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128화 (128/430)

# 128화

“아, 몰라! 안 해!”

일을 시작하자마자 몰려드는 과한 잔심부름에 결국 준해가 몇 분 만에 파업을 선언하며 드러누웠다.

다른 멤버들은 그게 웃겼는지 웃으면서도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사님. 저희 매니저가 대자로 누웠는데…….”

“일하라고 해 주세요.”

드러누워서 떼쓰는 것부터 이르는 것까지 완벽하게 어린애 같았어.

그나저나 직원이 업무 과다로 드러누웠을 때 상사로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지.

일단 정당한 근로 계약을 한 상태니까 준해의 의사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생각해 보니까 건방진 매니저 캐릭터도 좋은 것 같아.”

“네?! 그럼 언제 부려먹, 아니, 일은 언제 시켜요?”

“몰라. 이사님이 괜찮다고 했으니까 부려먹으면 나 드러누울 거야.”

어쨌든 준해가 할 일은 컨텐츠용 매니저 행세이니 재미만 있다면 뭐든 오케이.

내가 편들고 나서니 준해가 더 기세등등하게 드러누웠다.

아마 이 자체 컨텐츠 시리즈는 컬러즈가 예상하는 것처럼 ‘고생하는 현 매니저’가 아니라, ‘모노크롬VS현 매니저’가 될 듯했다.

***

현 매니저의 첫 외부 스케줄은 우형의 <미래의 당신을 만난다면> 출연에 따라가기.

아무래도 방송국이 우리와 상성이 잘 안 맞는 ZBS다 보니 조금 더 신경이 쓰여서, 나는 오늘도 녹화 시작 전까지 붙어있기로 했다.

이전까지 모노크롬은 워낙 활동이 없었으니, 방송국 사람들도 무심코 ‘회사에서 그 정도 위치의 그룹인가 보다.’ 하고 생각하기 쉬웠다.

‘그러니 소속사 이사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그룹이라는 인상은 심어주는 게 좋겠지.’

사실 관심을 가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인생을 걸었지만.

더군다나 매주 다른 직종의 사람들을 모아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니 나중엔 배우 특집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뉴마 소속의 배우가 섭외될지도 모르니, 제작진들도 웬만하면 소속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난 회의할 게 있어서 이따 회사로 복귀할 건데 준해도 그때 같이 갈래?”

지금은 먼저 샵에 들러 우형의 헤어, 메이크업 세팅이 완료되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준해의 오늘 매니저 활동은 샵에서부터 시작이었다. 사실 방송국에서 준해가 따로 할 만한 일은 많지 않으니 여기서 대충 컨텐츠 분량을 뽑고 갈 생각.

취업계를 내도 과제는 그대로인지 여전히 교재를 들고 다니는 준해였다. 공부할 시간도, 연습할 시간도 필요한 그가 촬영 끝까지 계속 붙어있을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데리고 복귀할 생각이었는데 준해는 조금 눈치를 보며 말했다.

“괜찮으면 저도 남아서 녹화하는 거 지켜봐도 될까요? 싱어송라이터 특집이라길래 궁금해서.”

“작곡에 관심 있어?”

“제대로 해 보려고 마음먹은 건 아니고, 아직은 관심만요. 알아두면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아서요.”

“뭐든 배우는 건 좋지.”

저번 라이브클립 촬영 때 우형과 함께 재민에게 기타 기본 코드를 가르치던 준해였다.

그래서 기타 연주를 할 줄 아는 것은 알았는데, 연주뿐만 아니라 곡을 만드는 데도 관심을 가진 줄은 몰랐다.

해랑처럼 우형의 영향을 받은 건가? 이렇게 학구열을 보이는 모습을 보니 명문대생이라는 것이 실감 났다.

‘진짜 성장캐란 말이 맞는 것 같아.’

내가 처음에 확인한 준해의 작사 레벨은 6이었다. 레벨을 보고 바로 작사에 참여시키자 경험치가 빠르게 올라 현재는 레벨 7.

기획력이 작사 능력에까지 들어가는지 모르겠지만, 이번 <이리> 제작에 참여하면서도 경험치가 큰 폭으로 올랐다.

그 외에도 확인할 때마다 다른 능력들 또한 조금씩 오르는 중이었다.

예전에 재민이 멤버들과 녹음하면서 보컬 레벨이 오른 적이 있었는데 준해도 비슷했다.

다른 멤버들이 작곡이니, 피처링이니, 연기니 하며 따로 바쁠 때 재민과 같이 연습실에 붙어있곤 했는데 그러다 보면 댄스 경험치가 오르기도 했다.

‘해랑이랑 붙어 있으면 조만간 랩까지 섭렵하는 거 아닐까?’

새끼 새가 어미 새에게 먹이를 받아먹듯이 멤버들의 장점을 조금씩 배워가는 느낌.

그룹의 막내다운 성장 방법이라 흐뭇해졌다. 다들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 있구나.

전에 멤버들끼리 이란 노래를 만들겠다고 했는데, 기다리면 정말 레벨이 또 올라갈지도 모르겠다.

레벨이 쑥쑥 오르는 흐뭇한 상상을 하며 그를 쳐다봤는데, 준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다 고개를 퍼뜩 들며 한 곳을 쳐다봤다. 나도 고개를 돌려보니 준비가 다 됐는지 우형이 다가오고 있었다.

“끝났어?”

“네.”

나는 완성된 우형의 헤어, 메이크업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아이돌이라기보다는 싱어송라이터로서 출연하는 것이니 깔끔한 셔츠 스타일이다.

<미래의 당신을 만난다면>은 카페처럼 꾸며진 세트에서 편안하게 대화하며 진행되었기에 그 분위기에 어우러질 수 있도록 맞춘 것이었다.

‘무대가 아닌 방송에선 역시 친근한 스타일이 무난하지.’

방송의 메인이 되는 학생 입장에선 아이돌 멤버를 대하기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 자연스러운 메이크업으로 부탁했다.

그 덕분인지 한결 더 부드러워진 인상.

흠잡을 것 없이 세팅이 완료된 것을 확인하고, 우리는 방송국으로 출발했다.

***

<미래의 당신을 만난다면>은 아나운서 출신의 MC 한 명과 학생 한 명, 그리고 학생이 꿈꾸는 직종의 종사자들이 다섯 명 내외로 출연한다.

오늘 게스트로 섭외된 싱어송라이터도 우형을 포함하여 총 다섯 명이었다.

게스트 자리 배치는 경력순인지 우형의 자리는 뒤쪽이었으나 워낙 아담한 세트라 구석이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이돌 중에선 웬만하면 선배에 속하는 우형이지만 작곡 경력으로 치자면 이 사이에서 가장 후배였다.

녹화 시작 전 대기실을 돌며 인사를 다니던 그는 세트장에 선배들이 들어올 때마다 다시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각 게스트가 하나둘씩 자리에 앉아 마이크를 착용하고 있을 때, 오늘의 메인인 남학생이 MC와 함께 등장했다.

“헐! 박형주다! 아니, 박형주 님!”

학생은 가장 안쪽에 앉은 게스트를 보며 외쳤다.

지나가다 유명인을 본 것처럼 이름 석 자를 그대로 불렀다가, 뒤늦게 당사자가 듣는다는 것을 떠올렸는지 바로 호칭을 바꿨다.

“허허. 고등학생이면 날 잘 모를 텐데?”

“모르긴요. 완전 팬이에요!”

“녹화 들어가면 그 얘기도 자세히 물어볼게요.”

MC가 웃으면서 학생을 자리에 앉히고 자신도 옆에 앉았다.

녹화가 시작되고 게스트가 한 명씩 간단한 소개를 이어갔다.

대선배 가수인 박형주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가수로 활동하지 않지만 대표곡이 여러 개인 작곡가, 12년 차 알앤비 가수 등, 대부분이 소속사에서도 웬만하면 한 자리 차지하는 경력의 소유자들.

인디밴드 보컬 출신 싱어송라이터가 그나마 우형과 가수 연차가 비슷했다.

“안녕하세요. 모노크롬 리더, 여우형입니다!”

지금은 어떻게 활동 중인지와 이름 정도만 소개하면 되었다.

각 게스트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이후에 편집으로 간략한 소개 영상이 추가될 예정이었으니까.

한 명씩 소개가 끝날 때마다 환영의 의미로 모두 작게 박수를 쳤다.

게스트 소개가 끝나고 바로 학생이 자기소개에 나섰다.

“안녕하세요. 이천영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이고요. 친구들은 개그맨을 하라고 하는데 전 꼭 싱어송라이터가 되고 싶어서 이 방송에 나오게 됐습니다! 활동명은 스카이제로고요.”

게스트처럼 간단히 소개하면 되는데 그 누구보다 소개 멘트가 길었다.

방송 출연에도 어색해하는 기색 없는 그의 모습에 MC가 놀라며 물었다.

“벌써 활동명도 있어요?”

“네. 나중에 세계적으로 활동할 때를 대비해서 지은 영어 이름이에요. 홍보해도 되나요? 작곡 연습 일기를 올리는 SNS도 있거든요. 아이디도 똑같이 skyzero예요.”

“하하. 제가 3년 동안 이 프로그램 MC를 보면서 이렇게 길게 자기 소개하는 학생은 처음 봐요. 미리 준비해 온 멘트인가요?”

“아뇨. 제가 원래 말이 많습니다!”

풋풋하고 활발한 멘트에 다들 웃었다.

MC는 곧바로 녹화 전 상황을 떠올리며 질문으로 진행을 이어나갔다.

“그러고 보니 녹화하기 전에 박형주 씨를 보면서 팬이라면서 엄청나게 반가워했어요. 고등학생이면 보통 아이돌을 좋아할 나이 아닌가요?”

박형주가 가수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것은 거의 15년 전. 지금은 프로듀서로 더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오늘의 학생인 이천영이 고등학교 2학년이었으니, 아기 시절에 그의 가수 활동을 지켜봤을 리도 없다.

“제 부모님이 팬이셔서 저도 자연스럽게 팬이 됐거든요. 친구들이 종종 그래요. 왜 이렇게 취향이 올드하냐고.”

“올드한 취향이라 올드한 제 팬이다?”

“아뇨! 제가 옛날 명곡들 좋아하고, 최신곡은 외국 노래 위주로 들어서 아이돌에는 빠삭하지를 못해서요.”

그 말에 우형은 유일한 아이돌인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감지했다. 장난스럽게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실제로도 아쉬웠다.

학생을 메인으로 돌아가는 프로그램. 그 학생이 아이돌에게 관심이 없다면 자신은 그저 활동한 지 얼마 안 된 작곡가일 뿐이었다.

카메라 앞이라서 웃었지만 속으로는 옛날처럼 리액션 담당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천영 군이 카메라 앞인데 긴장을 하나도 안 해요.”

“나중에 유명해지면 맨날 카메라 앞에 설 거잖아요. 그래서 익숙해지려고 미튜브 채널도 준비 중이거든요.”

자신만만한 천영의 말에 게스트인 알앤비 가수가 말했다.

“제 지인 중에 저런 타입 있어요. 개그맨 중에 이국태 씨라고. 왜 친구들이 개그맨을 하라고 하는지 알겠어요.”

“전 작곡 할 건데요!”

고집스러운 말투에 다들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다들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왜 작곡가가 아니고 싱어송라이터가 되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말 그대로 관종 타입. 나쁜 의미가 아니라 나서서 주변 분위기를 밝게 만들어 주는 타입이었다.

“푸하하. 가수가 아니라 엔터테이너로 활동할 생각은 없어요? 아니면 아이돌 해도 잘하겠는데.”

“우형 씨, 현직 아이돌로서 어때요? 회사 연습생으로 데려가 보면?”

MC가 우형을 지목하며 질문하자 다시 우형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순간 우형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같이 연습하던 연습생들이 여럿 있었는데, 얼마 전 소속을 옮겨 데뷔한 도한을 제외하곤 다들 뉴마에선 안 되겠다며 나가버렸다.

그 후에 들어온 연습생들도 마찬가지. 모노크롬으로 영입되었던 윤환 외에는 다들 배우 지망으로 옮기거나 금방 다른 아이돌 소속사로 옮겼고…….

파란 많았던 과거가 떠올라 잠시 눈의 초점이 흐릿해졌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어어, 들어오고 싶으면……? 잘할 것 같아요.”

적극적으로 뉴마로 들어오라고 권할 수가 없어서 애매하게 넘겨버렸다.

그냥 방송인데 대충 좋은 말로 넘겼어도 되지 않을까. 아니, 방송인데 무책임한 말을 해도 되나?

주인이라도 있었으면 슬쩍 눈치를 보고 대답을 구했을 텐데 지금은 없었다.

최대한 무난한 대답을 내뱉고도 머릿속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아, 이거 편집각이다…….’

아까부터 뭔가 하나씩 삐끗하는 느낌이었다.

멤버들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혼자 방송에 출연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재민은 윤환과 갑작스럽게 만난 상황에서도 잘하던데, 자신은 아직도 방송에 익숙지가 않았다.

일반인인 학생이 더 방송을 잘하는 것 같아서 우형은 속으로만 피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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