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한이의 오늘 촬영 장소도 역시나 피아노 학원이었다. 몇 번이나 같은 장소, 같은 동네를 오가며 촬영을 진행했더니 이제는 자기 동네처럼 친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가끔 들렀던 촬영 장소 근처 편의점 직원은 처음엔 한이를 못 알아보는 것 같더니, 몇 번을 더 마주치자 “아이돌 맞으시죠?” 하며 물어보기도 했다.
촬영 스태프들도 자주 들렀던 탓에 근처에서 뭔가 촬영한다는 건 아는데, 일반인 같지 않은 얼굴이라 배우겠거니 싶어서 슬쩍 알아본 모양이었다.
딱히 비밀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이돌 누구가 요즘 어디서 촬영 중이더라’ 하는 말이 돌아도 좋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한이는 손에 검지를 대고 “쉿.” 하며 비밀 요정을 자처했다. “실물로 봤는데 엄청 잘생겼다고 나중에 소문내 주세요.” 하는 멘트를 덧붙이며.
그렇게 주변 상인들과도 얼굴을 익힐 정도로 여러 날 이어진 촬영은 벌써 중반부를 넘어서고 있었다.
오늘은 특별히, 대사 연기 외에도 남자주인공이 단독으로 피아노를 치는 신이 있었다.
항상 자신감이 넘치던 한이였지만 이번엔 자신이 없는 말투로 감독에게 말했다.
“제가 정말 어릴 때 배우고 안 친 지가 오래돼서 손이 많이 굳었을 텐데, 진짜로 괜찮을까요?”
“괜찮아, 괜찮아. 게다가 전에 잠깐 치는 거 보니까 그 정도면 잘 치던데.”
이전에 주인이 했던 말대로 피아노 치는 장면은 대역으로 대체하나 했는데, 실제로 촬영을 진행해 보니 생각보다 남주가 피아노를 치는 장면이 많지 않았다.
아이들도 다니는 학원이라는 설정이라 남주는 아이들을 챙겨주며 함께 놀아주는 장면이 대부분. 따지자면 유치원 선생님에 가까웠다.
지금까지는 피아노 치는 장면이라고 해 봤자 원생을 가르치며 옆에서 멜로디를 간단히 쳐 주는 정도.
굳이 이런 짧은 장면을 위해 손이 비슷한 대역을 구하는 것도 시간 낭비, 인력 낭비이긴 했다.
아예 피아노를 쳐 본 적 없는 사람도 연기를 위해 미리 배우고 온다는데, 아예 못 치는 건 아닌 자신이 못 한다고 빼기도 어려웠고. 그 누구보다 열정을 보여줘야 할 신인 배우 아니던가.
“손 클로즈업은 몇 초 안 들어가고, 피아노 소리는 현장음을 그대로 내보내는 것보단 따로 녹음한 음원으로 까는 게 소리가 깔끔해서 편집으로 들어갈 테니까, 일단 한이 씨는 얼굴만 멋있으면 돼.”
“아. 그럼 문제없겠네요.”
방금까진 자신 없어 하더니 이젠 또 능청맞게 자신을 보이는 한이의 태도에 감독이 웃었다.
“잘 나오게 연습 좀 하고 있어야겠어요.”
“그래, 그래. 저기 피아노 개인실 비었던데.”
피아노 학원 내부 촬영을 위해 준비된 장소는 실제로 운영하는 학원을 빌린 게 아니라 따로 마련한 세트장이었다.
그래서 촬영이 진행되지 않을 땐 대기실처럼 사용되기도 하여 출입이 자유로웠다.
“후우.”
비어 있는 개인실의 피아노 앞에 앉은 한이가 한숨을 쉬었다.
웃으며 대화를 나누기는 했는데 조금 부담으로 와닿는 것은 사실이었다.
기왕 할 거면 남들이 뭐라고 하지 못하도록 잘하자. 잘하지 못한다면 아예 안 하는 게 낫다.
그런 생각으로 살아왔던 한이는 자기 자신에 대해 기준이 높았다. 특히나 이런 음악적인 부분에선.
처음 보컬의 길로 들어서며 빨리 잘 해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해했던 과거의 자신이 떠올랐다.
그나마 지금은 실력이 안정된 덕분에 많이 여유가 생겼지만.
‘피아노 제대로 치는 건 정말로 오랜만인데.’
건반을 두드리고 있으니 어느새 시연이 들어왔는지 작은 발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시연은 꼭 이번 배역 때문만은 아니고 원래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다며 대기 시간에 지금 한이처럼 피아노를 치기도 했다.
오늘은 한이가 먼저 자리 잡고 연습 중인 것을 보고 옆에 앉아 그 모습을 구경했다.
“오빠는 피아노 배운 거야?”
“되게 어렸을 때 배웠지.”
“그럼 지금은 안 쳐?”
자신의 관심사여서 그런지 시연은 평소보다 질문이 많았다.
“난 피아노보다 노래를 더 잘하거든. 선배, 내가 노래 부르는 거 들어 본 적 있어?”
“응. 드라마 OST.”
이번 웹드라마 메인 테마곡도 한이가 부를 예정이지만 아직 정식 발매되지 않았으니, 시연이 들었다는 것은 <매일 아침 만나요>의 OST였다.
한이의 이름을 달고 나온 유일한 음원이라 그것을 들은 모양이었다.
역시 모노크롬 노래는 아닌가 했는데 시연은 말을 더 이어나갔다.
“그리고 오빠들 방송에서 노래하는 것도 봤어. 그, 모노, 모노랑 컬러즈랑…….”
의외로 시연은 올해 나온 모노크롬의 타이틀곡 무대들을 전부 다 봤다고 했다.
관심을 가지고 봐줬다는 게 고마워서 한이는 웃으며 장난스레 물었다.
“준해 보려고 본 건 아니지?”
그 질문에 시연은 말없이 배시시 웃기만 했다. 역시 최애는 강력했던 걸까.
그러나 이렇게 귀엽게 웃어넘기는데 자신이 뭐라고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우리 얼마 후에 또 앨범 나올 건데 그것도 들어줄 거야?”
“노래 앨범?”
“응. 촬영 안 하는 날은 회사에 다 같이 모여서 앨범 만들거든.”
배우 회사에선 하지 않는 일이라 시연은 잘 모를 테니, 한이는 앨범을 만들려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설명했다.
“노래도 만들고, 가사도 쓰고. 뮤직비디오도 드라마처럼 어떤 내용으로 만들지 서로 얘기하고. 그것 때문에 바빠서 매일은 못 와.”
시연은 자신보다 촬영 일수가 적은 한이에게 종종 내일은 촬영하러 오냐, 안 오냐 물어보기도 했다.
아이돌과 배우를 겸직한다는 게 시연에겐 어떤 느낌인지 와 닿지 않을 것 같아서 촬영하러 오지 않는 날엔 그런 일을 하느라 바쁘다고 말했다.
“그럼 이사님은 거기서 무슨 일 해?”
“우리 회사 이사님?”
“응.”
주인이 무슨 일을 하냐는 질문에 한이는 잠시 고민해야 했다.
“글쎄…… 여러 가지 하시는데.”
무슨 일을 담당한다고 설명해야 할까. 현재 주인은 모노크롬에 관련된 모든 일을 총괄하고 있었다.
프로듀스 팀의 책임자이면서 아티스트 매니지먼트 팀의 책임자.
대부분의 일정을 계획하고, 앨범 기획에도 참여하고, 비주얼 디렉터…… 정도의 전문적인 범위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본 컨셉은 그녀가 잡기도 했다.
특히나 멤버들에게 어울릴 만한 스타일을 귀신같이 잘 찾아낸다고 스타일리스트가 말한 적이 있었다.
이 모든 일을 혼자서 손수 다 하는 건 아니고, 지시하고 지원하면서 일을 진행하는 사람. 정말 총괄 프로듀서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친분 관계가 넓은 한이에겐 아이돌 친구도 많았고 그들에게서 회사 이야기도 가끔 전해 들었다. 그러니 뉴마가 다른 회사와 많이 다른 방식으로 굴러가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다.
‘애초에 지금은 회사 구조가 좀 독특하니까.’
이전엔 여러 직원을 통해 진행되던 일들이었는데, 아티스트 관련 인원이 대폭 줄어들면서 딱 그만큼을 주인이 커버하고 있었다.
그녀가 한다고 하면 그때부터 모든 일이 시작되는 게 현재 뉴마의 업무 스타일.
이것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마치…… 게임처럼.’
소속사라는 존재가 사람으로 바뀐다면 이렇지 않을까.
물론 기분이 그렇단 것뿐이지,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리는 없었다.
작년까진 상상도 못 해 본 일들이 많이 일어나서 가끔 현실감이 없게 느껴진 탓에 그런 황당한 상상도 해봤을 뿐.
‘윤희 누나가 그랬었지. 컬러즈들이 ‘주인님’을 부르면서 소원을 빈다고.’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땐 자신이 말실수한 것 때문에 그 호칭이 퍼져버렸단 생각에 뜨끔했는데, 요즘은 컬러즈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신기하게도 이게 되려나 싶은 일도 정말 그녀의 의지대로 굴러가곤 했다.
갑자기 모노크롬이 글로벌 차트 1위를 차지하는 등의 비현실적인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그녀가 하려 하고 모노크롬이 바라는 방향으로 차근차근 나아가고 있었다.
이것들을 종합해 보자면…….
“토템…… 역할을 하시나?”
“그게 뭐야?”
“으음. 소원 들어주는 사람 같은 거? 이사님도 그렇고, 사장님이 되면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니까.”
많은 회사가 ‘꿈을 이뤄주는 회사’라는 캐치프레이즈로 회사를 소개하곤 했다.
소속된 사람들의 꿈과 소원을 들어주는 게 가장 이상적인 사장의 모습이 아닐까.
회사를 운영한다는 건 기업의 이익 또한 생각해야 하는 일이니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더라도 말이다.
사장을 꿈꾸는 아이에겐 현실적인 이야기보단 그런 이상적인 모습을 제시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았다.
한이의 이야기를 들은 시연은 이해했다는 뜻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다리를 같이 흔들거렸다.
“우리 사장님도 그래.”
“사장님이 소원 들어주셨어?”
“예전에 같이 연기하고 싶은 사람 있다고 했는데 진짜로 시켜줬어.”
“좋은 사장님이시네.”
좋은 사장님을 만난 덕에 현재 시연의 꿈이 사장으로 정착한 듯했다.
특히나 아역 배우인 시연이 좋은 회사에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6년 차 아이돌이 된 지금까지 한이는 자신을 포함하여 많은 케이스를 봐오며 깨달았다. 연예계엔 정말 안 좋은 방향으로 다양한 회사가 있다는 것을.
“선배는 그럼 나중에 아이돌 회사도 같이 할 거야?”
주인이 하는 일에 관해 물어보는 것을 보면 기존의 ‘배우 회사 사장’을 넘어서서 ‘더 큰 기획사 사장’으로 꿈이 바뀐 것일까.
궁금해서 물어보니 시연은 또 수줍게 웃어넘겼다. 아까 준해 얘기를 했을 때와 같은 반응이었다.
‘……설마 더 큰 회사 사장님이 되고 싶은 게, 이사님이 아니라 준해 때문이었나.’
시연이 주인에게 자신의 꿈은 사장님이라고 소개할 때, 분명 한이가 옆에서 말했었다.
‘난 아이돌이라 선배 회사엔 못 들어가겠네?’라고.
“나는 아이돌도 하고 배우도 하고 OST도 부르는데 더 대단해 보이지 않아?”
“으응…… 대단해.”
대단하다고 말은 했지만 누가 봐도 어쩔 수 없이 해주는 호응 같았다.
한이가 비주얼 얘기를 자주 꺼내긴 해도 멤버들을 얼굴로 이기려는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정말 준해에게 얼굴 하나로 모든 면에서 진 건가 싶어서 조금 시무룩한 기분은 들었다.
계속 이 이야기를 이어가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한이는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자. 나는 손 다 풀었으니까 이제 선배 차례.”
한이는 촬영에 쓰일 만큼의 분량만 악보를 외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서로 자리를 바꿔서 시연이 피아노 앞에 앉고 한이가 그 옆 의자에 앉아 구경했다.
같은 자리에 사람만 바뀌었을 뿐인데 시연이 앞에 앉자 피아노가 매우 거대해 보였다.
“계속 같은 곡 치던데 요즘 연습하는 거야?”
“응. 여기부터 여기까지 닿아야 한다고 했는데.”
시연이 건반 위에서 오른손을 쫙 폈다. 아직 손이 작아서 동시에 눌러야 하는 건반에 손가락이 간당간당 겨우 닿았다.
양손을 같이 칠 땐 한쪽에 신경 쓰느라 더욱 연주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그 말대로 계속 같은 곳에서 실수하자 불만스러운 듯이 시연의 입이 점점 삐쭉 나왔다. 귀여운 얼굴이었지만 본인은 매우 답답한 듯했다.
“사실 이거 나도 옛날에 배웠던 곡인데, 내가 도와줄까?”
“오빠가?”
빙글 돌아 시연의 옆에 붙어 앉은 한이는 검지를 세워 입에 대고는 눈으로 웃었다.
“다른 사람들한테 비밀인데, 내가 사실 피아노 요정이거든.”
***
시연의 엄마는 피아노 방 옆 다른 방에 앉아 다음 촬영 순서가 올 때까지 대기했다.
시연은 피아노 연습을 하겠다며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향했는데, 안에 이미 한이가 와 있었다. 보호자가 같이 있으면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 같이 있지 않고 옆방으로 온 것이었다.
둘이서 한참 대화를 나누는 것 같더니, 이내 벽 너머에서 시연의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시연이 항상 피아노로 연습하던 곡. 오늘도 항상 실수하는 부분에서 멈추고 다시 치기를 반복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실수하는 부분 없이 끝까지 연주해냈다.
잠시 후 촬영을 준비해야 해서 부르니 시연은 기쁜 표정으로 피아노 방에서 나왔다. 마음만큼 잘 쳐지지 않아 계속 끙끙 앓던 부분이 해결되어서 후련한 표정이었다.
“오늘은 컨디션이 좋은가 보네. 계속 연습해서 그런가, 이제 잘 치던데?”
“피아노 요정이 도와줬어.”
“피아노 요정?”
어릴 때부터 대본을 많이 봐서일까. 동화보다는 드라마 내용에 더 빠삭한 아이였는데, 무슨 일인지 동화 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들의 유치가 빠지면 이빨 요정이 다녀간다는 이야기처럼, 시연을 가르치던 피아노 선생님이 피아노 요정이 다녀가면 피아노를 잘 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를 해 준 걸까.
엄마의 궁금증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연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카메라 앞에 가서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