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준해의 아이디어에서 발전된 모노크롬의 다음 컨셉은 늑대. 제목은 늑대를 뜻하는 <이리>로 결정되었다.
영어로 할지, 아니면 가사의 한 부분을 제목으로 할지 고민하다가 유니크한 느낌이 좋아서 고른 제목이었다.
국내 팬을 잡기 전에 해외 팬 잡기에 집중할 건 아니지만 영어로 발음하기도 쉽고.
우형의 손에서 탄생한 곡은 기타 사운드로 시작하는 시원시원한 느낌의 댄스곡으로 완성되었다.
공식적인 컨셉은 이렇고, 사실 나 개인에게는 또 다른 컨셉이 있었으니…….
‘일명 돈 지X, 아니, 탕진 컨셉.’
소속사가 아티스트에 돈을 들인 티가 나면 팬들도 좋고 남들 보여주기에도 좋은데, 돈 안 들인 티가 나면 팬들은 환장하고 다른 요소가 아무리 좋아도 기대감이 떨어져 손이 잘 안 가는 법.
작년까지의 모노크롬은 후자에 가까웠으니 돈 좀 확실히 들인 티가 나는 것을 만들고 싶었다.
좀 보여주기식 사치이긴 한데 그거라도 어디야. 돈 많이 쓴다고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뉴마는 좀 싫어하겠지만.’
내가 이번에 회사와 상의했던 건 하반기 아티스트 부문 예산안.
뉴마 엔터테인먼트는 원래 대표가 제한 없이 자금을 운용하던 회사라, 갑자기 대표가 부재중이 된 상태로 맞이한 상반기는 이런 예산안으로 규모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지자체에서 연말에 남은 예산을 소진하려고 아스팔트도 갈고 보도블록도 갈듯이 나도 마지막으로 끌어 쓸 수 있는 예산은 다 갖다 끌어넣었다.
최대한 많이 써 놔야 나중에도 ‘전에도 이만큼 썼으니 이번에도 이만큼 필요한데요?’ 할 수 있으니까.
이미 날짜는 하반기에 돌입했지만 제작사 비용 지급 등은 미리 할 수 있었으니 마지막으로 다 털어 넣은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뮤직비디오 촬영일이었다.
내게는 탕진이 컨셉이다 보니 세트도 전부 돈 들여 세우고 싶었지만, 연출상 야외 촬영도 필요했다.
오늘은 모노크롬 멤버들을 이끌고 폐공장을 활용한 촬영지로 찾아왔다.
“잘 부탁드립니다!”
촬영에 앞서 멤버들은 다 같이 모여 제작진들에게 인사했다. 제작진들도 밝은 얼굴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저번에도 협업했던 뮤직비디오 제작사인데, 이번엔 특히 예산도 쿨하게 잡고 턱턱 지불했더니 지금껏 봤던 것 중에 가장 표정이 밝았다.
‘따지는 거 별로 없고 돈 잘 주는 곳이 제일 좋은 비즈니스 파트너지.’
진상 클라이언트식 요구를 해도 돈만 제대로 잘 주면 오케이. 역시 돈 주는 사람이 갑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곳에서 할 촬영은 멤버들 개인 컷과 단체 안무 컷.
슬슬 장마 시기였기 때문에 비가 오기 전에 야외 촬영부터 후딱 처리하기로 한 것이었다.
“악!”
앉은 자세로 개인 컷을 촬영하던 재민이 감독의 컷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펄쩍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걸치고 있던 점퍼를 반쯤 벗으며 내가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모기! 주인 님! 저도요.”
다음 촬영 순서인 준해에게 계피 향이 나는 스프레이를 뿌려주고 있었는데 자기한테도 뿌려달라며 다가온 것이었다.
들어와 있는 건물은 천장이 높고 휑해서 그나마 덜 더웠는데, 더위보다 이게 문제였다. 모기.
아무래도 이런 큰 건물은 도심이 아닌 교외에 있는 게 보통이었다. 교외엔 산이 많았고, 산에는 산모기가 많았다.
물리면 가려운 것도 문제지만 촬영해야 하는데 피부에 자국이 남는다는 점이 더 큰 문제였다.
‘여름인데 땀이 나도 안 되고 모기에 물려도 안 된다니. 아이돌도 인간인데.’
아이돌이란 사람과 마네킹의 중간쯤 되는 존재여야 하는 걸까.
아무튼 땀이 나는 거야 최대한 수정 메이크업으로 커버 중이고 모기는 이렇게 모기 기피제를 뿌리며 대비 중이었다.
스프레이를 들고 다섯 명한테 계속 뿌리고 있으니 어쩐지 내가 멤버들을 살충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진정한 모기 컨셉이 아닐까?”
“모기 컨셉 버린 거 아니었어요……?”
아이디어 회의 때 준해가 했던 모기 얘기가 다시 떠올랐다.
그 얘기를 꺼냈던 준해는 자신의 말이 복선이 되어 돌아왔다며 뒤늦게 후회했다.
아니. 네가 말을 안 꺼낸다고 해서 모기가 안 나타나는 건 아닐 텐데.
“내가 웃긴 얘기 해 줄까.”
모기에 관한 화제가 나오자 재민은 뭔가 생각나는 일이 있는지 준해를 보며 이야기를 꺼냈다.
“뭔데?”
“며칠 전에 자는데 어디서 자꾸 모기 윙윙대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그래서 자다 깼는데 여우 형도 모기 쫓으려는 건지 자면서 팔을 막 휘적거리고 있더라고.”
“웃긴 게 그거야?”
“아니. 알고 보니까 모기가 아니라 거실에서 한이 형이 노래 부르는 소리였어.”
“…….”
진짜 웃기면서도 별거 없는 얘기잖아. 폭소할 정도는 아닌데 내용이 너무 소소해서 나도 준해도 피식 웃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장본인인 한이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우형, 해랑과 함께 선풍기 앞에 붙어 있더니 심심해져서 자리를 옮긴 모양.
“이거 츄러스 냄새 나지 않냐.”
“여기서 기어이 탄수화물을 찾네.”
이번에도 역시나 앨범 준비를 위해 식단 조절 중인 한이가 스프레이의 계피 냄새에 반응하니 준해가 황당하단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다들 관리 중인 건 마찬가지였지만 한이는 하필이면 탄수화물 러버인 탓에 특히나 더 다이어트를 엄격하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
‘꼭 그렇지 않아도 여름이라 더 체력 소모가 커서 단 게 생각나는 걸 수도 있고.’
‘여름밤’에서 시작한 컨셉인지라 오늘 야외 촬영도 야간에 진행되었다.
낮에는 햇빛이 쨍쨍하니 시각적으로도 더운 날씨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밤에는 눈이 아니라 피부로 더위가 체감되니 괜히 더 후덥지근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안 그래도 여름이라 벌레가 많은데 촬영용 조명에 모여드는 날벌레들이 특히 눈에 띄었다.
‘으으. 싫어.’
이런 현장에서 가장 고생인 건 역시 멤버들이었다.
여름에서 비롯한 컨셉이긴 한데 밝은 분위기는 아니라 의상도 계절감보단 곡 분위기에 맞춘 상태.
아예 긴소매 의상인 멤버도 있었고, 재민처럼 반소매임에도 점퍼까지 걸쳐야 하는 멤버들도 있었다.
외투는 촬영이 끝나면 벗기라도 하는데, 애초에 긴소매 의상인 우형과 해랑은 선풍기 앞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악! 뭐야!”
“여기 모기 붙어서. 저 스프레이 좀 주세요.”
한이는 또 장난이 발동했는지 준해의 등을 찰싹 때리더니 모기를 잡았을 뿐이라며 아무것도 잡히지 않은 손바닥을 재빠르게 들었다 내렸다.
나에게서 받아간 스프레이는 살충제가 아니건만 허공에 뿌리며 “모기가 많다, 야~.” 하면서 능청스러운 연기까지.
‘……연기 실력이 저러면서 는 게 아닐까.’
준해가 발끈한 얼굴로 허공에 펀치를 날리자 한이는 호쾌하게 웃으며 다시 선풍기 앞으로 도망갔다.
돌아가서도 해랑에게 똑같은 장난을 시도하더니, 도망가기도 전에 해랑에게 붙잡혀 응징을 받았다.
똑같이 손바닥으로 때렸는데 한이가 ‘찰싹’이었다면 해랑은 ‘철썩’이었다.
‘저게 바로 되로 주고 말로 받기…….’
보고 있으면 연습생 때 두 사람이 왜 자주 싸웠다는지 알 것도 같다.
한이가 자꾸 장난을 거는데 그게 당시 해랑의 스타일과 안 맞아서 충돌이 생겼던 게 아닐까.
지금은 적당히 장난치고 적당히 바로 보복하며 뒤끝 없이 지내는 걸 봐선 다들 함께 세월을 거치며 둥글둥글해진 것 같았다.
이후 몇 개월 만의 뮤직비디오 촬영. 때는 거의 여행하는 기분으로 촬영했으니 비교 대상으로 삼기엔 좀 그렇고, 촬영 때와 비교하면 멤버들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모습이었다.
‘장난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긴 하지만.’
그땐 몇 년 만의 뮤직비디오 촬영이었기 때문인지 조금 안쓰러워 보일 정도의 절박함이 있었으니까.
이런 촬영에 서서히 익숙해진다는 것도 좋은 일이었다.
앞으로도 상황에 맞춰 점점 프로다운 모습을 갖춰 갈 필요가 있었다.
‘지금은 방송계에 그냥 던져두면 어디서 당하고 올 것 같은 이미지란 말이지.’
그러지 않기 위해 나도 같이 노력 중이지만 나 또한 미숙해서 큰 도움은 안 된다는 것이 문제였다.
손으로는 뮤직비디오 콘티 복사본을 펄럭거리면서 멀리 있는 조명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눈앞에 불쑥 스프레이가 나타났다.
고개를 들어보니 해랑이었다. 스프레이는 한이가 들고 있던 걸 다시 뺏어온 것이었다.
“더우시면 차에 계셔도…….”
“아, 아니. 더워서 펄럭인 게 아니라 그냥 생각 중이었어.”
난 콘티를 다시 돌돌 말아 쥐고 스프레이를 받아들었다.
초점 없이 멍한 얼굴로 부채질을 하고 있으니 더위 먹은 것처럼 보였나.
커뮤니티에서 모노크롬이 언급되는 것을 보며 한 번 박힌 이미지는 탈피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그건 나한테도 해당하는 얘기였다.
한 번 쓰러졌다 일어났다고 언제 또 쓰러질지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는 걸 보면 말이다.
자기 앞길 걱정하기에도 바쁜 애들한테 걱정시킬 일 없도록 건강 조심해야지.
“주인 님 더워요?”
옆에서 혼자 입으로 박자를 맞추며 안무를 간단하게 연습 중이던 재민이 어디서 구해왔는지 널빤지를 들고 와서는 팔 전체를 휘둘러 있는 힘껏 부채질하기 시작했다.
내 부채질이 선풍기였다면 이건 강풍기였다. 이 녀석, 일부러 이러는 거야?!
“안 더워! 난 더위 안 타니까 저기 우형이한테나 부채질해 줘.”
더위가 날아가는 게 아니라 내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도록 휘날려서 나는 손을 들어서 막고 우형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우형은 더위를 많이 타는지 선풍기 바람을 맞으면서 손에는 미니 선풍기까지 들고 있었다.
내가 새 목표물을 정해주자 재민은 곧바로 우형에게 달려가 또 강풍기를 발동시켰다.
‘다들 말은 참 잘 들어서 기특해.’
아니, 말을 잘 들어서 그 뉴마에 남아 있었던 건가.
착하게 굴면 호구 잡히는 이 업계에서 멤버들이 프로페셔널다운 모습을 갖추려면 제법 많은 공부와 경험이 필요할 듯했다.
***
이번 <이리>의 전체적인 내용을 관통하는 메인 문구는 ‘달이 뜨지 않는 도시의 밤’.
후렴부를 여는 가사 또한 이것이었다.
인공적인 조명 불빛에 밤하늘의 모든 빛이 사라져버린 도시의 뒷골목.
달빛이 사라진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남은 늑대가 거닐며 다닌다는, 조금 설화와도 같은 설정이 담겨 있었다.
아이돌 노래 뮤직비디오에는 연인 역할을 맡는 배우가 출연하기도 하지만, 상대 배우 없이 가사로만 사랑을 얘기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리>도 상대를 특정하기보다는 달, 혹은 달빛을 원하는 것으로 비유하여 사랑 노래라는 뉘앙스보다는 세계관을 표현하는 데에 더 집중했다.
처음 아이디어를 냈던 준해가 작사에 참여하여 제법 고심했다고 들었다.
‘역시 성장형 캐릭터.’
아이돌도 창작물처럼 설정이나 세계관이 중요한데 덕분에 좀 더 세심한 세계관을 짤 수 있게 되었다.
정말 돈이 많이 들어간 세트 촬영은 야외 촬영 다음 날 진행되었다.
배경이 달빛도 사라져버린 도시였기 때문에 세트는 조금 근미래적인 느낌으로 완성되었다.
외국에서 상상하는 한국 도시의 야경 같은 느낌. 네온사인을 많이 사용한 사이버펑크풍 세트.
나의 탕진 계획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멋진 공간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아이템이 또 있지.’
뮤직비디오에 한 대씩은 꼭 나오곤 하는 스포츠카.
그중에서도 특히나 비싸 보이는 스포츠카가 세트 안으로 들어와 있는 것을 보며 나는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