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107화 (107/430)

# 107화

장마가 시작됐다.

눈 뜨자마자 창밖으로 비가 오는 것을 확인한 나는 꿉꿉하게 하루를 시작했다.

비 오는 날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잠은 푹 잤는데도 공기의 밀도가 달라진 탓에 괜히 몸이 더 무겁게 느껴져서 전혀 상쾌하지가 않았다.

햇살이 안 들어오니 아침 같지도 않고. 침대에 더 누워있고 싶었지만 빗소리와 함께 초침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미적대도 시간은 무심하게 부지런히 흘러가기만 한다.

‘기분이 별로라고 회사를 쉴 순 없으니.’

무거운 몸을 이끌고 출근을 준비하는데 기분만큼이나 머리카락도 축축 처졌다.

어깨에 닿지 않던 내 단발은 습기 때문에 어중간한 길이가 되어 딱 그 존에 돌입하고 있었다. 일명 거지존.

‘……마음에 안 들어.’

컬을 살리려 애써도 다시 애매하게 풀려버리는 머리를 포기하고 빗을 내려놨다.

이번 주말엔 미용실이라도 들러서 좀 더 가볍게 커트해야겠어.

머리카락이 점점 길어지는 것을 보면 시간이 지나가는 것도 체감되고…… 아무튼,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래서 관리하기는 귀찮아도 내내 단발을 유지 중이었다.

불만 가득한 아침을 맞이했지만, 한편으로는 지금 비가 온다는 것에 안심이 되기도 했다.

‘비 오기 전에 촬영 먼저 해서 다행이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일기예보를 체크하며 얼마나 기상청과 눈치 싸움을 했던가. 다행히 우리는 그 눈치 싸움에서 승리했다.

예능 촬영이나 뮤비 촬영 등의 일정과 장마 시기가 겹치지 않은 것이 가장 다행이었다.

‘이거면 됐지.’

일정까지 지장이 갔으면 지금쯤 더 기분이 안 좋았을 터였다. 그냥 이렇게 혼자 기분 꿉꿉하고 마는 게 훨씬 낫지.

나는 그런 생각을 곱씹으며 축축 처지는 기분을 억지로 털어내고 출근했다.

지금 나에게 회사라는 공간이 그리 기피하고 싶은 공간은 아닌지, 회사에 도착하니 그나마 기분이 나아졌다.

“너도 머리가 습기 많이 먹는 타입이구나?”

나처럼 머리카락이 평소보다 처진 상태의 한이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한이는 앞머리가 눈 근처까지 내려오는 게 거슬리는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다가, 손가락으로 몇 가닥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비 올 때면 맨날 이래요. 머리카락이 자꾸 눈도 찌르고. 조금만 자를까요? 좀 있으면 활동해야 하는데.”

“여름이니까 좀 더 짧은 것도 괜찮을 것 같아. 헤어샵 선생님이랑 상의해 봐.”

연예인은 헤어스타일을 변경할 때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고 회사와 상의해야 했다.

가수, 그중에서도 특히나 아이돌은 앨범 컨셉에 맞춰 비주얼도 달라지기 때문에, 앨범 활동 기간엔 재킷 사진과 비슷하게 유지하는 게 일반적.

해랑이 예전에 새빨간 헤어를 유지하느라 독한 탈색을 반복했던 것도 바로 그 이유에서였다.

모노크롬도 이미 재킷 사진 촬영이 끝난 상태라 한동안 지금 스타일을 유지해야겠지만, 많이 바꾸지 않고 조금 가볍게 치는 정도면 나쁘지 않아 보였다.

여름이라 활동 기간 내내 습도가 높을 텐데 이렇게 눈을 찌를 듯 말 듯한 길이의 앞머리로 덮여 있으면 오히려 답답해 보일 수 있으니까.

“아, 안녕하세요.”

한이와 헤어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이번엔 준해가 나타났다.

머리카락이 처지는 한이와는 반대로 머리카락이 더 곱슬거리는 준해를 보고 나는 또 웃었다. 머리카락조차 이렇게 개성이 강하다니.

준해는 내가 자신을 보자마자 웃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왜…… 웃으세요?”

“너 웃기게 생겼대.”

“아니. 머리가 복슬복슬해서.”

“아.”

웃기게 생겼다는 말에 한이에게 또 주먹을 날리려던 준해는 내 말에 손가락으로 대충 머리카락을 빗어 내렸다.

“제가 반곱슬이라. 그래도 헤어쌤이 세팅 별로 안 해도 된다고 좋다고 하셨어요.”

“그건 부럽네.”

나름의 장단점이 있는 듯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카락이 습도에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 멤버는 이 두 명인 것 같고, 뒤이어 마주친 재민은 원래 생머리라 큰 변화는 없건만 왠지 오늘따라 표정이 뚱했다.

이쪽도 기분이 표정에 다 드러나는 타입이라 나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넌 또 표정이 왜 그래?”

“그냥. 비 오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나랑 비슷한 이유였군.

그래도 나는 좀 움직이니 기분이 나아졌는데 이쪽은 메인 댄서라 그런지 조금 더 주변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 듯했다.

과학적으로도 저기압이 몸에 영향을 주긴 하니까.

“나도 비 오는 날 별로야. 무릎도 좀 쑤시는 것 같고.”

“맞아요, 아니. 아니요.”

뭐가 맞고 뭐가 아니란 거지.

재민은 내 얘기에 바로 대답하더니 또 바로 부정했다.

‘젊은 애가 무릎 쑤신다는 소리에 왜 벌써 공감을…….’

……하고 생각하다가 떠올렸다. 혹시 비 올 때면 다쳤던 다리가 조금 안 좋은가.

움직이는 데에 무리는 없더라도 한 번 다친 부위가 기후에 따라, 컨디션에 따라 일시적으로 아픈 건 꽤 흔하게 있는 일이었다.

내가 오기 전, 뉴마는 재민에게 후유증이 없을 거란 보장을 하라고 닦달한 적이 있었으니 그 기억 때문에 티를 내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점을 들쑤시는 건 별로 좋지 않을 듯해서 나도 모르는 체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이렇게 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나 말고도 제법 많아 보였다.

‘해라도 난 상태에서 오면 그래도 이쁜데.’

그 여우비를 내리는 장본인인 우형이 보이길래 별생각 없이 ‘비 좀 그치게 해달라’고 말하자.

“비 내리는 거 저 때문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장난이었어.”

물론 내가 그런 소리를 하긴 했는데, 촬영 날 여우비가 오는 걸 벌써 두 번이나 경험하지 않았는가.

미신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우연이 여러 번 겹치면 그냥 믿게 된단 말이지.

장난이라는 소리에 우형은 “해랑이 불러와야겠다…….” 하고 똑같이 농담하며 사라졌다.

원래 내리다 그치다 하는 게 장맛비였지만 기세를 보니 오늘 비는 쉽게 그치지 않을 것 같았다.

***

“세이브! 세이브!”

비가 거세게 내린다 싶더니 결국 사달이 났다. 어디선가 문제가 생겨 차단기가 내려갔는지 정전이 된 것이다.

녹음실의 전등이 조금 불안하게 깜빡거리는 것 같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픽 꺼져버렸다.

방이 어두워지자마자 세이브부터 외친 우형은 모니터에 뜬 저장 완료 메시지를 확인하고 나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후우. 녹음한 거 날아갈 뻔했다.”

지금껏 작업하다 정전이 된 적은 없었기에 녹음실 장비에 비상 전원이 있다는 것을 지금 처음 알게 되었다.

복도까지 전부 어두워졌는데도 아직 빛이 나는 모니터 화면을 보며 우형은 다시 세이브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작업을 돕던 프로듀스팀 소속 엔지니어는 상황을 확인하겠다고 나가고, 수록곡 작업을 위해 녹음실에 모여 있던 멤버들은 갑자기 멈춰버린 작업에 할 일을 잃었다.

금방 전력이 돌아오리라 생각해서 어디 가지 않고 그대로 기다리는데, 다시 돌아온 엔지니어는 해결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다면서 다른 장비도 꺼두기를 추천했다.

전자기기는 갑자기 전원이 나가는 것도 문제지만 갑자기 전원이 들어오는 것도 조심해야 했으니까.

“……전기 들어올 때까지 우리 뭐 하지?”

건전지로 작동하는 스탠드 조명만이 어두컴컴해진 녹음실 안을 비췄다.

방 전체를 환하게 비추기에는 미약한 빛이었기에 멤버들은 스마트폰 플래시를 켜서 조도를 더했다.

“나가서 상황 지켜볼까?”

“공포 영화 보면 보통 그런 사람이 제일 먼저…….”

재민이 공포 영화의 대표 사망 플래그를 떠올리며 말하자 준해가 황당해하며 대꾸했다.

“그런 말을 할 거면 아까 엔지니어 형 나갈 때 진작 했어야지.”

“바로 나가는 바람에 말할 새가 없었어.”

정전이라는 특이한 상황에 흥미를 느꼈는지 재민은 아예 화제를 이쪽으로 옮겼다.

“근데 불 갑자기 탁 꺼지는 거, 진짜 공포 영화 도입부 같지 않아?”

“응. 아니야.”

깜깜해진 세상 속 녹음실에 남겨진 다섯 명……이라는 억지 공포 영화 설정을 붙이기엔 회사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우형은 단칼에 아니라고 했으나 한이가 꺼낸 한마디로 분위기는 정말 공포에 빠져버렸다.

“그런데 나 진짜 여기 녹음실에서 귀신 봤는데.”

“그게 이 녹음실이었어……?”

“여기, 문에 창 달려있잖아. 여기로.”

이건 멤버들도 모두 아는 얘기였다. 예전 웹 예능 촬영 때 한이가 했던 그 얘기였으니까.

뉴마 엔터테인먼트의 작업실, 녹음실, 회의실 등은 누가 사용 중인지 확인할 수 있도록 문마다 작게 창이 달려 있었다.

안에 사람이 있는데 무심코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는 서로 민망하기도 하고, 작업하는 사람의 집중이 깨질 수도 있으니까.

사실 멤버들은 웹 예능 촬영 때 한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냥 분위기에 맞춰서 지어낸 얘기라 생각하여 반쯤은 믿지 않았다.

그런데 한이가 상세한 위치까지 집으며 그 얘기를 똑같이 꺼내니 갑자기 사실성이 더해졌다.

한이가 그날의 기억을 제대로 꺼내려는 낌새를 보이자 해랑이 입을 열었다.

“뷰이라이브 할래?”

“갑자기 이 상황에?”

갑자기 나온 뷰이라이브 얘기에 멤버들의 시선이 주목되었다.

“아니, 전에 영상 올라갔을 때. 귀신 얘기 궁금하다는 댓글 있었던 게 생각나서. 어차피 지금 할 일도 없고.”

한이의 귀신 얘기를 더 자세히 듣고 싶어 하던 팬들이 있었으니 기왕 할 거면 뷰이라이브를 켜고 하자는 소리였다.

납량이 어울리는 여름이고, 비가 오는 데다가 정전까지 되어서 분위기도 조성되었고, 다섯 명이 모여 있었으니 마침 좋은 기회였다.

웹 예능 촬영 때도 한이가 열심히 설명하긴 했지만 말로 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여주면서 말하는 게 더 생생하게 전달될 것이다.

“으음. 난 찬성.”

우형으로서는 무서운 얘기는 별로 듣고 싶지 않았지만 아마도 한이는 자기가 듣기 싫어하면 더 기를 쓰고 말할 것이다.

카메라가 있으면 그나마 카메라를 의식해서 지어내는 얘기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카메라 없이 그냥 하는 얘기라면 정말 실화라고 믿어야 할 것 같지 않은가.

그러니 진심으로 하는 무서운 얘기가 아니라 그냥 컨텐츠로 가볍게 넘어가는 게 좋겠다며 찬성표를 던졌다.

다섯 명끼리 있는 것보다는 채팅창으로라도 사람이 좀 보이는 게 더 안심될 것도 같았고.

똑같이 무서운 것을 싫어하는 재민과 준해도 우형과 같은 생각을 했는지 의견은 금방 통일되었다.

우형은 가방에서 모노크롬 뷰이라이브용 스마트폰을 꺼내 한이에게 건넸다.

[(뷰이라이브 알림) 모노크롬: 비 오는 날 녹음실]

그렇게 갑자기 시작된 뷰이라이브. 한이는 스마트폰을 고정해 세워두고 소파에 앉았다.

테이블에 올려둔 은은한 스탠드 조명이 노린 것처럼 음산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평소와 다른 어둑한 섬네일에, 컬러즈는 뭔가 재밌는 얘기를 할 것 같다는 기대감을 보이며 금방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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