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사전 미팅을 마치고 다들 기대감에 상기되었는데, 유독 한 명만이 눈에 띄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진짜 비 오면 어쩌죠? 그것 때문에 문제 되는 건 아니겠죠?”
“네가 정말 신선도 아니고 비구름을 몰고 다니는 건 아니잖아. 설령 비가 온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냥 확률 문제지.”
기상청도 잘 모르는 비구름 마음을 우형이 어찌 알고 조종하겠는가.
아이돌로서, 그리고 리더로서 이번 예능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은 이해하지만, 아무리 봐도 걱정이 과했다.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런 이유로 섭외를 취소하겠어?’
……아니, 방송계는 혹시 좀 다른가?
일반인들도 굳이 손 없는 날을 골라서 이사하고, 개업하면 고사를 지내는데.
이 프로그램 제작진도 그런 미신을 믿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대답을 해 놓고는 생각에 빠지자 우형은 다시 울상이 되었다.
“혹시 문제 생기면 저를 빼고서라도…….”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비 오는 게 걱정된다고 리더를 빼고 촬영에 나선다는 건 안 될 소리.
“전에 뮤비 촬영할 때 카메라 감독님이 그랬는데 여우비 정도로는 카메라에 큰 문제 없대.”
나는 우형을 안심시키기 위해 서둘러 그의 말을 끊고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전해줬다.
LA에서 뮤직비디오를 촬영할 때 실제로 비가 내렸지만 촬영에 지장이 없지 않았던가.
‘오히려 영상이 잘 나왔지.’
폭우를 몰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여우비 정도라면야.
우형과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옆에 있던 멤버들도 지원에 나섰다.
“그 정도면 우산도 안 쓰잖아.”
“맞아. 그리고 드라마 보면 비 뿌리면서도 잘 촬영하던데?”
“그런가…….”
우형도 조금씩 설득되어갔지만 여전히 한구석에 불안함이 남은 얼굴.
나는 멤버들을 뒤돌아보며 물었다.
“누구 우형이랑은 반대로, 나가면 항상 날씨 쨍쨍한 사람 있어?”
“……저. 가끔 비 온다는 날에 우산 챙겼는데 안 온 적이 좀 있어요.”
해랑이 가볍게 손을 들며 말했다.
모노크롬 내에 여우비를 부르는 사람 한 명, 해를 부르는 사람이 한 명.
“좋았어. 비 오는 기운과 비를 막는 기운이 상쇄됐으니까 만일 비가 오면 우리 팀 때문이 아닌 거야.”
“와. 천재다.”
혹여나 생길지 모르는 책임을 아예 외부로 돌리자 한이가 박수를 짝짝 치며 감탄했다.
‘비를 부르는 사람이 다른 팀에도 있을지도 모르는 거고. 어쨌든 우리 책임 아니야!’
나는 그렇게 깔끔하게 정리하고 다시 뒤돌아 앞을 향했다.
뒤에서 “근데 그냥 비도 아니고 여우비 내리면 빼박이겠다. 그치?”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이건 못 들은 거로 치자.
***
미팅 단계에서 섭외가 엎어지는 경우도 꽤 많다는데, 다행히 모노크롬의 2차 미팅 일정이 잡혔다.
‘2차 미팅이라기보다는 촬영에 가깝지만.’
방학이 테마다 보니 출연진은 전부 같은 학교 학생이라는 설정이었다.
같은 학교, 같은 학년에 그룹별로 다른 반이라는 설정.
그래서인지 테마에 맞춰 학생증이라는 것을 따로 제작한다고 하였다. 그를 위해 프로필 사진 등 촬영이 따로 필요하다는 것이 제작진들의 설명이었다.
멤버들의 학생증은 제작해서 시청자들에게 추첨 선물로도 뿌린다고.
‘내가 팬이라면 갖고 싶어서라도 본방 사수하겠지.’
아이돌 예능에서 할 법한 적절한 시청 유도 방법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사전 촬영까지 하면 이제 출연은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
촬영은 특이하게도 스튜디오가 아니라 방송국 세트에서 진행되었다.
방송 편집에 필요한 소재 등도 함께 촬영하기 때문이라나.
미팅 겸 촬영을 위해 방송국에 도착하니, 그곳엔 촬영을 위한 교복이 준비되어 있었다.
“와. 교복 진짜 오랜만이다.”
멤버들은 옷걸이에 걸린 교복을 꺼내 들어 구경했다.
교복은 남색 베이스. 재킷 칼라와 소매 끝단에는 흰색과 빨간색 라인이 한 줄씩 들어가 있었다.
빨간색 라인이 강렬해서인지 화려한 인상이라, 실제 교복이라기보다는 방송에 쓰일 법한 교복이란 느낌이었다.
“우리 학교 교복은 칙칙한 초록색이었는데.”
“푸하. 기억나. 그때 누가 너보고 시금치라고 그러지 않았냐?”
“그거 형이 그러지 않았어?”
한이와 재민은 교복 재킷을 보고 예전 기억이 떠올랐는지 연습생 시절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시금치라니. 색깔을 보고 먹을 것 이름을 붙이는 건 인간의 본능인가.
내 학창 시절 교복 별명은 팥죽이었다.
‘나도 옛날 생각난다.’
교복은 사실 옷 자체만 놓고 보자면 정석적인 재킷 스타일.
거기에 교복이란 이름이 붙은 것만으로도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아이템으로 변모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오피스룩에 이어서 이건 또 신선한 코디네.’
새로운 스타일의 등장에 흥미롭게 구경하고 있는데, 거울에 찰싹 붙어 있는 우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렇게 딱 붙어서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 건……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고치려는 게 아니라 자신감이 떨어져서다.
“왜 또 그러고 있어?”
“앗. 저……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
나는 한 걸음 물러서서 그를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한 번 훑었다.
사이즈도 맞고. 그냥 재킷이라 이상해 보일 리가 없는데?
“어울리는데 왜?”
그러나 우형이 안 어울린다고 고민한 건 교복 스타일 때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교복 진짜 고등학교 졸업하고 처음 입어봐요. 7년도 더 넘은 것 같은데 갑자기 학생 코스프레 한다고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진 않겠죠?!”
그는 갑자기 한탄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지금 와서 갑자기 학생이라는 컨셉에 자신이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 마음에 걸린 모양.
‘아이돌들 성인 돼서도 교복 비슷한 의상 한 번씩은 입던데…….’
하고 생각하다가 금방 현실을 떠올렸다.
아. 모노크롬은 그럴 새도 없이 악동 컨셉으로 정착했었지…….
모노크롬의 악동 스타일이란 영어가 잔뜩 적힌 티셔츠, 주머니가 여기에도 달리고 저기에도 달린 점퍼, 끈 같은 게 많이 달린 바지. 이런 것들이었다.
그런 옷도 잘 입히면 이쁠 텐데 당시 의상 아이템을 살 돈이 부족했는지 마치 10년 전 힙합 꾸러기 같은 느낌으로 완성되었고.
‘게임에 이쁜 옷이 많다는 걸 아이리스를 키우면서 알았으니까…….’
<12345>의 악몽이 다시 살아나는 듯해서 나는 머리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버렸다.
살면서 교복을 입는 시기는 보통 중, 고등학생 시절을 포함해서 총 6년.
우형은 그보다 더 긴 시간을 교복과는 먼 생활을 하다 갑자기 입게 되었으니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해는 갔다.
그러나 정말 겉모습은 흠잡을 데 없어서 있는 그대로의 감상을 건넸다.
“아냐. 어울려. 우등생 같아.”
“하아. 진짜 어린 애들도 있을 텐데 좀 쑥스럽네요…….”
“으음…….”
모노크롬 외에 무슨 팀이 나오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지금 활발하게 그룹 활동을 이어가는 그룹이 나올 터.
그렇다면 대개 후배일 가능성이 컸다. 기껏해야 동기?
연차가 찬 선배 그룹일수록 멤버 개개인 활동 분야가 자리 잡았기 때문에 완전체로 방송에 나오기가 쉽지 않으니까.
……물론 이건 6년 차인 모노크롬에겐 해당하지 않는 얘기였다.
‘전에도 요즘 애들이니 뭐니 하더니.’
중간에 활동 암전 시기를 거친 후에 다시 활동하니 예전 신인 때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더욱 체감한 걸까.
그러나 나이를 내가 어떻게 해 줄 수는 없는 일.
“내가 나이 더 많으니까 자꾸 나이 걱정 하지 마.”
“헙, 넵.”
여기서 뭐라 위로하는 것도 이상했기에 그보다 연상인 나를 엮어서 나이 걱정을 사전 차단해 버렸다.
우형도 내가 나를 팔자 할 말이 없는지 거울에서 떨어지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렇게 진정시켜 놓았는데 장난꾸러기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나타났다.
“아하하! 형, 교복 거의 10년 만에 입는 거 아냐?”
과장 섞인 농담을 꺼내며 다가온 것은, 똑같은 교복 재킷을 걸친 한이와 재민.
한이는 오피스룩 정장도 잘 어울리더니 장난스러운 분위기 덕인지 교복도 잘 어울렸다.
재민은 다른 멤버들과 달리 후드티 위에 재킷을 걸쳤다. 반에 한 명쯤 있을 법한 축구 좋아하는 애 같은 느낌.
그나저나 나타나서 한다는 말이 영 타이밍이 좋지가 않았다.
“얘들아, 내가 우형이보다 연상이야.”
“헙.”
내가 끼어들자 바로 입을 다문 두 사람.
그리고는 나이 얘기를 꺼내면 안 되겠다는 걸 깨달았는지 곧바로 화제를 바꿨다.
“여우 형 뭔가 학생회장 같다.”
“맞아. 부회장한테 맨날 한 소리 들어도 허허 하고 넘길 것 같아.”
두 사람은 이번엔 자기들만의 설정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오피스룩 화보 촬영 때는 권력만 찾던 애들이 이젠 알아서 설정도 가져다 붙일 줄 알다니. 성장했구나.
“부회장은 준해 하면 어울리겠다.”
“뭐야, 부회장? 회장은 누군데.”
아니. 성장한 줄 알았는데 권력 욕심은 여전하구나.
막 준비를 마치고 나온 준해는 무슨 얘긴지도 모르면서 회장 자리에 욕심을 내며 다가왔다.
‘그나저나 역시 막내라 그런가. 교복이 찰떡이네.’
전에 오피스룩 화보를 촬영할 땐 순정 만화에 나오는 동글한 그림체의 회사원 같았는데 교복은 정말 평상시 입고 다닐 것처럼 잘 어울렸다.
반대로 교복보다는 오히려 정장 쪽이 더 잘 어울리는 멤버도 있었다.
“해랑 형은 교복 입어도 대학생 같다.”
역시 체대 선배 상인가.
패완얼을 증명하듯이 어울리기야 엄청나게 잘 어울렸는데, 고등학교 재학생이라기보다는 갓 졸업한 선배가 스승의 날에 교복 입고 찾아온 느낌에 가까워 보였다.
교복이라는 같은 의상으로도 이렇게 캐릭터가 나뉘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언젠가 교복 의상을 쓸 날이 오면 참고해야겠어.’
멤버들의 환복이 끝난 후에는 프로필 사진과 방송에 쓰일 단체 사진 등 여러 촬영이 이어졌다.
촬영 완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듯하여 나는 잠시 업무용 태블릿을 들고 세트 밖 복도로 나왔다.
최근 회사 업무가 다시 바빠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모노크롬의 다음 앨범을 준비하면서 발매 시기 결정만은 시간을 끌며 미루고 있었는데, 그게 이제야 결정됐기 때문.
‘최대한 예능 방영일에 맞추려고 미루고 있었지.’
모노크롬은 대중들에게 노출될 기회가 간절하게 필요했다. 그런 상황에 이 프로그램은 정말 좋은 기회.
그래서 일부러 방영일에 활동 기간을 겹치게 하자는 의견을 냈더니 직원들 모두가 동의했다.
돌대회 때도 있지 않았던가. 모노크롬 무대 영상이 어쩌다 관련 추천 영상으로 뜨면 TV에서 한번 본 얼굴이라고 궁금해서 클릭해 보는 사람들이.
‘아예 모르면 눈길도 안 주고 지나갈 텐데, 어디서 들어봤으면 섬네일, 제목에 시선이 잠깐이라도 가는 법이니까.’
그 미약한 화력이나마 합세시키고자 떠올린 방안이었다.
그리고 발매 시기가 정해지니 그 날짜에 맞춰 모든 일을 진행해야 해서 준비할 것들이 많았다.
진행 상황을 틈틈이 확인하기 위해 잠시 나온 것이었는데, 어쩐지 귓가가 간지럽기 시작했다.
……몰랐는데 내 귀는 제법 밝았나 보다.
“갑자기 웬 모노크롬이래?”
“그러니까! 5인조 뽑는다고 해서 당연히 타임즈원이겠거니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