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84화 (84/430)

# 84화

누가 자꾸 이렇게 방송국에서 뒷말하는 거야!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을 봐선 어디 숨어서 소곤대나 본데 다 들린다고.

모노크롬이 이제 막 촬영을 시작한 터라 관계자가 전부 세트장 안에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안타깝게도 모노크롬 담당자인 내가 들어버렸다.

“요새 모노크롬 이상하게 자주 나오지 않아?”

“난 처음에 무슨 신인인 줄 알았잖아. 처음 들어봐서.”

“그러니까. TV에 나오지도 않더니 최근에 갑자기 나오기 시작한 게 이상하단 소리야.”

“얘기 들어보니까 거기 책임자 젊은 여자로 바뀌었다는데 설마 손 PD님이랑…….”

젊은 여자에 특혜받는 게 아니냐는 소리.

묻어놨던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라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젠장…….’

[김 대리님 결혼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이상한 애한테 걸렸네. 불쌍해서 어떡해.]

[걔는 무슨 자신감으로 유부남한테 꼬리를 쳤대?]

이런 소문.

전부 버리고 떠났으니 이제 나를 괴롭힐 리도 없는 기억인데 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지.

머릿속의 댐이 와르르 무너져 귀가 시끄러워지는 듯한 감각에 귀를 막으려던 찰나.

“……뇌물 주고받은 거 아냐?”

……뭐야?

그간 나를 괴롭혔던 소문과는 다른 종류의 루머에 순간 맥이 탁 풀렸다.

얼마 전에도 그랬지. 회사에서 소문이 돈다길래 뭔가 했더니 사장이랑 싸웠다는 말이 돌았다고.

‘권력이 있으면 소문도 이런 식으로 나는 거냐고.’

젊은 여자라고 불순한 남녀 관계 뭐 그런 게 아니라 말이다.

반대로 예전엔 얼마나 만만하게 보였으면 그랬나 싶기도 하고.

심각한 내용을 듣길 원한 건 아니었지만 허탈한 기분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하. 근데 모노크롬이 TV 나오는 게 뭐가 어때서?!’

불안이 가시자 그 자리에 짜증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연예인이 TV에 나오겠다는데 뭐가 그렇게 이상해?!

대체 누가 이렇게 뒤에서 수군거리는지 찾아서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지만, 막상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회사에서나 갑이지, 방송국에선 을이었으니까.

이전에 복도에서 레드의 소문을 접했을 때는 내 존재를 밝히지 않고 그저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흩어지게 할 요량이어서 몸이 튀어 나갔지만.

지금은 내가 나서서 현장을 덮쳐버리면 내 이름으로 또 소문이 날 것이 아닌가.

그것도 모노크롬의 이름을 달고.

회사에선 대표 딸 낙하산이라 내 멋대로 움직일 수 있었는데, 그저 우물 속이었다.

이 정도 위치가 되고도 이 커다란 사회에선 무기력할 뿐이었다.

‘후우……. 참아야지 뭐 어쩌겠어.’

다행히 우울 직격탄은 아니었지만 다른 쪽으로 침울해지려고 하기에 그냥 내가 자리를 피하려는데.

“이사님.”

누군가 내 옷자락을 살짝 붙잡는 느낌이 전해져왔다. 동시에 귓가에 들려오는 작고 사근사근한 목소리.

귀에 익은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레드와 옐로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이 둘을 만나다니. 촬영 스케줄은 아닌지 평상복 차림이었다.

“저희 커피 좀 사주세요.”

살포시 눈웃음을 지은 레드가 그렇게 말하며 나를 다른 쪽으로 끌어당겼다.

잠시 걸으며 자리를 벗어나자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저런 소리를 듣고 계세요…….”

레드는 자신이 소문의 당사자라도 된 듯이 눈썹을 아래로 떨어트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전에 자기도 비슷한 일을 겪어서일까. 조금 전 내 상황에 이입한 것 같았다.

“그냥. 무슨 소리 하는지 듣고 있었어.”

그런 것치고 내 표정 꽤 굳어 있었겠지…….

그런데 정말로. 좀 화나는 건 맞지만 사실 더 심한 걸 예상했던지라 별거 아니었어. 조금 따끔한 정도.

굳이 예전 이야기를 꺼낼 생각은 없었기에 내가 생각보다 괜찮다는 것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흥. 전엔 다른 프로에서 아이리스 나와달라고 착한 척하더니 뒤에서 저러고 있는 건 또 뭐래요?”

이번엔 옐로가 나서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난 얼굴을 못 봤지만 둘은 뒷말하던 사람들이 어디 스태프인지 아는 모양이었다.

“다음에 또 그러면 아이리스 안 내보낸다 그래요!”

“푸핫.”

옐로가 나름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화내는 게 귀여워서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런데 말이야……. 이미 그러고 있었어.’

몰랐겠지만 나한테 아이리스 스케줄 물어보길래 잘 아는 척하면서 끼워 팔기도 이미 다 하고 다녔어…….

떵떵대던 것과는 반대로 내가 아이리스의 스케줄에 관여할 위치는 아니었기에 양심의 가책이 느껴져서 방송국에선 아이리스 관계자를 은근히 피해 다녔는데.

아이리스 멤버 본인이 허락해줬으니 다음부턴 양심의 가책을 덜 느껴도 되겠다.

난 기회를 놓치지 않으니까.

내 표정이 풀리자 두 사람도 안심했는지 다시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이 얼굴도 마음도 예쁜 아이들아…….

“그런데 너흰 왜 방송국에 있어?”

아이리스 저번 앨범 활동도 끝났을 텐데.

또 활동이 있다면 우리 회사의 대표 무지개인 민형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리가 없었다.

벌써 다음 앨범 활동을 할 정도로 시간이 많이 지나지도 않았고.

내가 의아해하며 묻자 레드가 대답했다.

“저희 막내가 <음악상상> MC를 맡아서요. 저희가 잠깐 스페셜 MC로 나가기로 했어요. 잠깐 그 미팅 하러요.”

아이리스의 막내라면 빨주노초파남보의 마지막인 보라색, 퍼플.

막내인 것치고 어른스러운 분위기의 미인이었다. 아직 고등학생이던가.

나도 오며 가며 몇 번 이름을 들은 것을 봐선 그룹 활동뿐 아니라 개인 활동도 제법 활발히 진행하는 것 같았다.

‘역시 아이리스는 잘나가는구나…….’

모노크롬은 공중파 음악 방송도 저번에 겨우 입성했는데 고정 MC에 스페셜 MC라니.

나는 방송국이 불러주면 비장하게 마음먹고 오는데, 아이리스에게는 방송국에 있는 게 딱히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걷다가 방송국 내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도 시간이 좀 있었고, 둘도 이렇게 여유로운 것을 보면 시간이 꽤 넉넉한 듯 보였다.

“그런데 왜 둘만 따로 다녀? 매니저는?”

항상 매니저를 대동하고 다니더니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리스 현장 매니저가 네 명인가 다섯 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공식 활동 스케줄이 아니어서 그런지 딱히 매니저가 찾으러 오는 기색도 없고 두 사람뿐이었다.

“매니저 언니는 퍼플이랑 같이 있고요. 저흰 그냥 자유시간.”

“저희 미팅은 끝났고 그냥 같이 가려고 기다리는 중이었어요. 퍼플이가 MC라 준비할 게 더 많아서요.”

옐로가 가볍게 대답하자 레드가 설명을 덧붙였다.

“이사님은요?”

“우린 예능 미팅이 있어서.”

“선배님들 예능 나가세요?”

내 대답에 레드가 관심을 가지며 되물었다.

하긴 아이리스도 같은 소속사였으니 모노크롬이 얼마나 활동을 못 했는지 알고 있었겠지.

공중파 방송국에 예능 미팅을 왔다는 게 의외로 들릴 법도 했다.

‘그래서 아까 누가 뒤에서 수군거리기까지 했지만…….’

이 쓸모없는 기억은 기억 저편으로 던져버리도록 하고.

잡생각을 버리고 다시 앞을 보니 레드가 반짝이는 시선을 내게 보내고 있었다.

“이사님이 하시는 일은 전부 잘되는 것 같아요.”

“으응……?”

그 반대라고 생각하는데.

인간 하드모드. 마이너스의 손. 내가 나에게 붙인 별명이었다.

내가 이 손으로 망가트린 게 얼마나 많은지 모르니까 하는 소리겠지만…… 잘된다고 느낄 정도로 뭔가 한 게 있었나?

‘으음. 스캔들 낸 기자한테 울분 토한 거?’

예전이 하도 심각했으니 그때와 비교하면 많이 나아 보여서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

항상 ‘욕먹지 말자’를 모토로 삼아 살아오다가, 반대로 칭찬을 접하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회사가 안 나뉘었으면 저희도 이사님이랑 같이 일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게…….”

나도 뉴레인이 분리된 줄 몰랐다. 이 세상에 와서 처음 뉴마에 도착했을 때 아이리스를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니까.

모노크롬에게 집중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사님 하시는 일도 계속 잘되고 선배님들도 잘됐으면 좋겠어요. 회사가 쑥쑥 커서 대기업 되면 저희도 이사님 밑에 한자리…….”

“야아!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옐로가 허무맹랑한 미래 설계를 하자 레드가 팔꿈치로 쿡 찌르며 말렸다.

……이쪽도 권력욕은 만만찮구나.

꿈을 크게 가지는 건 나쁘지 않지. 좋은 포부였다. 내가 이사 자리에 있긴 해도 뉴마를 키울 건 아니지만 말이야.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도 해 가며 즐겁게 수다를 떨고 있는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 님.”

“주인님?”

이런 호칭으로 나를 부른다는 것은 목소리로 판별하지 않아도 당연히 재민이었다.

옐로가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쳐다봤다.

아니야. 나 변태 아니야!

“아니, 내 이름 부른 거야!”

“아……. 주인, 주인 님.”

내가 다급히 해명하자 레드가 입으로 소리를 내며 곱씹었다.

‘그럼 그렇지. 설마 그런 취향이 의심되는 호칭으로 부르게 하셨을 리가.’ 하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냥 내 이름이야! 할머니가 지어줬단 말이야.

서둘러 오해를 차단하고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재민, 그리고 옆엔 우형도 함께 서 있었다.

“저희 촬영 끝났어요.”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꽤 빨리 끝났…….”

아니. 문득 카페에 걸린 벽시계를 보니 벌써 몇십 분이 지나 있었다.

‘대화에 너무 푹 빠져 있었나 봐.’

지금 나한테는 친구가 없어서 수다가 고팠던 걸까. 일 얘기가 아닌 수다를 떠는 건 정말 오랜만인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휴식도 시간 맞춰 하는 바쁜 애들을 오래 잡고 있으면 안 되겠지.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난 회사로 돌아가 봐야겠다.”

“가시게요?”

무척이나 심심했었는지 레드와 옐로는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크흡. 내가 이 애들을 두고 먼저 자리를 뜨다니.

“직장인이니 일해야지. 다음에 또 보자.”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아이리스의 바쁜 스케줄 속에 언제 또 만나서 이렇게 여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내가 다음을 기약하자 두 사람도 빙긋 웃으며 인사했다.

“우형이는 왜 그러고 끌고 왔어?”

카페를 나서니 재민은 왔을 때 모습 그대로 우형의 팔을 붙잡고 따라왔다.

“끌고 온 게 아니라, 형이 주인 님 찾으러 간다 그랬는데 안 오잖아요.”

“길이라도 잃었어?”

……방송국이 오랜만이라 어디서 헤맸던 걸까.

“바로 여기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던데요?”

“응? 그럼 부르지. 왜 안 들어오고.”

“앗. 그게……. 대화하시는데 방해될까 봐…….”

……나 또 칠렐레 팔렐레 헤벌레하고 있었나?

내가 아이리스를 보면서 표정 관리를 못 하고 있을 땐 어쩐지 항상 우형이 그걸 목격했다.

그리고 감추려고 하는 것 같은데 감춰지지 않는 저 시무룩한 표정.

“……일하러 온 거지, 수다 떨러 온 건 아니니까.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잠깐 기분 전환이었지만 실제로 이제부터 바쁜 일정이 이어질 테니 여유 부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멤버들을 이끌고 회사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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