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원래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 기억에 오래 남는 게 맞긴 해. 맞긴 한데!’
모노크롬을 확실히 기억해 준다는 건 좋은데, 이런 식으로 기억에 남는 게 과연 좋은 일인가.
‘컬러즈도 망돌 이미지를 퍼트리려고 한 건 아닐 텐데.’
팬에게 ‘좋아하는 그룹이 거지 같은 소속사에 있어서 힘들었겠다.’라고 하면 ‘네가 내 맘을 알아주는구나.’ 하며 감동할 텐데, ‘망돌 파느라 힘들었겠다.’ 하면 그건 싸우자는 소리였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듯이, 같은 내용에서 비롯된 말이라도 뉘앙스는 이렇게 천지 차이였다.
‘……그래도 인기가 없었다고 하니까 괜히 한 번씩 더 관심을 가져주는 것 같기도 하고.’
잘나가면 괜히 ‘헹. 난 관심 없음.’이라면서 오기로라도 관심을 안 두려는 사람이 많지만, 잘 못 나간다고 하면 ‘잘됐으면 좋겠네. 응원함.’이라면서 동정 어린 응원을 보내는 사람이 많았다.
불쌍한 이미지로 알려진 탓에 진입 장벽이 낮아진 것은 다행인데, 어쨌든 내 목표는 음악대상.
모노크롬도 언제까지나 이런 이미지로 남아선 안 된다.
‘음……. 좀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보자.’
팬들에겐 멤버들이 숨 쉬는 것조차 흥미로울 테니 컬러즈 시점에선 말고.
다른 사람들도 관심을 보일 만한 모노크롬의 이미지가 뭐가 있을까.
그나마 최근엔 카피바라 같은 별명이 생겼지만, 이건 다른 아이돌과 함께 있을 때의 얘기니까 우리가 나서서 영업하기엔 어려운 점이 있었다.
다들 각자의 스케줄이 있을 텐데 친분 과시하자고 막 불러올 수는 없으니까.
‘그거 말고는…… 팬들한테 잘하는 이미지?’
컬러즈가 열심히 올리던 영업글 중에 좀 주목받는다 싶은 것은 주로 뷰이라이브, 팬 사인회처럼 팬들과의 소통을 위한 컨텐츠가 많았다.
그런 종류라면 뉴마에서도 얼마든지 컨텐츠나 이벤트를 지원할 수 있다.
마침 지금은 활동 기간이니 원래 기획하던 것도 있었고.
난 생각난 김에 멤버들이 있는 연습실로 내려갔다.
“운전면허 있는 사람?”
우형이 면허가 있는 건 이미 아는 정보였다. 저번 사전 녹화 때 보통면허를 가지고 있다는 TMI를 들었으니.
뜬금없는 내 질문에 준해를 제외하고 전부 손을 들었다.
준해는 바쁜 대학생이라 면허까지 딸 시간이 없었을 테지.
“어디 가시게요?”
“아니. 나 태워달라는 게 아니고.”
내가 설마 멤버를 개인 기사로 쓰려고 물어봤겠어.
자신이 아이돌이란 걸 전혀 의식하지 않은 편견 없는 대답이었다.
‘착한 건 좋은데, 이러니까 뉴마에 호구 잡히지.’
인터넷에 잘 정리된 뉴마의 만행을 읽고 왔더니 자연스레 이 생각부터 들었다.
난 씁쓸하게 웃어넘기며 본론을 꺼냈다.
“전에 뮤직비디오 촬영할 때 너네도 봤잖아. 스포츠카.”
“네.”
갑자기 나온 스포츠카 얘기에 다들 눈을 멀뚱멀뚱 뜨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미니 팬미팅 때 그거 잠깐 빌릴 건데 운전할 사람?”
“…….”
면허 있다고 손을 들었던 우형이 바로 손을 내렸다.
“그거…… 긁히기라도 하면…….”
스태프에게서 들었던 집 한 채 가격이 문득 생각났는지 급격히 소심해진 모습이었다.
혹시나 긁힌다고 해도 수리 비용을 멤버들한테 부담시키진 않을 테지만.
자기 차도 아니고 남의 차인데 괜히 문제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며 몰고 싶지 않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전 뮤직비디오 촬영할 때 타 봐서.”
재민도 보험 처리해야 할 경우를 상상했는지 슬금슬금 손을 내려 등 뒤로 숨겼다.
무서운 것에 약하면 이런 현실적인 공포에도 약한 걸까.
하필이면 딱 귀신을 무서워하는 세 사람만 손을 내린 상태였다.
“그럼 마침 잘됐다.”
남은 것은 해랑과 한이.
마침 필요한 인원이 두 사람이었던지라, 더 시간을 들이지 않고 바로 예상했던 계획을 진행할 수 있었다.
***
━━━━━━━━━━━━
오늘 뮤더라 퇴근길에 스포츠카 비싸보이는거 한대 지나가서 주변에 있던 사람들 다 와 저거 얼마짜리냐 이런 소리 하면서 구경함ㅋㅋ
@그거 아이돌 타고있었대
@@엥ㄹㅇ?
━━━━━━━━━━━━
***
컴백주가 끝나고 사전 녹화 없이 본방송으로만 음악 방송에 출연 중인 모노크롬.
일정에서 사전 녹화가 빠진 만큼 시간이 늘어나 여유가 생긴 덕에, 오늘은 미니 팬미팅 시간이 따로 마련되었다.
미니 팬미팅은 팬미팅이라는 이름이 붙지만 공연장에서 하는 팬미팅 공연과는 매우 달랐다.
정말 말 그대로 ‘미니’한 ‘팬’과의 ‘미팅’. 간소하게 자리를 마련해서 얼굴 보고 잠깐 대화 나누는 자리.
간단히 말하자면 퇴근길 인사를 조금 더 길게 한다고 보면 됐다.
모노크롬 공식 팬카페에 공지된 미니 팬미팅 장소는 방송국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주차장 옆 작은 공원.
가끔 음악 방송에 출연하는 아티스트들이 이렇게 미니 팬미팅을 열곤 하는 곳이었다.
본방송에 참여했던 소수의 컬러즈와, 마침 시간이 나서 올 수 있었던 컬러즈들이 모였다.
“헐! 저거 우리 애들 뮤직비디오에 나왔던 차 아니에요?”
누군가 옆 사람과 대화하다가 지나가는 차를 봤는지 도로를 가리키며 외쳤다.
기다리느라 심심했던 컬러즈들도 그 소리에 흥미를 느끼고 곧장 도로로 시선을 옮겼다.
속도를 내면서 순식간에 쌩하고 지나가야 할 것처럼 생겼는데, 스포츠카치고는 느린 속도로 주행 중이라서 모두가 발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나가다가 흔히 볼 수 있는 차는 아니었기에 확실히 눈길을 끌었다.
“이쪽으로 오는데?”
“여기 주차장 들어오려나 보다.”
금방 지나가려나 싶던 차는 천천히 컬러즈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공원 바로 앞이 주차장이었으니 차가 들어오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뒤에는 연예인 밴이 따라오고 있었는데, 방송국 근처라 연예인 밴이 지나가는 걸 몇 번 봐서 다들 그러려니 했다.
그래도 평범하지 않은 수상한 등장. ‘설마? 혹시?’ 하는 마음에 자연스레 시선이 따라붙는 것은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설마’가 맞았다.
“안녕. 컬러즈~.”
“와악!”
스포츠카 뒤에서 따라오던 밴이 컬러즈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창문이 내려가면서 보이는 얼굴에 컬러즈는 한 박자 늦게 놀랐다.
밴 뒷좌석 창문을 통해 보이는 건 멤버 셋. 그렇다면 그 앞에 있는 스포츠카는?
컬러즈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 앞에 있는 스포츠카로 향했다.
그리고 스포츠카의 창문이 내려가자 컬러즈의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해랑. 그리고 그 너머 운전석엔 한이가 앉아 있었다.
“허헉. 직접 운전하고 온 거야?!”
“미, 미쳤나 봐. 영화 보는 줄 알았어.”
음악 방송을 마치고 곧바로 이곳으로 온 터라 멤버들은 모두 무대 의상을 입은 채였다.
마침 오늘 의상은 뮤직비디오 스타일의 의상. 스포츠카까지 더하여 정말 뮤직비디오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비주얼이었다.
게다가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노을빛이 잔잔하게 내려앉아 마치 영화를 감상하는 기분이었다.
바로 내리려나 했는데 조수석에 있던 해랑이 한이를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말했다.
“잠깐만요. 얘가 완전히 세워야 내릴 수 있어서.”
그러나 운전석에 앉은 한이는 재밌는 듯이 몸을 쭉 빼고 컬러즈에게 물었다.
“후진하는 거 보여줄까요?”
“네에!”
설레는 남친 모멘트에 그런 게 있었다. 조수석에 한쪽 팔을 올리고 뒤를 보며 후진하는 모습이 멋있다던가.
물론 이렇게 수십 명이 와글와글 모여서 구경하는 상황은 포함되지 않았을 테지만.
한이는 한껏 멋 부리며 1m 정도 후진하고는, 어디서 뭘 대충 봤는지 정차 시 조수석에 앉은 여친 앞을 팔로 막아주는 시추에이션을 대충 재현해냈다.
조수석에 앉은 바람에 한이의 멋 부림에 이용당한 해랑은 그저 성가시다는 표정이었다.
두 사람의 그런 온도 차가 컬러즈에겐 더욱 재밌었다.
“아이고. 우리 애가 후진을 한다.”
“개 멋있어. 운전 천재.”
컬러즈는 차가 움직일 때마다 “오오~.” 하며 반응했다.
마치 운전면허 기능 시험에 25번은 떨어진 재응시자를 응원하는 듯한 리액션.
별거 아닌 주행이었지만 컬러즈에겐 웬만한 레이싱 경기보다 재밌는 장면이었다.
한이는 그렇게 한차례 운전 실력을 뽐내고는 드디어 차를 세웠다.
차 문이 위로 열리자 컬러즈는 또 “와아~.” 하며 신기해했다.
“뒤에서 보는데 가관이더라, 진짜.”
“형이 좀 멋지게 몰아보든가.”
번쩍거리는 스포츠카로 보여준다는 게 고작 몇 미터 전진, 후진하는 것이라니.
밴에서 내린 우형이 한이의 운전 쇼에 대한 감상을 내뱉자 한이는 반격하고 나섰다.
“왜 제가 운전대 잡았는지 알아요? 이 형이 자긴 간이 작아서 도저히 못 몰겠다고…….”
“2인승이라 동생들한테 양보한 거예요.”
멤버들은 모여서 어쩌다 이런 등장을 하게 되었는지 컬러즈에게 설명했다.
“밟으면 속도 얼마나 나오냐고요? 모르겠어요. 무서워서 천천히 몰았더니.”
“천천히 달리는데도 아무도 빵빵 안 거리더라고요.”
도로에 집 한 채가 굴러다니는데 누가 뒤에서 비키라고 클랙슨을 울리겠냐마는.
컬러즈는 안전 운전이 최고라며 이 또한 칭찬했다.
그렇게 멤버들은 누가 스포츠카에 탈지 정하던 얘기, 오늘 음악 방송에서 있었던 얘기 등을 하며 모인 컬러즈와 소통했다.
“저희는 뒤에 또 할 일이 있어서…….”
“어디 가요?”
노을빛도 차차 사라져 어둑해지기 시작하고, 멤버들도 컬러즈도 슬슬 해산할 시간이 다가왔다.
시간이 늦었는데도 또 일이 있다는 말에 컬러즈는 궁금해했다.
“그건 비밀.”
어째서인지 항상 비밀이 많은 멤버들이지만 컬러즈도 이에 큰 불만은 없었다.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좋은 컨텐츠로 돌아온다는 것을 몇 번 경험해서 알았으니 얼마든 기다릴 수 있었다.
멤버들이 돌아갈 땐 이번엔 해랑이 운전석을 차지했다.
운전에 지원한 멤버가 두 명이니 한 번에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자는 주인의 의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다란 다리로 영화처럼 탑승해서는 또 천천히 안전 운행을 하는 모습에 더욱 격차가 느껴졌다.
[우리 애들 퇴근하는 것좀 봐 겉모습은 슈퍼카 속도는 장난감차 ㅜㅋㅋㅋㅋ]
[안전운전 캠페인 모델로 모노크롬을 추천합니다.]
그렇게 컬러즈에게 마지막까지 웃음을 안겨준 멤버들은 퇴장하여 장소를 옮겼다.
***
스포츠카는 정말 미니 팬미팅 등장에만 쓰려고 렌트한 것은 아니고 장소를 옮겨 사진 촬영도 진행했다.
활동마다 컨셉에 맞춰 사진을 찍어뒀다가 나중에 1년을 돌아보는 식으로 공개를 할 예정이었으니까.
‘기왕 돈 쓴 김에 알뜰살뜰하게 써먹어야지.’
이젠 회사에도 계획을 세우고 지출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기에 끼워 넣은 일정이었다.
아직 세세하게 기획된 것은 아니었으나 사진이야 언제 어느 용도로든 활용할 수 있으니 데이터를 쌓아둬서 나쁠 것은 없었다.
이런 늦은 시간에 촬영을 진행하는 것도 이유가 있었다.
<이리>의 배경이 밤의 도시였으니 한강 둔치에서 야경과 콘크리트 구조물을 배경으로 찍으면 좋지 않을까 하고.
“악! 모기!”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의 시추에이션이 재현되긴 했지만.
나는 오늘도 멤버들에게 모기 기피제를 뿌리는 역할이었다.
밤늦은 시간에도 반납할 수 있다기에 촬영이 끝난 후엔 그대로 차를 반납하러 갔다.
“저, 사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반납할 때 서명 필요한가요? 아마 렌트가 이사님 성함으로…….”
직원이 먼저 차에서 내린 멤버들에게 다가가서 말하자 우형이 나를 부르기 위해 뒤돌았다.
그러자 직원은 손사래를 치며 그를 말렸다.
“아뇨, 아뇨! 저 팬이라서. 방송 잘 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