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화
성운은 머리숱이 많은 편인데 그게 길어지니까 자기도 귀찮은지 항상 앞머리를 뒤로 넘겨서 모자를 쓰고 다녔다.
차라리 아예 짧았으면 건들 생각을 못 했을 텐데, 길면 얼마든지 헤어스타일을 변경할 여지가 남아 있지 않은가.
비유하자면 커팅하기 전의 원석 상태라고 해야 하나.
‘겉모습에 신경 쓴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워서 외부 활동을 더 꺼리는 거 아닐까?’
지금은 작곡 위주로 활동하고 있지만 성운도 일단 싱어송라이터. 외부 활동이라 하면 당연히 방송 쪽이다.
지금껏 살면서 꾸밀 일이 없었는데 갑자기 치장한 연예인들 사이에 들어가라고 하면 누구든 주저하게 되지 않을까.
물론 라솔의 소속사도 스타일리스트를 지원해줄 테고 원한다면 얼마든지 스타일링이 가능하겠지만, 안 하던 사람이 처음 마음먹기란 힘든 것이다.
‘계기가 없으면 그냥 익숙한 상황에 안주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지.’
사람이란 차림에 따라 행동이나 마음가짐이 변하기도 한다.
트레이닝복만 입고 다니던 사람이 정장을 차려입으면 공식적인 자리에 나갈 용기가 생기도 하고, 집에서 목 늘어난 티셔츠만 입고 있으면 동네 편의점조차 나가기 싫어지기도 하는 법.
성운도 외부에 나서는 자신의 모습이 상상이 안 가서 별로 내켜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진짜로 싫어하는 것 같았으면 내가 이렇게 관심을 두지도 않았어. 그런데 제 발로 오디션 프로그램에도 나갔다잖아.
‘이번엔 좀 의욕이 생긴 것 같으니까 지금이야말로 변화를 줄 적기가 아닐까.’
그런 마음으로 몇 번 성운을 좀 관찰했는데 들켰는지 그가 우형 뒤로 숨었다.
예전에 우형이 들이대서 성운이 해랑 뒤에 숨은 적이 있었는데 내가 지금 우형 역할이 됐나…….
언제 어떻게 말을 꺼내서 마음을 돌려볼까, 타이밍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는데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해서, 작곡팀 두 분 인터뷰를 따로 짤막하게 넣고 싶어서요. 투표하신 시청자분들이 많이 궁금해하시거든요. 출연진이 공모에 참여하게 된 과정도 조금 설명해 드리고. 아, 참고로 미리 작곡으로 내정되어 있었다는 내용은 언급 안 하는 쪽으로 부탁드릴게요.]
<쉰셋돌>의 작가에게서 따로 연락이 왔다.
원래 작곡팀은 녹음 등의 앨범 제작 과정에서 자연스레 등장할 예정이었는데, 투표로 인해 주목도가 높아져서 따로 소개할 시간을 마련했다고.
성운의 소속사인 라솔의 회사에도 연락이 갔을 것 같아서 일정을 맞출 겸 문의하니 라솔에게서 직접 연락이 왔다.
[이사님도 작곡팀 인터뷰하는 날에 방송국에 같이 가신다고요?]
“네. 저는 또 따로 사전 회의가 있어서요. 그래서 가는 김에 성운 씨도 같이 데려가고 싶은데…… 샵으로요.”
내 말에 라솔은 잠시 생각하는 듯 “으음.” 소리를 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이사님께 맡길게요. 왠지 이사님 말씀은 잘 듣더라고요.]
라솔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흔쾌히 수락했다.
비용 관련은 회사로 말해달라 했으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후후……. 죄송하지만 제 대리만족에 어울려주셔야겠어요.’
일은 아주 조금 늘어나겠지만, 대학생 준해를 데려다가 아이돌 준해를 만들면서 얼마나 재미있었던가.
나도 만족스럽고, 라솔도 좋아하고, 성운도 신경 쓸 것 없이 몸만 맡기면 되니 상부상조 아닐까.
취미가 일이 되면 괴롭다던데, 업무의 일부가 취미가 되니 제법 즐겁기도 했다.
***
“어! 모자 쓰시면 안 돼요. 머리 흐트러져요.”
성운이 차에서 내리며 버릇처럼 모자를 쓰려다가 내 말에 다시 손을 내렸다.
과감한 스타일 변화로 인상이 확 바뀌는 연출이었으면 재밌었겠지만, 그런 헤어스타일은 관리하기가 어려운 법.
본인도 갑자기 헤어에 신경을 쓸 것 같지는 않아서 관리하기 편한 정도로 최대한 ‘깔끔!’에 집중해서 다듬어달라고 부탁했다.
멤버 외의 다른 사람의 스타일에 간섭한 것은 처음인데, 무거워 보였던 머리가 가벼워지고 덮여 있던 목덜미가 시원하게 드러난 것을 보니 만족스러웠다.
성운은 달라진 자신의 모습이 어색한지 몸까지 삐걱거렸다.
“인터뷰 잠깐 하는데 무슨 화장까지…….”
“기왕 나오는 거 잘 나오는 게 낫지. 지금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데 나중에 카메라로 찍은 거 보면 잘 나온다니까?”
우형이 셀프 자존감 채우기 장인답게 옆에서 성운의 자신감을 북돋아 줬다.
샵까지는 잘 따라온 성운이 메이크업까지 해야 한다는 소리에 잠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내가 부탁하자 결국 손을 들었다.
그리고 우형의 말처럼 카메라 앞에선 확실히 차이가 나니까 메이크업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오셨어요? 인터뷰는 간단하게 저쪽에서…… 어머.”
우리를 안내하러 나온 스태프가 성운을 보고는 작게 놀랐다.
이전에도 몇 번 만났었지만 인상이 달라진 게 바로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만족스러운 반응에 흡족한 마음으로 두 사람은 인터뷰실로 보내고 나는 따로 회의를 위해 이동했다.
우리는 우리대로 타이틀곡의 진척 상황과 완성 일정을 전달하고, 제작진 측에선 다음 촬영에 필요한 사항을 전달하고.
우리에게서 기회를 앗아갈 뻔했던 안지택 PD가 대체 무슨 낯짝으로 나타날까 궁금했는데, 그는 생각보다 밝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투표 결과가 잘 나와서 다행입니다. 허허, 참. 확실히 1등이었던 덕분에 시청자들 불만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고요.”
결과만 좋으면 됐다 이거야?! QBC의 PD들은 대개 이런 느낌인가.
결국 이렇게 될 일이었는데 우리는 안 해도 될 마음고생을 겪었다.
그냥 바로 작곡에 이름을 올리는 것보다 사람들의 인정은 조금 더 받게 되겠지만.
멀리 갈 것도 없이 안 PD의 반응부터가 그러했다. 1등을 하니까 이제 인정해준다는 저 표정.
“참…… 다행이네요. 이제 저희가 모르는 변동 사항은 또 없겠죠?”
“크흠. 방송 사정에 따라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확신할 순 없지만 지금 상황으로서는 그렇습니다.”
확실하지 않다는 건 조금 불안하긴 해도 전처럼 얼버무리지 않는 것을 봐선 뭔가 숨기고 있지는 않은 듯했다.
우리도 앨범을 제작하면서 상황에 따라 일정이 조금씩 바뀌기도 하니 그런 예측 불가능한 경우의 수 때문에 확신하지 못한다는 거겠지.
제작진이 다른 수를 숨기고 있는 게 아니라면야 상관없었다.
“그리고 다음 촬영에 앞서서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이번엔 또 뭐지. 의심스러운 마음으로 쳐다보자 안 PD는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전에 같이 촬영하고 나서, 저희는 저희끼리 따로 촬영을 진행했는데 말입니다.”
“네. 그건 알죠.”
“생각했던 만큼 그림이 잘 안 나와서 도움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만.”
“생각했던 그림이란 게 어떤 건가요?”
“만호 씨나 저나 좀 더 단합되는 그림을 원했는데 지금은, 음……. 너무 개인플레이라고 할까요.”
좀 더 똘똘 뭉칠 수 있도록 도움을 달라는 건가?
1차 연습생 평가 때부터 서로 조금 눈치를 보거나 서먹해하는 것 같긴 했지만 크게 티가 나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 사이에 갑자기 사이가 나빠졌을 것 같지도 않고.
“촬영 분위기가 어땠길래…… 전에 말씀하신 대로 트레이닝 과정을 찍으신 거죠?”
재밌게 즐길 수 있는 게임 형식으로 진행한다고 들었는데. 그걸 생각하면 문제가 생길 만한 구석은 없었다.
“네. 체력, 지식 트레이닝으로 가벼운 운동 경기나 퀴즈 같은 걸 했었죠. 기획은 별문제 없었습니다.”
제작진이 기획한 게임에는 자신이 있는 듯했다. 트레이닝과 별로 상관없는 내용이지만 예능에는 어울리는 내용이었고.
“분위기가 나빠질 만한 부분이 없었을 것 같은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트레이닝 성적으로 리더를 뽑겠다고 해서 그런가…….”
“…….”
그게 중요한 거라고요! 자기네들이 1차 평가에 이어서 계속 경쟁심을 부추겼잖아!
‘이 사람아!’ 소리가 절로 나올 뻔했으나 겨우 참아냈다.
애초에 다른 연습생들과 경쟁하여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신인들이다.
거기서 또 다른 신인 그룹들과의 물밑 경쟁으로 오디션을 거쳐 출연하게 된 네 명.
‘그런데 자꾸 순위를 매기고 자리 하나를 두고 경쟁을 시키면 당연히 팀워크보다 경쟁심이 더 생기지!’
<아이돌부 방학캠프> 때와는 반대의 상황이었다.
그때 제작진은 서로 경쟁하는 그림을 원했는데 그룹끼리 사이가 좋거나 호의적이었던 바람에 협력하는 구도로 바뀌어 버렸고.
여기선 좀 더 협력하는 그림을 원했는데 개개인이 친분이 없다 보니 서로를 경쟁상대로 먼저 인식한 듯했다.
‘신인이라서 더 그랬을지도.’
아마 네 명이 사교적이지 못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건 아닐 것이다.
신인으로서 의욕이 넘쳤거나 소속사에서 기대를 거는 바람에 부담을 가졌을 가능성이 컸다. 멤버들의 경쟁은 그 뒤에 있는 소속사들의 경쟁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리더는 뽑으셨나요?”
“그건 아직입니다. 아직 트레이닝 촬영이 남아서요.”
경쟁에 불을 지피는 촬영이 더 남아있다니.
프로젝트 그룹 멤버들은 지금도 리더라는 권력을 어떻게 따낼지 회사와 함께 머리를 굴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저희가 어떻게 도움을 드리죠?”
유치원도 아닌데 손잡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할 수도 없고.
애초에 우리의 역할은 프로듀서였기에 어떻게 개입해야 할지 가늠이 안 됐다.
“음. 멤버들끼리 진행할 예정이었던 몇몇 촬영을 같이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중간에서 과열되지 않도록, 따지자면 진행자 역할이 되겠네요.”
불씨에 부채질을 해 놓고 우리보고 꺼달라는 건 좀 황당했지만.
‘출연 분량이 늘어나는 거면 이득이지……?’
게다가 괜히 불화가 깊어져서 방송에 방해가 되면 우리에게도 좋지 않으니까.
안 PD와 나눈 대화 내용을 정리한 후, 우리 매니지먼트 팀과 확인하고 나서 결국 촬영 일정이 조금 변경되었다.
일단은 촬영일에 직접 어떤 상황인지 봐야 자세히 알 것 같았다.
***
“시이이이이!”
“후우……. 도오오오오!!”
“잠깐, 잠깐. 진정!”
목이 터져라 고음 대결을 펼치는 메인 보컬 셋을 한이가 손을 뻗어 말렸다.
‘촬영 시작할 때만 해도 생각보다는 분위기가 괜찮아 보였는데…….’
원래 이 고음 대결 게임도 보컬 트레이닝이란 이름으로 쉰셋돌 멤버끼리 촬영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거기에 보컬 담당으로 붙은 한이를 긴급 투입.
게임이 시작되자 제작진의 요청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말리는 사람이 없으면 끝이 안 났을지도 모른다.
목소리가 허스키한 편인 만호와, 래퍼라서 저음에 가까운 목소리의 제오가 먼저 탈락하고 메인 보컬 세 명만이 남았다. 그러자 메보의 자존심을 걸었는지 더욱 필사적이었다.
“자아, 여러분. 목 안 상하게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니까 진정해요.”
한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무설탕 목캔디를 하나씩 나눠줬다.
PPL이 아니고, 메인 보컬이라 목을 많이 쓰는 한이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것이었다. 다이어트를 위해 좋아하는 단것을 마음껏 못 먹으니 간식 대신 먹는 용도이기도 했다.
입에 사탕을 넣은 쉰셋돌 멤버들은 금세 차분해졌다.
‘……저거 드라마 찍을 때 아역들한테 쓰던 방법 아냐?’
전에 커피차와 함께 촬영장에 들렀을 때 한이가 아역들과 놀아주는 장면도 목격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한 번 신나면 좀체 진정이 안 되니까 체력이 못 따라가겠다 싶었는지 가지고 있던 무설탕 사탕을 나눠주던 모습.
그러면 아이들은 먹는 데 집중하느라 조용해지고. 그 방법을 여기서 그대로 쓰고 있었다.
“음역대를 보자는 거지, 얼마나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는지 보자는 게 아니니까 너무 무리하지 말고요. 애초에 우리 곡에 그런 초음파 파트는 없으니까.”
성적으로 리더를 뽑겠다는 PD의 말도 일단 보류한 상태. 그렇게 조금 진정되려나 했는데.
“그런데 저 메인 보컬이 하고 싶어요.”
우리의 참지 않는 도한이 직격탄을 날리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