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모노크롬이 숙소 앞에 도착하자 머리를 마저 말리던 SPID가 장난스럽게 환영하고, 엔피버가 은근슬쩍 그 옆에 붙어서 같이 반겼다.
“너네, 하…… 두고 보자.”
“허억.”
“여우 형 흑화했다.”
“너네도 마찬가지거든.”
그가 아마 오늘 하루 가장 수난을 많이 겪은 출연진이 아닐까.
우형이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기자 SPID와 엔피버가 놀란 척을 하고, 아무 잘못 없다는 듯이 그의 뒤를 따르는 멤버들을 보며 우형이 한마디를 더했다.
이제 1일 차 촬영은 마지막 단체 촬영만이 남았다.
‘모여 있으니 이 카메라에 걸리든 저 카메라에 걸리든 아무튼 계속 나오겠지?’
온갖 짐들이 모여 있는 임시 대기실에서 오늘의 마지막 메이크업 수정이 이어졌다.
메이크업을 받느라 가만히 앉아있는 멤버들은 옆에서 지켜보는 나를 흘끔 쳐다보다가도 눈을 피했다.
“자, 잘하고 오겠습니다.”
나도 모르게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나.
최대한 예쁘게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놓치는 부분이 없도록 꼼꼼히 지켜본 건데 무언의 압박으로 느껴졌던 모양.
멤버들은 마치 등교 인사 같은 말을 남기고 카메라 앞에 마련된 모노크롬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포인트는 많이 모으셨나요?”
각 팀으로 나뉘었던 스태프들도 한곳에 모인 상태.
카메라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자 각 그룹 담당 작가들이 하던 역할을 메인 작가가 하기 시작했다.
작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룹마다 달랐다.
나름 만족스러운 성적이었는지 “네!” 하고 대답하는 엔피버와 이코드. 당당하게 “아니요~.” 하는 SPID.
유니온맥스는 고생했음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모노크롬은 ‘우린 열심히 했지’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자리에 모인 만큼, 이제 마지막 게임이 남아 있는데요.”
거의 저녁이 다 되도록 이어진 게임은 끝이 아니었다.
오전부터 내내 했는데 더 할 게임이 남아 있나 싶었지만, 여름이 다가오면서 해도 점점 길어지고 아직 어둡지 않아서 그리 오래 고생했다는 느낌은 없었다.
게다가 이제 마지막이면 다들 남은 기력을 총동원할 수 있을 터.
“저희가 준비한 마지막 게임은, 리더전입니다.”
그 말에 출연진들의 시선이 각 팀 리더에게 몰렸다.
미리 전해 들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갑자기 지목된 리더들은 놀란 표정이었다.
‘이건 정말 아이돌 예능답네.’
아이돌 그룹엔 보통 리더라는 존재가 있었다.
아이돌 여러 팀이 모여야 할 수 있는 게임이지만 아이돌 단체 예능이 얼마 없었기에 그만큼 신선하기도 했다.
“리더! 하면 든든하고 의지 되고, 어찌 보면 팀의 부모님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데요.”
“예? 아니요.”
“잔소리하는 건 맞긴 하다.”
작가가 읽는 멘트에 리더들만 끄덕일 뿐, 다른 멤버들에게선 야유 소리가 터져 나왔다.
“리더분들이 해 주실 게임은, 요리 대결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게임 설명.
메뉴는 떡볶이. 재료는 준비되어 있고 약 5인분씩 요리해서 출연진과 스태프의 투표로 1위를 뽑는 대결이었다.
번외 게임으로는 리더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이 자신 팀의 리더가 만든 것을 맞추면 보너스 포인트를 받을 수 있었다.
‘음. PPL 게임이네.’
TV로 시청하는 게 아니라 제작진 뒤에서 현장을 직접 지켜보다 보니 자꾸만 이런 현실적인 시점으로 보게 되었다.
협찬이 티 나긴 했지만 그래도 게임 내용은 제법 흥미로웠다.
출연진들의 반응을 보니 어딘 망했다면서 벌써 포기하고, 어딘 잘하라며 응원하고.
‘모노크롬은…… 나름 알아서 요리해 먹고 살지 않을까?’
다들 매일같이 숙소에 붙어 있다는 건 알겠는데 어떻게 지내는지는 전혀 몰랐다.
모노크롬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다른 멤버들의 표정은 몰라도 우형은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평소에 멤버들을 챙기는 모습을 자주 봐서 그런지, 이미지만 보자면 우형이 멤버 중에서 가장 요리를 잘할 것 같기는 했다.
반장전이 아니라 리더전이라 다행이려나. 왠지 해랑이 요리하는 모습은 전혀 상상이 안 갔다.
“리더전이 진행되는 동안 다른 분들은 심심하게 기다릴 수만은 없으니까, 포인트 걸고 자유투 경기라도 할까요?”
“아까 그게 마지막 게임이라면서요!”
마지막 게임이라고 안심시켜놓고 또 추가된 게임. 무한으로 증식하는 게임의 늪.
섭외한 김에 알뜰살뜰하게 분량을 뽑아내는 제작진의 모습에 역시 방송은 쉽지 않다는 것을 실감했다.
***
출연진들은 쉬고 싶다고 성화더니, 공을 던져주니까 금세 경기에 빠져들었다.
쉬는 시간만 되면 공을 들고 운동장으로 뛰쳐나가는 남학생들을 보는 기분.
이들은 농구를 일이 아니라 휴식의 일종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멤버들이 알아서 잘 노는 동안 각 그룹 리더들의 손에 완성된 요리는 익명으로 번호가 붙어 접시에 담겼다.
출연진들의 투표는 촬영 중에 진행할 예정이라 먼저 스태프들의 시식과 투표가 이어졌다.
‘메뉴는 떡볶이 하나였는데…….’
나온 결과물은 각양각색이었다.
나름 지역 관광 홍보를 겸한 프로그램. 이를 노골적으로 노리겠다는 듯이 떡볶이에 보통 들어가지 않는 지역 특산물을 다 때려 넣은 접시도 있었고.
분명 5인분이라고 했는데 양 조절에 실패했는지 그 두 배를 담은 접시도 있었고.
가장 특이한 건 떡은 없고 계란만 담긴 접시였다.
“이건 이미 떡볶이가 아니네요…….”
“리더분들이 만들면서 코멘트도 적어주셨거든요. ‘단백질이 필요한 아이돌을 위해 만들었습니다’……라네요.”
종일 붙어 다녔더니 친근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작가가 옆에서 코멘트를 읽어주었다.
괴상한 비주얼과 달리, 만든 사람도 먹을 사람도 아이돌이란 점을 고려한 세심함이 담겨있었다.
그 옆의 접시는 어딘가 부족한 생김새였으나 코멘트가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맛’이었다.
‘할머니 이름을 팔다니.’
할머니 이름을 걸면 혹평은 못 하지.
역시 방송을 해 온 아이돌이라 그런가, 이런 부분에서도 각자의 센스가 돋보였다.
그리고 각 그룹의 리더들이 요리로 예능을 펼친 가운데, 유독 비주얼이 뛰어난 접시가 하나 있었다.
한눈에 봐도 요리 잘하는 사람이 만든 비주얼. 코멘트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맛에는 별 기대가 없던 스태프들도 그릇을 보고는 “오오.” 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누가 이렇게 요리도 예쁘게 잘할까. 팬들이 좋아하겠다.”
“아들 삼고 싶을 듯.”
주변에서 들려오는 스태프들의 칭찬이 내 마음과 똑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아들 삼고 싶다는 거 동감.
그러나 이 훈훈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쿨럭.”
“뭐야, 이거?!”
“물, 물!”
갑자기 곳곳에서 기침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 제작진 외 각 그룹 스태프 중에선 한 명만이 대표로 투표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노크롬 스태프 대표는 나였기에 ‘뭐지?’ 하는 마음으로 한 입 먹었는데.
“콜록.”
왜 갑자기 기침 소리가 울려 퍼졌는지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겉모습은 페이크였잖아……!’
겉모습으로 방심을 시켜놓고 맛으로 반전을 주는, 독보적으로 예능을 펼친 요리가 그곳에 있었다.
***
“가장 잘 만든 떡볶이에 1명당 1표씩 투표. 그리고 그룹별로 회의를 거쳐서 본인 팀의 리더가 만든 떡볶이를 맞혀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테이블에 번호가 달린 떡볶이 다섯 그릇이 세팅되고 메인 작가가 자세한 설명에 나섰다.
그 설명 끝에는 한마디 주의 문구가 덧붙었다.
“되도록 조금씩만 드세요.”
자세한 이유는 얘기하지 않았으니 이후에 저녁을 먹어야 하므로, 혹은 양이 많지 않아서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걸 많이 먹으면 큰일 나지.’
주인은 왜 작가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방금 직접 겪었으니까.
문제의 떡볶이가 비주얼이 가장 멀쩡하다는 게 문제였다. 겉모습에 이끌려 가장 먼저 손을 댔다간 이후엔 뭘 시식해도 맛이 안 느껴질 터였다.
단백질은 지긋지긋한지 떡 없는 계란볶이에 “으으.” 하는 반응을 보이던 출연진들은 예상대로 가장 멀쩡한 요리에 주목했다.
“와. 어느 팀 리더가 이렇게 잘 만들었지.”
“이거 어디서 사 온 거 아니에요?”
접시 하나로 관심이 쏠리는 와중, 상황을 살피던 한이가 모노크롬 멤버들을 붙잡았다.
“저거 먹지 마.”
“왜?”
“저거 우형이 형이 만든 거야.”
멤버들이 “그게 왜?”라고 묻기도 전에, 한 곳을 중심으로 기침이 전염되듯이 퍼져나갔다.
“크엑. 이거 뭐…… 이렇게 맛있냐. 쿨럭. 빨리 먹어봐.”
“뭐, 뭐야. 안 먹을래.”
“푸하학! 너 왜 울어?”
“아. 스흡. 우리 아빠가 해준 게 떠올라서, 갑자기 울컥하네.”
문제의 떡볶이를 시식한 아이돌들은 헛구역질하다가 옆에 있는 자신의 동료에게도 맛보여주고 싶었는지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입 안엔 불이 나고 눈엔 눈물이 고인 상태. 아직 시식 전인 다른 이들은 그 모습을 보고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이미 비주얼에 이끌린 피해자가 많았다는 게 문제였다.
다들 피하는 와중에 재민은 호기심에 이끌려 굳이 시식에 나섰다.
“컥.”
누군가 말리는 데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건만. 재민은 난데없이 울음바다가 된 현장에 동참하며 뒤늦게 후회했다.
문제의 접시 덕분에 어부지리로 덕을 본 것은 다른 접시들이었다.
최악의 떡볶이를 겪고 난 후라 다른 것들의 맛이 훨씬 미화되는 효과가 있었다.
예상외로 스릴이 넘친 시식과 각 출연진의 투표가 끝난 후. 순위 발표 전에 먼저 누구 요리인지부터 발표되었다.
“2번 진짜 누가 만든 건지 궁금하다.”
“2번은 모노크롬 리더 우형 씨.”
“헉.”
우형의 이름이 나오자 곳곳에서 몇 명이 숨을 삼켰다.
특히 엔피버와 SPID는 촬영 직전에 우형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촬영 전에 우리한테 두고 보자고 하지 않았어?”
“착한 형인 줄 알았는데…….”
정말 그 말을 잊지 않고 이런 악마의 요리를 만들어 복수하다니.
내뱉은 말을 착실하게 지킨 그의 계획성에 소름이 돋아 몇몇은 자신의 팔을 문질렀다.
다른 출연진이 우형의 과격한 요리 실력에 놀라는 사이, 모노크롬 멤버들은 한이의 추리력에 감탄했다.
“어떻게 알았어? 먹어보지도 않고.”
“그 형은 중간이 없어. 건강식 아니면 폭탄이야.”
접시에 담긴 떡볶이를 보자마자 기시감이 들어 기억을 되새겨보니 분명 그의 기억에 있는 비주얼이었다.
2년쯤 전이었던가. 어느 날의 뷰이라이브 방송.
당시 모노크롬은 활동이 없었기에 뷰이라이브는 줄곧 회사 아니면 숙소에서만 이뤄졌다.
숙소에서 할 만한 것은 제한적이었고, 컬러즈에게 뭘 보여줄까 고민하던 우형이 요리 방송을 생각해냈다.
컬러즈에게 채팅으로 메뉴 추천을 받아 떡볶이를 만들긴 했지만 자긴 매운 음식을 잘 안 먹는다며 방에 있던 한이를 불러 먹였고.
그날, 컬러즈들이 아직도 사용하곤 하는 ‘한이 눈물짤’이 탄생했다.
먹을 만한 음식물이 못 되었기에 식탁 구석에 밀어놓고 뷰이라이브가 끝나자마자 버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대체 어떻게 만들었기에 그런 괴식이 나올 수 있는지 궁금해서 다시 보기로 영상을 확인했던 한이는 고춧가루를 물감처럼 때려 붓는 우형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맛이 아니라 색을 내기 위해 재료를 쓰는 모습. 색깔 내기에 집중했으니 비주얼에 속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서 내가 다시는 만들지 말라고 했거든.”
그런데 봉인되어 있던 이 폭탄을 다시 제조해냈다는 것은…….
주방에 있던 리더들이 돌아오고, 그 사이에 섞여 있던 우형은 후련한 표정이었다.
“내가 만든 거 먹었어?”
“아니. 재민이만…….”
“왜 안 먹었어?”
“무, 무서워!”
싱긋 웃으며 멤버들에게 묻는 우형의 모습에 준해는 자신의 양팔을 감싸 안았다.
모노크롬 멤버들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리더의 심기를 웬만하면 거스르지 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