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아, 괜히 운세 얘기를 해 가지고는.”
첫 게임으로 적절하다며 멤버들의 사기를 올린 한이는 승부가 결정 나자마자 김이 빠진 표정으로 자신의 말을 후회했다.
그냥 게임으로만 즐겼으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겼을 텐데, 하루 운세라는 의미를 부여해 버린 탓에 괜히 하루 시작을 찜찜하게 하게 되었다.
“……한 판만 더 해볼래?”
“그런 마음으로 사람들이 도박에 빠지는 거야.”
이 상황을 만든 장본인인 우형이 미련을 보이자 옆에서 준해가 말렸다.
모든 팀에게 주어진 기본 포인트가 5만 포인트. 이 중에 2천 포인트를 지불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가벼운 마음으로 계속했다간 가랑비에 옷 젖듯 금세 소진할 수도 있었다.
이기면 몰라도 또 졌다간 오늘 운세 ‘조금 나쁨’이 ‘매우 나쁨’으로 바뀔 수도 있었고.
‘시작부터 제법 계획을 세워가면서 진행해야겠어.’
아직 첫 게임이었지만 제작진이 고심해서 기획했다는 것이 체감됐다.
게임을 진행하는 것은 멤버들이었지만 주인 또한 모노크롬을 1등 팀으로 만들기 위해서 여러모로 머리를 굴리며 촬영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모노크롬 전담팀으로서 이들의 분량을 늘리기 위해 중간중간 정비 시간에 회의하거나 의견을 낼 수도 있으니까.
“그럼, 여기까지만 하기로.”
오늘 반장으로서 모노크롬을 이끌어야 할 해랑은 가위바위보를 더 진행하지 않고 빠르게 다음 지점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한 판만 더!’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거란 생각에 멤버들도 순순히 패배를 받아들이고 물러섰다.
“또 오세요.”
“운이 좋아지면 다시 올게요…….”
범위 내에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고 언제든 다시 와서 진행할 수도 있었기에 스태프는 마치 손님을 배웅하듯 인사했다.
저 자신감 넘치는 모습. 왠지 고수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어디서 가위바위보 강자 모셔온 거 아니에요?”
주인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그의 동료인 제작진들이 작게 웃었다.
가위바위보로 운세를 점쳐 보자는 건 그저 멤버들이 그렇게 의미를 부여한 것일 뿐이었지만.
어쩐지 찜찜하지 않은가. 호기롭게 촬영에 나섰는데 시작부터 조금 운이 좋지 않다니!
“진짜 보통 분이 아니신 거죠? 저희가 운이 안 좋은 게 아니라.”
“흐흐. 호락호락하지 않다고는 말씀드릴 수 있어요.”
운이 나쁜 게 아니라고 믿고 싶은 주인의 옆에서 작가가 웃으며 대답했다.
‘다음은 멤버들이 잘할 만한 게임이 걸려야 할 텐데.’
시작을 마이너스로 해 버려서 사기가 떨어질까 걱정이었다.
가위바위보 스폿을 벗어난 멤버들은 작가에게 받은 지도를 펼쳐 들고 다음 게임 지점을 골랐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가위바위보를 하게 될 줄은 몰랐던 것처럼, 지도에는 어떤 게임이 준비되어 있는지 적혀 있지 않았다.
다만 지도를 살펴보던 준해가 중요한 정보를 짚어냈다.
“여기 깃발 마크 보면 중간에 손 모양 그림 있잖아. 방금 스태프분이 들고 있었던 깃발도 그렇고.”
“어디? 아, 그러네.”
멤버들이 머리를 맞대고 모여 준해가 가리킨 깃발 마크를 살펴보니 그의 말대로 중앙에 픽토그램 같은 단순한 손 모양 아이콘이 있었다.
준해는 지도의 다른 깃발을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여기는 공, 여기는 물방울……. 다 다른 거 보니까 아마 게임 힌트인 것 같아.”
“오오. 역시 우리 팀 브레인. 눈썰미가 좋아.”
“그럼 우리 어디로 가지?”
힌트로 보이는 마크를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그림만으로는 정확히 추측하기가 어려웠다.
재민이 그중에서 현재 위치와 가까운 한 지점을 가리켰다.
“여기 종이랑 펜 그림인 걸 보니까 머리 쓰는 거 아닐까? 준해한테 맡겨보자.”
“본인이 할 생각을 안 하고.”
“그럼 머리 쓰는 거 형이 할 거야?”
“아니. 준해한테 맡기지.”
태클을 건 한이도 머리 쓸 생각은 없어 보이자 준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위바위보는 운이지만 이건 노력하면 어떻게든 할 수 있는 거잖아.”
“가까우니까 한번 가보자.”
재민의 말대로였다. 이미 운으로는 한 번 패배를 겪은 모노크롬이기에 노력으로 커버할 수 있는 게임이 필요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해랑이 반장으로서 이동을 결정했다.
얼마 걷지 않아 도착한 멤버들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푸르른 나무 아래에 설치된 학교 책상과 의자. 그곳에도 깃발을 든 스태프가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여기 무슨 게임이에요?”
“안녕하세요. 이 파란 하늘과 자연. 여러분들도 마구 영감이 떠오르지 않으시나요?”
대본으로 준비된 멘트였는지 국어책 읽듯 부자연스러운 말투. 하지만 멤버들은 그보다는 내용이 신경 쓰였다.
머리 쓰는 게임인 줄 알고 찾아왔는데 이런 감성 돋는 서론이라는 것은…….
“이곳의 게임은 ‘그림 연상 퀴즈’입니다.”
잘못 찾아왔나?
그러나 이어지는 설명을 들어 보면 그리 난도가 높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림을 보고 어떤 상황을 묘사한 건지 맞혀주시면 되는데요. 예를 들면, 이 그림.”
스태프는 동화책 삽화 같은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하나 들어 보였다.
“노란 병아리가 역도 하는 그림?”
“네. 정답은 ‘병아리가 운동하는 장면’입니다.”
“이건 쉬운데요?”
“대신, 그림은 멤버 한 분이 주제를 보고 직접 그려주셔야 합니다.”
그 말에 멤버들의 눈치 싸움이 펼쳐졌다.
“야. 그림 잘 그리는 사람 있어?”
“알면서 뭘 물어. 그나마 해랑 형…….”
“그림을 그려주실 분은 저희 제작진이 미리 정했는데요.”
멤버들이 고민하는 것을 봤는지 스태프는 추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모노크롬은 재민 씨.”
“망했다.”
역시 잘못 찾아왔다.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소리에 애초에 재민은 고려 대상에서 빠져 있었다. 재민도 자신이 그림에 약한 걸 아는 터라 좌절했다.
멤버들은 사전 인터뷰에서 지나가듯이 나왔던 질문이 이것 때문이었음을 깨달았다.
당시 우형이 방학 숙제로 일기를 언급했던 직후.
[어릴 땐 그림일기를 쓰기도 하잖아요? 혹시 멤버분들은 미술 수업은 좋아하셨나요? 아무래도 같은 예체능이다 보니까 가수분들 중엔 미술에 재능이 있는 분도 계셔서요.]
[전 그림 그리기 진짜 싫어했는데. 열심히 그려도 결과물이 안 좋아서.]
노력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는 것을 좋아하는 재민에게 그림이란 재능의 영역에 가까웠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꺼냈던 말이 지금 이런 결과로 돌아왔다.
게임 참가 여부야 멤버들이 선택하지만, 설명까지 듣고도 포기하는 것은 큰 이유가 있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모노크롬은 그저 이곳으로 걸어와서 설명을 들었을 뿐이지만 그 뒤에선 스태프들이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함께 이동하고 잘 나오는 구도를 찾아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이 상황에서 게임을 포기하면 아무 분량도 못 얻어내고 또다시 같은 수고를 반복해야 할 텐데 어느 누가 “저희 못 해요.” 하면서 간만 보고 내빼겠는가.
오랜만에 예능 출연 기회를 잡은 모노크롬에겐 더욱 그랬다.
“참가비는 5천 포인트. 게임 진행하는 10분간 정답 하나당 천 포인트 획득입니다.”
“재민아. 너한테 달렸다.”
“음. 해 볼게.”
평소 재민의 태도가 ‘최대한 잘해 볼게.’였다면 지금은 자신이 없는지 ‘일단은 해 볼게.’에 가까웠다.
제작진이 타이머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신호가 울리고, 재민은 주제를 보고 준비된 스케치북에 열심히 펜을 휘갈겼다.
제법 빨리 완성한 그가 그림을 들어 올리자 멤버들은 통탄했다.
“야, 너……. 미술 학원이라도 다녀야겠다.”
“전문가분이라도 저걸 구제할 수 있을까?”
평소에 그림 그릴 일이 없었기에 멤버들이 그의 그림을 마지막으로 본 건 재민이 활동을 중지하기 전.
몇 년 만에 보는 재민의 그림 실력은 멤버들이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이런 일로 변치 않았음을 체감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시간 내에 빨리 그려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그림은 더욱 과격해졌다.
“저게 뭐야. 돼지?”
“정답. 너구리가 게임 하는 모습.”
“땡.”
스태프는 단호하게 오답을 알렸고, 말로 힌트를 줄 수 없는 재민은 열심히 고개만 저었다.
눈이 시커멓게 그려진 정체불명의 생물체에 멤버들이 ‘너구리’, ‘판다’만 열심히 외치고 있는 사이, 곰곰이 그림을 지켜보던 우형이 외쳤다.
“알았다. 고양이!”
“저게 무슨 고양이야.”
한이가 이해가 안 된다는 어투로 말했으나 재민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고양이라고? 이걸 어떻게 알아!”
“재민이는 단순하게 생각해야 돼.”
저보고 단순하다고 평하는 앞담에 재민은 또 고개를 저었지만 우형은 그것을 무시하고 감을 잡았다는 듯이 설명했다.
“전체적인 걸 보지 말고 디테일만 봐. 코가 이상한 게 아니라 옆에 수염이 그려져 있는 거야. 앞에 모니터 같은 게 있고 손에 뭔가 들고 있는 걸 보면…… 정답! 고양이가 TV 보는 모습.”
“정답입니다!”
“와. 형이 진짜 리더다.”
숲을 보지 말고 나무를 보라는 조언.
이상한 말이었지만 그것으로 정답을 이끌어낸 것은 사실이라 멤버들이 모두 감탄했다.
첫 번째 주제에서 시간을 제법 잡아먹었지만, 그 이후엔 조언을 힌트 삼아 멤버들도 마음의 문을 열고 재민의 그림을 해석할 수 있었다.
“정답! 돼지를…… 삶는 건가요?”
“땡.”
“잔인해!”
“아! 정답! 돼지가 목욕하는 거!”
“정답입니다!”
뒤로 갈수록 시간이 촉박하여 그림은 개판이 되어갔으나 멤버들의 해석 실력은 반비례하여 일취월장했다.
“와. 저걸 어떻게. 혹시 회사에서 이런 연습이라도 하셨나요……?”
“아뇨. 저도 저렇게 잘할 줄은 몰랐네요.”
처음엔 재민의 그림 실력에 놀라워하던 스태프들도 이제는 가속이 붙듯이 점점 빨라지는 정답 속도에 놀랐다.
주인도 멤버들이 게임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감탄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건 거의 텔레파시 게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재민의 그림이었지만. 예체능 감각이 춤에만 집중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팀워크가 승리했다…….’
모노크롬의 이번 게임 스코어는 참가비 5천 포인트를 만회하고도 플러스 9천 포인트.
다행히 가위바위보로 지출했던 참가비도 커버하고 흑자로 돌아섰다.
와중에 가장 뿌듯해하는 것은 재민이었다.
“나도 그림 실력이 늘었나 봐.”
“아니. 그건 아니야.”
두 번째 게임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낸 모노크롬 멤버들은 이 기세를 몰아 다음 게임 포인트로 이동했다.
촬영지가 마을 하나 전체이다 보니 이동하는 길 중간엔 작은 시냇물도 흐르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강을 건너가는 다른 길도 있었지만 제작진은 이쪽으로 건너가는 게 좋을 것 같다며 추천했다. 마을의 풍경을 보여주기엔 제격인 장소였으니까.
멤버들이 시냇물에 놓인 징검다리를 폴짝폴짝 뛰어 건너고, 멤버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찍은 스태프들도 뒤이어 이동을 시작했다.
먼저 건너가서 대기하던 멤버들 사이에서 재민이 뭔가 걸리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기 조금 미끄러웠던 것 같지 않아?”
***
세트장에서 촬영할 때도 중간중간 대기시간이 생기고는 했는데, 이런 외부 촬영은 출연진에 스태프까지 이동해야 하니 더 번거로운 감이 있었다.
멤버들이 시냇물을 건너며 카메라 앵글 밖으로 나가자 스태프들은 잘 찍혔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이동에 나섰다.
‘아직 그렇게 덥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한여름인 방학 시즌에 방영되어야 하니 촬영일은 그보다 빨랐다. 그래도 계속 햇볕 아래에 있는 것은 고된 일.
그걸 고려했는지 몇몇 게임 지점은 실내에 위치했다.
물가라서 카메라를 더 세심히 챙기는 스태프들을 뒤로하고 스타일리스트를 포함한 우리 팀이 앞서 건너가려는데, 먼저 건너가 있던 멤버들이 왜인지 이쪽으로 다시 다가왔다.
“거기 조심…….”
“엄마야!”
한 손에 양산을 들고 있느라 균형을 잘못 잡았던 것일까. 돌다리를 잘못 디뎌 휘청하려는데 누군가 내 팔을 턱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