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믹스테이프 공개가 이런 전개로 이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나는 최 비서가 들고 온 태블릿으로 방송 출연 요청 내용을 확인했다.
프로그램 이름은 .
아마 연기 쪽에서 쓰이는 ‘씬스틸러’라는 말을 힙합 식으로 바꿔서 지은 프로그램명으로 추정되었다.
‘힙합 프로그램이란 건 알겠는데…….’
보통 새 스케줄이 들어왔을 땐 설명을 굳이 길게 듣지 않아도, 기본 정보만 훑어보면 개요는 대강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모노크롬이 출연한 예능이나 음악 방송은 한 회차만 봐도 프로그램을 파악할 수 있는 형태의 방송들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런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1화부터 꾸준히 봐야 전개를 이해할 수 있다.
TV와 먼 생활을 하던 나로서는 쉽게 손대지 못하던 종류의 방송이었기에 어떤 프로그램인지 잘 감이 오지 않았다.
내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자 최 비서는 차근차근 설명에 나섰다.
“뮤직플러스TV라는 채널이 있지 않습니까?”
“응. 알지.”
채널 이름대로 음악, 그중에서도 가요를 전문으로 다루는 채널이었다.
모노크롬도 출연했던 케이블 음악 방송 중 하나, <픽스테이지>를 만드는 방송국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정기적으로 제작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앨범을 하나 이상은 낸 프로들만 출연하고요.”
“으음. 해랑이가 이번에 믹스테이프를 공개해서 섭외 기준이 충족됐다는 거지?”
“네.”
그렇다고 믹스테이프를 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바로 섭외가 들어오다니.
‘혹시…… 출연자가 엄청 부족한가?’
이런 변방의, 아니, 아직 주목받지 못한 아이돌 그룹 멤버한테까지 출연 요청을 할 정도로?
그러나 이어지는 최 비서의 설명을 들어보니 그렇게 섭외에 난항을 겪을 정도로 무명의 프로그램은 아닌 듯했다.
“이번에 제작하는 게…… 시즌5입니다. 저번 시즌은 작년에 방영되었고요.”
“시즌5까지 나올 정도로 꾸준히 만드는 거면 시청률이 꽤 잘 나왔었나 보네.”
“네. 힙합 전문 프로그램은 많지가 않아서 시청 수요가 집중된 것으로 보입니다.”
음악 전문 케이블 채널들은 음악 방송과 음악 방송 비하인드, 그리고 가요 관련 예능 비중이 컸다.
그 와중에 힙합이라는 블루오션을 공략하여 빵 터진 건가.
랩 수위 때문인지 공중파가 아니라 케이블에서만 제작된 탓에 나한테는 더욱 이름을 접할 기회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시청층이 있는 건 좋은데 서바이벌 형식이면 진짜 거의 야생 아냐……?’
서바이벌. 말 그대로 생존이 아닌가. 강한 자는 살아남고 약한 자는 도태된다.
초장부터 탈락할 수도 있고 끝까지 살아남아 분량을 챙길 수도 있다는 소리다. 그걸 판가름하는 요소는 아마도 실력이겠지.
‘실력은…… 그리 떨어지진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해랑의 랩 레벨은 현재 8을 갓 넘어선 상태였다. 원래 7이었다가 이번 믹스테이프 공개 이후로 오른 것이었다.
보컬 레벨 8인 한이가 확신의 메인 보컬이었으니 해랑도 확신의 메인 래퍼였다.
‘그런데 정말 이 분야만 전문으로 파는 프로들 사이에선 어느 정도 수준일지 잘 가늠이 안 된단 말이야.’
마이 엔터는 아이돌 육성을 표방하는 게임이지, 한 부문의 아티스트를 전문으로 육성하는 게임은 아니었다.
물론 마이 엔터 공식 커뮤니티의 그 미친 보컬 장인처럼 아이돌 육성을 포기하고 한 포지션을 중점으로 키우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비정상적인 플레이를 지금 이 현실에 대입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으음. 힙합 쪽이면 역시 래퍼인 해랑이 제일 잘 판단하겠지. 본인 의사도 물어봐야 할 테고.’
책상머리에서 머리를 굴려도 잘 모르겠으니 섭외를 받은 당사자인 해랑을 불러서 물어보는 게 가장 빨랐다.
얼마 전이었다면 ‘해랑이가 저 상태인데 혼자 방송에 내보내도 괜찮을까……?’ 하고 고민했겠지만, 믹스테이프 공개 이후로 그는 심경에 어떤 큰 변화가 있었는지 거의 괜찮아진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갑자기 외향적인 성격으로 바뀐 건 아니라 혼자 내보내기엔 여전히 걱정이 되지만.
뮤직비디오 촬영장에서 그나마 아는 얼굴을 보고 나서야 안심하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니 더욱 그랬다.
그런 그가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나간다는 것이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불러 섭외 사실을 알려주니.
‘표정이 영…….’
일단 나가겠다는 것처럼 끄덕이긴 했는데 그리 내켜 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처음엔 무표정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자꾸 보니 무덤덤한 표정에 담긴 감정을 조금씩은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건 아마도 껄끄러워하는 표정에 가까웠다.
“뭐가 마음에 좀 걸려?”
“……나가면 모노크롬 얘기가 나올 것 같아서요.”
내가 물어보자 해랑은 조금 주저하더니 그런 표정을 지었던 이유를 말해주었다.
그의 소속 그룹으로 모노크롬이 소개될 것을 말하는 건 아닐 터였다. 그게 껄끄러울 리는 없으니까.
아마 안 좋은 얘기가 원치 않게 발굴될 것이란 얘기겠지.
예를 들면 가수로서의 성적이라든가, 멤버 탈퇴라든가…….
‘그, 그러네. 힙합은 좀 더 거친 세계였지…….’
약점을 공격하는 ‘디스’란 것이 일종의 문화가 되어 있지 않던가.
분명 모노크롬의 성장을 위해 개개인의 역량을 공략하는 방안도 고려했었고, 방송에 나가면 개인과 그룹의 인지도는 조금이라도 오르겠지만.
이제야 좀 ‘탈퇴멤 있던 걔네’ 같은 이미지를 벗으려는 모노크롬에게 과연 이 프로그램이 좋은 선택일까.
“흠. 그럼 나가지 마.”
“……네?”
내가 잠시 고민하다 결론을 내자 해랑이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니, ‘그런 어중간한 태도로 나올 거면 때려치워!’란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일단 우리 그룹 앨범도 계속 준비해야 하고. 그렇게 힘을 쏟을 만큼 메리트가 있을지 판단이 안 서서.”
이름이 있거나 확실한 곳에서 불러주면 ‘감사합니다!’ 하면서 냉큼 받아들이던 나였지만 이번 경우는 불확실한 요소가 너무 많았다.
분량을 확실히 챙길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서바이벌 형식이라 언제까지 촬영 스케줄을 비워둬야 할지도 불투명했고.
‘물론 시청률 생각하면 아깝긴 하지만…….’
공중파 예능이 하나 잡혔다고 거만해진 게 아니다, 절대로.
이건 아이돌이라는 특수성을 생각해서 낸 결론이기도 했다.
아이돌은 멤버가 공격당하면 팬덤 또한 타격을 입는데 어떤 거친 말이 나올지 모르는 전장에 막 내보낼 수도 없는 일.
외부 인지도 잡겠다고 있는 내부 팬덤까지 들쑤실 수는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원체 남과 잘 엮이려 하지 않는 해랑인데 서바이벌 형식으로 사람들과 맞부딪치려면 남들보다 정신력을 두세 배는 더 써야 할 것이다.
그렇게 스트레스받을 것을 예상하면서도 출연을 강행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모처럼 섭외가 들어온 건데 조금 더 생각해 볼…….”
“아니.”
내가 너무 가볍게 결정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해랑은 어딘가 찜찜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난 재고의 여지도 두지 않고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돌대회 섭외가 왔을 때 제일 걱정했던 게 바로 이거였어.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할까 봐.
“강요가 아니라 제안이 온 거고 선택권은 우리한테 있는 거야. 나가든 안 나가든 장단점은 둘 다 있어. 안 나간다고 막 뒤처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우리는 원래 가던 길 가면 되는 거지.”
안 나가는 것도 장점은 있다. 그 말을 하니 해랑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내 빠른 결단을 걱정스러워하며 말리긴 했지만 역시 억지로 나가고 싶지는 않았는지 결국 해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출연은 거절할게. 우리도 앨범 준비하는 데 더 시간 쏟아야 하니까 그렇게 신경 쓰지 마.”
“네.”
나가고자 했다면야 나갈 수 있었겠지만 이렇게 되었으니 앨범 준비 때문에 못 나가는 것으로 정리했다.
‘제대로 된 프로그램 출연 거절하는 건 처음인데…….’
과연 이게 맞는 선택일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지금껏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조금 중심을 잡고 선 기분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협업 관계와 암묵적인 갑을관계 사이에서 얼마나 휘청거렸던가.
이것저것 욕심부리다가는 오히려 발목이 붙잡힐 수 있었다.
기왕 결론지었으니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그런데, 역시 이 업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가 의 출연 요청을 거절한 후, 상황은 스노우볼처럼 데굴데굴 굴러가기 시작했다.
***
해랑이 잠깐 이사실에 올라갔다 오더니 하는 말이 “프로그램 출연 섭외를 거절했다”였다.
점심 약속이라도 취소하듯이 가볍게 취소된 스케줄 소식에 멤버들은 기함했다.
다들 어버버 하는 와중에 준해가 먼저 멤버들의 마음을 대변하며 말했다.
“그래도 돼……?”
“이사님이 그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셔서.”
지금까지 모노크롬에겐 선택권이 많지 않았다. 회사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이 없으면 없는 대로.
이상하게 일정 주기대로 딱딱 맞춰 생기던 스케줄을 기계처럼 소화하다가, 또 어느 시기는 한참 동안 일이 없곤 했다.
주인이 뉴마의 새 이사로 부임해서 온 이후로는 전부 하고 싶었던 활동들이라 군말 없이 따랐고.
이렇게 지내온 모노크롬이기에 지금껏 일정 취소를 당한 적은 있어도 멤버의 의견으로 스케줄을 거절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방송은 출연료가 얼마 안 돼서 그런가?”
한이가 진지한 얼굴로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며 어떻게든 이유를 찾아보려 했다.
TV 프로그램 출연료는 별로 좋은 수입원이 아니라 회사 입장에서 미련이 없는 걸까.
‘안 나가도 된다’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이번 돌대회 섭외가 들어왔을 때였다. 그때를 떠올려 보니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멤버들이 수입 걱정부터 하는 것도 당연한 게, 이전까지 뉴마에서는 항상 투자한 것에 비해 수익이 안 나와 모노크롬에게 활동 지원을 많이 해 줄 수 없다는 얘기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방송을 가볍게 포기하는 것치고는 따로 수익률이 좋은 활동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예전과 비교하자면 한마디로, 돈이 들기만 하는 상태.
지금이 모노크롬에겐 딱히 불만스러울 것 없는 상황이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가기에는 뭔가가 걸렸다. 회사에 큰 도움이 안 되는 그룹이 과연 오래 유지될 것인가.
“우리가 소였으면 좋은 거 먹이고 살찌워서 되팔기라도 할 텐데.”
이번엔 또 무슨 영화를 본 건지 재민이 이상한 비유를 들기 시작했다.
컬러즈가 가끔 ‘뉴마가 애들을 소처럼 굴린다’는 소리를 하긴 했어도 그건 그냥 관용어구일 뿐이고 이건 정말 가축을 말하는 것이었다.
우형이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건 또 무슨 새로운 이상한 소리야.”
“계속 먹을 거 챙겨주시길래 그냥 생각나서.”
“네가 말라서 그렇다고 하셨잖아.”
“응. 그러니까 잘 모르겠단 소리야.”
평소처럼 생각나는 대로 내뱉은 것으로 보였지만 어쨌든 본질적인 내용은 같았다.
회사란 건 봉사 단체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자신들에게 계속 아낌없이 투자한다는 것은…….
“주인 님 진짜 막 재벌인 거 아닐까……?”
모노크롬에게 이해 못 할 상황이 생길 때마다 주인에 대한 인식은 점점 미스터리로 빠져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