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재민아, 토끼 그려주면 안 돼요?”
“토끼요? 토끼는 간단하지.”
사인하면서 하트를 그려달라, 스마일을 그려달라 하는 식의 요청은 가끔 있었다.
어차피 사인 시간 내에 하는 것이었기에 멤버들도 무리한 요청이 아니라면 들어주는 편이었다.
그리고 특히 재민에게 자주 오는 요청은 ‘간단히 동물을 그려달라’였다.
컨셉 스포로 올라온 늑대 그림 이후로 재민의 그림 실력이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허헉. 어머, 어떡해.”
재민이 거침없이 펜을 움직이자 컬러즈의 입에선 귀엽다는 뜻인지 무섭다는 뜻인지 모를 ‘어떡해’가 튀어나왔다.
늑대는 원래 맹수이기라도 하지, 귀여운 초식동물인 토끼가 재민의 손에서 재해석되며 사나운 육식동물처럼 변해갔다.
“그림 천재다, 정말.”
“그쵸?”
컬러즈는 다들 대단하다며 칭찬만 했기에 재민은 그림에 대한 자신감이 날로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의 해랑과 한이는 스윗함을 담당했다.
평소 냉미남으로 통하는 해랑이 실제로 보면 인상이 부드럽다는 이야기가 컬러즈의 입을 통해 퍼져나갔다.
원래의 이미지가 있었기에 그 갭 때문에 반대되는 인상이 더욱 두드러진 것이기도 했다.
원조 멜로 눈빛으로 유명하던 한이는 그 소문을 듣고 혼자 위기감을 가졌다. ‘그럼 나는 지적이고 쿨한 이미지로 나가겠다’고 했다가 해랑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그래도 제가 글씨는 제일 괜찮죠?”
“준해 말이 다 맞다.”
준해는 막내답게 귀여움을 담당 중이었다.
귀여운 행동을 하지 않아도 팬들 눈엔 뭐든 귀여워 보였기에 어딜 가서 뭘 하든 귀여운 막내였다.
평소에도 멤버들에게 우쭈쭈를 받고는 하던 준해였기에 컬러즈의 오구오구에도 익숙했다.
가끔 여동생 나이 또래의 컬러즈가 어떤 기분으로 자신을 귀여워하는 건지 궁금하긴 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보고도 귀엽다고 느끼는 게 사람이니까.
원래 귀여움 콩깍지가 가장 강력한 법이고 그런 관심을 받는다는 게 기분 나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오늘 이벤트의 관건은 그 사이에 낀 우형이었다.
“오빠 얼굴에 뭐 묻었어요.”
“잘생김이요?”
우형을 울리지 말자는 의견이 있었기에 컬러즈는 우형에게 사인 받을 순서가 되면 흔한 드립이라도 하나씩 던졌다.
‘얼굴에 김 묻었어요, 잘생김.’은 주접계의 전통문화라고 할 정도로 워낙 유명했기에 팬 사인회에 익숙지 않은 모노크롬도 알 수밖에 없었다.
저번 팬 사인회에서 자신이 울었던 것을 의식하고 일부러 웃기게 해 주려는 컬러즈의 노력이 우형의 눈에도 보였다.
그래서 오늘은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고자, 능숙하게 받아치려고 대답했는데.
“아, 아니, 물론 잘생겼지만……. 다정함이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다정, 그…… 아.”
“큽.”
우형은 자신이 혼자 얼굴을 자화자찬한 상황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멈칫했다.
옆에서 잠시 다음 순서를 기다리던 한이가 그 모습을 보고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그리고 웃는 대신, 재빠르게 마이크를 들었다.
“여러분, 지금 우형 씨가 뭐라고 하셨는지 아십니까?”
사인하면서 하는 대화는 마이크를 대고 하는 게 아니라 남들에겐 들리지 않았다.
대기하던 컬러즈들은 방금 우형과 컬러즈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몰랐기에 “뭔데?” 하면서 궁금함을 표했다.
한이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우형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야! 조용해! 아까 그건 잊어주세요. 비밀, 알죠?”
“비밀! 알죠, 알죠.”
일단 비밀이라고 말하면 통하는 게 모노크롬과 컬러즈 사이의 룰이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모노크롬과 컬러즈 사이에서 통하는 이야기일 뿐, 모노크롬 내부에선 통하지 않았다.
“자기얼굴에잘생김이묻은건비밀이래요!”
사인도 마저 해야 하니 계속 붙잡고 있을 수 없었기에 우형이 한이를 놔주자, 한이는 숨도 쉬지 않고 속사포처럼 폭로했다.
하필이면 오픈된 장소에서 이뤄지는 공개 팬 사인회.
지나가던 쇼핑몰 이용객들에게까지 우형의 나르시시스트 발언이 알려지고 컬러즈들은 이 상황을 즐거워하며 웃었다.
얼굴 보여주겠다고 나온 자리에서 얼굴을 가릴 수도 없는 우형은 부끄러움을 참아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부끄러워지는 상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오빠, 저 티슈 가져왔는데.”
“티슈…….”
컬러즈가 눈물 닦으라고 가져온 티슈를 보고 우형은 또 몰려오는 민망함을 티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애초에 선물 금지라 받을 수 없었으나 이걸 선물이라고 봐야 할지도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받으면 다음에 또 누군가가 티슈를 한 박스 가져올지도 모르니 “오늘은 정말 안 울 거니까 괜찮아요.”라는 대답으로 잘 넘어갔다.
컬러즈 보는 앞에선 최대한 안 울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시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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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왜 우형이 늑대귀 쓰고있어? 울었어?ㅠㅠ
└기왕 준비했는데 한명도 안울어서 아쉽다고 눈물연기 시합했는데 꼴찌함
└아니대체왜 ㅠ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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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방송 제작진은 신기하게도 출연 아이돌의 소식을 뭐든지 알고 있었다.
공식으로 뜨는 소식뿐만 아니라 소소한 에피소드나 팬들 사이에 도는 이야기까지 어디선가 다 지켜보고 있는 느낌.
‘우리로 치면 거의 팬 매니저 같은 사람이 있나?’
소식을 전부 알고 있다가 음악 방송 공식 SNS 계정에 사진을 올리거나 무대 영상을 올릴 때 그와 관련된 멘트를 달아서 업로드하고는 했다.
그러면 팬들은 친근감을 느끼며 긍정적인 피드백을 하고 방송도 이미지가 좋아지고. 스태프의 노력으로 그런 선순환이 이루어졌다.
오늘은 케이블 음악 방송 중 하나인 <뮤직더라이브> 방송일.
모노크롬이 팬 사인회에서 늑대 귀 머리띠를 쓴 것이 <뮤직더라이브>의 작가 귀에도 들어갔는지 별도의 요청 사항이 있었다.
“이번에 컴백하는 가수분들이 짧게 타이틀을 소개하는 코너인데요. 한 분이 뉴스 리포터처럼 멘트를 읽어주시면 뒤에서 다른 멤버분들이 사건 현장을 연기해 주시면 돼요.”
사전 녹화 진행 후 본방송 전까지의 긴 대기시간을 이용해 촬영하는 짤막 소개 코너였다.
애초에 높은 퀄리티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바로 찍어서 바로 편집해 방송에 나가는 듯했다.
“팬 사인회에서 쓰셨던 늑대 머리띠. 혹시 지금도 가지고 계시나요?”
“네. 일단 벌칙용이라 계속 들고 다니고는 있는데.”
울지 않기 미션이 꽤 재밌었는지 멤버들은 팬 사인회장을 벗어나서도 미션을 이어나갔다.
슬퍼서 우는 게 아니더라도 무슨 이유로든 눈물이 나면 벌칙으로 머리띠를 쓰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만 해도, 새벽에 사전 녹화를 준비하며 한이와 재민이 하품을 했다가 한 번씩 썼던 참이었다.
덕분에 눈물이 나서 아이메이크업이 번지는 일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었다.
“저희 소품실에 있던 건 좀 더 귀여운 편이라. 늑대가 아니라 강아지 같기도 해서요.”
작가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이 준비해온 머리띠를 꺼내 들었다.
확실히, 우리가 가진 건 긴 털이 달려서 좀 더 리얼한데 이건 회색 강아지 인형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귀여운 맛이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이건 준해가 쓰고 이건 해랑이가 쓰면 어때? 아기 늑대랑 어미 늑대처럼.”
“어미……?”
귀여운 쪽을 준해에게, 우리가 가진 리얼한 쪽을 해랑에게 건네며 말했다.
준해만 보면 강아지를 떠올리는 컬러즈가 요샌 아기 늑대라며 주접을 떨던 게 떠올라서 고른 포지션이었다. 해랑은 그 준해가 공식 이리로 밀고 있으니까.
내 ‘어미 늑대’란 표현에 해랑은 머리띠를 순순히 받아들면서도 이상하단 듯이 말끝을 올렸지만 그 이상의 불만은 표하지 않았다.
“그리고 뉴스 리포터 역 한 명이랑, 일반인 역이랑…….”
난 대본을 보며 나머지 멤버들에게 역할을 분배했다.
작가가 써온 대본은 ‘속보, 야생 늑대가 나타났다!’라는 내용으로 뉴스를 중계하는 식이었다.
늑대 역을 맡은 두 사람이 일반인 역을 맡은 우형을 습격한다.
그러면 옆에서 한이가 나타나 <이리> 앨범 재킷 이미지의 번쩍이는 달 모양으로 달빛 파워 같은 걸 쏘고, 늑대가 뾰로롱 인간으로 변하는 스토리.
원래는 달빛을 받으면 인간으로 변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늑대로 변하는 것이었지만, 진지한 내용은 아니기에 그냥 넘어갔다.
‘이것도 앨범에 반사되는 빛이 달빛 같다고 한 얘기를 들어서 아는 걸까?’
다른 음악 방송 사전 녹화 때 있었던 일인데 그걸 어찌 알고. 팬들의 SNS나 커뮤니티를 보고 안 것이라면 감탄할 만한 서치력이었다.
따로 긴 준비가 필요한 내용은 아니었기 때문에 멤버들은 내용을 대충 숙지한 후 바로 촬영에 들어갔다.
뉴스 리포터 역을 맡은 재민이 마이크를 들고 먼저 카메라 앞에 섰다.
“모노크롬 뉴스 명재민 기자입니다. <뮤직더라이브> 촬영 현장에 야생 늑대가 나타났다고 해서 그 현장에 나와 있는데요. 앗! 바로 저기, 늑대가 사람을 습격하고 있습니다!”
뉴스 리포터라기엔 발랄한 멘트가 끝난 후 카메라 앵글이 옆으로 돌아가면, 그곳엔 일반인을 습격하는 늑대 둘이.
“살려주세요…….”
우형은 몸을 수그리고 있고 해랑과 준해가 인디언밥을 하듯이 양손으로 가볍게 그의 등을 때렸다. 나름대로 늑대의 습격을 순화하여 표현한 것이었다.
늑대 역을 맡은 두 사람은 연기보단 장난에 가깝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손놀림이 신나 보였다.
“아니, 이런 곳에 늑대가!”
대본에 적힌 순서대로 앵글 밖에서 한이가 어린이 드라마 같은 대사를 뱉으며 나타났다.
‘그런데 왜 이것도 잘하는 거지.’
가수들의 어설픈 연기가 이 코너의 매력인 것 같은데, 한이가 능청스럽게 잘하니 연극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늑대에게 습격당하는 사람을 도와줘야 할 한이는 은근슬쩍 늑대 둘 사이에 껴서 우형을 같이 때렸다.
“야. 방금 때린 거 너지.”
손이 하나 더 늘어난 것을 알아챘는지 우형이 정색하며 일어났다.
“허억. 등에 눈이 달렸나?”
“아. NG 났잖아요.”
한이는 무서운 척을 하고, 준해는 신나게 때리고 있었는데 우형이 일어나서 흥이 깨졌는지 우형을 탓했다.
우형이 카메라 감독에게 미소로 양해를 구하고 다시 촬영에 들어갔다.
이번 테이크에도 한이는 기어이 우형의 등짝을 한 대 또 때렸다.
“달빛이 있으면 늑대도 평범한 인간으로 만들 수 있어!”
“지금은 낮인데 어떡하죠?”
“괜찮아. 이 모노크롬 미니 앨범 <이리>가 있으면.”
한이가 들고 있던 앨범을 얼굴 옆으로 들어 올리며 카메라를 응시했다.
대놓고 하는 PPL. 아니, 어차피 타이틀 소개 시간이니까 직접 광고인가?
지켜보니 점점 홈쇼핑이 되어가는 것 같아서 이게 과연 괜찮은가 걱정스러웠지만 괜찮으니까 대본에 있는 거겠지.
‘한이한테 시키길 잘했어.’
민망해하지 않고 능숙하게 넘어가는 덕분에 촬영도 빨리 진행되었다.
그렇게 한이가 앨범을 들이밀면 늑대 역할의 두 사람이 머리띠를 벗고 인간이 된다.
마지막은 다섯 명이서 어깨동무를 하고 “와~.” 하면서 화목해지는 전개.
“도시에 나타난 늑대의 이야기가 더 궁금하시다면 채널 고정!”
마이크를 들고 있던 재민의 엔딩 멘트로 촬영은 무사히 종료되었다.
그리고 본방송 시간이 되었을 때, 타이틀 소개 영상은 엔딩 멘트로 끝난 게 아니라 몇 초가 더 송출되었다.
재민이 “늑대야, 손!” 하면서 손을 내밀고 준해가 그 위에 자신의 손을 척 올려놓는 장면.
촬영이 끝난 줄 알고 장난친 것이었는데 제작진 눈에 재밌었는지 편집점이 그렇게 잡혀 있었다.
[우리 준해 인간 덜됐는데요 ㅜㅜㅋㅋㅋㅋㅋㅋ]
[내가 티비보다 갑자기 이마 팍팍 치고있으니까 엄마가 뭔일이냬..아니 우리 애가 손을 할줄 안다고요 세상에 이런 천재멍뭉이가??! 해외토픽감이다]
컬러즈는 그 장면을 보고 또 아기 늑대 주접을 늘어놓았다.
어쩌다 보니 인간의 모습이지만 늑대의 본능이 남아있다는 컨셉까지 충실히 지킨 멤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