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촬영이 끝난 후 아이돌 출연진들은 숙소 C동 건물을 독점했다.
운영하는 숙박 시설이었지만 여러 아이돌 그룹이 모인지라 보안을 위해서 몇몇 카메라 스태프들을 제외하고는 출입을 막은 것이다.
모든 그룹에 기본 제공되었던 10인실은 2층, 포인트를 지불해야 하는 2인실은 3층에 모여있었다.
“아, 형. 로비 내려가세요?”
“그럴까 하고. 너는?”
서른 명의 출연진 중 가장 연장자인 우형. 촬영 중에 다른 그룹과 많이 엮이며 어느새 동생들도 많이 생겼다.
오늘 촬영을 진행한 출연진 중 가장 연차가 높은 그룹은 데뷔 동기인 모노크롬과 SPID였다.
깍듯한 연예계답게 처음엔 다들 선배님이라고 불렀는데 어느새 호칭이 형이 되었다.
그런 우형을 찾아온 것은 엔피버의 리더, 임종훈이었다.
엔피버가 동맹을 끊고 도망가버린 사건 때문에 모노크롬 멤버들은 엔피버를 보고 배신했다며 장난스럽게 화를 냈지만 지금은 그런 가벼운 대화를 하려는 건 아닌 듯 보였다.
“아. 그. 저는 잠깐. 바쁘시면 나중에요.”
엔피버는 어차피 네 명이었기에 넓어서 좋다면서 10인실로 만족했다.
덕분에 포인트에 여유가 있었는지 누가 사가나 했던 축구공을 사 갔고, 엔피버의 다른 멤버들은 사람들을 모아 건물 앞에 마련된 운동장으로 축구를 하러 나간 참이었다.
종일 촬영이 이어졌지만 스케줄이 끝나서 신이 났는지 다들 아직 시끌시끌한 상태였다.
그 와중에 혼자서 굳이 우형을 찾아 올라온 것을 보면 아마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일 터.
우형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는 로비로 내려갈 생각이었으나 그의 표정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바쁜 건 아니고. 혹시 할 얘기 있으면 들어줄게.”
“저, 그러면…… 혹시 상담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카메라가 앞에 있을 땐 내내 활기차게 리액션을 하던 그였는데 지금은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아마 카메라가 있으면 하기 어려운 말이라 지금 찾아온 듯했다.
그러고도 망설일 정도로 하기 어려운 말인 것 같아서 두 사람은 창문이 달린 복도 끝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시다시피, 저희가 멤버 한 명이 탈퇴했어요. 얼마 전에.”
“……알지.”
종훈은 입술을 잘근거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리고 우형은 첫 마디를 듣자마자 그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 모인 사람들 가운데 우형 말고는 아무도 들어줄 수 없는 얘기였으니까.
“그런데 제가 리더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종훈은 그 말을 꺼내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진짜 좀 염치없는 것 같은데, 이런 말을 어디에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멤버가 탈퇴한 그룹의 리더. 그건 바로 얼마 전에 우형 자신도 처했던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우형은 그가 굉장한 고민을 거치고 이야기를 꺼냈으리란 점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으니까 마음 쓰지 말고 말해 봐.”
같은 상황에 처했던 두 그룹은 다른 결과를 맞이했다.
엔피버는 좋지 않은 결말로 끝나버렸고, 모노크롬은 다른 기회를 얻었다.
그 덕분에 지금의 우형에겐 이야기를 들어줄 여유는 있었다. 종훈이 원한다면 진지하게 들어줄 생각이었다.
우형이 이런 자상한 태도로 나오자, 종훈은 좋지 않은 얘기로 시간을 잡아먹어서 미안하다면서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혹시 아세요? 더 올라갈 길이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정신 차려보니 내리막길에 있는 기분.”
멤버들도 회사도 괜찮아지려고 하는데 자신만이 자꾸 안 좋은 미래를 상상했다.
그런 생각이 깊어지면 발목을 붙잡게 되리란 것을 알면서도 사고가 부정적으로 빠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이야기를 듣고 우형도 잠시 잊고 있었던 감정이 떠올랐다.
‘같은 팀원이지만 리더로서 실패한 기분.’
멤버들 또한 자신과 비슷한 절망감을 느낄 텐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력함.
누군가 리더에게 모두를 보살필 역할까지 맡긴 것은 아니었지만 리더로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얼마나 사람을 좀먹는 감정인지 그도 잘 알기에 멤버들도, 다른 이들도 그런 경험은 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난 운이 좋아서 버틸 수 있었던 거고.’
자신이 극복해낸 것이 아니라.
자신은 항상 그래왔다. 정말 바닥이라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끌어올려 주었다.
가족이든, 멤버들이든, 회사의 누군가든.
그런데 결국 5인조로서의 활동이 완전히 종료된, 이미 상처받고 끝나버린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자신도 완벽한 리더가 아니었고 무슨 일에도 의연할 정도로 성장한 것은 아니었기에 누군가에게 조언해줄 만한 위치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쩐지 지금 그에게 자신만이 해줄 수 있는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안 좋은 생각은 최대한 안 하는 게 좋겠지만. 이런 말을 하는 나도 나쁜 일을 잘 잊는 성격은 아니어서.”
바로 얼마 전까지 해랑의 믹스테이프 작업을 옆에서 계속 지켜본 우형이었다.
비슷한 사람이 있으면 위로가 된다는 말이 해랑에겐 생각을 조금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 종훈에게도 아마 그런 별것 아닌 이야기가 조금은 위안이 되지 않을까.
“거창할 것 없고, 그냥 주변에 남은 사람들을 붙잡고 버틴 거지. 너희 멤버들도 아마 마찬가지 아닐까? 열심히 하는 게 눈에 보이더라.”
“……다들, 예능 촬영이라고 해서 비장하게 나왔거든요.”
“우리도.”
예능을 앞두고 전체적으로 비장하던 회사 분위기가 생각나서 우형이 웃자, 거의 울 것 같던 표정이던 종훈도 따라 웃었다.
“열심히 한다고 모두가 주목해 주는 건 아니지만, 알아봐 주는 사람은 분명 있더라고.”
자신이 의욕적인 엔피버 멤버들을 보면서 좋은 감정을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종훈도 그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혼자 하는 고민이 아니란 사실에 조금 안정된 듯 보였다.
심각하던 그의 표정이 조금씩 풀려가는 것을 보며 우형은 조금 고민하다가 말을 꺼냈다.
“스스로한테 다짐도 하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들려주고 싶어서 만든 곡이 하나 있거든.”
처음 재민이 탈퇴했을 때였다. 작곡을 하고 싶어진 계기가 되었던 때.
당시엔 작곡 경험이 없어서 서투르게 완성되었지만, 그 곡을 작업할 때의 감정만큼은 생생했다.
결국, 아무데도 공개하지 않았고 부족한 버전 그대로였지만, 윤환이 탈퇴하면서 다시 꺼내 다듬으려고 생각해 두고 있었다.
제 스타일의 극복법이 혹시 다른 이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괜찮으면…… 너희가 부를래?”
***
출연진 외의 나머지 스태프들은 다른 동의 객실을 제공받아 머물 수 있었다.
아직 성수기가 아닌 데다 평일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협찬.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에 장소 제공, 거기에 많은 팬을 보유한 아이돌이 묵기까지. 이보다 더 좋은 홍보가 있을까.
나는 스타일리스트와 함께 방을 쓸 수도 있었지만 멤버들 의상이 담긴 캐리어가 공간을 꽤 많이 차지해 1인실을 더 빌렸다.
이곳에서의 내게 절약이란 필요가 없었으니까.
‘하아. LA 이후로 다른 데서 묵은 건 처음이던가.’
집이 아닌 다른 곳에 누워있으면 생경한 기분이 들곤 했다. 내게 주어진 그 집을 집으로 인식하게 됐다는 게 실감 나기도 했다.
인간이 적응의 동물인 것은 둘째 치고 약 반년이 지났으니 익숙해지지 않은 게 더 이상하겠지.
‘반년…….’
정신없이 달려왔는데 아직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잘하고 있는 건지 아닌 건지.
조용한 객실에 혼자 있으니 또 잡념이 들려고 하기에 나는 주머니에 있던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이 어쩔 수 없는 커뮤니티 중독.
그러나 지금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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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 이따 10시 맞지??
벌써 QBC 틀어놓고 대기중ㅠㅠ
└10시 맞음!
└광고 때문에 정각 시작 아니긴한데 한이 아마 후반부에 나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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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이가 <매일 아침 만나요>에 카메오로 출연한 것이 바로 오늘 방영되기 때문이다.
‘다들 보고 있으려나?’
멤버들에게도 오늘이 방영일이라고 미리 알려두었으니까 아마 챙겨 보지 않을까. 무엇보다 재민이 굉장히 기대했는데.
그룹별 셀프캠 외에도 숙소 곳곳에는 카메라가 설치되었다고 들었다.
다행히도 숙소에서 대놓고 드라마를 시청해도 문제가 없는 게, 이 <아이돌부 방학캠프>와 <매일 아침 만나요>는 방송국이 같았다.
시청하는 모습이 찍히더라도 서로 홍보가 되면 됐지, 나쁠 것은 없을 터.
미리 공식 SNS와 기사로 소식을 접한 컬러즈는 아직 방영까지는 시간이 남았음에도 벌써 대기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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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오늘은 웬일로 TV앞에 앉았냬 ㅜㅜ우리 애가 나온다고요
└나돜ㅋㅋㅋㅋ 엄마가 챙겨보던 드라마라 리모컨 싸움 안나서 다행이다
└난 언니가 김형운배우님 팬이라ㅋㅋ 재밌다고 영업했을때 귓등으로도 안들었는데 옆에 같이 앉아서 보려니 머쓱^^;
└최고의 드라마.. 앞으로 챙겨볼게요
└우리 애 ost 나오는 거 들으면 뿌듯할 듯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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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크롬이 TV에 자주 안 나왔기 때문에 음악방송이 아니면 TV 앞에 앉을 일이 별로 없었던 컬러즈.
재민이 나왔던 <최고의 팀메이트>는 예능 프로그램이었으니 컬러즈가 채널을 사수하기에 큰 문제 없었지만, 매 화를 챙겨 봐야 하는 드라마라면 상황이 조금 달랐다.
보통 가정집엔 TV가 한 대뿐인데 가족이 동시간대의 다른 채널 드라마를 챙겨 본다면 리모컨 쟁탈전을 벌여야 했다.
커뮤니티의 게시글을 보니 컬러즈의 리모컨 사수는 나름대로 선방하고 있는 듯했다.
드라마를 기다리며 온라인에서 열심히 기대감을 불태우는 컬러즈의 화제는 역시나 멤버들이었다.
[몬클이들 다같이 보려나? ㅠㅠㅠ상상만 해도 귀엽다]
***
컬러즈는 멤버들이 다 같이 모여 보기를 기대했으나, 다 같이 보는 것은 멤버들뿐만이 아니었다.
“너 나온다고? 언제 나오는데?”
“몰라. 거의 끝날 때쯤 나올걸?”
출연진들이 묵는 C동 건물 로비에는 대형 TV가 설치되어 있었다.
우형은 종훈과 함께 로비에 나타나고, 해랑은 몇 SPID 멤버와 함께 나타났다.
한이가 극강의 인싸인 덕분에 원래 친한 사이였던 일부는 한이를 따라왔고.
애초에 재민처럼 이 드라마를 챙겨 보던 아이돌도 같이 보면 재밌겠다며 모여들었고.
운동장에 있던 축구파는 같이 뛰어다니던 재민과 준해가 드라마를 봐야 한다고 들어가자 자기들도 쉬겠다며 같이 들어왔다.
그렇게 본방 시청 인원은 대인원으로 늘어났다.
“남주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거야?”
“자기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연애 감정이 아니었던 거지. 그리고 여주인공이랑은 원래 사이가 안 좋았는데-.”
처음 봐서 내용을 모르는 이들도 있었으나 드라마 애청자인 재민이 열심히 설명에 나섰다.
덕분에 약 한 시간의 방영 시간 동안 다들 몰입하며 시청할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한이가 등장하는 장면이 나오자.
“와씨. 나 방금 남주인 줄 알았어. 아는 얼굴 나와서 깜짝 놀랐다.”
“오올. 잘생겼는데~.”
다른 그룹에도 이미 배우로 데뷔하여 연기 활동 중인 멤버들이 있었지만 그리 많지는 않았다.
이렇게 드라마에서 동료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모두에게 흔치 않은 경험.
특히나 개인 활동보다 단체 활동 위주인 후배들에겐 더욱 희귀한 경험이었다.
[연예인 닮으셨어요. 아이돌 그룹 중에……. 하니인가, 허니인가?]
[아. 걔 별로던데.]
곧바로 이어지는 코믹한 애드립 장면에 모두 폭소했다.
“와하하핰! 유허니!”
“작가님이 대본에 저렇게 써 주신 거야?”
“저건 선배님 애드립.”
“와, 근데 넌 또 그걸 잘 받았다?”
그 이후에 이어진 장면은 짧았지만 한이가 대사를 하나하나 할 때마다 모두 빵빵 터졌다.
한번 웃음이 터져 다 같이 웃으니 분위기 때문에 더 재밌게 느껴진 덕분이었다.
제일 반응이 좋았던 건 한이가 흥얼거리던 노래가 실제 OST로 바뀔 때였다.
“푸하하! 아, 겁나 웃겨!”
“연출 미쳤다.”
감독이 봤으면 좋아할 만한 반응들이었다.
주연 두 사람의 대사가 조금 더 이어지고 바로 엔딩 장면. 그러나 다음 편 예고가 끝나도 이들에겐 여운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한 게시글이 인기글로 떠올랐다.
[실시간으로 매일아침만나요병에 걸려버린 아이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