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준해가 아까 어물어물하던 것을 봐선 내가 물어봤기에 어쩔 수 없이 대답한 것 같았다.
옆에 있던 멤버들도 처음 듣는 얘기였는지 입을 떡 벌렸다.
“형들이…… 부끄러워?”
“아,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상처받기 직전인 우형의 반응에 준해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난 졸업하는 게 목표인데 연예인인 걸 밝혀서 뭐 해. 괜히 주변 시선만 모여들 것 같고 그래서.”
“동기들이랑 평소에 일상 얘기 하지 않아?”
“그냥…… 그냥 대충 넘겼지.”
해랑도 4년 동안 숨겼다는 사실이 의아했는지 조금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하는 준해를 보고 재민이 충격이라도 받은 표정으로 입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준해…… 혹시 아싸야?”
“준해가 아싸라고?!”
그 말에 그룹 최고 인싸인 한이가 덩달아 충격을 받았다.
“아니, 아싸까지는……. 나도 과 친구는 있어. 그냥 학년이 다 갈렸을 뿐이지.”
준해는 몰려드는 관심이 부담스러운 듯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도 멤버들은 준해가 친구들과 잘 지내지 못하는 거면 어떡하냐는 듯이 안절부절못했다.
……이런 모습을 예상해서 굳이 말을 안 한 걸지도.
“그런데 어떻게 동명이인이란 말을 다들 믿었지? 생얼이어도 연예인 티가 나지 않아? 이목구비를 보면.”
멤버들이 자신이 준해의 부모님이라도 되는 듯이 호들갑을 떠는 사이에 나는 준해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봤다.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 가. 일반인 사이에 있으면 조금이라도 티가 날 텐데.
특히 이런 동글동글한 예쁜 눈은 연예계가 아니면 좀처럼 보기 힘든 눈이다.
내가 멤버들한테 정이 들어서 예쁘게 보인다는 주접이 아니고, 내가 뉴마에 처음 왔을 때도 준해는 ‘눈이 동그랗고 예쁜 멤버’로 기억했었으니까.
“아! 준해 등교할 때마다 안경 쓰고 다녀요.”
내 의문에 대답하듯이 재민이 떠오르는 것을 말했다.
그러자 다른 멤버들도 “아아.” 하면서 납득하는 표정.
“안경을 쓴다고 사람들이 못 알아봐?”
무슨 영화나 만화도 아니고 안경 하나로 뚝딱 변장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너 안경 가지고 다니지 않아?”
“으응. 가방에 있을걸?”
학교에 갈 때마다 쓰고 다니기 위함인지 준해가 평소에 들고 다니는 가방에는 안경이 항상 들어있다고 한다.
직접 보는 게 빠르다는 듯이 가방을 뒤져 안경을 꺼낸 준해. 곧바로 나는 그 안경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뭐야, 이 안경은……?”
저번 잡지에서 오피스룩 화보를 촬영할 때 준해가 그랬던가. 자기는 안경이 안 어울린다고.
어울릴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피하기에 대신 해랑과 재민에게 씌웠었는데.
‘이런 걸 쓰니까 안 어울리지!’
안경테가 엄청 두꺼운 건 둘째 치고, 렌즈 도수가 그리 높은 것 같지도 않은데 이 얼굴 왜곡은 어떻게 가능한 거지?
평소엔 여기에 모자까지 쓰고 다닌다며 해랑은 본인이 쓰고 있던 볼캡을 준해 머리 위에 얹었다.
모자와 안경으로 무장한 준해는 대충 보면 그냥 평범한 대학생 그 자체였다.
“왜, 왜 그러고 다닌 거야?”
“이게 편해서요.”
모자와 안경을 다시 벗자 평소의 준해, 아이돌 준해로 돌아왔다.
“너 무슨 순정만화 주인공이니……?”
이거 만화에서 본 것 같은데. 평범해서 존재감 없던 학생이 안경을 벗자 샤랄라해지는 장면.
아니, 멀리 갈 것 없이 얼마 전에도 봤잖아? 한이에게 들어온 웹드라마 대본에서 남주가 바로 이런 캐릭터였다.
만화 같은 내용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바로 옆에서 현실로 펼쳐지고 있었다니.
준해는 내가 놀라는 것을 보고 머쓱하게 웃었다.
“그런데 사실 생각보다 물어보는 사람 별로 없었어요. 이제는 또 고학년이기도 하고.”
하긴 몇 년이나 멀쩡히 학교 다니던 선배가 입학 전부터 아이돌이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주변에서도 별 반응 없으면 닮은 사람인가 보다 하고 넘어가겠지.
번화가에 유명 연예인이 떡하니 서 있어도 주변에 그를 알아보거나 모여드는 사람이 없으면 ‘아닌가 보다.’ 하게 되는 게 사람 마음이니까.
‘……전에 모노크롬이 공항에서 일반인으로 오해받았던 게 그 상황 아니야?’
아무튼 지금까지는 여느 학생들과 다르게 별다른 시선을 받지 않고 정말 공부에만 집중해왔던 듯한데.
“지금까지 잘 숨겼는데 축제에 모노크롬으로 출연해도 괜찮겠어?”
“숨긴 건 그냥 대학 생활 편하게 하려고 그랬던 거고요. 근데 메이크업도 할 텐데 설마 알아볼까요? 지금까지도 다들 아닌가 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강의 들으러 다니는 거랑 학생들 앞에서 공연하는 건 주목도가 다르니까 어쩌면 알아보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너는 졸업할 때까지 숨기고 싶어?”
준해는 형들이 부끄럽냐며 상처 입은 제스처를 하던 우형을 힐끔 쳐다봤다.
“축제 끝나고 한두 달 있으면 종강이고, 그다음엔 바로 졸업이라 알려지는 건 크게 상관없어요. 이후에 같은 과 사람들 보기가 조금 민망할 뿐…….”
4년 동안 아니라고 했다가 마지막에야 사실은 맞다고 밝히려면 민망하긴 하겠지.
‘이거, 준해 혼자 의도치 않게 4년간에 걸친 깜짝 카메라 빌드업을 해둔 거잖아?’
쉽게 만들어지는 상황이 아닌데, 준해가 괜찮다면 이 기회를 놓치기는 아깝지 않을까?
기왕 숨겼던 신분을 드러내는 김에 좀 더 극적으로 연출해 보면…….
자체 컨텐츠에 중독된 내 머리가 또다시 핑핑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럼 우리 본격적으로 재밌는 걸 해 보자.”
그 누구도 하지 못할 특별한 리얼리티 컨텐츠. ‘낮에는 평범한 대학생인 내가 사실은 아이돌?’ 같은 것 말이다.
***
“너 진짜 축제 구경 하나도 안 하고 갈 거야?”
“나 인턴 중이라니까. 회사 가봐야 해.”
“그런 것치고는 오늘도 과제에 필요하다니까 군말 없이 나오고. 어느 회사가 그렇게 자유롭냐? 어디 아는 사람 회사 들어간 거 아냐?”
동기의 말에 준해는 내심 찔렸다.
그 말 그대로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는 사람 회사라기보단 원래 소속되어 있던 회사였을 뿐.
취업계는 활동 시기에 출석을 빼기 위한 것이었고 모든 강의를 결석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게다가 시험과 과제는 빼기가 어려웠기에 이렇게 학교에 나와 있을 때가 있었다.
애초에 치밀하게 속이려고 했던 게 아니라 적당히 넘어가려던 게 어쩌다 보니 길어진 것이라 이렇게 변명이 턱턱 막히곤 했다.
이번에 복학한 동기는 준해를 붙잡고 늘어졌다.
“아, 제발-. 나 혼자 다니기 싫다고오.”
“과에서 카페 부스 한다며? 과 사람들 다 거기 모여 있을 텐데.”
“다 후밴데 나 혼자 거기 있어서 뭐 하냐. 누구 올 때까지만이라도 같이 있어 줘.”
멤버들에게 아싸는 아니라고 했지만, 축제는 물론이고 빠질 수 있는 단체 행사는 거의 불참해 왔던 준해. 들쭉날쭉했던 스케줄 탓에 자체휴강하는 일도 꽤 있었고 다른 학생들과 친근하게 지내지는 못했다.
그런데 마지막 학기에 갑자기 학과 축제 부스에 얼굴을 비치는 것도 어색한 일이었다.
‘마지막 학기…….’
졸업만 생각하면서 학교를 다녀와서 대학생다운 대학 생활을 하지 못했던 건 사실이다.
앞으로 더 다녀야 한다면 모르겠지만 이번이 마지막 학기.
동기의 애처로운 눈빛을 무시하기도 조금 그랬고, 무엇보다 마지막이란 것은 사람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법이었다.
회사로 가야 하는 건 맞지만 시간은 조금 여유가 있었다.
“나 어차피 오래 있지는 못해.”
“괜찮아, 괜찮아.”
그렇게 동기에게 끌려서 학교를 한 바퀴 돌았으나 아직 준비 중인 곳이 많아서 구경할 만한 곳은 많지 않았다.
결국 도착한 곳은 그나마 아는 얼굴들이 많은 학과 부스였다.
동기는 마침 친분 있는 후배들이 있었는지 인사를 나누는 와중, 옆에 있는 준해에게 먼저 말을 거는 후배가 있었다.
“선배는 축제에서 뵈는 거 처음인 것 같아요.”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부과대를 맡은 후배였다.
일견 반기는 것 같지만, 한 번도 안 보이다가 웬일로 나타났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얘는 왠지 얼마 전부터 날 저렇게 보는 것 같아.’
나름대로 눈치로 굴러가는 연예계 경력도 있고 작년까진 회사에서 눈칫밥 먹으면서 지내온 준해였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는 얼추 구분할 수 있었다.
학과 인원이 많은 편이라 행사에 몇 명이 불참한다고 피해가 가는 건 아니었기에 준해 같은 부류의 학생들도 꽤 있었다.
그런데 부과대는 자신에게 특히 이런 날 선 반응을 보이곤 했다.
‘내가 뭐 했나? 딱히 마주친 적도 없었던 것 같은데.’
준해가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부과대 후배가 준해에게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건 아주 개인적이고 유치할 수 있는 이유였으니까.
‘또 대놓고 명품 두르고 온 것 봐.’
부과대는 인정욕구가 강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과 학생회에 들어가 부과대를 맡은 것이었고, 학과 사람들을 항상 주시하고 있었다.
준해는 처음엔 존재감 없는 선배1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를 예의주시하게 된 모종의 사건이 있었다.
시작은 학생회실에서 여학우들의 대화 내용을 들은 것.
[그거 교양 들을 만해? 현대음악의 이해?]
[난 가요 얘기하는 줄 알았는데 그냥 음악사야. 별로 재미없어.]
[어쩐지 다 드롭하더라. 우리 과 사람 없지 않아?]
[아니, 한 명 있었어. 그…… 현준해 선배?]
[그 엄청 두꺼운 안경 쓰고 다니는 선배 맞나?]
여기까지는 별로 신경 쓰일 것 없는 대화였다. 그러나 그중 한 명이 꺼내는 얘기엔 저절로 귀가 기울여졌다.
[이상하게 들릴까 봐 말 안 했는데…… 그 선배 잘 보면 은근 잘생겼다?]
[야아. 얼굴을 언제 그렇게 자세히 뜯어봤어?]
[잘 들어봐. 정면에서 보면 모르겠거든? 근데 언제 한번 옆에서 본 적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인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그녀가 이렇게 진지하게 말하는 것도 당연했다. 옆에서 보면 얼굴이 반밖에 보이지 않지만 안경에 의한 얼굴 왜곡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같이 듣는 친구들은 까르르 웃으며 재밌는 이야기로 넘겼다.
부과대도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로 치부하고 넘어갔는데, 이상하게 그때부터 준해가 시선에 걸렸다.
‘전엔 분명 눈에 안 띄었는데.’
왜인지 이 시점부터 준해가 보란 듯이 명품을 두르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준해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회사에서 구입한 옷이 옷장에 많이 들어오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입었을 뿐.
그 이후로도 ‘전엔 몰랐는데 그 선배 은근히 멀끔하고 스타일 좋더라.’라는 말을 한두 번 듣게 되니 부과대의 마음속엔 불만이 삐죽 튀어나왔다.
적극적으로 나서는 자신보다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이 관심을 더 많이 받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웃는 얼굴을 유지하면서도 은근슬쩍 준해를 배척하듯이 말했다.
“저희가 어떤 거 하는지 잘 모르실 테니까, 준비 도와주실 거면 뒤쪽 청소만 좀 부탁드릴게요.”
“아, 아니. 나 조금 있으면 가 봐야 하는데…….”
“에이. 설마 그냥 놀다만 가실 거예요?”
놀러 온 게 아니라 끌려온 것이었다. 준해는 도움을 구하듯이 동기를 찾았지만, 같이 어울려달라며 붙잡고 늘어졌던 동기는 이미 몇몇 후배들 사이에 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괜히 왔나. 이 정도면 나는 슬슬 가 봐도 될 것 같은데 어떻게 빠져나가지.
그런 생각으로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준해 뒤에서 도움의 손길이 뻗어 나왔다.
“준해.”
“응? 형, 왜 여기 있어?”
자신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감각에 뒤를 돌아보니 그곳엔 아는 얼굴이 있었다.
모자에 마스크까지 끼고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키만 봐도 해랑임을 알 수 있었다.
한눈에 봐도 비율이 남다른 존재가 등장하자 이쪽으로 시선이 몰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