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슬레이트 치겠습니다!”
촬영장 중앙에 선 스태프가 슬레이트를 치고 촬영이 완전히 종료되었다.
촬영 시간 내내 ‘이거 잘못되는 거 아냐? 저거 잘못 찍히는 거 아냐?!’ 하며 긴장했던 나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 재민이라서 살았다.’
멤버들 덕에 위기를 넘기는 상황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은데……. 걱정이 무색할 만큼 재민이 잘해주었다. 그리고 윤환도.
같은 팀이었던 코미디언 서다봄이 둘과 함께 분위기를 이끌어준 덕분이기도 했다.
그러나 촬영이 무사히 끝났다고 해도 관건은 방송.
몇 주 뒤인 방송일까지는 맘 편히 기다리지 못할 것 같아서 난 다시 한숨을 푹 쉬었다.
그렇게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와중에 PD가 다가오는 것이 보여 나도 모르게 눈초리에 날이 섰다.
‘아니다, 신주인. 이렇게 애처럼 굴면 안 된다. 비즈니스 매너는 지켜야지.’
여기선 방송국이 갑이 아닌가.
그런 생각에 나는 흘겨보는 대신 눈을 둥그렇게 뜨고 쳐다봤다.
안타깝게도 나는 대놓고 우리를 난관에 빠트린 사람을 웃으면서 반길 비위는 가지지 못했다. 소심한 반항의 의미라고 해 두자.
PD의 표정은 영 읽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어느 쪽이냐 하면 무표정보다는 웃는 쪽에 가까워 보였다.
“촬영 잘 보셨어요? 생각보다 방송 잘 나올 것 같지 않나요?”
“제작진분들이 공들여 만들어주신 만큼 잘 나오겠죠.”
‘잘 나올 것 같죠? 방심하지 마시죠.’ 뭐, 이런 의미인가?
나는 거기에 ‘신경 써서 방송 분량을 뽑아냈으니 편집도 잘해 달라’는 마음을 담은 대답을 돌려주었다.
누가 봐도 논란을 일으킬 게스트 구성. 이런 일을 벌인 제작진이면 악마의 편집을 할 가능성도 다분했으니까.
나한테 굳이 다가와서 이런 소리를 하는 건 무슨 의도지. 기 싸움이라도 하러 왔나.
그런 생각에 바짝 긴장하고 있었는데 PD는 뜬금없는 얘기를 꺼냈다.
“저희가 여름쯤 파일럿 예능을 하나 기획 중인데, 인원이 꽤 많을 것 같아서 말이죠.”
이건 또 무슨 얘기람.
자기는 우리 말고도 섭외할 인원은 얼마든지 많다고 자랑하는 건가.
이 업계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을 쳐서 무슨 말을 들어도 좋은 쪽으로 해석되지가 않았다.
나는 언짢음을 숨긴 얼굴로 PD의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모노크롬이 다섯 명이죠?”
다섯 명이면. 다섯 명이면 뭐 어쩌게. 불러주게?!
‘병 주고 약 주면 좋아할 줄 알아?!’
정확히 보셨습니다.
내 얼굴엔 어느새 비즈니스용 미소가 돌아와 있었다.
인원이 많은 파일럿 예능을 계획 중인데 모노크롬의 인원수를 물어본다?
방금까지 모든 말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던 나였지만 이건 행복 회로 돌아갈 수밖에 없지.
“네! 미리 말씀만 해 주시면 시간이야 얼마든 맞출 수 있거든요. 언제든 연락 주세요.”
단체 공중파 예능 출연이면 만사 제치고 달려가야지.
돌대회도 나름 단체 공중파 예능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건 논외로 치고.
파일럿 예능이면 좋은 반응을 얻어야 계속 제작이 결정되기 때문에 제법 신경을 많이 쓸 터였다.
몇 시간 만에 겨우 얼굴에 웃음이 돌아왔는데, PD는 다른 스태프의 부름에 ‘나중에 연락드리겠다.’ 정도로 대화를 급히 마무리했다.
확실히 불러줄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라 아쉬웠지만 지금 붙잡고 확정부터 해달라고 할 순 없는 일이니까.
나중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고 오늘은 오늘의 성취를 즐기자.
PD가 가고 뒤이어 재민도 촬영장 뒤편으로 돌아왔다.
“잘했다. 넌 예능 천재야.”
일이 잘 풀린 건 예능 레벨의 영향도 있는 걸까.
마이 엔터 게임상에서는 예능 레벨이 예능 스케줄의 성공도에 영향을 주긴 했다.
그러나 내가 이 세상에 오고 현실화되면서 일부 기능만 작동하게 된 마이 엔터.
성공도 시스템은 비활성화된 것 중 하나였다.
‘현실적으로 스케줄을 진행하자마자 성공도가 나오는 건 이상하긴 하지.’
촬영하자마자 공개 후 대중들의 반응까지 알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따져 보자면 이번 스케줄은 성공에 가깝지 않을까. 편집만 악의적이지 않으면 말이다.
그런데 촬영 내내 잘 웃고 기운차던 재민은 이상하게 촬영이 끝나니 오히려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피곤한가? 아니면 방송이 걱정돼서 그런가.’
내 칭찬에도 조금 웃나 싶더니, 돌아갈 준비를 할 때는 고민이라도 있는 것처럼 표정이 조금 굳어 있었다.
하긴 나도 내내 긴장하면서 지켜봤는데 촬영장 안에 있던 재민은 더 피로감이 심하겠지.
“피곤하겠다. 들어가서 푹 쉬어.”
손가락으로 자기 입술을 꾹꾹 누르며 바닥을 보고 걷던 재민은 내 말에 현실로 돌아온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뭔가 생각에 푹 빠져있던 건 맞는 모양이었다.
일단 빨리 숙소로 돌려보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고 굳이 묻지는 않았지만.
“주인 님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재민은 조금 힘이 빠진 움직임으로 꾸벅 인사를 했다.
‘괜찮은 거 맞겠지……?’
재민의 귀가는 매니저에게 맡기고, 우리는 방송국에서 각자 퇴근했다.
***
저녁이라 재민을 제외하고 회사에 있던 멤버들도 이미 숙소로 돌아와 있었다.
우형은 방문 너머로 들리는 도어락 소리에 곧바로 방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오늘 촬영 잘했어?”
멤버 단독으로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는 게 또 얼마 만인지.
모노크롬에 속해있을 적부터 솔로 활동 홍보로 혼자 나갈 수밖에 없었던 윤환을 제외하고 말이다.
멤버 전원을 섭외하기 부담스러워서가 아니라 멤버 개인을 특정하여 출연 요청이 온 것은 처음인 듯했다.
촬영으로 바쁠 텐데 잘 되어가나 연락해서 물어볼 수가 없어서 종일 궁금하기만 했다.
모노크롬 전담팀 단체 메신저방을 통해 재민의 촬영이 끝났다는 알림은 이미 받았고, 그의 귀가를 기다리던 참이었다.
정신이 다른 데에 가 있는지 털레털레 신발을 벗던 재민은 우형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급한 일이라도 있는 듯이 행동이 빨라졌다.
“여우 형 비상사태!”
“뭐, 뭐, 뭔데!”
재민은 재빠르게 걸어와서는 방문을 붙잡고 서 있던 우형을 방 안으로 다시 밀어 넣었다.
거실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방문을 닫은 그는 남이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라도 하는 듯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나 오늘 채윤환 만났거든?”
“뭐?! 윤환이를 어쩌다?!”
“같이 촬영했는데 그것보다.”
“오늘 촬영을 같이 했다고?!”
우형은 예상치도 못하게 튀어나온 윤환의 이름에 표정이 심각해졌다.
재민은 뭔가 말하려는데 우형이 계속 그 부분만을 물고 늘어지니 답답하다는 듯이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아니.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그게 왜 안 중요해?”
물론 이것도 중요한 얘기는 맞고, 그의 반응도 이해는 갔지만. 지금 해야 할 얘기는 그게 아니었다.
서로 말을 끊어대며 대화가 앞으로 나아가질 않자 재민은 일단 본론부터 꺼냈다.
“해랑이 형 동생. 뉴레인 연습생으로 들어왔대.”
“뭐……?”
윤환이란 이름에 시끄러웠던 우형의 머릿속이 순간 일시정지되었다.
촬영장에서 윤환에게 이 얘기를 들었을 때 재민의 반응과 똑같았다.
“채윤환이 그랬어. 얼마 전에 들어왔는데 혹시 알고 있냐고.”
“윤환이가…….”
뉴레인 소속이 된 윤환에게서 들은 정보라면 확실했다.
확실히, 재민이 윤환과 같이 촬영했다는 것은 천천히 들어도 될 일이었지만 이건 긴급 사태였다.
최근엔 좀 조용하나 싶더니.
2연타로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우형은 머리를 짚었다.
“해랑이 아직 모르는 것 같지?”
“상태 보면 아마도.”
“한이랑 준해 좀 불러와야겠다.”
한이와 준해 역시 똑같이 숙소 안에 있지만 해랑 모르게 불러오기 위해 두 사람은 스마트폰으로 연락을 넣었다.
[재민: 해랑 형 모르게 우리방으로 컴. 동생얘기.]
갑작스러운 소집 메시지를 바로 확인했는지 한이가 곧바로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동생 얘기가 뭐야? 설마 해랑 형 동생은 아니지?”
“맞으니까 일단 앉아 봐.”
“아. 돌겠네.”
아니길 바라면서 다양한 경우의 수를 생각해봤건만 그중에서도 최악의 수가 맞다니.
한이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방바닥에 털썩 앉았다.
역시나 마찬가지로 메시지를 확인하고 우형과 재민의 방으로 향하던 준해는 거실에서 해랑과 마주쳤다.
“다 거기 모여서 뭐 해?”
“어……. 형 따돌리려는 건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준해는 대단히 신경 쓰이는 한마디와 함께 해랑만 거실에 남겨두고 문을 닫았다.
“그 또라이가?!”
준해 또한 오자마자 해랑의 동생 얘기가 맞았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펄쩍 뛰었다.
리더로서 동생들이 이런 어휘를 쓰면 주의를 주던 우형도 지금만큼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의 가족이라 이런 말은 좀 그랬지만…… 준해가 또라이라고 부르는 게 이해가 갔기 때문에.
해랑의 동생. 멤버들 사이에서 통하기로는 일명 ‘해랑 멘탈 털이범’.
멤버들도 그의 동생과 직접 만난 적은 없고 얘기만 들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류의 사람이었다.
해랑은 원체 자기의 사적인 일을 잘 말하지 않는 편이었기에 일부만 전해 들은 것인데도 말이다.
멤버들이 이런 반응을 보일 정도로 그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잠깐 우리 일로 바빠서 잊고 있었어…….’
그는 언제는 한참 연락이 없다가, 언제는 또 뭐가 맘에 안 드는지 집착에 가깝게 연락을 해댔다.
그렇게 간헐적으로 동생이 속을 긁어대는데도 해랑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당하기만 했다.
무려 연습생 시절부터 그런 모습을 봐왔다.
아마도 해랑은 그 훨씬 이전부터 시달려 왔을 테고.
‘이번엔 좀 길게 소식이 없더니.’
마지막으로 그가 해랑의 멘탈을 공격한 게 작년 초였나, 재작년이었나.
아이돌 가수로 데뷔한 형을 따라 하고 싶었던 건지 원래 그런 꿈이 있었던 건지는 알 수 없어도 보컬 학원에 다닌다던 그가 본격적으로 업계에 뛰어들려 할 때였다.
그런 용건으로 사람을 괴롭게 할 수가 있나 싶지만 그는 가능했다.
해랑이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거나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으면 마치 세기의 죄인이 되는 것처럼 굴었다.
이것도 당시 초췌해진 해랑에게 겨우 전해 들은 얘기일 뿐이었기에 순화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때 이후로 조용해서 방심했어.’
그간 모노크롬은 자신들의 안위를 챙기기에도 바빠서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었다.
괜찮아질 만하면 괴롭히고, 또 회복될 만하면 속을 긁어대는 그의 소식이 들리지 않은 것은 해랑에게도, 멤버들에게도 다행이었다.
재계약을 앞두고 힘든 시기에 그까지 들쑤셨으면 어쩌면 해랑은 못 버텼을지도 모른다.
“근데 왜 하필 뉴레인으로 온 거지?”
“이유가 어딨어. 또 난리 치러 왔겠지.”
준해 말대로였다. 다른 회사도 아니고 뉴레인으로 온 것은 누가 봐도 해랑을 의식한 행보였다.
하필 회사 건물도 바로 옆. 마주치면 해랑에게 좋을 게 없었다.
재민이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회사로 찾아오면 어떡해. 회사에 말할까?”
“……아니.”
멤버들도 다 아는 인물이지만 지금까지는 전해 듣기만 한 전설의 존재.
이제 그 실물이 나타날 거라 생각하니 다들 긴장된 표정이었다.
회사에 말한다고 멤버의 동생인 그를 막을 방법이 있을까.
게다가 우형은 주인이 얼마 전에 가족 문제로 면담 자리를 마련했던 것이 떠올라 고개를 저었다.
“다들 해랑이 혼자 두지 말고 지켜봐.”
그렇게 멤버들은 머리를 맞대고 해랑 당사자만 모르는 계획을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