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드디어 찾아왔다.
공중파 예능 사전 미팅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지!’
<최고의 팀메이트> 촬영이 끝나고 손영식 PD가 얘기를 꺼냈던 그 파일럿 예능.
그때 모노크롬이 다섯 명인 것을 확인하더니, 이번 사전 미팅에 불러준 것도 확실히 다섯 명 전원이었다.
TV 프로그램에 그룹 전원이 출연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던가.
인기 그룹은 단체로 나가기엔 스케줄이 안 맞아서 힘들고, 우리는 시간도 많은데 안 불러주니 나가기가 힘들고.
출연진을 대량으로 쓸어 담는 돌대회 정도가 아니면 어려운 일이었다.
뿌듯한 표정으로 새 스케줄을 보고 있는데, 일정을 정리해서 가져온 최 비서가 웃었는지 정면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왜 웃어?”
“아닙니다.”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그가 웃은 이유를 알 수 없어서 거울을 꺼내 얼굴을 비춰보니 최 비서가 해명했다.
“그게 아니라…… 이전에 아이돌 대운동회 섭외 받고 화내셨던 게 생각나서.”
“크흠. 그, 그랬었지.”
나도 소싯적엔 그러기도 했지.
어언 옛날…… 아니, 고작 몇 달 전 일이지만 체감상 아주 오래된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들어봐. 이건 진짜라고!
돌대회가 가짜는 아니었지만 이건 진짜 제대로 모노크롬을 콕 집어서 불러준 거란 말이야.
얼굴에 뭐가 묻은 게 아니란 것을 확인한 나는 다시 뿌듯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멤버들 좀 여기로 불러줘.”
한두 명 찾아가는 거면 내가 내려가서 찾는 게 빠르지만, 요즘은 누구는 작업실, 누구는 연습실, 이렇게 흩어져 있어서 이쪽으로 불러 모으는 게 빨랐다.
PD에게 언질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아직 멤버들에게 하지 않았다.
미리 말해서 기대하게 해 놓고 나중에 섭외가 흐지부지되어버리면 괜히 상처만 입을까 봐.
멤버들은 전부터 무슨 일정이 생기든 당장 나갈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두고 있었다. 아마도 이전의 경험 때문에 그런 습관이 몸에 배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줬다 뺏는 게 더 서러운 법인데!’
또 그런 스케줄 취소의 아픔을 겪게 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돌대회 출연 요청이 들어왔을 때 멤버들을 불러 모았던 것은 ‘난 싫지만 너희 의견은 들어봐야 하니까.’였다면, 이번엔 ‘내보낼 건데 괜찮지?’에 가까웠다.
물론 의견이야 존중하겠지만 멤버들이 안 나간다고 할 리가 없었다.
멤버들이 전부 모이고, 예능 미팅 일정이 잡혔다는 것을 알려주자 예상대로 다들 표정이 밝아졌다.
“저희 다섯 명 전부요?”
“당연하지.”
저번엔 재민뿐이었지만 이번엔 다섯 명을 전부 불러 모으지 않았는가.
사실 제작진이 멤버 일부가 아니라 전원을 부른 것은 전부 나갈 수 있게 힘을 써줬기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프로그램 성격이 그랬기 때문이었다.
“전부 그룹 단위로 출연한대. 이번엔 파일럿이고, 보이그룹만.”
이번 미팅 요청이 들어온 파일럿 예능은 보이그룹 여러 팀을 모아서 촬영을 진행한다고 했다.
그래서 모노크롬 단체를 부른 거고.
팀에게 들어온 섭외라는 것을 확인하자 한이가 물었다.
“그런데 뭐 하는 프로그램인데요?”
아, 제일 먼저 해야 했을 설명을 안 했구나.
‘공중파 예능이라는 데 정신이 팔려서 그만.’
방송 내용을 확인하지도 않고 일단 환영부터 하던 멤버들도 멤버들이었다.
대화가 역순으로 흘렀지만 나는 다시 처음부터 찬찬히 설명했다.
“다 같이 모여서 방학을 즐기는 프로그램.”
이른바 여름방학 특집이었다.
***
예능 사전 미팅일.
회사에 있다가 같이 방송국으로 출발하기로 했기에, 나는 시간에 맞춰 멤버들이 있는 연습실로 향했다.
“곧 출발할 거니까 다들 개인 소지품 챙겨.”
“네!”
연습실에 모여 있던 멤버들이 대답하며 일어났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챙겨야 할 것은…….
“해랑이 멘탈…….”
해랑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말하자 옆에 있던 준해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챙겼군.’
해랑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듣고 난 뒤로 멤버들도 전처럼 내게 모든 일을 숨기지는 않았다.
이번엔 무슨 일로 멘탈이 무너졌었나 했더니, 동생이 자기 꿈을 가지고 히스테리를 부렸다나.
자기가 데뷔를 못 하면 누구 책임일 것 같냐면서.
‘착해 보였는데 겉모습만 봐선 모르는 일이야…….’
짧은 만남이었지만 뭔가 좀 이상하다 싶긴 했는데.
이전까지는 해랑이 방에 틀어박히든 작업을 하든 하면서 혼자 묻어놨던 모양이지만, 이번에 믹스테이프로 판을 깔아준 것은 정답이었던 듯했다.
도피 목적으로 곡 작업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이것 자체가 하나의 목표가 되니 조금 더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멤버들이 열심히 옆에서 기분을 환기해 준 덕분인지 걱정될 정도로 초췌한 모습은 오래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미팅이라고 무슨 면접처럼 따로 준비할 것은 없지만, 다큐도 아니고 예능인데 어둑한 모습을 보여서 좋을 건 없으니까.
“좋았어. 방송국으로 가자.”
내가 주먹을 꽉 쥐고 눈에 힘을 준 채로 말하자 재민이 그런 나를 빤히 바라봤다.
“주인 님은 왜 그렇게 힘이 들어갔어요?”
나 혼자 과하게 비장하니까 이상해 보인 모양이었다.
‘물론 매 활동이 기회지만…….’
이건 정말 큰 기회임이 틀림없으니까.
이 세상에 떨어진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배워오지 않았던가.
아이돌이라면 다들 당연히 하는 일인 줄 알았던 게 사실은 엄청난 노력과 지원이 필요하단 것을.
예능 출연도 마찬가지였다.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보니 복덩이처럼 굴러온 기회.
우리가 주체적으로 노력해서 할 수 있는 일을 일반 주행으로 비유하자면, 이렇게 외부의 지원까지 더해져서 찾아오는 기회는 부스터 같은 것이었다.
“난 어떤 계기든 물 들어오면 절대 놓치지 않을 생각으로 임할 거야.”
그렇게 말하니 핸드폰을 챙기던 멤버들이 행동을 멈추고 날 쳐다보았다.
멤버들은 그냥 ‘그렇구나’ 정도로 들어도 될 이야기였는데 의외로 우형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저희도 잘할게요.”
진심이 느껴졌는지 어느새 다들 비장한 얼굴로 바뀌었다.
‘아니, 부담 주려던 건 아니었는데…….’
긍정적인 쪽으로 의욕을 불태우는 것은 좋은 일이니 굳이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렇게 비장하게 도착한 방송국.
회의실에는 이전에 촬영 현장에서 본 스태프들이 꽤 있었다.
손영식 PD가 맡는다더니 <최고의 팀메이트> 제작진들을 주축으로 만드는 듯했다.
손 PD는 회의실에 들어선 재민을 보고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아니, 이걸 인사라고 해야 하나.
“전에 재민 씨가 나온 회차, 시청률이 꽤 잘 나왔더라고요.”
“그래요?”
당사자인 재민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나 옆에서 듣고 있던 나와 다른 멤버들은 딱딱한 웃음만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걸 여기서 좋아할 일이야?!’
지금 딱 이 인원이 바로 그 방송 때문에 가장 마음 졸인 피해자들 모임인데!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누군가가 손 PD를 언급하며 똘끼가 있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PD가 겉으로 크게 드러날 일이 없는 직업이건만 이런 얘기가 나올 정도면 말 다 했나.
말문을 막히게 만드는 소리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손 PD는 본격적으로 프로그램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아이돌 단체 예능이 ZBS의 아이돌 대운동회밖에 없잖아요?”
“그렇죠.”
내가 끄덕이자 손 PD는 여전히 평이한 어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모노크롬이 아이돌 대운동회랑 일이 좀 있었다고 알고 있어요.”
“…….”
이걸 또 대놓고 얘기하다니.
슬쩍 옆을 보니 오늘 손 PD를 처음 마주한 멤버들은 헉 하는 표정이었다.
‘이 화법, 도저히 적응이 안 돼.’
설마 모노크롬을 섭외한 게 재민이 촬영을 잘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어그로용으로 쓰기 위해서인 건 아니겠지.
ZBS의 돌대회에 대항하는 QBC의 새로운 아이돌 단체 예능! 돌대회 부상 피해자도 나옵니다. 뭐 이런 식으로.
좀 가식이라도 보여주면 덧나나 싶었지만, 사실이 어떻든 서로에게 윈윈인 건 사실이니 나는 겨우 비즈니스 미소를 유지했다.
손 PD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나와 멤버들의 표정이 바뀌는 것을 보았는지, 예전의 그 친절한 작가가 나머지 설명을 대신했다.
“그 정도로 대규모는 아니지만요. 기획상 출연진이 너무 많아도 전부 촬영하기에 어려움이 있어서요.”
저렇게 말한다는 건 출연하면 분량을 어느 정도는 챙길 수 있다는 소리겠지?
“테마는 여름방학 수련회예요. 방송일도 여름 방학 시즌이고, ‘방학’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처럼 신나는 방향으로 가고자 합니다!”
작가는 이어서 프로그램의 구성안을 간단히 알려주었다.
간단히 줄이자면 <최고의 팀메이트>에서 팀별로 게임을 진행해 순위를 매기는 것처럼, 여기선 그룹별로 게임을 진행하여 포인트를 쌓는 방식이었다.
“그러면 몇 팀이나 나오는 건가요?”
“아직 섭외 단계인데, 아마 총인원은 30~40명 사이가 될 예정이에요.”
5인조 아이돌 그룹이 많다지만, 구성 멤버 5명은 적은 편에 가까웠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아마 대여섯 팀인 모양.
나는 무슨 이야기를 듣든 분량 이야기로 치환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부턴 사전 인터뷰인데, 멤버분들은 어릴 때 방학에 뭘 하면서 지내셨나요?”
아이돌들은 중, 고등학생 때부터, 간혹 초등학생 때부터 연습생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방학 때 마음 놓고 놀러 다닌 기억을 꺼내려면 시간을 제법 많이 거슬러 가야 했다.
예전 기억을 꺼내느라 대답에 시간이 걸리자 작가는 도움을 주기 위해 예시를 들었다.
“예를 들면 가족끼리 물놀이를 다녀오거나.”
“…….”
가족. 물놀이.
하필이면 해랑 앞에서 가장 꺼내면 안 될 키워드 두 개.
해랑이 원래 표정이 무덤덤한 편이라 제작진들은 못 알아본 듯했지만, 우리 눈에는 그가 입을 꾹 다무는 게 보였다.
멤버들은 급히 말을 돌리며 다른 대답을 꺼냈다.
“저, 전 부모님 휴가에 맞춰서 할머니 댁 며칠씩 다녀오고 그랬어요.”
준해가 말하자 한이가 뒤이어 본인의 얘기를 꺼냈다.
“맞아. 할아버지 뵈러 외국 다녀오고 그랬는데.”
‘할머니 댁’에서 갑자기 ‘외국’으로 업그레이드되자 처음 말을 꺼낸 준해는 갑자기 소심해졌다.
“난 그냥 시골 다녀온 거 얘기한 건데…….”
“형 그렇게 부잣집이야?”
“아니, 그냥 그땐 외국에 계셨으니까.”
학생 때부터 서로 알던 사이지만, 초등학생 시절 얘기는 나눠본 적 없는지 다들 처음 들어본다는 표정이었다.
국내에서 진행되는 프로그램이니 외국 이야기는 별로 참고될 만한 이야기는 아닌 듯해서 금방 지나갔다.
“방학 숙제로 일기 쓰고 그러잖아요. 요즘 애들도 쓰나?”
“나도 초등학교는 졸업한 지 오래돼서 모르겠는데.”
전에 ‘요즘 애들은 우리 때와 장래희망 선호 직종이 다르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세대 차이를 느껴서인가.
우형은 말을 꺼내놓고는 준해를 보면서 확인을 받았다.
앞에서 듣고 있던 작가는 좋은 키워드라고 생각했는지 “오, 일기!” 하면서 노트에 받아 적었다.
이후에도 ‘다시 방학이 생긴다면 하고 싶은 것은?’ 등의 질문이 이어졌다.
다들 동심으로 돌아갔는지 즐거운 분위기로 대화를 이어나가다 보니 미팅도 슬슬 끝을 보였다.
“좋은 참고가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장마 예상 시즌을 피해서 촬영 일정을 잡긴 했는데 날씨란 게 언제 바뀔지 모르는 일이라서요. 촬영이 어려울 땐 날짜가 바뀌거나 구성이 바뀔 수도 있어서 미리 말씀드리고요.”
“네.”
지금 모노크롬이 스케줄을 여러 개 잡아둘 정도로 일이 많은 게 아니어서 일정 변경은 큰 무리 없겠지만…….
“혹시 나가기만 하면 비를 불러오는 분은 없으시죠?”
“앗…….”
작가가 마지막으로 농담처럼 건넨 질문에, 우리의 시선은 우형에게 모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