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넘어질 뻔한 나를 먼저 붙잡은 건 해랑이었다.
겨우 중심을 잡은 후 고개를 들어보니 해랑은 나보다 더 놀란 표정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게 어떤 상황이었는지 이해한 나는 식겁할 수밖에 없었다.
‘허, 헉. 해랑이 앞에서 물에 빠질 뻔했다.’
여긴 고작 시냇물이고 얕은 물이지만 십여 년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사고가 쉽게 지워졌을 리는 없을 터.
저렇게 놀란 표정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예전 일이 떠오르기는 한 것 같았다.
“고, 고마워.”
“아! 조심해요, 주인 님.”
해랑이 팔을 놓자 다른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몸이 기우뚱하다 말고 멈춘다 싶더니 재민이 등을 받쳐줬던 모양이었다.
그는 조심하라며 입을 삐죽이면서 뚱한 얼굴로 말했다. 분명 전에 쓰러졌다 출근했을 때도 이런 비슷한 표정이었는데.
남이 아프거나 다치는 것을 보기 싫어서 신경 쓰는 것이 맞는 듯했다.
‘와. 나 지금 재민이 앞에서 다칠 뻔까지 한 거야?’
두 멤버의 트라우마를 일타이피로 자극할 뻔하다니.
일하러 왔는데 멤버들의 활동을 서포트하기는커녕 발목만 붙잡을 뻔했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아직 촬영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날씨도 좋고 나도 모르게 소풍이라도 온 것처럼 방심하고 있었나.
내가 미끄러질 뻔한 것을 목도하자 뒤이어 따라오던 직원들도 모두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여기 모래라도 뿌려둬야겠는데?”
“스태프분들 잠깐 거기 계세요!”
다른 멤버들도 모여들어 잠시 교통정리에 나서고 우리는 버려도 될 만한 종이 상자로 강변에 있는 흙을 퍼다 돌다리 위에 뿌렸다.
“앗, 저희가 할게요.”
“아뇨. 그냥 뿌려두기만 하면 돼요.”
멤버들까지 나서서 흙을 뿌린 자리를 발로 탕탕 밟자 작가가 머쓱하게 말했다.
멤버들이 신고 있는 운동화도 의상으로 준비한 것이었기에 젖거나 더러워지면 말리려고 했는데 그럴 새도 없이 금방 현장 정리가 끝나버렸다.
스태프들은 멤버들에게 고맙다고 눈인사를 하며 징검다리를 건너오고 재민은 모두가 무사히 건너오는 것을 뿌듯하게 바라봤다.
“다들 다치면 가만 안 둬.”
“어…… 으, 으응.”
재민이 멤버들에게 돌아와 그렇게 말하자 다들 끄덕였다.
뭘 어떻게 가만 안 두겠단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을 꺼낸 사람이 재민이었기에 아무도 반박을 하지 못했다.
‘저거 원래 내가 하던 역할이었는데.’
돌대회 때 다치지 말자고 당부를 했었는데 오늘은 ‘1등 하자’로 목표를 바꿨더니 그 역할을 재민이 대신 가져가 버렸다.
내가 이사로서 말하는 것보다 재민이 말하는 게 효과는 더 확실한 것 같기도 하고.
잠깐의 해프닝이 있었지만 멤버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또다시 다음 게임 지점을 찾아갔다.
지도에는 채소 그림이 그려져 있던 곳.
가장 가까운 게임 지점을 찾아온 것이었는데, 멤버들이 찾던 ‘머리 쓰는 게임’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입구에 깃발이 꽂혀 있는 상점에는 청과를 비롯하여 이런저런 먹을거리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곳은 지역 상인분들이 함께 운영하는 명물 상회입니다. 이곳에서 진행되는 게임은 특별히 성공 시, 포인트와 함께 부상으로 명물 간식거리를 함께 드립니다.”
“헐. 우리 빵 먹자.”
“무슨 게임이에요?”
게임은 <최고의 팀메이트>에서 했던 것과 같은 형식의 기억력 게임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편의점 상품이 아니라 이 지역 시장에서 판매하는 특산물의 가격을 합쳐서 특정 금액을 맞춰야 한다는 점.
게다가 시간 안에 장바구니에 담아서 계산대로 가져와야 한다는 룰까지 추가되었다.
“초급, 중급, 상급 중에서 난도를 선택하실 수 있는데요. 각각 참가비 천, 2천, 3천 포인트. 정답 시 각각 참가비 3배의 포인트를 보상으로 드립니다.”
“참가비 세 배나 주는 거 보면 어렵나 봐.”
“그렇대, 준해야.”
“다들 자기가 나설 생각은 없는 거냐고!”
들어오자마자 간식거리에 정신이 팔린 한이와 재민은 설명을 제대로 듣기는 한 건지 일단 준해부터 불렀다.
오늘 출연진 중에 인원이 많은 팀은 8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멤버 전체가 참여하면 형평성이 안 맞았다. 따라서 참가자는 대표로 한 명.
머리 쓰는 일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준해에게 맡기는 멤버들답게 준해를 내세웠지만.
“오답입니다. 정답 금액보다 5천 원이 부족하셨네요.”
“악!”
“와하하! 바보야!”
“준해가 우리 팀 최고 브레인인데 바보라고 하면 우린 뭐가 되는 거야.”
처음 하기 때문인지, 긴장해서인지 첫판은 크게 오차를 내며 실패해 버렸다.
뒤에선 한이가 남 일이라도 지켜보듯이 구경꾼 포지션이 되어 준해를 놀리고 재민이 뼈아픈 태클을 날렸다.
다행히 초급 난도여서 지출은 많지 않았지만 준해는 초급에서 실패했단 것에 자존심이 상한 듯했다.
“잠깐! 저 다시 해 보면 제대로 할 수 있어요. 한 판만 더 할게요.”
“아까 내가 한 번 더 한다고 할 땐 도박이라고 했으면서!”
“한 판만 더 할게요. 이번엔 중급으로.”
“와. 반장 아니라고 리더 말은 안 듣는다.”
품목이 다양하고 외워야 할 상품 가격도 계속 달라지기 때문에 재참가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리고 리더인 우형의 말도 무시해 가며 재참가를 결정한 준해.
‘준해도 해랑이 닮아가나 봐…….’
팀 1위를 목표로 승부욕을 불태우는 해랑과 달리, 준해는 자신의 개인 성적을 위해 승부욕을 불태웠다.
멤버들이 반장인 해랑을 불렀지만 ‘포인트 관리는 부반장이 맡기로 했다’며 그저 방관할 뿐.
준해는 반장에서 떨어진 대신 포인트 관리라는 중대한 역할을 맡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걸 자신의 명예를 위해 쓰고 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러나 해랑 외 다른 멤버들이 말려야 하는 거 아니냐며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준해는 확실한 성장형 캐릭터였다.
“3만 2천 원. 정답입니다!”
“예스!”
“오오! 한 판 더?”
포인트가 큰 폭으로 쌓이자 이제는 멤버들이 준해를 부추기기 시작했다.
도박 조심해야 한다던 아까 그 멤버들은 어디로 간 걸까. 이곳엔 그저 포인트 벌이에 신이 난 다섯 명만이 남아 있었다.
어쩐지 길어질 것 같은 예감에 나는 조금 뒤로 물러서서 업무용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밖에 나와 있긴 하지만 다음 앨범도 예정되어 있고 하루하루가 아까우니 일에서 완전히 손을 뗄 수는 없었다.
그리고 확인한 메신저에는 최 비서에게서 메시지가 하나 들어와 있었다.
[최단우: 이사님. 조금 전에 사장님이 찾아오셔서 부재중이라고 전해드렸습니다.]
“음? 사장?”
그의 메시지는 예상 밖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가끔 오며 가며 마주치면 잠깐 인사나 하고 지나가지, 일하면서 사장을 크게 신경 쓴 적은 없었다.
내가 그의 일에 관여를 안 하니 사장도 마찬가지로 내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모노크롬 스케줄에 따라온 것도 모르고 이사실로 찾아왔던 모양이다.
‘갑자기 나는 왜 찾은 거지.’
서로 신경을 안 쓰고 지내온 만큼 갑자기 찾아왔다는 건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일 터.
촬영에 방해되지 않도록 잠시 자리를 옮겨 최 비서에게 전화를 거니 신호음도 몇 번 울리지 않고 그가 곧장 받았다.
[네. 이사님.]
“사장님이 무슨 일로 날 찾아오셨다는데?”
[나중에 다시 찾아오겠다며 돌아가시긴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예산안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아참. 그런 게 있었지.
예능 촬영에 정신이 팔려 있느라 잠시 잊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아티스트 부문 하반기 예산안이 필요하다고 해서 경영팀에 보내두긴 했었다.
물론 현재 뉴마에 남아 있는 아티스트는 모노크롬뿐이고 연습생은 거의 배우 지망생 쪽으로 몰려 있어 따로 관리했으니 모노크롬이 하반기에 쓸 돈을 말하는 것이었다.
‘……역시 뮤직비디오 제작비로 10억을 쓰겠다고 했던 건 좀 그랬나.’
뉴마 엔터테인먼트는 내가 게임에서 만든 회사였지만 현실화하면서 내가 모르는 부분도 많이 생겨났다.
게임에선 들어본 적도 없는 배우 팀이 생겨난 것 하며, 조직도도 생소했고 어떻게 굴러가는지도 몰랐고.
물론 계속 뉴마에서 일해 왔던 최 비서가 옆에서 많이 도와주긴 했지만, 예산을 얼마까지 자유롭게 쓸 수 있는지는 그도 잘 모르고 있었다.
‘하긴 대표 말 하나로 굴러가는 회사에서 대표를 보좌했으니.’
대표가 1억을 쓰겠다고 하면 1억이 투입되는 거고, 10억을 쓰겠다고 하면 10억이 투입되는 회사.
그런 곳이었으니 최 비서도 내부에서 뭔가 거부당하거나 반대에 부딪히는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내가 게임에서나 대표였지, 지금은 대표가 아니지 않은가.
나도 모르고 최 비서도 모르니 일단 대충 ‘여긴 몇억, 여긴 몇억’ 하면서 예상 금액을 적어뒀었다.
‘쓸 수 있는 금액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정말 뮤직비디오에 10억을 다 쓰진 못하더라도 세트도 엄청나게 크게 짓고 그 비싸다는 CG도 팍팍 넣으면서 신나게 지출하려고 그랬지.
가용 금액 최대치를 알아보자는 게 목적이었으므로 예산 측정이 마구잡이식이긴 했다.
최 비서가 조금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해 줬는데. 그 노력으로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내게 대표란 욕받이 같은 존재에 가까웠는데, 처음으로 대표가 아니란 점이 아쉬워졌다.
‘그런데 사장이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네.’
무리수를 둔 것은 자각하고 있었기에 그대로 진행하기 어렵겠다는 답을 들을 준비는 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표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교대하듯이 들어온 게 나였고, 사장과 싸웠다느니 뭐니 하는 소문까지 돌았던 참.
경영팀에선 차마 그런 내게 안 된다고 말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사장이 대신 찾아온 것을 보면.
‘회사에서 내 이미지가 대체 어떻게 되어 있는 거야……?’
어쨌든 회사 내에선 갑이란 것을 다시금 실감했다.
“으음. 그럼 처음부터 다시 짜야 하나?”
[아닙니다. 아마 의견을 조율해 가는 식으로 진행하면…….]
이번 예능 프로그램 촬영은 1박 2일에 걸쳐 이어지기에 내일까진 내가 회사에 없을 예정이었다.
그래서 우선 통화로 대략적인 내용을 정리하고 내가 바로 파악해야 할 일은 없는지 확인까지 한 후 대화를 마무리했다.
통화가 생각보다 길어지긴 했어도 그렇게까지 긴 시간이 지나진 않았을 터인데.
모노크롬이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와 보니 통화를 하러 나오기 전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너희 언제 9인조가 되었니……?”
잠시 정비 시간인지 어수선하게 모여 있는 스태프들 사이에 모노크롬은 휴식을 취하듯 모여 있었다.
그런데 모여 있는 아이돌이 다섯 명이 아니라 모르는 얼굴 넷까지 포함하여 아홉 명.
“이사님 이거 드실래요?”
한이가 돌아온 내게 개별 포장된 타르트를 하나 건네기에 얼떨떨하게 받아들었다.
그의 손에 들린 봉투엔 조금 전 게임 지점에서 받아온 것으로 보이는 간식거리가 한가득했다.
“나 잠깐 없는 동안 게임을 얼마나 한 거야?”
“상급까지 성공하니까 종류별로 주시더라고요.”
“그건 그렇다 치고…….”
뭐부터 물어봐야 할지 엄두가 안 나지만 일단 지금 제일 신경 쓰이는 건.
“넌 왜 갑자기 머리가 젖었어?”
“아, 그게…….”
그새 어딘가 다녀왔는지 의상까지 갈아입고는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고 있는 우형.
대체 십여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