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아! 형은 안 돼. 안 돼요, 이사님. 이 형은 융통성이 없어요.”
한이는 해랑과 함께 운동하러 갔을 때 그가 얼마나 깐깐하게 굴며 자기를 굴렸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필 관리 때문에 가장 스트레스받았던 한이라서 그의 까다로운 태도가 더 가슴에 사무친 모양이었다.
멤버들도 해랑의 성격을 잘 알기에 ‘멤버들을 굴리겠다’는 소리가 진심이란 걸 깨닫고 질색했으나, 내 입장에선.
‘……나쁘지 않은데?’
모노크롬의 공중파 예능 전적이 어떠하던가.
<아이돌 대운동회> 남자 육상 달리기 1위 해랑. <최고의 팀메이트> 1등 팀 재민.
일단 1등을 하면 편집될 리도 없고 원샷을 받든 소감 인터뷰를 하든 최소한의 분량은 확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아이돌부 방학캠프> 또한 게임을 통해 포인트를 쌓아 경쟁하는 방식의 프로그램이었다.
최종 목표는 ‘우등반’이란 이름의 1등으로 뽑히는 것.
“1등 할 수 있어?”
“노력해 봐야죠.”
확신하지는 않았지만 믿음직한 대답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태도야.
돌대회 때야 적극적으로 촬영에 나선 것도 아니었고 재민의 일로 ‘다치지 말자’를 모토로 내세웠지만, 이 프로그램에선 1등을 노려봄 직하지 않을까.
“좋았어. 반장은 해랑이로.”
“아아…….”
해랑이 당당한 표정으로 멤버들을 둘러보고 한이가 탄식했다.
“준해는 대신 부반장 해.”
결국 반장 선거에서 떨어져 크게 실망한 준해에게 나는 부반장 자리를 선사했다.
아쉽긴 해도 아무 지위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는지 준해도 금방 수긍했다.
반장을 정하고 나니 곧바로 촬영을 시작할 시간이라 스태프들의 안내에 따라 멤버들은 카메라 앵글 안으로 들어가 섰다.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한 스태프가 슬레이트를 치고 빠지자 리더 우형이 작게 “둘, 셋.” 구호를 보냈다.
“블랙 앤 화이트! 모노크롬입니다!”
구호에 맞춰 인사법을 외친 모노크롬은 짝짝 박수를 치며 꾸벅 인사했다.
“그래서 저희…… 뭐 하면 되는 거죠?”
인사 하나 했는데 할 게 없어진 멤버들.
그도 그럴 게 작가는 ‘오프닝을 어떻게 진행할지는 촬영이 시작되면 알려드리겠다’고 했던 것이다.
멤버들이 지시만 기다리고 있자 작가는 온화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희 프로그램이 여름방학 특집이잖아요?”
“네. 여름방학.”
“여름방학을 맞이하면 어떤 기분이세요?”
“기쁘다? 신난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작가는 곧바로 본론을 꺼내지 않고 서론으로 질문을 늘어놓았다.
뭔가 원하는 대답, 혹은 정답이 있는 게 아닐까. 멤버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대답했다.
“준해는 종강하면 무슨 기분이에요?”
“학교 안 가도 돼서 좋죠. 해방된 느낌. 자유로운 느낌?”
재민이 유일한 대학생인 준해에게 묻자 준해는 자신의 경험을 빗대어 대답했다.
그리고 이게 정답이었는지 작가가 드디어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네! 방학을 맞으며 처음 느끼는 기분은 ‘자유로움’이 아닐까 하는데요. 방학식 끝나고 일찍 하교해서 마음껏 자유를 느끼는 기분. 기억나시나요?”
“생각난다. 그건 종강한 기분이랑은 달라요. 종강은 그냥 ‘하…… 시험 끝났다.’고, 방학은 ‘와! 방학이다!’ 이런 느낌이거든요.”
“아침에 일어났다가 ‘아, 오늘 방학이지.’ 하면서 다시 자는 게 최고잖아.”
이야기를 듣다 보니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지 멤버들은 방학을 맞이한 첫날의 에피소드를 풀어냈다.
동심을 떠올리며 훈훈하게 이어지던 대화도 잠시.
그다음으로 작가가 꺼낸 말에 모노크롬은 굳어버렸다.
“자! 그럼 모노크롬 여러분도 방학을 이제 막 맞이한 것처럼 30분 동안 이곳에서 자유시간을 만끽해 주세요!”
“네……?”
댄스로 치자면 프리스타일 댄스. 랩으로 치자면 프리스타일 랩.
이것도 그야말로 아무 대본도 없는 프리스타일 오프닝이었다.
‘저, 저기 저희 애들은 그런 데에 면역이 별로 없는데요!’
라는 소리가 목구멍 바깥으로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출연자 외의 스태프는 오디오에 끼어들어서는 안 됐다.
물론 방송 출연 경력이 많지 않더라도 6년 차고, 라이브 소통 방송은 많이 해왔다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없이 ‘알아서 분량을 만들어 주세요!’ 하면서 진행까지 맡기는 건 예상 못 했단 말이야!’
이런 걸 먼저 예상하고 뭐라도 준비해 왔어야 했던 게 아닐까?
내가 엔터 업계 초짜라서 멤버들에게 무기도 안 쥐여주고 전장으로 내몬 건 아닐까?
나는 머리를 짚고 준비성이 부족했음에 통탄하고, 멤버들은 당황하여 우왕좌왕했다.
예능 레벨 투톱인 한이나 재민이 나서기를 기대했으나 그들도 이런 상황은 처음인 듯 잠시 버벅댔다.
결국 판단은 방금 새로 뽑힌 반장에게 돌아갔다.
“반장. 오늘 촬영을 잘 시작하려면 뭐부터 해야 하죠?”
멤버들의 시선이 해랑에게 몰렸다.
다른 아이디어가 마땅히 떠오르지 않아서 자신에게 질문이 돌아온 것을 아는지 해랑은 멤버들을 둘러보다 바로 입을 열었다.
마치, 자기가 꺼낼 대답은 하나라는 듯이.
“체력 비축.”
그리고 잠시 후.
카메라 앵글 안에 남은 것은 돗자리를 깔고 드러누운 모노크롬 다섯 멤버들.
“……이래도 돼요?”
“안 될 건 없죠. 말 그대로 자유시간이니까요.”
내가 작가에게 슬쩍 물으니 작가는 걱정할 게 뭐가 있냐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멤버들이 가만히 있자 스태프들도 카메라만 세워두고 거의 휴식 시간이었다.
‘정말 이래도 된다고?’
지금까지 모노크롬의 활동을 지켜봐 오면서, 해랑이 일할 땐 열심히 일하고 쉴 땐 열심히 쉬는 것은 알고 있었다.
과연 그다운 대답이었지만…… 방송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안 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정말 괜찮을까?
말은 이렇게 해도 나중에 통편집되는 거 아니야……?
“다른 팀은 혹시 뭐 하는지 알 수 있나요?”
스태프들끼리 스마트폰 메신저로 계속 상황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아서 물어보니 작가는 메신저창을 위로 훑으며 대답했다.
“방학 관련 토크를 하는 팀도 있고요, 자기소개 하는 팀도 있고…….”
맞아. 보통 그런 정석적인 오프닝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다른 팀이 하는 걸 우리까지 하면 식상하려나 싶기도 하고.
“SPID는 아직도 반장이 안 정해져서 계속 반장을 정하고 있다나 봐요.”
권력욕은 어디에나 있구나…….
어쨌든 이렇게 누워있는 것은 역시나 우리 팀뿐이었다.
난 뭘 기대하고 물었던 걸까. 다른 팀들도 다 이렇게 누워서 시간을 보내기를 기대했던 걸까.
‘괘, 괜찮을까?’
똑같은 걱정을 했는지 우형과 준해는 누워있다가 슬쩍 고개를 들고 주변을 확인했다.
멤버들도 스태프도 쉬고 있는 것을 보고 다시 머리를 뉘었지만 손을 꼼질거리는 것을 보면 여전히 불안한 모양.
한이와 재민은 누워서 잠깐 조잘대더니 그것도 몇 분 안 가고 조용해졌다.
해랑은 바로 잠이 든 건지 뭔지 정말로 열심히 누워만 있었고.
‘뭐…… 체력 비축한 만큼 본 촬영에서 분발하겠지.’
그렇게 모노크롬은 예능 촬영의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
“같은 반이란 설정이면, 우리 다 같은 학년이고 동갑인 거잖아요?”
첫 게임 지점으로 이동 중. 한이가 느닷없이 이 프로그램의 설정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렇게 서두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우형은 그가 무슨 소리를 할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이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역시나 예상대로.
“야. 우형아.”
“…….”
우형은 카메라가 돌아가는 중이라 웃었지만, 동갑 설정은 썩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
그러나 한이 또한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는 점을 의식하고 그를 도발한 것이었기에 모른 척하며 그를 놀렸다.
“우형아. 표정이 왜 그래?”
“동생이 형에게 버릇없이 구는 모습이 방송에 나가면 어린이 시청자분들에게 안 좋지 않을까요?”
평소 같았으면 바로 한마디 쏘아붙였을 텐데, 카메라 앞이라 직설적으로 뭐라 말은 못 하고 우형은 대신 제작진에게 동의를 구했다.
“저희 아마 15세 관람가일 거예요.”
“…….”
결국 제작진 동의 구하기에 실패한 모습을 보고 준해는 “푸핫.” 하고 웃음이 터졌다.
“우형아. 아니, 여우야. 친구끼리 왜 그래.”
재민은 평소에 우형을 ‘여우 형’이라고 불렀기에 형 호칭을 빼면 그냥 ‘여우’였다.
이제 그냥 못 들은 체하기로 했는지 우형은 반응하지 않았고, 뒤에서 따라오던 한이와 재민은 아예 ‘여우야, 여우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스테레오로 들려오는 놀림에 우형은 촬영 중임을 끊임없이 상기하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을 다스렸다. 그리고 앞에 있는 동지를 불렀다.
“해랑, 아니, 반장. 너도 애들한테 형이잖아. 뭐라고 말 좀 해봐.”
“내가 알아서 할게, 여우형.”
동지인 줄 알았는데 가장 당돌한 대답을 꺼내놓은 해랑에 우형은 말문이 막혔다.
연장자 한 명을 두고 1대 4의 상황. 재민이 옆에서 저게 바로 힙합 정신이라며 해랑의 편을 들었다.
“제가 빠른년생이라 형이란 설정이거든요.”
“에이. 친구끼리 누가 빠른년생 따져요.”
한이가 퉁명스럽게 끼어들고, 참고 참던 우형은 결국 걷다가 적당한 골목이 있는 곳에서 그를 옆으로 밀어 카메라 밖으로 내보냈다.
“아악!”
오디오만 들으면 무슨 일이라도 난 것 같은 목청.
주인은 그런 멤버들의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다 수목원에서 있었던 비슷한 상황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체력 비축한 게 도움은 됐나 봐.’
잠이야 푹 자두라고 했지만 평소 바이오리듬과는 다른 일정이었으니 그리 푹 자고 나왔을 리도 없을 터.
촬영지로 이동하느라 해도 안 뜬 이른 새벽부터 이동했으니 아마 평소보다 피곤하긴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보니 체력 비축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그러나 비축한 체력을 또 초장부터 2절, 3절 돌림노래로 발산하려 하기에 주인은 적당히 손으로 컷 사인을 보냈다.
한이가 그 사인을 곧바로 알아채고 우형과 다시 카메라 화면 안으로 들어섰다.
“아. 오키. 형. 존중.”
재민과 준해는 카메라에 가까이 붙어서 “저희 리더가 이렇게 깐깐해요.” 하면서 이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디오를 채우며 모노크롬은 시작점에서 가장 가까운 게임 장소로 찾아 왔다.
옛날 느낌이 남아 있는 버스 정류장. 그곳엔 한 스태프가 NPC처럼 지도에 표시된 마크와 똑같이 생긴 깃발을 들고 앉아 있었다.
“저희 게임 하러 왔는데요.”
“어서 오세요. 참가비는 있으신가요?”
“참가비도 있어요?”
“게임 한 판당 2천 포인트입니다.”
게임을 진행하며 모으는 포인트는 필요한 곳에 사용할 수도 있었다. 말하자면 촬영에서 쓰이는 화폐.
이렇게 게임마다 참가비가 필요하기에 모든 팀은 시작하면서 5만 포인트를 기본으로 제공받았다.
방금 촬영에 나선 지금은 포인트가 부족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멤버들은 가볍게 참가비 지불을 결정했다.
“이곳의 게임은 가위바위보입니다. 저와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겼을 시 보상은 4천 포인트입니다.”
“이거 완전 운이잖아요!”
첫 번째로 진행하는 게임이라 다들 긴장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소소한 내용이라 허탈해진 준해가 외쳤다.
한마디로 이기면 두 배, 지면 본전도 못 찾고 참가비만 마이너스.
“첫 게임으로 딱 좋을 수도 있어. 여기서 이기면 오늘 운세가 좋은 거야.”
한이가 말한 것처럼 운세를 점쳐 보자는 의미에선 첫 번째 게임으로 가장 적당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 첫 스타트를 누가 끊느냐. 멤버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눈빛을 교환하자 우형이 먼저 나섰다.
“나 조금 운 좋은 편이야.”
웬일로 자신감 있는 발언에 동생들은 “오오~.” 하면서 그를 반겼다.
“좋았어. 이기면 오늘 우리 운세 좋은 거야!”
“형한테 오늘 운세가 달렸어!”
“가위! 바위!”
멤버들의 응원을 한 몸에 받으며 스태프와 마주 선 우형.
카메라가 두 사람을 비추고 멤버들은 흥미진진한 목소리로 함께 구호를 외쳤다.
“보!”
우형 가위. 스태프 주먹.
한 판 만에 승패가 결정 나자 곧바로 내려앉는 정적.
준해가 굳어버린 우형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괜찮아. 우형아.”
“…….”
1등을 노리며 기세 좋게 나선 모노크롬.
그들의 오늘 운세는 조금 나쁨으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