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화
“저, 저도!”
선착순으로 메인 보컬을 뽑는 것도 아닌데, 가만히 있다간 뺏기겠다 싶었는지 러너스하이의 류현이 서둘러 같이 손을 들었다.
그러다가 옆에 있던 더클랜의 이담과 눈이 마주치고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컨셉 회의에서 센 컨셉 하자고 했던 게 저 이담이라는 멤버였던가……?’
방송 내용 유출 방지를 위해 우리가 따로 녹화나 녹음을 할 수 없었기에, 나와 송준오 피디는 옆에서 들으며 메모하기만 했다.
그래서 원만호가 ‘젊은이 느낌이 났으면 좋겠다.’라고 한 것 외엔 누가 어떤 제안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이 중에서 ‘센 컨셉’에 가장 잘 어울리는 멤버라 하면 단연 이담.
‘게다가 다들 1년 차 신인인데 혼자 2년 차 선배라 후배들 입장에선 조금 어려울 것 같기도 하고.’
미리 알아본 바로는 더클랜은 데뷔 때부터 강렬한 힙합 컨셉을 유지해 온 그룹이었다.
멤버 전체가 그룹 컨셉에 맞게 강렬한 스타일이었는데 이담 역시 마찬가지였다. 준해보다 더 짧은 머리에 날렵하게 올라간 눈꼬리, 그 위에는 눈썹 스크래치까지.
이 예능 멤버들 사이 분위기가 서먹해 보이는 것엔 이 비주얼이 한몫했다. 말없이 쳐다만 봐도 마치 노려보는 듯한 분위기가 있었다.
기 싸움인지 눈치 싸움인지 모를 시선이 오가고, 한이가 웃음을 띤 채로 눈을 잠깐 질끈 감더니 천천히 한 어절씩 끊어 말했다.
“자아, 친구들. 음역대가 제일 높은 사람에게 메인 보컬 파트를 주는 게 아니니까 미리 조급해하지 말아요.”
“네에…….”
그래도 역시 신인들이라 그런지 선배인 한이의 말에 고분고분 대답하는 것을 보니 조금 웃음이 나왔다.
‘이게 촬영장이야, 유치원이야.’
원만호는 아이돌을 체험하는 상황이 즐거운지 그저 해맑을 뿐. 이 상황을 때 묻지 않은 상태로 순수하게 즐기는 것은 그밖에 없었다.
문제는 신인이라 그런지 혈기왕성한 다른 멤버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안정될 때까지는 모노크롬 유치원 모드로 촬영을 진행해야 할 것 같았다.
***
“휴우.”
“고생했다.”
한이가 이마에 손을 올려 땀을 닦는 시늉을 하며 카메라 뒤편으로 나왔다.
여러 가지 코너가 준비되어 있어서 잠시 휴식한 후에 또 다음 트레이닝 코너로 넘어갈 예정이다.
첫 번째 보컬 트레이닝 파트는 한이가 어떻게든 열심히 진정시킨 덕분에 무사히 넘겼다.
제작진도 협력하는 모습을 원한다고 했으니까 악의적인 편집을 하진 않을 테고, 잘 편집하면 신경전을 펼치는 게 아니라 의욕 넘치는 모습으로 비치겠지.
“근데 메인 보컬 진짜 어떡하냐? 형은 좀 생각 있어?”
“글쎄…… 포지션을 먼저 정하고 파트를 배분하는 것보단 파트에 잘 맞는 사람을 적재적소에 넣고 싶은데.”
기존 메인 보컬들이 전부 메인 보컬 포지션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자 우형도 곤란한 표정이었다.
아직 곡이 완전히 완성되지 않아서 더욱 혼란스러운 듯했다.
“앞으로가 좀 걱정이에요. 친해지고 말고는 저희가 어떻게 해주기 어려운 부분인데.”
“그러게. 정 안 되면 진짜 손잡고 친하게 지내라고 할 수밖에.”
“그거 정말…… 좋은 방법이네요.”
한이가 실없는 내 해결 방안을 듣고 영혼 없이 엄지를 들어 올렸다.
결국 지금 상황에선 별다른 수가 없다는 이야기에 우형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예능이지만 현실감이 있다고 해야 하나, 진짜 연습생들 보는 것 같아요…….”
“아. 연습생들이라고 다 사이좋은 건 아니니까. 가끔 싸우는 사람도 나오고.”
“그중에 한 명이 너였지.”
“뭐, 다 그러면서 크는 거예요.”
데뷔 전에 연습생 사이에서도 리더였다는 우형이 촬영을 지켜본 소감을 내뱉고 한이가 남 얘기 하듯이 능청스레 대꾸했다.
이미 예능 제목부터가 <쉰셋돌>인데 여기서 더 클 필요가 있을까…….
“다음은 랩 트레이닝이었지?”
잠시 시선을 돌려보니 한구석에서 해랑과 준해가 작가에게 뭔가 지시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있었다.
우형과 한이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는 그나마 안심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쪽은 별로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
“애초에 메인 래퍼가 한 명이니까.”
랩은 개개인의 스타일이 워낙 다양해서 평가하거나 가르치기 어렵다 보니 랩 트레이닝은 예능에 치중되어 있었다.
라임 맞추기 백일장이라고 했던가. N행시와 비슷한 부류의 언어유희 코너였다.
예능 레벨2인 해랑을 진행자로 혼자 내보내도 될까 고민하다가 작사 담당 준해가 적절하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듯해서 같이 붙였다.
“그다음은 댄스……인데.”
재민이 담당하는 댄스 트레이닝 코너는 이전에 1차 평가로 했던 노래방 점수 대결과 비슷했다. 운동용 댄스 리듬 게임을 진행해서 점수로 평가하는 방식.
‘그럼 또 저번처럼 점수 경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메인 댄서가 없어서 그 정도로 심하진 않겠지만 경쟁 구도는 최대한 피하고 싶은데.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자 재민이 큰 고민 없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제 순서가 마지막이에요?”
“응.”
“촬영 예정 시간이 저녁까지면 다들 스케줄 없겠죠?”
그리고 문제 될 것 없다는 듯이 웃으며 무서운 말을 했다.
“카메라 몇 대만 남겨두고 자기가 납득할 만한 점수가 나올 때까지 알아서 계속하라고 시키면 돼요.”
“와…….”
경쟁이고 뭐고 지쳐서 나가떨어지겠구나. 참으로 재민다운 해결법이었다.
아까 고음 경쟁처럼 몸이 상할 리도 없을 테고. 정말 심하게 몸을 혹사하지 않는 이상 근육통 정도로 끝날 것이다.
물론 내가 직접 겪는 게 아니니까 쉽게 생각하는 거지, 당사자들은 몸으로 절절히 느끼게 될 것이다. 괜히 오기를 부렸다간 자신만 고통스러워진다는 것을.
‘멤버들이 믿음직해서 다행이야.’
이런 식으로 최대한 경쟁심을 자극 안 하면서 잘 넘어가 보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문제는 그다음, 타이틀곡 파트 분배에 있었다.
***
2차 평가는 실력을 평가한다기보다는 타이틀곡 파트를 분배하는 과정이었다.
쉰셋돌 멤버들이 진지하게 각 파트를 부르고 그것을 토대로 나중에 회의를 거쳐 가장 잘 어울리는 멤버에게 파트를 주는 방식.
우리가 포지션을 딱 명명하지 않더라도, 유일한 타이틀곡의 어느 파트를 맡느냐가 거의 그룹 내 포지션 결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모노크롬 메인 보컬인 한이가 후렴 파트에 무조건 들어가니까.’
아마 메인 보컬들이 노리는 것도 후렴 파트. 그중에서도 임팩트가 가장 큰 1절 후렴 파트의 경쟁률이 가장 심할 것이다.
“경쟁시키거나 대놓고 평가하는 건 피하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 작곡팀이 파트 분배에 빠질 수도 없고.”
“최대한 둥글게 잘 말해 볼게요.”
어쩔 수 없이 경쟁 구도가 생겨나서 걱정인 것도 있지만, 누군가를 평가하는 위치에 있으면 사람들에게 빈축을 사기 십상이었다.
더군다나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우형 같은 경우엔 더욱.
예능 멤버들이 원하는 파트를 못 가져가면 ‘우리 애가 제일 잘 어울리는데 왜 안 시켜주냐!’ 하면서 팬들의 화살이 이쪽으로 돌아올 수 있다.
다른 팬덤에서 비난이 들어오는 피곤한 상황은 웬만하면 사양이지만 우형이 타이틀곡 작곡가 중 한 명인데 여기서만 쏙 내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도 안 된다.
우형도 내 걱정을 이해하는지 날 안심시키듯이 말했다.
‘그게 최선이지. 같은 말도 괜히 얄밉게 하는 것보다야 둥글게 하는 쪽이 나으니까.’
그러나 방송보다는 곡의 완성도에만 집중하는 성운은 거리낄 것이 없었다.
“이담 씨가 방금 그 1절 후렴 파트, 가성 섞어서 다시 불러볼 수 있어요?”
파트 분배의 토대가 될 2차 평가가 시작하고, 성운이 이담의 보컬에 특히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자 다시 메인 보컬 사이의 눈치 싸움이 시작됐다.
***
“넌 이대로 가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뭐가?”
“평가에 기준이 없고 자기 취향대로만 뽑는 것 같잖아. 그리고 우리 말고는 왠지 다들 친분 있는 것 같다니까.”
류현이 쉬고 있던 제오를 인적 없는 복도로 몰래 끌고 와서 속삭였다.
파트는 좀 더 회의를 거친 후에 결정된다고 하는데 왠지 자신은 원하는 파트를 가져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솔직히 실력은 누가 월등하고 떨어지고 할 게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이미지라는 게 있지 않은가. 이런 명랑한 곡의 메인 보컬 파트에 래퍼보다 더 거친 인상의 이담이 들어가면 그게 어울릴까?
처음엔 소속사의 입김이 있기도 했지만, 이 상황이 되니 류현은 자기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있다간 본전도 못 받아먹는다.’
기대보다 많이 주목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확실히 분량을 챙길 방법은 자신의 소속사, 베터 엔터테인먼트가 개입하는 방법뿐이었다.
그의 그룹인 러너스하이의 프로듀서 박형주는 작곡 투표에서 떨어지고 자존심이 상한 듯했다.
아쉽게 떨어진 2등 곡이 몇 번 후보곡인지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류현은 결과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멤버 표를 받은 곡이 1등과 2등뿐인데, 류현이 투표하지 않은 곡이 1등이 되었다면 다른 쪽이 류현이 투표한 곡, 베터 엔터에서 낸 박형주의 곡이란 것이니까.
알아보니 제오 또한 자신과 같은 곡에 투표했다고 한다.
멤버 표가 3대2로 갈린 와중에 자신들은 소수파에 속하고야 말았다.
“김도한, 그 형은 애초에 친한 사이인 것 같고, 만호 형님도 방송 시작 전부터 만났다잖아.”
이담은 무슨 생각인지 잘 모르겠으나 2번에 투표한 게 확실했다. 작곡가는 그런 그에게 메인 보컬 파트를 주려고 마음을 먹은 듯했고.
이쯤 되니, 이미 파벌이 형성되어 있는데 자신들이 배제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함께 온 매니지먼트 팀장이 한숨을 푹 쉬던 것이 떠올라 류현은 더욱 초조해졌다. 이는 소속사 입장에서 좋은 방향이 아니라는 신호와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좋은 타이밍은 물 건너갔지만, 아직 앨범 제작은 초기 단계.
매니저가 말하기를, 만일 제작진이 현재 프로듀싱팀의 역량이 부족하다고 판단하면 베터 엔터테인먼트에서도 개입할 여지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가만히 있으면 좋은 파트 다 뺏기고 부스러기만 주워 먹을지도 모른다니까.”
“난 어차피 메인 래퍼일 거라 상관없는데?”
“이 자식, 아니, 친구야. 내 말을 좀 들어 봐.”
여론을 좀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제오는 속 편한 스타일이라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함께 연습생이었던 경험을 살려 최대한 그가 혹할 만한 말을 만들어냈다.
“만호 형님이 랩 트레이닝 1등 했잖아. 갑자기 그 형님한테 메인 래퍼 파트 주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 이거 예능이라서 재밌겠다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니까. 래퍼 뺏기면 넌 보컬 파트 받을래? 메인 보컬만 세 명이라 중요한 파트는 다 나누고 없을 텐데?”
안심하고 있었는데 래퍼 자리를 뺏길 수도 있다는 소리에 제오도 조금 진지한 표정으로 들었다.
다년간의 친분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조금 미안했지만 예상대로 귀가 팔락이는 그의 표정을 보고 류현은 마음속으로 안도했다.
다만 그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최대한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구석으로 왔는데, 뉴마의 건물 구조에 빠삭한 도한에게 사각지대란 없었단 점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모노크롬 선배님들이 프로듀싱하는 것도 말야. 선배긴 하지만 우리 음방 1위 할 때 후보에도 없었던 거…….”
“야.”
제삼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자 류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뒤돌아보니 기가 찬 표정의 도한이 있었다.
도한은 이 상황에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 과거에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입장은 반대였지만.
다만 그때는 그때고.
“이 새…… 이 자식이. 선배님들이 지금까지 어떻게 활동해왔는지 몰라서 뒤에서 그딴 소리 지껄이는 거냐, 지금?”
도한은 자신도 같은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었기에 이성적으로 해결해 볼 생각이었으나, 정작 입을 여니 먼저 튀어나온 것은 파멸의 주둥아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