에 그렇게 적혀 있네요.]
카메라가 이력서를 클로즈업했다. 수기로 적힌 이력서는 누가 봐도 여러 명이 작성한 흔적이 있었다.
자막으로 ‘이력서는 다른 멤버들이 작성’이라는 부연 설명이 나타나자 또 즐거워하는 컬러즈들.
일단 자신의 이력서이기 때문에 해랑은 어떻게든 자신이 쓴 것처럼 대답하는 게 이 면접의 미션이었다.
[얼굴을 잘하게 되기까지 노력하신 게 있나요.]
[……잘 먹고 잘 잤습니다.]
어떻게 그리 잘생길 수 있는 거냐며 항상 궁금해하던 컬러즈는 본인의 대답을 듣고 “오오오-.”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체 어느 부분을 이해한 건지 잘 모르겠지만…….’
멤버가 하는 말은 일단 믿고 보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취미가 랩 메이킹이신데…….]
랩이 취미라는 이유로 정장을 입은 채 차분하게 무반주 <미드나잇 블루>를 선보이는 해랑.
진지하고 자전적인 곡인데 이 상황에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아서 오히려 웃음을 유발하는 효과가 있었다.
‘예능 레벨 2는 이런 식으로 웃기는 방법이 있구나.’
자신도 모르는 이력 사항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대답한 해랑의 면접은 [합격 사유: 미남]이라는 글씨와 함께 종료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뜨는 문구 ‘5년 후’.
“으응?”
“다른 애들은……?”
공식 미남 인증에 터져 나온 환호가 사그라들고 웅성거림이 울려 퍼지는 와중에, VCR이 종료되고 무대에 조명이 켜졌다.
그리고 무대 위에는 포스터와 같은 오피스룩을 입은 해랑이 서류를 팔락거리며 책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전광판에 클로즈업된 그가 컬러즈의 환호성이 가라앉으면 인사하려 했는지 눈치를 보느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게 너무 눈에 보여서 컬러즈는 또 웃으며 2차 환호성을 질렀지만.
“……백해랑 팀장입니다.”
이 대사 하나로도 다들 설정을 알아챘을 것이다.
방금 VCR에서 신입 사원으로 입사한 해랑이 몇 초 만에 5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팀장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예전 오피스룩 화보 촬영 때 우리끼리 정했던 설정의 연장선이었다.
“오늘 경력직으로 입사한 컬러즈 대리라고 들었는데.”
해랑의 국어책 읽는 듯한 대본 낭독은 둘째 치고 갑자기 주어진 역할에 다들 웅성거렸다.
“아닌가요?”
“맞아!”
확실한 대답이 없어서 해랑이 다시 질문하자 관객석에서 누군가가 그를 실망시킬 수 없었는지 크게 긍정했다.
그 다급한 목소리에 관객석 전체에 웃음이 퍼져나가고, 일단 해랑이 하는 대로 상황극에 맞추기로 했는지 웅성거림은 금세 잦아들었다.
“오늘 신입사원 공채 면접인 건 아시죠. 면접자들이 올 거니까 호응으로 평가해주세요.”
컬러즈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금방 파악한 듯 한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팬미팅이니 다 같이 즐길 수 있다면야 어떻게 진행하든 형식은 자유.
이 설정을 어떻게 살려볼까 고민하다가 이렇게 관객 참여형 연극처럼 오프닝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첫 번째 면접자, 준해가 그 두꺼운 안경을 쓰고 등장하자 열렬한 성화가 터져 나왔다.
“벌써 합격이다.”
무대 아래에서도 관객들의 소리가 들렸는지, 아직 등장하지 않은 한이가 마이크로 혼잣말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무대 위로 걸어 나오던 준해는 그 소리에 잠시 멈추고 환청이라도 들은 듯 반응했다.
“어디서 이상한 소리 나는데요?”
“층간 소음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정체가 분명한 소음이 사그라들자 준해는 예정대로 인사를 이어나갔다.
조금 다른 형식이었지만 공연에 앞서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나 마찬가지였다.
“현준해입니다. 단군대 나왔고요. 나이는 스물셋입니다.”
“학력이 좋으신데 이 회사에 지원하신 이유가 있나요?”
“어……. 그런데 여기 무슨 회사죠?”
실제 면접이었다면 가장 하면 안 될 질문이었으나 관객들의 이해를 돕는 데 필요한 질문이었다.
“여기는…… 블랙 회사입니다.”
해랑의 대답을 듣고 컬러즈는 이제야 VCR에 처음 나왔던 ‘주식회사 블랙’이라는 회사명의 참뜻을 알아챘다.
블랙 회사. 노동 환경이 열악한 회사를 말하는 것이었으나 그런 사회 고발적인 의미로 쓴 건 아니고 그저 모노크롬이 ‘블랙 앤 화이트’였기에 만들어진 말장난 같은 설정이었다.
자세히 말하자면 항상 컬러즈가 말하는 것처럼 ‘모노크롬이 복지’인 회사.
가까운 좌석 어디에선가 한 컬러즈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뉴마인가……?”
이, 이런 말이 나올 것도 어느 정도 예상했어.
‘너무 예상한 반응이 나오니까 오히려 조금 당황스럽다.’
이제야 좀 이미지 회복을 했다지만 컬러즈에겐 오랫동안 블랙 기업 같은 이미지가 박혀 있었으니 ‘1 더하기 1은 2’처럼 자연스럽게 나오는 반응이었다.
이런 세세한 것은 중요하지 않으니 넘어가고, 해랑이 VCR에서 자신이 했던 것처럼 면접을 진행해나갔다.
“특기가 ‘변신하기’네요?”
“어어……, 네. 맞아요.”
“보여주실 수 있나요?”
이쯤 되면 모두가 예상했을 것이다. 준해가 안경을 쓰고 나온 이유를.
무대 앞쪽으로 나간 준해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미리 준비한 종이꽃가루를 제 머리 위로 뿌리며 안경을 벗었다.
그에 맞춰 나오는 ‘샤랄랄라’ 하는 효과음. 그러나 그의 변신은 안경을 벗는 게 끝이 아니었다.
“샤랄랄랄……랄라!”
효과음이 금방 끝나버리자 입으로 자체 효과음을 이어가며 다급한 몸놀림으로 몸에 안 맞던 벙벙한 재킷과 아빠 넥타이를 벗은 준해.
그는 미리 무대 앞쪽에 준비되어 있던 핏이 맞는 세련된 재킷으로 갈아입었다.
허둥지둥하며 옷을 갈아입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뿌듯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그의 모습에 컬러즈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이 정도면 합격인가요?”
“와아아아아아!”
“오케이. 합격.”
“오예.”
탈락한다는 전개는 없었지만, 준해는 일단 무사히 통과해서 안심한 표정으로 준비된 자리에 가서 앉았다.
해랑을 제외하고 나이 역순대로 등장하기로 되어 있어서, 다음 순서는 재민이었다.
“이력 사항에 댄스팀에 있었다고 적혀 있는데 춤을 잘 추시나 봐요.”
“저 특기에는 춤이라고 안 적어줬어요?”
“특기는 사람 굴리기.”
재민은 뚱한 표정을 지었으나 어쨌든 이곳에서 멤버들을 굴리는 것을 보여줄 순 없으니 춤을 보여주기로 했다.
“음악 주세요!”
재민은 움직이기 편하도록 손가락으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컬러즈는 그런 동작 하나하나를 기대가 한가득 담긴 눈으로 쳐다보았다.
수트를 입고 추는 댄스는 과연 어떤 걸까.
무대에 집중하느라 조용해진 공연장 안에 준비된 음악이 울려 퍼지고.
“푸핫! 아, 어떡해.”
“악! 개귀여워!”
재민이 흘러나오는 동요에 맞춰 귀여운 율동을 췄다.
입을 틀어막는 컬러즈를 보면서 나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의상은 다들 정장인데 분위기는 완전 유치원 학예회잖아.’
동요 1절이 끝날 때까지 응원봉을 흔들며 ‘오구오구’ 분위기로 율동을 지켜보는 컬러즈가 마치 아이 재롱 잔치를 보는 학부모들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열렬한 환호와 함께 댄스…… 아니, 율동 무대가 끝나고 재민도 합격 처리가 되어 준해 옆 의자에 앉았다.
다음 멤버가 등장하기 전, 그새 면접관으로 동참하여 같이 진행하던 준해가 마이크를 들고 컬러즈에게 물었다.
“궁금한데 다음 사람한테 호응 안 해 줘서 면접 탈락시켜 보면 안 돼요?”
“면접 탈락하면 어떻게 돼요? 공연 못 해요?”
막내 두 명이 장난스러운 호기심을 보이자 해랑의 시선이 허공을 돌았다.
“관객석에 앉아서 구경하면 되지 않을까.”
탈락하는 경우는 설정해 놓지 않아서 적당히 내놓은 대답에 컬러즈는 관객석으로 멤버가 내려온다는 말에 오히려 환영했다.
멤버가 공연에서 빠질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안심하고 보이는 반응이었다.
컬러즈와 멤버들이 작당 모의한 것도 모르고, 다음 순서인 한이가 자신감을 보이며 나타났다.
“제 특기엔 뭐가 적혔죠. 얼굴? 노래?”
“아니. 춤.”
“예?”
당황할 새도 없이 아까 재민이 율동을 췄던 동요가 다시 울려 퍼졌다.
멤버들은 각자 장기를 하나씩 준비했는데, 한이가 준비한 것은 ‘춤’이 아니었다.
리허설에선 적당히 순서만 짚고 넘어간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이 애드립 구간이 그런 부분 중 하나였다.
뒤에 앉은 재민이 팔만 움직여 아까와 같은 율동을 추고, 준비가 되지 않은 한이가 그런 그를 흘깃거리며 따라 했다.
동요가 끝나고 준해가 관객석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컬러즈 대리님이 별로 마음에 안 드시나 봐요.”
컬러즈는 아까 약속한 대로 작은 호응만 보였다. 대신 만면에 웃음을 띠고 소리 대신 응원봉을 더 크게 흔들었다.
원래는 컬러즈가 아니라 멤버들이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고, 한이는 더 잘하는 것을 하겠다며 준비한 노래를 불러 합격하는 게 기존 순서인데.
‘진짜 탈락시켜보는 것도 재밌지 않을까?’
방금 탈락시켜보자는 말이 나온 것도 리허설에 없던 준해의 애드립이었다.
원래 예정대로 노래를 불러도 컬러즈가 방금 약속한 대로 호응을 안 해 주면 어차피 대본과 다른 멘트로 넘어가야 할 상황.
제작진과 대화하여 진행을 위한 프롬프터 화면에 새로운 순서를 띄우자 해랑이 그것을 확인하고 읽었다.
“잠시 후에 패자부활전을 할 거니까 잠시 기다리고 있으랍니다.”
“무슨 면접에 패자부활전이 있어요.”
똑같이 프롬프터를 확인한 한이는 입술을 내밀고 투정하듯이 대꾸했다.
그리고 정말로 관객석으로 내려가……는 대신, 자신의 의자를 들고 1층 좌석 사이 돌출 무대로 나가서 자리 잡았다.
갑자기 거리가 가까워진 1층 관객들이 약속도 잊고 큰 소리로 한이를 반겼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우형이 리허설과 달라진 한이의 위치를 보고 잠시 당황한 얼굴로 굳었다. 공연장 중앙에 떡하니 혼자 앉아 있으니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저분은 면접관이신가요……?”
“아뇨. 그분은 지금 관객이고 이쪽이 면접관이에요.”
우형이 한이를 가리키며 묻자 준해가 해랑에게 손짓하며 대답했다.
우형은 신경 쓰이는 돌출 무대 위의 한 관객을 애써 무시하고 본인의 면접을 이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