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126화 (126/430)

# 126화

게임에 없었던 배우팀이 어떻게 돌아가고 회사 내에서 어떤 태도였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그 전형적인 중소기업 마인드의 사장이 배우팀의 수장으로 있으니 모노크롬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은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모노크롬 멤버에게 관심을 둔다는 건 분명 고마운 일일 텐데.

‘왠지 우리한테 압박 넣는 느낌인 건 내 착각인가…….’

항상 일 부족 상태에 시달려온 모노크롬이니 일거리를 주는 건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가수 활동은 뒷전으로 미뤄도 되고 배우팀 일을 우선해달라는 느낌?

얼마 전에 배우팀만 생각하는 사장과 기 싸움을 한 탓에 괜히 더 그런 생각이 드는 건가.

물론 새로운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는 건 기뻐할 만한 일인데, 자꾸 사내 분위기가 신경 쓰였다.

‘아니지. 원래 신경 써야 하는 건데 내가 반년 동안 너무 무시하고 살았던 것도 같고.’

시작부터 뉴레인은 내 관할 밖이었고, 배우 팀은 알아서 굴러가고, 아티스트 팀과 관련 없는 회사 업무는 최 비서가 상당 부분 처리 가능했으니 나는 확인만 하면 됐고.

그러니 다른 건 크게 신경 안 쓰고 모노크롬에만 집중했다.

어쩌면 그렇게 지내왔던 상반기는 튜토리얼 기간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까진 이사인 나를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으니까.

이 세계에 와서 초반에는 하드모드에 절망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게 이지모드였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외적으로 너무 하드모드니까 포기하지 말라는 의미로 내부적인 갈등 요소는 일부러 배제했다거나.

집과 돈을 챙겨주던 게임 시스템이 어디까지 관여했는지 나로선 알 수 없다.

‘뒤돌아보면 튜토리얼 기간을 거친 것 같긴 해.’

외부의 방해 요소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정말 튜토리얼을 마친 것처럼 이제야 일이 돌아가는 과정을 좀 알 것 같았다.

이전까진 기본적인 기틀을 마련하는 과정이었고 지금이 정말 시작점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워낙 바닥에서부터 시작하느라 하루하루가 새롭긴 했지만, 이제는 지금까지 다진 기반에서 또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

중심 없이 되는 대로 휩쓸리곤 했는데 조금은 안정감이 생겼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점에 개인 활동은 나쁘지 않지.’

보통 신인 아이돌도 그룹이 어느 정도 인지도를 얻고 안정되기 전까지는 그룹 활동 위주로만 돌아가지 않던가.

우리는 그 과정을 빠르게 거쳐온 데다가 지금은 멤버들도 각자 준비하는 게 따로 있었으니 시기적으로는 알맞았다.

한이는 이전 카메오 출연 후에 가끔 연기 트레이닝을 받기도 했다.

연기 쪽 진출을 확실히 정한 건 아니었지만 일단 배워놔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아이돌은 활동하면서 소소하게 연기나 상황극을 할 기회가 많지 않은가. 이전의 그 음악 방송 타이틀 소개 영상처럼.

이런 식으로 꼭 배우 활동이 아니라 예능에 나가더라도, 연기를 못하는 것보다야 잘하는 게 훨씬 나았다.

‘그리고 특히 한이는 제대로 된 연기 경험을 시켜보는 게 나은 것 같아.’

나도 모르는 새에 생겨났던 마이 엔터의 연기 레벨 항목.

작곡 레벨처럼 원래 마이 엔터에 없었는데 한이의 카메오 촬영 이후 나타난 능력치였다.

마이 엔터에서의 아이돌 활동이란 가수 활동과 예능이 끝이었다.

그러나 현실의 아이돌은 작곡도 하고 예술 활동도 하고 연기까지 커버하며 날이 갈수록 복합 엔터테이너가 되어갔다.

그런 현실에 맞춰서 시스템도 재구성되는 듯 보였다.

‘시스템상 연기도 아이돌 활동으로 인정받는 것 같으니 레벨이 높은 쪽이 도움이 되겠지?’

한이의 연기 레벨은 현재 6.

멤버들이 재능을 보이는 특기 분야가 대개 7이고, 메인으로 맡은 포지션에서 8까지 올라가곤 했다.

물론 마이 엔터에서는 대충 레벨이 5만 넘으면 꽤 잘한다고 볼 만한 수준이었으니, 이런 숫자가 아주 흔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활동이 없는 동안 멤버들이 알아서 자기 발전에 힘쓴 덕분에 높은 능력치를 유지한 듯했다.

여기에 회사의 지원까지 더해지면 더 오를 가능성이 있는 거고.

‘배워본 적도 없고 경험도 없는데 6부터 시작한다면 타고난 재능이 있는 거 아닐까?’

제대로 시켜보면 더 오를지 궁금해졌다.

가끔 연기력이 필요한 촬영을 할 때도 잘했고, 숫자만 봐도 못하는 건 절대 아닌 것 같으니까.

모노크롬을 키워야 하는 담당자로서 연기를 적극적으로 시킬지도 결정해야 하니, 최소 한 번쯤은 제대로 경험해 보는 편이 나았다.

한이의 연기 트레이닝을 잠깐 지켜본 적이 있는데, 역시 전문가 기준으로 봐도 그의 실력은 괜찮은 듯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배운 적이 없다고? 이런 사소한 디테일은 스스로 체득하기 어려울 텐데.]

연습생들을 가르치던 연기 트레이너는 그런 말을 하며 놀랐다.

연기 수업을 받는 건 처음이니 연습생들이랑 비슷하겠거니 생각했던 모양인데, 한이가 하는 것을 보자 점점 표정이 달라졌다.

한이도 칭찬해 주니까 할 맛이 나는지 수업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무대에 서던 게 좀 도움이 됐을까요? 카메라 앞에서 항상 표정 신경 쓰라는 얘기를 연습생 때부터 많이 들었거든요.]

[아이돌 출신 배우들이 그런 점은 누구보다 프로긴 하지. 다들 카메라 안 피하고.]

아이돌 배우라 하면 많은 사람이 발연기부터 떠올릴 정도로 편견이 있지만, 그것도 점점 옛말이 되어가는 중이다.

실력으로 말이 나오는 아이돌 배우도 따지자면 그냥 신인 배우인데 인기도 때문에 좀 더 주목받는 자리에 들어가서 말이 많이 나왔을 뿐이지.

요즘은 워낙 요구치가 높다 보니 정말 프로 못지않게 연기에 두각을 보이는 아이돌도 많았다.

트레이너의 말대로 카메라에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표정도 지을 줄 알고.

거기에 외모 좋고, 몇 시간짜리 세트리스트를 외울 정도로 머리도 좋아야 하는 등 배우와 겹치는 능력을 갖췄으니까.

‘그래도 자세히 보자면 무대 위에서의 연기와 정극 연기는 다르긴 하지.’

근데 전문가의 눈으로 보기에 한이는 그런 부분도 능숙하게 해내는 듯했다.

[흠. 기본이 아니라 심화 과정부터 들어가야겠는데.]

노래 부르는 발성과 연기 발성이 다르기 때문인지 발성 같은 기초부터 가르치려고 했다는 모양.

그런데 한이가 워낙 목청이 쩌렁쩌렁하고 기본 실력이 있으니 굳이 필요 없는 듯했다.

그뿐만 아니라 서글서글하고 잘 맞춰주는 한이의 성격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수업이 끝나고도 같이 일하는 배우팀 사람들에게도 엄청 칭찬했다고.

내가 직접 들은 건 아니었고, 윤희가 같은 매니지먼트 팀 직원들에게 들어서 말해줬다.

‘팬 반응뿐만 아니라 사내 반응까지 알려주다니.’

회사 내외로 우수한 인력이었다.

배우팀도 아이돌 배우가 탐이 나는데 마침 트레이너가 칭찬하며 잘한다고 하니 더욱 이렇게 적극적으로 대본을 보낸 것 같았다.

들어온 것 중, 하반기에 예정된 모노크롬 일정에 크게 겹치지 않을 만한 것을 추리고 추리니 결국 대본 두 개가 남았다.

‘카메오야 원래 중간에 짧게 추가된 장면이라 준비할 것 없이 바로 투입되었다지만, 웹드라마는 이렇게 빠르게 진행하나?’

나야 드라마 제작 과정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지만 조금 더 오래 걸리는 작업일 줄 알았는데.

출연하게 된다면 촬영에 들어가는 시기가 바로 다음 달이었다. 지금이 월말이니 바로 몇 주 후.

웹드라마는 TV 드라마와 비교하면 분량이 많이 적어서 준비 과정도 좀 간단한 듯싶었다.

‘우린 언제나 뭐든 급하게 해와서 상관은 없는데.’

이런 데 너무 익숙해지지 않을까 걱정도 되고.

선택을 기다리는 작품 중 하나는 대학생 주인공들의 캠퍼스 로맨스, 하나는 직장인 로맨스. 어쨌든 로맨스.

한이의 멜로 눈빛을 알아본 건가 했는데 원래 웹드라마는 로맨스물이 많았다. 짧은 분량으로 표현해내기 적합한 것이 바로 사랑 이야기라서 그렇다나.

뉴마의 배우 팀은 배우의 의사를 우선해서 작품을 선택한다고 한다.

그래서 우선 한이에게 판단을 맡기려고 했는데 이런 건 처음이라서 그런지 잘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냥 시청자로서만 드라마를 봐 와서, 막상 저한테 출연할 작품을 선택하라고 하니까 어렵네요.”

“재민이가 이런 데는 좀 빠삭하려나?”

“안 그래도 궁금해하기는 하더라고요.”

모노크롬에서 드라마에 가장 관심 많은 사람을 꼽자면 바로 재민이었다.

한이가 카메오로 나간다고 할 때도 재민이 신기해하면서 적극적으로 추천했었다.

그런 재민이면 선택에도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물어봤는데, 한이도 이미 그에게 물어봤었는지 바로 대답했다.

“그래서 대본 보여준다고 했더니 글자 읽기는 싫대요.”

“……그거 참 재민이답네.”

정말 호불호가 뚜렷한 아이였다.

드라마 애청자인 그는 그냥 영상으로 완성된 걸 보기 좋아할 뿐이지, 제작 과정까지 관심을 가지진 않나 보다.

대사도 굳이 텍스트로 보고 싶지는 않은 듯했다.

‘머리에 쓸 에너지를 다 몸으로 쓰고 있으니.’

댄스로 에너지 대부분을 소모해서 머리 쓰는 일을 싫어하는 게 아닐까.

모노크롬과 모노필름은 떼어 놓을 수 없고 아마 모노필름 무대를 앞으로도 몇 번은 더 선보일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재민은 모노필름 안무 영상 촬영 전에 완성도를 좀 더 높이자고 내내 팀 미로와 붙어있었다.

쇼케이스 팬미팅에서 선보였던 개인 무대도 따로 안무 영상을 찍을 수 있을까 해서 그것도 좀 연습 중이었고.

“그러면 재민이한테 의견을 구하긴 어렵겠고.”

“그래서 말인데 이사님이 같이 봐 주시면 안 될까요?”

“내가?”

“이거 시청자층이 젊은 여성분들이래요.”

캠퍼스 로맨스물은 표적으로 잡은 시청자층이 10, 20대 여성. 직장인 로맨스는 20, 30대 여성. 겹치는 건 20대 여성.

20대 여성이 딱 모노크롬 전담팀에 있었다. 나와 윤희.

“내가 얼마 전까지 TV를 거의 안 보는 생활을 해와서……. 윤희 씨가 더 잘 알지 않으려나?”

이전에 꽃놀이 컨텐츠 구상 회의 때, 윤희는 주말에 친구와 영화를 보곤 한다고 대답했었다.

영화를 즐겨 본다면 드라마도 자주 보지 않을까? 적어도 나보다는 많이 보겠지.

그런데 한이는 윤희에게도 이미 물어본 모양이었다.

“윤희 누나는 누가 죽거나 죽기 직전까지 가는 거 아니면 잘 안 본대요.”

“…….”

팬들과 외부 반응을 지켜보는 그녀니까 일하면서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꽤 받을 것이다.

그래서 주말에 영화 보며 힐링한다고 생각했는데.

‘업무 스트레스를 다른 쪽으로 분출하고 있었던 건가?’

예상도 못 한 정보였지만 듣고 보니 왠지 그게 윤희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그녀에게 로맨스 대본을 보여주기엔 좀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

그럼 남은 건 나인데…….

“내가 본다고 도움이 되려나?”

“이사님 안목이면 믿을 만할 것 같은데요?”

한이는 항상 다른 사람에게도 이런 소리를 잘 내뱉곤 했다.

입에 발린 소리인지 진심으로 말하는 건지 몰라도, 갑자기 훅 들어온 칭찬에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필요하다면 도와주긴 할 건데. 내 의견을 전적으로 믿지는 마.”

“에이. 이사님이 잡아서 망한 거 있었어요? 없었잖아요.”

“그…….”

……미안. 그게 너희들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당사자가 말하니까 죄책감 공격이 배가 되었다.

어쨌든 혼자서 결정하기 어렵다니까, 사소한 의견이라도 도움을 주기로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