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라솔의 무대는 본방송으로만 진행되어서 세트는 간단하게만 준비되었다.
애초에 라솔은 음색으로 무대를 채우는 스타일이라 거창한 세트는 필요하지 않았다.
어두운 무대에 마치 가로등이 비추듯이 조명을 받은 스탠드 마이크. 그리고 무대 양옆엔 하얀 벤치가 놓였다.
뒤쪽의 전광판에는 반딧불이처럼 작은 빛들이 천천히 흘러갔다.
해랑의 파트는 중반부에 들어가기 때문에 처음엔 라솔이 혼자 무대에 섰다.
(스쳐 간 마음이 발걸음을 무겁게 하네요. 함께 걷던 이 길 위에 나는 혼자서-)
피아노 소리 위에 그녀의 잔잔한 목소리가 얹혔다.
가사는 이별을 고하고 둘이 걷던 길을 혼자 걸으며 돌아오는데, 항상 길을 비춰주던 가로등 불빛이 그제야 눈에 들어와서 되돌아갈 용기를 얻는다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라솔의 감성이 그랬다.
가볍게 듣고 싶은 사람은 사랑 노래 감성으로 들으면 되고, 힘들 때 들으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와서 위로가 되는 곡.
그녀의 노래엔 그런 사소한 감정 하나하나에 집중한 곡이 많았다.
‘그리고 목소리가 그런 노래랑 잘 어울려.’
잔잔하게 시작하는 목소리가 마치 편지를 물어오는 새처럼 가사를 전달했다.
송 피디가 한이의 보컬 스타일을 두고 두루두루 잘 어울리는 대중적인 스타일이라고 평했는데, 라솔의 스타일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한이가 존경하는 선배, 좋아하는 노래로 그녀와 그녀의 곡을 꼽았던 걸까.
라솔은 노래를 부르다가 스탠드에서 마이크를 빼 들고 오른편에 있던 벤치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해랑이 무대 위로 올라와 라솔의 반대편 벤치에 앉았다.
본방송에 참여한 방청객들이 무대에 집중하면서도 술렁이는 게 느껴졌다.
(추억이 비가 되어 내린 길에 나는 또 한 발 한 발……)
해랑은 평소 목소리도 낮은데 랩을 할 때는 더 낮았다. 반면 라솔은 높은 음역으로도 유명했다.
도입부와 같은 멜로디지만 한층 높은 음으로 이뤄진 후렴을 라솔이 시원한 가창력으로 전개해나갔다.
그와 동시에 해랑의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아래를 지탱하듯이 들어가자 서로의 목소리가 더욱 대비되면서 색다른 느낌으로 어우러졌다.
빗방울은 무거운 발소리를 지워주고, 가로등 불빛이 어두운 그림자를 지워주는 길에서 가사의 주인공은 편안함을 느낀다. 2절은 그런 내면의 성장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게 두 사람이 만든 곡이란 말이지.’
두 사람이 함께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이렇게 완성된 것이었다.
해랑의 곡은 항상 어둠만을 조명하곤 했는데, 이 곡에는 어둠을 지워주는 빛도 있었다.
달빛을 잃었던 늑대는 어둠 속을 헤매던 끝에 자신만의 빛을 찾은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무대였다.
***
음악방송은 매주 출연진이 달라지기 때문에 매 회차를 챙겨 보는 사람도 있지만, 관심 있는 가수가 나오는 회차만 보는 사람도 많았다.
아마 그녀의 무대를 보기 위해 오늘 특별히 채널을 고정한 사람도 많지 않을까.
오늘 <뮤직더라이브>의 시청자들은 모노크롬은 잘 몰라도 라솔은 대부분 알았다.
그리고 그들은 라솔과 함께 라이브 무대를 펼친 해랑에게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일단 비주얼에 눈길이 가고, 노래에 어울리는 특유의 저음에 청각이 집중되고.
한번 이목이 집중되니 대체 누구기에 라솔과 함께 무대에 섰냐는 궁금증이 자연스레 떠오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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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솔 무대에 같이 나온 사람 아이돌임??
곡 검색하니까 feat. 백해랑이라고 나오는데 이 사람 맞아?
└ㅇㅇ모노크롬 메인래퍼
└워오 모델인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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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크롬이 TV에 나올 때마다 보이던 단골 질문, ‘지금 나오는 애 누구냐.’라는 질문은 빈도가 줄었지만 여전했다.
그러나 이제는 컬러즈뿐만 아니라 모노크롬을 아는 사람들도 같이 대답해주고 있었다.
‘인지도가 오른 걸 이런 부분에서도 체감할 줄은.’
물론 컬러즈가 가장 적극적으로 답변하는 건 변함이 없었다.
아니, 항상 자기들이 대답해주던 건데 이제 다른 사람까지 같이 답변하고 나서니 경쟁심을 느끼는 것도 같고.
제일 먼저 많이 답변한다고 누가 내공 점수를 주는 것도 아닐 텐데, 모노크롬 영업 부문에선 지고 싶지 않은가 보다.
해랑은 래퍼로서 피처링에 참여했지만, 음악방송은 눈으로 보이는 무대이다 보니 매력 레벨 역시 영향을 끼쳤다.
‘개잘생’이니, ‘존잘생’이니, 해랑은 그냥 잘생겼다는 말로는 부족한지 ‘잘생겼다’ 앞에 수식어가 하나 더 붙곤 했다.
아이돌 그룹의 래퍼가 개인으로 나올 때면 ‘저 정도면 랩 잘하는 편임?’이라는 질문이 하나씩은 꼭 올라온다는데.
‘……다들 얼굴 얘기만 하잖아.’
랩 레벨이 매력 레벨에 묻히는 것은 조금 아까웠다.
매력 레벨로 예능 레벨을 묻으려고 했던 내가 할 소리는 아닌가.
우리 쪽에서 낸 영업 기사 외에도, 라솔과 함께 무대에 선 존잘남에게 관심을 보이며 인터넷 기사를 쓰는 기자들도 있었다.
한쪽 능력이 조금 묻히긴 해도, 누군가가 관심을 가지고 호감을 보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되돌아보면 이 곡이 나오기까지 참 많은 일을 거쳐왔다.
‘애초에 해랑이 믹스테이프를 내기로 마음먹은 것부터가 시작이었으니.’
스노우볼이 데굴데굴 굴러서 어쩌다 보니 예쁜 눈사람으로 완성된 느낌.
컬러즈도 라솔과의 피처링이라서 좋고, 곡 자체도 상당히 좋아서 대만족이라는 반응이었다.
게다가 컬러즈에겐 오늘 할 일이 하나 더 남아있었다.
오늘 <뮤직더라이브>에는 뒷모습만 나온 준해만 포함하여 모노크롬 멤버 네 명이 출연했다.
그리고 유일하게 나오지 않은 멤버, 우형은 다른 방송에 나올 예정이었다.
그가 개인으로 출연했던 <미래의 당신을 만난다면>의 방송일이 바로 오늘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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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누가 금요일밤에 나가서 노냐? 집에서 몬클 보는게 진정한 트렌드세터지
몬클데이 신난다ㅎㅎㅎㅎ
└내일 주말인거 밤새도록 떡밥 소화시키라고 그런거잖어
└ㅇ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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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내일이 주말이라 신나는데 멤버 다섯 명이 전부 TV에 나오다니 컬러즈에겐 축제와도 같은 날. 그들은 오늘을 ‘몬클 데이’라고 불렀다.
대기실 인터뷰와 <되돌아가는 길> 무대를 번갈아 가며 몇 시간째 다시 보고 있던 컬러즈는 방송 대기를 위해 다시 커뮤니티에 모여들었다.
멤버들도 직원들도 저녁 먹고 해산한 상태. 나도 집에 돌아와 본방송을 사수할 수 있었다.
미리 공개되었던 예고편에선 분량이 꽤 많을 것처럼 나왔다. 원래 예고편엔 실제 분량과 상관없이 아이돌 게스트를 잘 내세운다고 하니 이건 그렇다 치고.
초반부터 우형의 작업실 소개 영상이 나와서 흐뭇한 마음으로 보고 있었는데.
“……이게 끝이야?”
갑자기 이렇게 분량이 소멸할 줄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후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우형이 끼기 어려운 주제들이 많았다.
작곡에 관한 이야기에 중간중간 멘트를 하긴 하는데, 옆에 작곡 경력이 몇 배나 되는 작곡 선배들이 여럿 있다 보니까 우형의 멘트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우형이 멘트조차 치지 못하는 화제도 있었다. 차트 1위니, 음악방송 1위니 하는 성적에 관한 이야기.
데뷔하자마자 초고속으로 1위를 쟁취한 초대형 신인의 VCR 영상까지.
심지어 자료화면으로 나온 짧은 영상엔 그 신인의 뒤에 서서 박수 치던 모노크롬 멤버들의 모습이 언뜻 비쳤다.
편집된 방송으로 보는 나도 마음이 좀 그런데, 현장에서 계속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우형은 더 씁쓸하지 않았을까.
‘왜 우형이가 촬영이 어땠는지 자세히 말 안 하려고 했는지 알 것 같아…….’
열심히 했는데 생각만큼 점수가 안 나온 성적표를 들고 온 기분이었을 것이다.
잘하고 싶다고 말하던 그 표정이 떠올라서 괜히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인터넷 커뮤니티엔 초대형 신인이 VCR로 출연한다는 이야기에 이끌려 방송을 시청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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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당신을~에 런하 나온다길래 보고있는데
저기 아이돌 게스트분 런하랑 같은 기간에 활동하지 않았나?
└뒤에 앉은 반팔셔츠?
└모노크롬 리더잖
└얼마전에 커뮤에서 1위 실패했다고 얘기도는거 봤는데
└런하에 밀린거임?
└ㄴㄴ 런하 활동할땐 후보도 아니었음
└아이고 하필 게스트를 저렇게 섭외햇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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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하는 그 초대형 신인 ‘러너스하이’를 말하는 것이었다.
방송에선 대놓고 비교당하지 않았지만 커뮤니티마저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이 방송에 적극적으로 내보낸 당사자로서, 나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싱어송라이터 특집이라 진지하게 작곡 얘기 하는 줄 알았지…….’
한 싱어송라이터가 프로듀싱해서 성공한 아이돌에게 초점이 맞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방송이 시작하고 스타일이 마음에 든다든지, 뷰이라이브에서 작업실을 자주 봐서 익숙하다든지 복작복작 감상을 나누던 컬러즈.
그러나 방송이 중반부를 넘어가자 컬러즈가 모인 게시판의 리젠율이 우형의 분량처럼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간간이 올라오는 글은 ‘웃는 게 예쁘다’ 정도.
‘기분 좋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실망이었을지도…….’
글 수가 줄어든 커뮤니티뿐만 아니라 SNS에서도 컬러즈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저 잠깐 비계에 있을건데 오실분]
컬러즈는 할 말이 많은데 다른 사람들이 보는 데서 하기 싫을 땐 항상 ‘비계’를 찾았다.
비계란 비공개 계정의 줄임말이었다. 팔로우한 사람만 볼 수 있는 비공개 SNS 계정.
사실 내가 커뮤 중독 소리까지 들으며 항상 지켜보는 컬러즈의 반응은 물 위에 나온 반응들뿐이었다.
물 아래에서는 무슨 대화가 펼쳐지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았다.
지금 컬러즈가 다시 물 아래로 들어간다는 건, 그만큼 오늘 방송에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다는 말이었다.
‘방송에는 최대한 많이 나가는 게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내 실책이었나 봐.’
그간 멤버들이 나갔던 방송에선 뭔가 하나씩은 얻어가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 방송은 사람들도 별로 좋지 않은 얘기로 비교하고, 컬러즈도 물 밑으로 들어가고.
무엇보다 당사자인 우형이 보였던 반응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방송을 본 나도 침울해지려 했다. 나가라고 적극적으로 등 떠민 게 나였는데.
힘이 빠져서 TV를 끌 생각도 안 하고 나는 그냥 소파에 추욱 늘어졌다.
방송이 끝나고 흘러나오는 광고를 멍하니 보고 있는데 옆에 내려놓았던 스마트폰이 울렸다.
[이윤희: (링크)]
저절로 켜진 화면에 뜬 미리 보기로 보니 윤희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갑자기 이 시간에?’
지금 보냈다는 건 아마 방송에 관한 내용일 가능성이 농후한데.
금요일 밤에 일 시키는 상사가 제일 별로인데 내가 그런 상사가 되어있는 게 아닐까. 내가 시킨 게 아니고 그녀가 먼저 보낸 거니까 괜찮나. 아니, 그래도…….
중력에 가속도가 붙듯이 사소한 요소 하나하나에도 기분이 계속 바닥으로만 향해갔다.
‘그래도 굳이 이 시간에 보내준 거니까 확인은 해야지.’
난 여전히 힘 빠진 팔로 스마트폰을 들어 그녀가 보낸 링크를 확인했다.
링크를 누르자 뜨는 것은, 엔피버 멤버의 개인 SNS 계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