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화
“있지……. 언니는 한이 오빠가 잘생겼다고 생각해?”
“으, 응?”
도아는 시연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다.
‘왜 이런 걸 묻지?’
한이와는 함께 촬영할 때 외에는 별로 엮인 적도 없었다. 아이에게 이런 질문을 받을 정도로 자신이 이상한 태도를 보였던가?
도아에게 그런 기억은 없었다. 자신은 내내 프로다운 태도를 고수했을 터였다.
연예인이어서 남들에게 뭔가가 이상하게 보였던 게 아닐지 걱정부터 들었는데, 시연은 정말 단순하게 궁금해서 질문한 것뿐이었다.
“난 준해 오빠가 더 잘생겼다고 생각하는데. 준해 오빠는 잘생긴 것보단 귀엽다는 거야. 잘생긴 건 자기가 더 잘생겼대.”
“준해 오빠?”
일단 배우나 스태프 중에 준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시연과 한이가 공통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아마 이전에 커피차가 왔을 때 시연과 붙어 있던 다른 멤버를 말하는 듯했다.
그가 어떻게 생겼던가. 크게 관심이 없었던 도아는 준해의 얼굴을 떠올리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정확히 떠오른 것도 아니고, 대충 동그란 인상이었던 것만 기억이 났다.
그나저나 시연과 한이가 빠르게 친해졌다 싶었는데 둘이 있을 땐 그런 유치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니. 도아는 속으로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언니는 잘 모르겠는데…….”
도아는 어른스러운 사람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타입이었으므로 한이의 얼굴에 관해선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얼굴이 배우상에 가까워서 연기할 때 아이돌 티가 크게 나지 않는다, 정도?
큰 기대가 없어서 그런지 연기는 의외로 잘하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주인공 캐릭터가 한이의 평소 모습과 비슷했으니 캐릭터를 잘 잡은 덕분일지도.
“으음. 이사님이 사람마다 취향은 다 다른 거니까 존중해야 한대.”
“취향…….”
이사라면 자신도 속해있는 뉴마 엔터테인먼트의 이사를 말하는 듯했다. 여러모로 회사를 재편하면서 새로 부임해서 아티스트 팀을 전담한다는 사람.
도아는 그게 아이에게 괜찮은 말인가 고민했다. 취향 존중이 필요한 세상이니 못 할 말은 또 아닌 것 같고.
“누가 잘생기지 않았다고 한다고 시연이 눈에도 안 잘생기게 보이는 건 아니잖아? 시연이한테는 시연이 기준이 맞는 거지.”
아까의 ‘나는 잘 모르겠다’를 좀 더 그럴듯하게 늘인 말이었지만 시연은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남의 얼굴을 얘기하며 이렇게 진지한 대화를 하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연이 이해했다면 충분했다.
그런데 그 대화 이후로 어쩐지 한이의 얼굴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얼굴에 그렇게나 자신이 있다고 하니까 시선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하는 것도 당연했다.
시각적인 요소가 중요한 영상 창작물에서 눈길을 확 끌 만한 매력은 중요하다. 그래서 요즘 아이돌 배우가 많이 활약하는 거겠지.
‘내가 캐릭터에 몰입하는 게 아니라 너무 분석하기만 하나?’
지금까지 계속 여주가 마음이 끌릴 만한 남주의 매력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가 아이돌 배우로서 수준이 적당한지를 따지지 않았던가.
카메라 앞에서만큼은 상대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처럼 감성적으로 몰입할 줄 알아야 한다는데.
이번에 로맨스 주연에 도전한 것은 기존의 작품들에서 맡아왔던 딱딱한 캐릭터를 탈피하기 위해서였다.
그 어느 때보다 감정적인 연기를 펼쳐야 할 텐데 이렇게 머리로 분석한다고 잘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몰입하자. 몰입.’
그 배우는 멜로 연기 할 때도 표정이 딱딱해서 안 어울리더라, 라는 평은 듣고 싶지 않았으니까.
앞으로 로맨스물을 계속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로맨스가 아닌 다른 장르에서도 주요 등장인물에 가까울수록 로맨스 라인 정도는 자주 등장했다. 그러니 멜로 연기 공부는 확실히 필요했다.
촬영이 진전되면서 여주의 감정도 깊어지니 이제부터가 정말 중요했다.
오늘 촬영 신은 여주가 가진 남주의 이미지가 바뀌는 계기가 되는 장면이었다.
***
“안녕하세요. 하늘이 데리러 왔는……. 꺅!”
“욘석! 도망가지 말고……. 아이고, 보호자님. 괜찮으세요?”
여주인공 서은은 조카 하늘을 데리러 학원에 올 때마다 이런 상황을 자주 마주했다.
남자아이들은 뛰어다니고, 이곳의 선생이라는 현민도 같이 뛰어다녔다.
오늘도 원생 한 명이 왜인지 실내에서 보드를 타다가 막 들어온 서은과 부딪힐 뻔했다.
아이를 잡으러 쫓아다니던 현민이 그녀에게 대신 사과했다.
“하늘이 곧 수업 끝나니까 잠시만 앉아서 기다리고 계세요.”
“네, 네…….”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옆구리에 낀 현민이 그 말을 남기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휴. 하늘이를 이런 시끌벅적한 데에 둬도 되려나.”
사실 여주 서은이 남주 현민에게 가지는 이미지도, 도아가 한이를 보며 하는 생각과 비슷했다.
아이를 좋아하는 덕분에 조카의 귀가 시간이 늦었을 때도 놀아줘서 고마운데, 너무 해맑아서 잘 안 맞는 사람. 약간 눈치 없어 보이기도 하고.
그래도 그런 성격 때문인지 일곱 살 조카와는 잘 지내는 듯했다.
자신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든 자신과 그는 크게 관련이 없는 사람이니까, 조카와만 잘 지낸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녀는 항상 다른 사람과 이런 식으로 적당히 선을 긋는 것이 익숙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안녕하세요. 하늘이 데리러 왔는데…….”
“어. 벌써 오셨어요?”
‘벌써’라는 말에 서은은 뜨끔했다. 조카 하늘의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딱 맞춰 찾아온 것이었는데 빠르게 왔다고 느낄 정도로 평소엔 늦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학원엔 야간 직장인반 수강생 한 명 외엔 현민뿐이라 조용했다.
“김 쌤이 편의점 다녀온다고, 하늘이도 같이 산책하자고 잠깐 데리고 나갔거든요. 잠시만 기다리시면 금방 올 거예요.”
“네…….”
학원에 남아 있는 선생님 두 명에 하늘까지. 모두 당연히 서은이 오늘도 늦으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서은은 민망한 얼굴로 학원 소파에 앉아 조카를 기다리기로 한다.
현민도 안쪽으로 들어가서 조용해진 실내에 피아노 소리가 흐르기 시작했다.
“피아노……. 정말 피아노 학원이구나.”
지금은 사회생활에 치여 잊은 지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서은은 어릴 때 피아노를 좋아했었다.
본가에 잠시 맡겨진 조카를 피아노 학원에 보내기 시작한 것은 서은의 엄마였다.
아마 어릴 때의 서은을 떠올리고 피아노를 배우게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 조금 애틋해졌다.
피아노 소리에 마음이 차분해진 서은은 좋아하는 연주곡에 이끌려 슬며시 일어나 학원 내부를 구경하기로 했다.
조카가 몇 달을 다녔던 학원인데, 항상 급하게 와서 급하게 나가느라 이렇게 찬찬히 살펴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지금 이 곡은 현민이 연주하는 걸까? 아니면 수강생이 연주하는 걸까.
궁금한 마음에 피아노실의 문 쪽으로 슬쩍 다가갔는데 현민이 느닷없이 벌컥 문을 열고 나온다.
“어어?!”
갑자기 사람이 나올 줄 몰랐던 서은도, 바로 문 앞에 사람이 있을 줄 몰랐던 현민도 깜짝 놀란다.
서은은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 중심을 잃고 휘청인다.
그러다 넘어지기 직전에, 현민이 한쪽 팔로는 그녀의 팔을, 다른 팔로는 허리를 지탱하며 붙잡아 세운다.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게 된 두 사람.
여주는 남주와 시선을 마주치고 가까워진 얼굴에 자기도 모르게 스르르 눈을 감…….
‘아니. 눈 감는 신이 아닌데?!’
대본에 없는 행동을 하다가 정신을 차린 도아는 눈을 번쩍 떴다.
NG가 날 뻔한 상황이었는데.
“고모?”
마침 등장해야 하는 시연이 타이밍 맞게 잘 나타났다.
“어, 어어. 하늘아. 산책 잘 다녀왔어?”
“응!”
지금부터는 다시 대본대로였다. 여주는 당황해서 후다닥 떨어져 어색하게 조카를 반긴다.
“컷!”
다행히 감독이 내뱉은 것은 NG 사인이 아니라 컷 사인.
“도아 씨. 지금 표정 아주 좋았어.”
“그, 그런가요?”
자신도 모르게 대본에서 벗어나 이상한 표정을 지었을까 봐 걱정됐는데 감독은 지금이 딱 좋았다며 칭찬했다.
사실 감독은 도아가 제대로 감정 연기에 들어가면 잘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도아의 차가운 분위기 탓이었다.
‘사회생활에 지친 여주’를 표현하기엔 적당할지 몰라도, 후반부에 나오는 여주의 설레는 감정을 잘 표현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겠어.’
감독이 후반부 촬영에서도 지금 그대로 유지해달라며 칭찬하자 도아도 안심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뭐였지. 그 눈빛?’
방금까지만 해도 멜로 연기에 영 소질이 없는 게 아닐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 고민도 잊고 순간적으로 몰입하게 만들었던 그 눈빛.
공부를 위해 유명한 로맨스 드라마를 봐도 어느 부분에서 설레는 건지 감정선이 잘 이해가 안 되었는데 지금은 뭐가 달랐던 걸까.
‘……설마 연기 실력으로 상대까지 몰입하게 만들었다고? 눈 마주친 게 전부였는데?’
대사를 주고받은 것도 아니고, 문을 열고 넘어지려는 것을 잡아주는 아주 짧은 장면이었다.
지금까지 한이에게 그런 연기 실력이 있을 것이란 생각을 안 했기에 그 몇 초의 연기가 더욱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럼 오늘은 이제 퇴근인가요?”
“음. 다시 찍어야 할 건 없고. 다들 오늘 촬영은 여기서 마무리합시다!”
“와! 수고하셨습니다! 시연 선배도 집에 갈 거지? 내일 아침부터 촬영이니까 몇 시간 후면 또 보겠네-.”
한이는 또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가 발랄하게 퇴근을 맞이했다.
그런 모습을 보니 더욱 그의 연기 실력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도아는 촬영이 끝나고 집에 도착해서도 계속 오늘의 연기 경험을 머릿속으로 되풀이했다.
‘연기할 때와 평소 모습이 사실 많이 다른가?’
촬영 중일 때도 촬영하지 않을 때도 아이와 함께 있는 모습만 많이 봐서 몰랐는데, 일대일로 마주했을 땐 확실히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다.
학구열에 불타오른 도아는 그게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스마트폰으로 한이의 이름을 검색했다. 그러자 한이가 라솔의 노래를 커버한 영상이 검색 결과에 걸려 나왔다.
아이돌 노래는 즐겨 듣지 않지만 라솔의 노래는 좋아했던 도아는 자연스레 영상의 섬네일을 눌렀다.
‘아니, 이 얼굴로 노래까지 불러……?’
촬영장에서도 가끔 흥얼거리는 것을 보긴 했는데, 지금까진 ‘역시 아이돌이군’이란 생각밖에 안 했던 도아였다.
아이돌이니 노래를 부르는 건 당연하겠지만 관심을 가지고 이런 영상을 보니 뭔가 달라 보였다.
[크아,, 멜로눈빛에 취한다,, 알콜 도수로 치자면 한 보드카쯤. 알쓰도 만취하게 만드는 당신은 도대체]
[여기가 그 기억조작 장인이 있다는 곳인가요?]
[지금부터 내 첫사랑 상대 한이로 바뀜. 몰라 그냥 내 첫사랑임]
화면을 아래로 내리니 팬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이런 내용의 댓글을 많이 달아놓았다.
‘기억조작은 또 뭐야?’
자신이 느꼈던 무언가에 대한 실마리인가 싶어서 도아는 자연스럽게 다음 영상을 재생했다.
컬러즈에겐 부족하기만 한 컨텐츠 양이었지만, 아이돌을 잘 모르는 그녀에겐 정보의 바다였다.
추천 영상으로는 팬들이 잘 정리한 편집 영상까지 줄줄이 걸려 나왔다.
‘……춤도 춰? 팬서비스까지 해?’
모노크롬은 개인 활동이 전혀 없다시피 했기에 대부분이 단체로 등장하는 영상들이었다.
한이는 멤버들 사이에 있을 땐 또 다른 느낌이었고, 멤버들 역시 회사에서 봤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신세계를 영접한 도아는 자기도 모르게 다음, 또 다음 영상을 재생했다.
새 연기 장르에 제대로 한 발짝을 내디딘 날. 그리고 동시에 입덕의 시작이 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