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
촬영하러 모인 김에 방송과 관련된 의견을 나누고자 출연진들과 각 소속사 스태프들은 해산하지 않고 남았다.
하도 많은 회사가 엮여 있다 보니 회의하자고 따로 자리를 마련하기도 번거로워서, 대화를 나눌 일이 있으면 이렇게 촬영 후에 시간을 내곤 했다.
제작진은 먼저 촬영 장비를 철수시키느라 어수선하고 출연진들은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몇 명이 안 보이네.’
많은 소속사 스태프들이 있지만, 이 중에 제작진이 촬영 분위기로 걱정이 많다는 것을 아는 건 우리밖에 없었다.
카메라가 꺼져서 방심했을 때 좀 더 솔직한 모습이 나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촬영 중이 아닐 때도 지켜보려 했는데 마침 몇몇 멤버만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류현이랑 제오는 친분이 있는지 종종 같이 다니는 건 봤는데.’
도한은 아는 연습생 친구들을 만나러 간 건가, 아니면…….
한 공간에 가둬놓은 게 아니고 촬영으로 오픈된 장소야 얼마든지 돌아다닐 수 있었으니 잠시 자리를 비우는 건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보이지 않는 멤버의 구성이 왠지 신경 쓰여서 나가봤는데, 복도 한구석에서 걱정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저, 저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야, 이제오! 너 혼자 발 빼면 어떡해, 인마!”
류현과 제오가 나란히 서 있고 그 앞에 도한이 서 있는 대치 구도.
그러나 서로 의견이 잘 안 맞았는지 류현이 당황한 표정으로 제오를 쳐다봤다.
무슨 이야기가 발단이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쪽으로 오면서 언뜻 들렸던 도한의 말소리와 저 반응을 보니 대충 짐작이 갔다.
도한은 두 사람이 뭐라 하건 신경도 쓰지 않고 이를 갈며 속사포처럼 말을 이어나갔다.
“너네는 데뷔할 때부터 잘나가니까 다 쉬워 보이냐? 네가 이 거지 같은 환경에서 몇 년이나 버티다 떡상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몰라서 그렇게 쉽게 말하지. 너희도 X소를 겪어 봐야…….”
아니, 잠깐.
도한이 지금 말하는 ‘거지 같은 환경’이란 거 아무리 생각해도 업계 얘기가 아니라 뉴마 얘기 같은데.
그도 뉴마에게 방치된 피해자였기에 내가 할 말은 없다만, 지금 여기서 꺼낼 이야기는 아니었다.
감정적으로 나가는 게 입뿐이고 몸이 먼저 튀어 나가지 않은 점은 다행이지만, 놔뒀다간 그의 거침없는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두려워서 끼어들었다.
“잠깐 스톱.”
멍하니 도한이 토하는 울분을 듣고 있던 두 사람은 나의 등장에 내심 찔리는지 고개를 슬쩍 숙이며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도한은…….
“네가 무시할 팀이 아니란 말이야. 이 주인님 이사님이 얼마나 밀어 주시…….”
“도한아, 너도 스톱.”
편들러 와준 것이 아닌데 ‘주인님 이사님’이라는 이상한 호칭까지 쓰며 오히려 기세등등해졌다.
도한은 아직 감정이 덜 풀린 듯하지만 다행히 내 제지에 바로 입을 다물었다.
‘진짜 무슨 유치원이냐고.’
성인이 된 지 얼마 안 된 애들이라고는 해도 이렇게 어른스럽지 못한 일로 말썽을 일으키다니.
아니,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뒷말하는 버릇을 못 버리기도 하니 꼭 나이가 어려서 벌어진 일만은 아닐 것이다.
이들의 불만이 프로듀싱팀에게도 향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일을 크게 키울 생각은 없는데. 다들 연예인이니까 평소에도 말조심해야 하는 거 알지?”
“……죄송합니다.”
내가 여기서 이들을 질책하는 것은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원인 제공이야 얘들이 했지만 타 소속사가 보호하는 아티스트니까.
게다가 타이른다고 바로 반성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앙심을 품기도 하지.
‘모노크롬이 신인한테도 얕보이고 있다는 건 속이 쓰리지만.’
방송 분위기도 신경 써야 하니 일단 적당히 타일러서 넘기는 게 최선이겠지.
나까지 감정적으로 나갔다간 악화만 될 것이다.
“타당한 의견이 있으면 매니저를 통해 얘기하거나 직접 말해주면 좋겠어. 우리도 최대한 협조할 생각이니까.”
할 말이 있으면 당당하게 하란 소리에 뒷공작을 펼치려고 했던 게 찔렸는지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제대로 대답하라고 재촉할 생각도 없었고, 계속 여기 모여 있을 수도 없었기에 두 사람을 스태프들이 있는 곳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남아 있는 도한에게로 몸을 돌렸다.
“……너도 급발진하기 전에 한 번만 더 생각해 보기로 하자.”
“네엡…….”
이러면 사람들이 뉴마에서 급발진만 배워왔다고 생각한다고.
그래도 한편으로는 모노크롬의 일에 자꾸 나서주는 것이 고맙기도 했다. 메인 보컬이니까 따뜻하게 차라도 마시라고 텀블러 굿즈라도 선물해 줘야겠어.
돌아와서 출연진들은 프로듀싱팀과 모이고 나는 제작진, 스태프들과 따로 이야기를 나눴다.
“만호 씨에겐 따로 댄스 트레이닝이 필요해서 시간을 마련할 생각인데, 괜찮다면 다른 멤버들도 같이 하는 게 어떨까 해요. 그러는 편이 나중에 호흡 맞추기가 좋을 것 같아서요.”
팀 미로의 단장인 민후는 안무가로 섭외되긴 했지만, 안무가 완성되기 전에도 같이 연습하는 시간이 있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팀 미로도 평소에 최대한 함께 연습하면서 서로의 스타일을 파악하고 호흡을 맞춘다고.
댄스 트레이닝은 팀 미로가 맡는다고 하자 각 소속사 스태프들이 긍정적인 의견을 내비쳤다.
신인이라 아직 배울 것이 많은데 괜찮은 트레이닝 기회가 알아서 찾아오니 잡아야겠다고 생각한 듯했다.
다만 내가 적극적으로 이 제안을 내세우는 것은 조금 다른 이유도 섞여 있었다.
‘뉴마에선 뉴마법을 따라야지.’
재민이 멤버들을 엄청나게 굴린다 싶었는데 그게 다 팀 미로에서 배워온 것이었다.
모노크롬이 얼마나 고강도 훈련을 하는지 몸소 경험해 보면 선배들도 이 자리에 올라오기까지 쉽지 않은 길을 걸어왔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까.
우리가 굴린다고 해가 되는 것도 아니잖아? 트레이닝을 시켜주는 건데. 비유하자면 굉장히 쓴 보약과 같은 것이다.
뉴마에서 모노크롬 팀의 프로듀싱을 받는 이상 모노크롬을 깔보는 대로 놔둘 순 없지.
그리고 이게 내가 떠올린 뉴마식 해결법이었다.
***
<쉰셋돌> 2화가 방영된 후 타이틀곡 작곡가가 알려졌다.
우형이 팀으로 공모에 참여해서 결국 타이틀곡 작곡을 따냈다는 소식에 컬러즈는 크게 안도했다.
2번이 아닌 다른 후보곡에 투표했던 이들은 제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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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 다른데 투표했어ㅠㅠㅠㅠ
우형아 미안해 흫긓그ㅠ휴ㅠㅠㅠㅠㅠㅠㅠ
└나도ㅠㅠㅠㅠㅠ 좀더 잘 듣고 투표할걸,,,,,
└석고대죄하는 마음으로 일주일간 커피 끊고 차분차만 마시겠습니다
└건강해지겠는데?
└헐 나도 1번 투표했던듯..
└컬러즈들 표까지 갈릴만큼 쟁쟁한 후보들 사이에서 우형이팀이 1등했단 얘기니까 좋은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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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옆에 계신 분 혹시 너의별 작곡 그분..?
└헐 이름 보니까 맞다 둘이 친한가?!ㅇㅁㅇ
└곡이 좋았던 이유가 있었네 크으 갓조합이네
└능력자는 능력자를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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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즈의 관심은 우형의 옆에 있는 성운에게까지 옮겨갔다.
당당하게 멤버와 한 팀으로 엮인 그에게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지.
우형은 이름으로 검색하면 모노크롬의 리더로서 정리된 자료가 나온다지만, 성운은 검색해도 이전에 발매한 자신의 음원이나 작곡한 곡들의 정보만 나올 뿐.
작가는 생각보다 멀끔한 모습으로 나타난 성운을 보고 흥미가 생겼는지 이전에 그가 출연했다던 오디션 프로그램 예선 영상까지 공수해왔다고 한다.
‘사람들이 흥미가 가게 편집해 놨네.’
예선에서 뛰어난 실력으로 통과했지만 본선에 나오지 않았다는 얘기, 그의 재능을 알아본 라솔이 직접 찾아 스카우트했다는 얘기, 그리고 얼굴 없는 가수로 활동했다는 정보까지.
라솔은 성운을 ‘말 안 듣는 집돌이’라고 했는데, 방송에선 그것을 ‘자기주장 확고한 예술인’으로 포장해놓았다.
그리고 그를 가수로서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와 친구한테 숨겨진 띵곡으로 추천받아서 한때 엄청 들었는데 가수 저 사람이었엌ㅋㅋㅋㅋ 얼굴 처음 본다 라솔느님네 작곡가였을 줄이야]
라솔이 알아본 인재를 남들보다 미리 알았다는 사실이 뿌듯했는지 ‘나도 저 사람 알아!’ 하는 반응도 속속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모노크롬의 인지도가 올라가는 과정만 지켜봤는데 주변 사람도 같이 주목을 받는 것을 보니 신기하기도 했다.
‘라솔 씨가 좋아하겠다.’
그리고 우형에게 들어보니 인터뷰 때 작가가 방송에 나오게 된 과정 설명을 꽤 길게 요청했다는데, 역시 그에 관한 반응도 빼놓지 않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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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은 원래 방송 나오기로 했던 ㅁㄴㅋㄹ이고 한쪽은 라솔네 작곡가.. 먼가 이상하지 않아?
이런 말 하기 좀 조심스럽지만 좀 짜고치는 느낌이 있다
└근데 곡이 진짜 좋긴했어. 나 2번에 투표함
└사실 나도ㅎ
└지도 투표해놓고 의심 왜 했는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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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보면 우연의 연속이라 의심스러워 보일 수 있겠다 싶었는데, 투표 방식을 거친 덕에 다행히 크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투표부터 짜고 쳤다기엔 투표했다는 사람이 너무 많았으니까.
우리는 그렇게 잘 넘어갔는데,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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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에 내돌도 나와서 기대했는데 안 뽑혔네
인지도로 줄세워서 뽑았나 쩝
└줄세웠다기엔 두세명 빼고는 으음..
└걍 그사세라고 말 나올까봐 중소돌 한명 끼워넣은 거 아님?
└나 방송 못봤는데 런하 븨스탈 힙합인 빼고 나머지 한명 누구?
└ㄷㅓㅋㅡㄹㄹㅐㄴ
└진심 첨들어봄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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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여러 아이돌 그룹이 한곳에 모이면 항상 거치는 과정인가.
1화에서 캐스팅을 위해 여러 소속사를 돌았던 탓에 기대했었는지, 최종 섭외되지 못한 그룹의 팬들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불만을 표했다.
그리고 이 불만의 화살들은 가장 유명하지 못한 더클랜을 무시하는 발언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중소 기획사 아이돌은 기회도 가지면 안 되는 거냐고…….’
<아이돌부 방학캠프> 촬영 때 모노크롬도 들었던 이야기였기에 괜히 이입되었다.
인기 그룹은 소수고 비인기 그룹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제작진이 더클랜의 멤버를 뽑았다는 것은 무조건 인기 그룹만 뽑으려 하지는 않았다는 뜻.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비인기그룹에서 한 명쯤 뽑으려 했다고 하더라도, 그 많은 비인기그룹 중에서 경쟁을 뚫고 뽑힌 거면 그만큼 실력이 뛰어나다는 거 아니야?
‘실제로 실력도 좋았고.’
처음엔 까칠해 보이는 비주얼 탓에 래퍼로 착각하기도 했지만, 노래 부르는 모습을 직접 보니 확실히 메인 보컬다웠다.
성운이 이담의 실력에 관심을 가진 것도 충분히 공감이 갈 정도로.
‘잠깐만.’
문득 한 기억이 스쳐 지나가서 나는 곧바로 업로드된 방송 다시 보기 분량을 확인했다.
이미 촬영할 때 봤던 장면이라 방송에선 대충 보고 넘겼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재생 바를 움직이다 보니 컨셉 회의 때 이담이 조심스레 손을 들고 발언하는 장면을 찾을 수 있었다.
[저, 조금 대중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컨셉을 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센 인상만 떠올리고 센 컨셉을 제안한 게 얘라고 생각했었는데.
멤버의 반절이 래퍼 포지션인 퍼포먼스형 힙합 그룹에서 메인 보컬을 맡고 있는 이담.
그런 그가 ‘친근한 컨셉을 해 보고 싶다’고.
‘……얘 설마 소속사 때문에 악동 컨셉만 해오던 모노크롬 비슷한 상황인 거 아니야……?’
그저 내 기우라면 좋겠다만, 신인이면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게 보통 아닌가.
매니악한 힙합 컨셉도, 강렬한 비주얼도 어쩌면 자기가 원해서 한 게 아닐 수도 있지.
내가 그쪽 회사 사정까지 알 순 없으니 섣불리 판단하면 안 되겠지만.
조금 찝찝한 마음으로 자고 일어난 다음 날.
나는 출근하자마자 송준오 프로듀서에게서 이런 말을 전해 들었다.
“여우형이 제작진한테 연락을 받았는데…… 더클랜의 이담이 후렴 파트 지원은 포기하겠다고 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