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화
모노크롬의 다음 앨범은 정규 앨범으로 예정 중이다. 무려 6년 차에 첫 정규 앨범.
원하던 게 하나씩 이루어지고 있던 컬러즈의 다음 소원은 ‘다음 앨범은 정규 앨범이었으면 좋겠다’였다.
‘그리고 이 소원을 또 허상의 주인님에게 빌고 있으니…….’
그 단어가 보일 때마다 내 시선은 저절로 그곳으로 향했다. 날 부르는 것 같지만 딱히 나를 부르는 건 아닌 그 호칭.
정말 ‘하나님’처럼 쓰고 있는지 이젠 ‘주님’이라고 줄여 쓰는 컬러즈도 있었다. 이렇게 점점 변질되다가 나중엔 그냥 ‘님아’ 하고 부를지도.
‘날 잘 모르는 상태로 아무렇게나 부른다는 건 알겠는데 자꾸 눈에 보이니까 압박받는 기분이란 말이지.’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역시 이름이란 것에는 특유의 힘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에 정규 앨범을 준비하는 것은 컬러즈가 소원을 빌어서가 아니라 이제 정말 낼 때가 되어서였다.
싱글이나 미니 앨범과 달리, 정규 앨범에는 대개 10곡 내외의 곡이 담긴다.
곡 수가 많다 보니 타이틀곡에 집중하기보다 앨범 자체로 아티스트의 색을 드러내고는 했다. 그래서 다른 앨범보다 조금 더 의미가 깊었다. 특히나 첫 정규 앨범이면.
‘그래서 이번에 표현해내야 할 모노크롬의 색이 무엇일까.’
모노크롬이라는 단어 자체는 ‘흑백’, 혹은 ‘단색조’를 뜻했다.
다만 모노크롬의 뜻을 그대로 사용하기보다는 한 단계 더 나아간 이미지를 전하고 싶었다.
앨범 기획에 앞서 하나의 키워드를 기준점으로 잡고, 컨셉도 거기서부터 뻗어 나갈 생각이었다.
나는 펜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에 빠졌다. 역시 모노크롬에서 뺄 수 없는 것은.
‘모노(mono)려나.’
흑백영화 느낌으로 연출했던 데뷔곡 처럼 그룹명과 이어지는 느낌이면 좋을 것 같아서 나는 열심히 검색에 나섰다.
모노(mono)가 붙은 단어는 많았다. 특히 ‘모노’ 자체도 용어로 쓰였다. 음향 재생 방식으로, 스테레오와 상대되는 개념.
이런 음향 관련은 우형에게 물어보는 게 빨랐으니 나는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노래를 아예 모노 버전으로 만들면 티가 별로 안 날 거예요. 같이 들어보면 차이가 있긴 한데.”
그러면서 우형은 작업실 컴퓨터로 한 파일을 열어 모노로 재생했을 때와 스테레오로 재생했을 때를 비교해서 들려줬다.
내 막귀로는 뚜렷하게 어떤 점이 다른지 잘 모르겠지만 소리가 조금 밋밋해진 느낌은 있었다.
“으음. 좀 일렁이는 게 없어진 느낌?”
“작업할 때, 입체감을 살리려고 소리 위치를 좌우로 조금씩 조정하거든요.”
“그럼 기본이 스테레오라는 거네? 모노 버전이면 그 입체감을 줄 수 없고?”
“네.”
‘모노’에 집중하다가 떠오른 것이었는데 그리 좋은 아이디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뭔가 바로 포기하기에는 아쉬워서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같은 아이디어를 다른 쪽으로 비틀었다.
“그럼 아예 극단적인 스테레오 버전으로 만들어 버리면?”
모노크롬의 팬덤명을 ‘컬러즈’로 지은 것이 그런 이유에서였다. 흑백과 색이 대비됨으로써 서로의 색이 더욱 뚜렷해지는 느낌.
모노와 스테레오도 비슷한 식으로 대비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좌우 소리가 많이 다르면 듣기에 피로할 수도 있는데…….”
이것도 별로 좋은 아이디어는 되지 못했나.
그런데 우형은 모니터에 시선을 두며 곰곰이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활용할 방법은 있을 것 같아요. 타이틀곡에 적용하려면 먼저 앨범 컨셉이 정해져야겠지만요.”
“그렇지.”
내가 말한 것은 앨범 컨셉에 관한 것이 아니라 기법에 가까웠으니 이것만 던져선 부족했다.
잘하면 활용이 가능하다는 사실 외에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고 대화를 마무리하려는데, 우형이 한마디를 더 했다.
“그런데 맞는 컨셉을 잘 찾으면, 실험적이고 재밌는 작업이 될 것 같아요.”
자신이 타이틀곡을 맡아도 되냐며 걱정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기대된다는 표정이었다. 더군다나 의욕 넘치는 표정.
나는 레벨이 올라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레벨이 오르면 스스로도 성장했다는 게 체감되는 걸까.
자신 없는 모습을 보면 과거부터 그가 겪어왔을 많은 일이 짐작되어 괜히 마음이 안 좋았는데.
작곡 레벨이 오른 후로 특기 분야에선 확실히 자신이 생긴 듯한 그의 모습에 나도 안심이 되었다.
***
뉴마 내에서 팀 미로의 단장인 민후와 로아를 마주치는 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매일 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안무가 겸 댄스 트레이너로서 정기적으로 일정을 잡아 찾아왔다.
그런데 오늘은 단장 부부가 재민과 모여서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재민까지 같이 나서서 고민에 빠져있길래 무슨 일이냐 물으니.
“방송 섭외 연락을 받아서 계속 고민해 봤는데, 아이돌 안무 쪽이라 아무래도 저희가 나가긴 어려울 것 같아요.”
“네에? 단장님들이 춤으로 뭐가 부족해서요……?”
“아뇨. 실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실력은 자신이 있다는 소리였다. 팀 미로의 수상 경력을 나열해도 종이 한 면을 가득 채울 정도니 객관적으로도 실력이 입증되긴 했다.
누가 봐도 실력이 대단하면 굳이 겸손이 필요하진 않지.
그나저나 왜 출연이 어렵다는 걸까. 팀 미로가 만든 모노크롬의 안무는 매우 만족스러웠는데.
“저희 팀은 대회가 있으면 맞춰서 퍼포먼스를 짜곤 하는데, 아이돌은 한 안무로 계속 활동을 하니까 난이도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가늠이 잘 안 되더라고요.”
“아이돌은 그 안무를 여러 번 반복해서 춰야 하잖아요? 노래도 부르면서. 게다가 어려운 동작 하다가 다치면 큰일 나고.”
로아가 덧붙여 설명에 나섰다.
말하자면 댄스팀 퍼포먼스와 아이돌 안무는 가능한 범위가 다르다는 것.
“로아 씨는 안무 시안 경험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전 걸그룹 전문이라. 이번에 요청이 들어온 건 보이그룹이었어요.”
춤에 성별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그녀는 메인 분야를 걸그룹으로 잡은 듯했다.
로아도 모노크롬 안무에 참여는 하지만 주로 리드하는 것은 민후였고, 시안 영상도 남성 단원들로 찍었다.
“모노크롬은 재민이가 있으니까 실시간으로 조율하면서 안무 제작이 가능했거든요.”
민후가 재민의 등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자랑스러운 후배를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재민도 그의 신뢰가 담긴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멤버들이 이건 안 된다고 할 때 되게 만든다거나.”
“어쩐지 연습실에서 가끔 곡소리가 나더라.”
가끔 재민이 자기만 가능할 것 같은 고난도 동작을 요구한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그걸 넘어서서 멤버들의 수준까지 멱살 잡고 끌어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준해가 재민이랑 같이 연습실에 있으면 댄스 경험치가 자꾸 늘던 이유가 있었어.
“재민이처럼 아이돌 안무에 지식이 있고 계속 의견을 나눌 사람이 있으면 모르겠는데, 이번엔 프로젝트 그룹이라고 단발성으로 요청이 온 거라 아마 그렇게까지는 안 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재민처럼 내내 붙어서 의견을 나눌 사람이 있으면 몰라도 없으면 어려울 것 같다는 얘기였다.
충분히 가능할 만한 방송도 개인 사정으로 거절하다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우리였다면 열 일, 아니, 한 여덟 일 정도는 제치고 달려갔을 텐데.
이건 단장 부부의 의견이 제일 중요한 사안이니 그냥 혼자서만 안타까워하고 말았다.
그런데 아이돌 관련 업계에 연락이 돌고 있는 건지, 이번엔 또 다른 데서 비슷한 이야기가 들어왔다.
시작은 라솔의 연락이었다.
사실, 피처링 곡 활동 이후로 라솔과 또 연락할 일은 없었다. 함께 식사 한번 하자는 이야기를 나누긴 했는데 반쯤은 한국인의 인사말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로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 아직 공부 안 했는데…….’
얘기 좀 들어줄 수 있냐면서 운을 떼는 게, 단순히 식사 자리를 마련하자는 게 아니라 비즈니스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았다.
업계 공부가 덜 되었으니 못 나가겠다고 할 수는 없어서 바로 시간을 잡아 만난 라솔은 의외의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 가능하면, 방송에 우형 후배를 또 빌릴 수 있을까요?”
“네?”
“QBC에서 프로젝트를 하나 기획 중인데, 제가 지금 말할 수 있는 것만 알려드리자면 연예대상과 음악대상의 콜라보거든요.”
“네에……?”
이건 무슨 다른 차원 세계 이야기인가.
얘기를 들을수록 예상을 한참 벗어나는 화제에 나는 얼빠진 반응밖에 하지 못했다.
“신인 아이돌끼리 프로젝트 그룹을 하나 만들어서 제작 과정을 찍을 거예요. 그래서 아이돌 제작에 필요한 사람들을 모으는 중이거든요.”
이거 팀 미로 단장 부부가 했던 이야기 아냐?
섭외가 들어왔단 이야기만 들었지, 자세한 이야기까지는 못 들었는데 그들에게 출연 요청을 했던 게 아무래도 QBC였나 보다.
“그래서 작곡가가 필요한데……. 방송에 잘 나올 만한 작곡가요.”
“아, 그래서 우형이를.”
저번 <미래의 당신을 만난다면> 때와 거의 같은 요청이었다.
가수 경력이 긴 라솔이니 아는 작곡가도 많을 텐데 지금 다시 우형을 콕 집어서 지목했다는 것은 아마도.
“성운 씨도 같이 내보내시려는 거죠?”
“네. 작곡 쪽은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 놨는데, PD님은 제작 과정까지 리얼리티처럼 찍고 싶어 해서요.”
“그럼 작곡을 성운 씨가 하고, 방송을 우형이가 메인으로 하게 되는 건가요?”
“정확한 건 방송국과 대화를 나눠봐야겠지만, 우형 후배에게 방송만 메인으로 맡길 생각은 아니에요. 뭣보다 성운이는 솔로곡 작업을 많이 해 와서, 아이돌 노래 작곡은 우형 후배가 더 경험이 많을 테고요.”
그 말을 들으니 라솔이 우형을 지목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바지사장처럼 얼굴만 내비치는 바지작곡가로 쓰겠다는 건 아니란 얘기였다.
‘서로 부족한 점을 채워주기에 적당하다는 거지.’
성운에게 부족한 예능감과 아이돌 노래 제작 경험을 우형이 채우고. 반대로 우형에게 부족한 작곡가로서의 확실한 경력을 성운이 채우고.
무엇보다 그가 작업하는 것을 참고한 게 우형에게 제법 도움이 되었던 듯했다.
작곡에 탄력을 받은 우형에게 다시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라솔의 요청이 우리에게 확실히 기회가 되리라 판단을 마친 나는 적극적으로 그녀의 이야기에 응했다.
“그러면 혹시, 두 사람을 한 팀으로 묶으면 어때요?”
“아, 프로듀싱 팀처럼요?”
“네.”
그간 모노크롬 앨범에 우형의 곡만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다른 작곡가의 곡도 받곤 했는데 그중엔 개인 작곡가가 아니라 작곡 팀, 프로듀싱 팀의 곡도 섞여 있었다.
이렇게 팀으로 활동하는 작곡가들은 거의 같은 회사 소속이었지만, 소속이 달라도 팀을 짤 수 있지 않을까? 공동 작곡도 흔한 시대인데.
다만 이건 나 혼자 결정해서 될 일은 아니고 라솔도 허락해줘야 하는 문제였다.
“그게 시청자분들이 이해하기 훨씬 쉽겠네요. 한 팀이라서 같이 나온다고 하면, 두 명이 같이 나오는 이유를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까. 당사자랑 이야기해보고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네. 저도 우형이랑 얘기해 볼게요.”
전부터 생각했지만 여러모로 그녀와 이해관계가 맞아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이번에도 그건가. 라솔 버스.’
이런 거대한 기회를 또 들고 와 주다니.
앞으로도 일단 그녀가 하는 얘기는 다른 누구보다 경청하도록 하자.
“역시 이사님께 상담하길 잘했어요. 역시 젊은 나이에 이사까지 오르신 분답달까.”
“네에……?”
라솔이 내게 가지는 이미지가 내 생각과 많이 다른 것 같지만, 낙하산이라고 밝히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래서 나는 적당히 웃으며 무마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