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나는 한이와 함께 회의실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작품을 하나씩 확인했다.
줄거리가 적힌 기획서도 있어서 시간 들여 대본을 전부 읽지 않아도 내용 파악은 가능했다.
“넌 다 읽어봤어?”
“틈틈이 봤는데 대본은 다는 못 읽어봤어요.”
“하긴 시간이 별로 없었지.”
본업이 배우가 아니니 아이돌로서의 일을 쉴 수는 없다.
라솔의 곡 커버 영상도 곧바로 촬영할 생각이었는데 한이는 보컬 레슨에 시간을 더 쏟으며 준비 기간을 뒀다.
요즘 뉴마에 가끔 와 있는 라솔과 얼굴을 마주하다 보니 최대한 잘해야겠다는 부담감이 생긴 듯했다.
보컬 레벨이 8이나 되어도 아직 레슨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세상엔 레벨 8보다 잘 부르는 사람, 혹은 잘 가르치는 사람이 그만큼 많은 건가.
‘그럼 게임처럼 트레이닝을 집중해서 계속하면 언젠가 레벨 10이……?’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가 정신을 차렸다. 순간 미친 보컬 장인이 되어버릴 뻔했어.
나는 잡생각을 떨쳐내고 다시 손에 든 종이에 집중했다.
웹드라마라 TV 드라마와는 달리 분량이 짧아서 한 화에 20, 30분 내외.
그래서인지 회차별로 나뉜 대본도 생각보다 얇았다.
나도 이전에 기획서를 보긴 했지만 그땐 촬영 일정 위주로 확인하며 걸러내기 위함이었다.
내용이 전부 기억나지 않아서 선택지로 남은 두 작품의 줄거리부터 훑었다.
‘일단 딱 봤을 때 잘 어울릴 것 같은 건 이 대학생 로맨스.’
우선 남녀 주인공이 대학생인 캠퍼스 로맨스 드라마.
대학 진학 전 학생들에게 대학교에 대한 판타지를 심어주는 청춘 넘치는 로맨스물이었다.
대학을 거친 사람들은 저런 대학이 어디 있냐고 하는 현실감 없는 상상 속의 대학교가 배경.
의도하지 않았지만 없던 첫사랑의 기억도 조작해서 만들어내는 게 특기인 한이가 맡는다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줄거리는 이러했다. 남주는 안경으로 얼굴이 가려져 아무도 몰랐지만 사실 공대 남신.
같은 학교에서 사진을 전공하는 여주가 우연히 그의 맨얼굴을 목격하고 모델을 부탁하면서 얽히고설키는 이야기.
나는 1화 대본을 훑으며 한이의 모습을 남주에 대입해서 상상해봤다.
‘음. 역시 대학 선배 이미지가 어울려.’
다만 남주가 상당히 어수룩한 아싸 계열이라 그 부분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한이는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인싸였으니까.
실제로 역할을 맡는다면 아싸 연기도 잘하겠지만.
다른 하나는 로맨스에 살짝 휴먼 드라마 성격이 가미된 작품이었다.
그래서인지 남주, 여주 말고도 아역 한 명이 같이 주연 자리에 들어가 있었다.
여주는 사회 초년생 직장인. 안 그래도 직장에 적응하기 바쁜데, 친오빠의 이혼과 출장으로 본가에 잠시 맡겨진 조카를 보살펴야 할 책임까지 생겼다.
그리고 남주는 그 조카가 다니는 피아노 학원의 선생님이었다.
바쁜 나날에 지쳐가던 여주는 의외로 조카에게서 위안을 받고, 조카를 계기로 남주와도 친해진다.
결국은 조카가 큐피드 같은 존재가 되어 두 사람의 마음이 통하는 이야기.
‘고르기 어려울 법도 하네.’
두 작품은 같은 로맨스지만 다른 장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상당히 결이 달랐다.
앞의 작품은 줄거리를 봐도 어떤 내용일지 예상이 갔는데 이건 예상이 안 가서 바로 1화 대본을 펼쳤다.
1화는 여주가 평범한 직장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못한 어린 조카와 함께 귀가하려고 했는데 야근이 생각보다 늦어져 안절부절못하는 장면.
그리고 직장에는 스트레스의 주요 원인인 빌런이 한 명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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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택: (불편한 티를 내며 한숨) 또 조카야? 그렇게 조카만 챙기다 사람은 언제 만나고 연애는 언제 하려고.
서은: (어색하게 웃어넘기며) 지금은 별로 생각이 없어서요.
인택: 서은 씨가 이 회사에 다닌 지 벌써 1년이 지났는데 아직 동료들이랑 서먹한 것 같아서,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서은: 좀 더 신경…… 쓰겠습니다.
인택: 말 나온 김에 주말에 시간이라도 내는 게 어때? (상체를 가까이하며) 회사 밖에서 상하 관계 내려놓고 커피나 마시면서 어려운 점 있으면 상담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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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미친 새…….”
“헉.”
한이는 목격하면 안 될 장면이라도 목격한 듯이 손으로 입을 막았다.
나도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갈 줄은 몰랐던지라 같이 깜짝 놀랐다.
예전에 어떤 놈이 비슷한 소리를 했던 게 생각나서 그만.
“아니, 방금 그건 그냥 재채기 같은 거였어. 잊어. 편집.”
“편집.”
내가 편집이라는 의미로 손가락을 들어 허공을 싹둑 자르자 한이도 똑같이 따라 했다.
사회생활 하는 20, 30대 여성이 타깃층이라 그런가, 나까지 몰입해 버렸다.
‘시작부터 이런 장면이라니.’
작가가 누군지는 몰라도 현실적인 인간상을 표현해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현실에 이런 인간이 있다는 건 나도 잘 아니까. 내가 뒤처지는 건가? 내가 비정상인가? 하는 생각 들게 수작 부리는 인간.
‘아까 건 순정만화처럼 가볍게 볼 수 있겠는데 이건 확실히 이입하게 만드네.’
웹드라마는 온라인 플랫폼에서 서비스되니 시청자도 인터넷을 활발하게 이용하는 젊은 층이 많다.
그러면 학생 시청자들을 노린 캠퍼스물이 나을 것 같긴 한데.
“개인적으로 다음 화를 보고 싶다면 이거려나.”
내가 고른 것은 직장인 로맨스물의 대본이었다.
나중에 집적거리는 새, 아니, 놈을 결국 처리하는지가 매우 궁금했다.
그런 이유 말고도, 한이의 첫 연기 활동이니까 조금 더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만한 작품을 고르고 싶었다.
학생이 주인공인 웹드라마가 많으니까, 반대로 조금 특이한 작품을 고르면 확실히 인상에 남지 않을까 해서.
아역이 함께 나오는 걸 보니 내내 무거운 내용이 이어지는 것도 아닐 듯하고.
“넌 더 마음 가는 거 있어?”
“이사님이 고른 거요.”
비전문가인 내 의견이니 알아서 적당히 걸러서 듣지 않을까 했는데, 한이는 들고 있던 캠퍼스물 대본을 내려놓고 바로 이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내 결정을 따르지 말고. 네가 하고 싶거나 더 잘할 것 같은 걸 골라야지.”
내 결정을 전적으로 따르겠다는 태도여서 타이르듯이 말했는데 한이는 반쯤 장난이었는지 웃었다.
“사실 대본으로 봤을 땐 그게 좀 더 재미있어 보였는데 제가 잘할 수 있을지 몰라서 고민했었거든요. 피아노 치는 역할인 것도 그렇고.”
하긴. 학창 시절은 누구나 경험해 보니까 비교적 이입하기 쉽지 않을까. 반면에 아예 다른 직업을 지닌 인물이라면 처음부터 새로 파악해야 하고.
그리고 한이는 전에 피아노를 배우다 말았다고 한 적이 있었다.
“피아노는 치는 척만 하면 되지 않을까? 손은 대역으로 나갈걸?”
“그래요? 그건 몰랐네.”
“나도 모르는데 그냥 그렇지 않을까 하고.”
피아노 잘 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조건은 없으니까 못 쳐도 괜찮을 만한 대책은 마련되어 있지 않을까.
애초에 어린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선생님 역할이니까 연주 실력을 뽐내는 장면은 없을 듯했다.
“흐음. 그럼 더 살펴보고 결정해서 말씀드릴게요.”
“정 모르겠으면 배우팀에 의견을 구해볼 수도 있으니까 말하고.”
“네.”
최종 캐스팅이 결정되면 기사 나가고 곧바로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이전 카메오 출연은 OST 작업에 따라오는 부수적인 것이었으니, 이번이 모노크롬 멤버의 첫 연기 도전이라 할 수 있다.
어떤 반응이 나올지 기대가 반, 걱정이 반이었다. 컬러즈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궁금하고.
한이의 카메오 출연 신을 보고, 또 보고, 크롭해서 보고, 확대해서 보고, 움짤로 만들어서 보던 그들이었다.
‘컬러즈가 원래 뭐든 무한 반복해서 보긴 하지만.’
그 짧은 장면을 닳고 닳도록 반복하는 것을 보니, 얼마 없는 쿠키를 야금야금 갉아먹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괜히 마음이 짠했다.
아마 신인 시절 모노크롬이 예능에 나가서 리액션 담당만 하다 왔을 때도 그랬겠지.
그런 컬러즈에게 갈증 해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지금은 예정된 활동이 많으니 당분간은 갈증을 느낄 새도 없을 것이다.
한이의 웹드라마 촬영, 우형의 방송 출연, 해랑의 피처링. 우리는 또 우리끼리 자체 컨텐츠까지.
그룹 하나가 아니라 다섯 명으로 각자 활동한다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처음부터 제대로 활동해 왔으면 이게 일상이었겠지?’
지금껏 신인처럼 그룹 위주로 활동해 왔지만 이 연차에는 원래 이런 모습이 더 일반적인 거겠지.
생각해 보면 컴백 프로젝트도 재데뷔하는 마음으로 임했고, 지금까지 데뷔부터의 과정을 압축해서 걸어온 기분이었다.
집중이 분산된다고 놓치는 부분이 생기면 안 되니, 나는 다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업무로 돌아갔다.
***
평소와 같은 시간에 회사에 왔을 뿐이지만 인턴으로서 첫 출근인 준해.
그는 바로 연습실이 있는 층으로 내려가지 않고 매니지먼트팀이 있는 곳으로 올라왔다.
민형과 윤희가 매니지먼트팀 인턴을 반겼다.
“저 여기 한 번씩 다 가요?”
“응.”
멤버들 개인 스케줄이 생기니 덩달아 바빠지는 것은 바로 준해. 현 매니저였다.
매니저로서 동행할 수 있을 만한 스케줄엔 한 번씩은 보낼 생각이었다.
‘기왕 계약한 김에 알뜰살뜰 써먹어야지. 컨텐츠 쪽으로.’
물론 모노크롬 멤버로서의 일이 우선이니 연습과 트레이닝에 지장이 안 가는 선에서만 노동을 착취할 예정이다.
지금까지 확정된 스케줄이 적힌 종이를 건네자 준해는 복잡한 표정으로 일정을 훑었다.
“일이…… 많네요.”
“좋은 일이지.”
몇 달씩 스케줄이 꽉꽉 찬 건 아니고, 동시에 진행하는 일이 여럿 겹쳐 있어서 더 많아 보일 것이다.
모노크롬의 스케줄이 많아진 건 분명 좋은 일. 준해도 기뻐할 일이다.
그런데 그만큼 매니저로 활약하며 부려 먹힐 자신의 모습이 상상되는지 마냥 기뻐하지는 못했다.
그게 표정에서 보여서 또 웃음이 나올 뻔했다.
졸업이 인질로 잡혀있으니 좋든 싫든 어쩔 수 없이 따라야겠지만.
“민형 씨는 준해가 대신 일할 때 찍을 만한 상황 있으면 촬영 부탁해요.”
준해에겐 매니저용 법카를, 민형에겐 캠코더를 건넸다.
몇 달이나 인턴 신세로 일할 텐데 그동안 모든 것을 촬영할 순 없었다.
평소에 잔심부름 조금 더 하다가, 재밌을 만한 일이 생길 때 찍어두는 정도면 적당히 할 일을 하면서 컨텐츠도 뽑을 수 있겠지.
그리고 오늘은 재밌을 만한 첫 출근 편이다.
“어어. 매니저. 왔어?”
멤버들이 있는 연습실로 가자 한이가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시건방진 태도로 준해를 반겼다.
“왜 내 기분이 별로지?”
“아니. 형님을 말한 건 아니지 말입니다.”
‘매니저’란 호칭에 준해 뒤에 있던 민형이 먼저 반응하자 바로 손을 빼고 공손해졌지만.
다들 무슨 장난을 칠지, 그것만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간 착한 모노크롬이었는데 막내 앞에선 진상 모노크롬이었다.
“나 물 좀.”
“…….”
가장 힘 잘 쓸 것 같은 해랑이 물병 뚜껑을 따달라며 준해한테 내밀었다.
알아서 잘하던 것들을 다 준해에게 시키고 싶은지 다들 손 하나 꿈쩍 안 하려 했다.
혼자서 잘만 돌아다니던 애들이 지금은 못 일어나겠다며 준해한테 일으켜 달라고 하는 식.
거기에 커피 사달라, 아이스크림 사달라 난리였다.
‘이게 연습실이야, 유치원이야.’
손이 많이 가는 타입으로 바뀐 멤버들을 보니 20대 성인 남성의 집합이란 생각이 전혀 안 들었다.
저들끼리 장난치고 노는 모습을 보면서 학생 같다고 생각한 적은 많았다. 그래도 기껏해야 고등학생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말 안 듣는 꼬맹이들이었다.
첫날이라 더욱 이런 진상 태도를 보이는 것 같지만, 앞으로 준해가 겪을 고생이 눈에 선했다.
“이러고 잘 노는 거 보니까 아역들이랑도 금방 친해지겠다.”
“푸핫.”
얼마 전에 아역이 나오는 대본을 봤던 게 생각나서 말하자 한이가 알아듣고 웃었다.
다른 멤버들이 무슨 소리냐고 물었으나 너네 유치하다고 할 순 없어서 그냥 미소로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