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그 말에 다들 대답도 못 하고 행동이 멈춰버렸다.
우연히 마주친 사람이 자신들에게 사인 요청을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다는 듯한 반응.
“어…… 네, 네!”
우형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허둥지둥하며 직원이 건네는 펜을 받아들었다.
‘컬러즈’가 아니고 팬이라고 하는 걸 보니 공식 컬러즈는 아닌 모양이지만.
모노크롬을 알아보고 호감을 표시해 주니 감사한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사인 요청을 받는 건 팬 사인회 이벤트를 제외하고, 예전에 촬영장에서 마주친 이코드 멤버 이후로 처음이려나?
‘역시 공중파 방송 영향이 크긴 컸나 봐.’
나야 커뮤니티를 항상 지켜보니까 언급량이 점차 늘어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마이 엔터에서 인지도 수치가 늘어나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고.
그러나 멤버들은 그간 회사와 방송국만 왔다 갔다 했으니 예능 출연이 그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줬는지 체감할 일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증정용 앨범에 팬 사인회까지. 최근 사인이라면 질리도록 한 멤버들이라 능숙하게 종이에 사인을 채워나갔다.
‘이런 부분에선 연예인 태가 나는구나.’
누구 한 명이 크게 사인해 버리면 다른 사람이 사인할 공간이 적어지고, 위치를 잘못 잡으면 남은 여백이 애매해져서 사인 다섯 개가 같은 비율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나름대로 자기들끼리 사인 위치를 정해놨다는 듯했다.
누구는 오른쪽 위, 누구는 하단 가운데, 이런 식으로.
“감사합니다! 응원할게요!”
“아, 네. 감사합니다.”
직원이 사인 종이를 기쁘게 받아들자 멤버들은 똑같이 감사하다고 인사하며 밴이 있는 쪽으로 돌아왔다.
“진짜, 열심히 해야겠다.”
우형이 멤버들한테 말하는 건지 스스로 다짐하는 건지 모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껏 열심히 안 한 적이 없었으나 눈에 보일 정도로 사람들의 인식 변화가 생기니까 새삼스레 체감된 것 같았다.
그만큼 사람들이 모노크롬을 알아본다는 것이 기뻐 보였다.
“이제 일주일 남았으니까 남은 기간도 힘내서 마무리하자.”
“네!”
이제 남은 활동 기간은 일주일.
똑같이 이어지는 스케줄과 연습 일정에 슬슬 피곤해질 법도 하건만 멤버들은 다시 의욕적인 얼굴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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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돌판에 새로 등장한 스포츠카 홈마
오늘 새로 뜬 신인 스포츠카 프리뷰 사진.jpg
(이미지) (이미지)
…은 모노크롬
└뭔 스포츠카까지 프리뷰란 말을 쓰나 했더니 얘네엿냨ㅋㅋㅋㅋㅋㅋ
└그래서 스포츠카 왜 탔는데? 맨날 물어보면 비밀이래
└이번엔 비밀 아냐 ㅜㅜ뮤비 나온 차라서 미팬하는데 타고왔음
└얘네 요새 자꾸 보이네 바이럴인가
└니가 이제야 봤나보지 검색해봐 예전부터 글은 꾸준히 있었어
└모노크롬 요새 글뜨는거 다 웃김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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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간이 지나 <이리> 활동의 마지막 공중파 출연일. QBC의 <음악상상> 막방 날이 다가왔다.
오늘은 음악방송 스케줄에 앞서, 조금 다른 이벤트가 생겼다.
“오늘 우리 1위 후보래!”
그렇다. 내가 이 세상에 온 후 처음, 모노크롬이 음악 방송 1위 후보에 올랐다.
그것도 케이블이 아니라 공중파에서부터 후보에 오르다니!
내가 듣자마자 들고 온 소식에 멤버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저희가요?”
“여기 ‘우리’라고 할 만한 그룹이 모노크롬 말고 더 있겠어?”
음악방송 1위 후보는 일주일간의 성적을 반영해서 정하기 때문에 미리 알 수 없고, 방송 당일이 되어서야 알 수 있었다.
1위, 혹은 1위 후보는 무대 순서가 뒤로 빠진다는 소리도 있었으나.
‘모노크롬은 원래부터 뒤 순서에 가까워서 이런 방법으로는 알 수가 없지.’
이제 6년 차. 연차가 있어서 무대 순서엔 딱히 변동도 없었다.
그러니 정말 예상 못 한 갑작스러운 소식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멤버들은 눈을 끔뻑거리기만 했다.
‘저희가? 왜 저희가?’라는 느낌.
좋은 떡밥을 물어다 줬더니 당황하며 제대로 먹지를 못하던 컬러즈가 떠올랐다.
‘설마 내가 몰래카메라라도 했을까.’
무대 전에 ‘아니. 사실 장난이었어.’ 하면서 초 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오늘 후보 세 팀이 적힌 종이를 멤버들에게 보여주며 그룹명을 순서대로 불렀다.
“마이하트, 브이스타일, 그리고 모노크롬.”
맞지? 하는 눈으로 보니 멤버들은 이제야 믿는 표정.
어제 ZBS의 <가요차트>는 원래 후보가 두 팀뿐이라 모노크롬은 후보에 없었다.
<음악상상>은 후보가 세 팀이라 다른 한 자리에 모노크롬이 들어간 거고.
앞의 두 팀은 원래 우리도 예상했던 1위 후보였다.
‘그리고 예상했던 나머지 한 팀이 생각보다 활동을 빨리 종료했지.’
초대형 신인의 데뷔 앨범이라 조금 더 오래 활동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활동 기간이 짧았다.
그리고 오늘. 빈자리에 다른 팀이 들어가리라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모노크롬이 후보에 오른 것이다.
‘모노크롬이 다른 팀을 앞서다니!’
아마 이번엔 QBC에서 딴 방송 점수가 후보 선정에 도움이 좀 되지 않았나 싶다.
예능 홍보용인지 가끔 다른 QBC 방송 엔딩에 <이리> 뮤직비디오가 나오기도 했으니.
“……우리 열심히 했나 보다.”
바로 얼마 전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던 멤버들은 눈에 보이는 결과를 마주하자 환하게 웃었다.
‘우리’란 모노크롬만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컬러즈가 힘내서 얻은 점수의 영향도 대단히 컸으니.
1위 후보라는 사실에서 팬들의 응원하는 마음이 느껴진 걸까. 멤버들은 기쁜 마음으로 리허설을 진행하러 올라갔다.
다만, 우리 모노크롬 팀의 반응은 딱 거기까지였다.
“원래 1위 후보면 조금 더 조마조마하고 긴장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컴백 시기를 잡으면서 1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지만.
‘어째 다들 후보로만 만족하는 것 같아. 나만 긴장하고.’
대기실 분위기는 이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관심을 받아서 후보로 올라왔을 정도면, 가능성이 조금은 있다는 거 아니야?
난 1위 후보라는 소리에 희망적인 상상부터 했는데, 윤희는 객관적인 사실을 나열했다.
“한 팀은 원래 음원에 강한 데다가 활동 마지막 날, 다른 팀은 데뷔 때부터 1위를 차지했던 대형 신인이라서요.”
“1위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가요?”
“후보로 오른 건 기쁘긴 한데, 아무래도 그렇죠.”
지표 분석은 그녀 전문이었으니 내가 여기에 대고 ‘그래도!’를 외칠 수는 없었다.
‘……이렇게 딱 잘라 말할 정도면 성적 차이가 꽤 큰가 봐.’
갑자기 엔터 업계에 들어오기 전까진 그냥 열심히 하면 다들 차트 1위도 오르고 음방 1위도 하는 줄 알았는데.
애초에 관심이 없는 상태에서 그나마 유명 그룹 얘기만 언뜻언뜻 귀에 들려왔으니 그렇게 착각했던 것뿐이었다.
“기쁘긴 한데, 좀 아쉽기도 하네요.”
“이번 방학에 컴백 경쟁이 좀 치열하긴 했어요. 원래 방학에 컴백하면 이점이 많아서.”
학생 팬들이 학교에 가지 않으니 응원 활동에 더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이벤트를 열기도 용이하고. 방학엔 그런 장점이 있다고 한다.
생각할수록 1위와의 거리감에 아쉬움만 커져서 나는 화제를 조금 바꿨다.
“혹시 이번이 1위 후보 처음이에요?”
보통 사람들은 1위만 기념하지, 1위 후보를 기념하지는 않는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1위 후보 등극’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1위 실패’니까.
그래서인지 모노크롬의 과거 활동 자료를 볼 때도 1위 후보에 올랐다는 언급은 따로 없었다.
“아뇨, 있었어요. 케이블이었지만. 언제였더라……. <생각이 안 나> 때였을 거예요, 아마.”
“…….”
악동의 근원이 되었던 앨범이다.
이름을 왜 저렇게 지었냐면, 앨범을 계속 내려니 슬슬 제목에 쓸 만한 키워드 배리에이션이 떨어지는 바람에 마땅한 앨범 이름이 생각이 안 나서.
내 마음을 대변하듯이 적었던 앨범명이었는데 이곳에선 ‘널 붙잡을 방법이 생각이 나지 않아’ 같은 의미의 가사로 바뀌었다.
‘역시, 당시에 조금 잘되긴 했었나 봐.’
덕분에 악동 컨셉을 유지했고 그 이후는 계속 말해왔으니 생략.
그나마 공중파 첫 1위 후보라는 점은 기뻐할 만했으나, 그 이상을 노리기엔 다른 두 후보가 너무나도 쟁쟁했다.
커뮤니티에서도 귀추를 주목하는 건 인기 걸그룹과 대형 신인의 경쟁이지, 모노크롬은 아니었다.
모노크롬이 언급되는 건 이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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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ㄴㅋㄹ은 qbc에서 너무 대놓고 밀어주는거 아냐? 예능 내보내서 방송점수 몰아주고.
└6년차에 1위 한번도 못했는데 후보 한번 올랐다고 뭐라 하는건 좀 너무하다..
└아 그래? 그건 몰랏음ㅈ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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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봐도 밀어줬다기엔 상대가 안 되는 성적.
누가 봐도 견제당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서 그런가. 컬러즈 외에도 모노크롬을 좀 아는 사람들이 먼저 실드를 치고 나섰다.
좋지 않게 보던 사람들도 사정을 알게 되자 불쌍했는지 드러냈던 발톱을 금방 집어넣었다.
‘견제와 동정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니.’
견제보단 동정이 차라리 스트레스를 덜 받으니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니, 동정 쪽이 더 입이 쓰긴 한데.
연차 덕분에 뒤 순서였던 멤버들은 본방송 무대를 마치고 여유롭게 쉴 틈도 없이 금방 다시 엔딩 무대 위로 올라갔다.
평소 같았으면 오늘도 칼퇴크롬이었을 텐데, 이번엔 1위 후보라서 무대 맨 앞에 섰다.
후보팀을 잡는 카메라 중 하나가 모노크롬에게 붙었다.
한이는 카메라를 의식하며 손가락 하트를 앞으로 쭉 내밀었다. 옆에서 해랑이 그 팔을 끌어내리고.
‘좀 차분히 있으란 뜻이겠지.’
그래도 한이는 굴하지 않고 다시 하트를 내밀었다.
멤버들도 다른 그룹들과 자신들의 성적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아는 걸까. 그리 긴장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멤버들이 자꾸 한이의 팔을 끌어내리며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가 보다.
자신들을 위한 자리가 아닌 걸 알아서.
한이도 알지만 기왕 카메라가 붙은 김에 팬들에게 팬서비스나 하자는 마음인 것 같고.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게 더 아프니까…… 1위를 못 할 게 확실하다면 기대를 안 하는 쪽이 낫긴 한데.’
씁쓸해지는 이 마음은 뭘까.
1위를 노리진 않았지만 저렇게 후보로 서 있으니까 괜히 헛된 기대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내가 계속 모니터링용 화면 앞에 서서 시선을 못 떼고 미련을 보이자 윤희는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지금 컬러즈가 아마 이사님 같은 마음일 거예요.”
……그렇지. 컬러즈는 나보다도 더 간절하겠지.
나야 직원으로서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봐야 하는데, 그들은 항상 이상을 꿈꾸는 사람들 아니던가.
“그런데 저흰 바로 옆에 있으니까. 실망하는 얼굴 보여주는 것보다 그냥 수고했다고, 잘했다고 말해주는 게 낫죠.”
“……네.”
나만 너무 긴장하길래 다들 애초에 기대감이 없는 줄 알았는데.
기대하지 않거나 향상심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멤버들과 지금껏 여러 실망스러운 일을 겪어온 직원으로서 하는 얘기였다.
더 상처받지 않도록 하는 방어기제 같은 것.
“다들 바라고 있으니까 언젠가, 다음에.”
“……제가 진짜 꼭 1위 받게 만들 거예요.”
언제 어떻게 해내겠다는 확신까지는 없었으나 확실하게 이뤄야 하는 목표였다.
그녀가 말한 ‘언젠가’는 과연 어디까지를 보고 말한 건지 모르지만, 윤희는 내 말을 듣고 웃었다.
곧이어 화면 속에선 1위를 축하하는 꽃가루 폭죽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