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아직 촬영이 재개되기 전.
서다봄은 출연진들이 어수선하게 모여 있는 촬영장을 둘러보았다.
벌써 세 번째 출연인 그녀에겐 익숙한 상황. 지금은 팀메이트들과 다들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며 팀명을 정할 시간이었다.
‘원래라면 이때가 딱 분위기 메이커로 나설 차례인데.’
먼저 촬영장에 돌아와 있던 윤환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지만 그 얼굴엔 걱정이 드리워 있었다.
어찌 보면 연예계 후배라고 할 수 있는 그의 그런 모습이 안쓰러웠지만 지금은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팀명 ‘서다봄과 양손의 꽃’ 이런 거로 하고 싶었는데.’
이 분위기론 안 되겠지……?
이전에 두 번이나 출연하며 아직 한 번도 1위를 거머쥔 적이 없었기에 ‘이번에야말로 1등 상품인 한우 세트를!’ 하며 자신만만하게 출근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이런 사면초가에 빠질 줄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눈치 보며 눈만 굴리고 있을 때 재민도 세트로 들어와 다봄, 그리고 윤환에게 작게 인사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잠깐의 정적.
“채윤환.”
재민이 윤환을 부르는 소리에 다봄은 작게 “헉.” 하며 숨을 삼켰다.
윤환도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일단 재민과 눈을 마주쳤다.
세트로 돌아오기 전, 윤환의 매니저는 잠시 뉴레인의 기획실과 통화를 하고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서로 어색할 테니까. 적당히 묻어가기로 하자.]
방송에 안 좋게 잡히는 것보다는 아예 안 잡히는 게 나으니 많이 엮이지 말라고.
윤환도 그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아직은 촬영이 시작되기 전.
윤환은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궁금하다는 얼굴로 재민의 말을 기다렸다.
“이런 얘기 부담스러울지도 모르겠는데.”
재민은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많이 친한 척 좀 해도 되겠냐?”
“뭐?”
윤환은 재민이 어떤 스타일인지 몰랐다.
그래서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전혀 예상이 가지 않았다.
그가 기억하는 ‘명재민’이란, 회사 직원들 혹은 연습생들의 입으로 전해 들은 소문이 대부분이었다.
부상으로 활동을 쉬었고, 가끔은 회사에서 멤버들과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그때마다 주로 표정이 어두웠고.
‘그러다 어느 날 사라졌고.’
모노크롬의 멤버로 합류한 자신 앞에서 명재민이라는 이름을 꺼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팬들, 그러니까 컬러즈를 포함해서.
그러다 그가 다시 모노크롬으로 합류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윤환도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놀랐다.
이기적인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탈퇴하는 바람에 모노크롬을 곤란하게 했다는 죄책감이 조금은 메워지는 기분이기도 했다.
“사실 너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거든.”
재민이 꺼낸 말에는 그가 무엇 때문에 미안하고 또 고마운지는 빠져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닌 윤환이기에, 그게 어떤 감정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동안, 혹은 지금 모노크롬으로 있어 줘서 고마운 마음.
그 누구에게도 섣불리 이야기할 수 없는 감정이었는데 설마 재민이 먼저 말해올 줄은 몰랐다.
무엇을 믿고 자신에게 솔직하게 털어놓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점에선 동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마치 언급도 해서는 안 되는 듯한 존재가 된 건 주변 상황 때문이었지, 둘 사이가 나빠서는 아니었으니까.
윤환은 정말 인간 대 인간으로만 말해오는 재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을 보니 거짓 한 점 없이 진심인 듯했다.
대답이 없는 윤환이 당황한 건지, 황당해하는 건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재민은 조금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다음 얘기도 이어서 꺼냈다.
“적어도 팬들이 우리가 나온 방송 보면서 슬프거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자신의 계획은 상대방이 함께해 주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었다.
두 사람의 사이처럼, 컬러즈와 윤환의 팬덤도 교집합이 많지만 서로의 언급을 피하는 사이였다.
가장 큰 걱정거리는 대중들의 시선이 아니었다.
대중들에겐 그저 ‘와,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네.’ 하는 신기한 일일 뿐, 그들의 마음이 다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나 팬덤은 달랐다. 두 사람이 붙어 있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란하겠지.
당황하는 바람에 조금 다른 생물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던 윤환도 그제야 겨우 입을 열었다.
“……그렇지.”
그건 윤환 자신도 동감하는 바였다.
모노크롬이 재민의 복귀를 발표하고 곧바로 <기다림의 끝>을 발매했을 때를 떠올렸다.
윤환에게는 연예인 생활도, 아이돌 그룹 활동도, 아예 솔로 아티스트로 독립하는 것도 전부 처음 겪는 일들뿐이었다.
그래서 자신은 잘 몰랐다. 자신 또한 ‘컬러즈’라고 칭했던 팬덤이 설마 그렇게 갈라지고 싸울 줄은.
자신 때문에 보이지 않게 곪아 있던 환부가 터진 듯한 느낌.
자신이 어떤 길을 선택해도 응원해 주는 마음은 고마웠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누군가와 충돌을 겪어야 한다는 게 씁쓸하고 안타까웠다.
모노크롬뿐만이 아니라, 컬러즈에게도 미안했다.
그래서 SNS에 반응을 남기고 갔던 것이었다.
팬들의 속마음은 각자 다르겠지만, 공식적으로는 응원하는 연예인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가 모노크롬에 유감이 없음을 간접적으로나마 표시하자 다행히도 두 팬덤은 각자 갈 길을 가자는 듯이 서로에게 반응하지 않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상황.’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그런 생각으로 새 앨범을 일부러 시간 들여 준비했는데, 많은 사람이 엮여 있는 업계다 보니 제 의지대로만 되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 또한 새롭게 곪아 버린 상처일 수도 있었다.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기회가 아닐까?’
상처가 저절로 아물기를 기다리기보다 적극적으로 치료할 기회일지도.
그의 새로운 소속사, 뉴레인에선 오프닝에 앨범을 소개한 것 정도면 홍보는 됐다 치고 넘어가려는 느낌이었다.
그는 슬쩍 세트 뒤편의 매니저를 쳐다보고, 모노크롬일 적 새 이사였던 주인도 쳐다보았다.
아마 재민이 이런 말을 꺼내는 건 그녀와 얘기하고 결정한 듯했다.
자신이 재민의 의견에 따른다면 회사의 지시에 반하는 일이 된다.
하지만 대표의 딸이라는 주인의 위치는 뉴레인 소속의 윤환에겐 최소한의 방어막이 될 수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머리를 굴린 윤환은 다시 재민을 쳐다보았다.
“솔직히 우리, 대화다운 대화는 처음 해 보는 건데 친하게 보일 수 있을까?”
고민을 끝낸 윤환이 적극적으로 나오자 재민은 순식간에 표정이 밝아졌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뭐?”
“잘 통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윤환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재민은 자신의 예상이 맞아 기분이 좋아졌다.
몇 년 만에 다시 본 멤버들은 마치 재민과의 공백기가 없었던 것처럼 여전했다.
아마 윤환이 멤버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들 만큼 잘 맞는 사람이라 그들도 변함이 없었던 게 아닐까.
그러니까.
“멤버들 대하듯이 대해.”
재민이 하는 말은 하나같이 막연하기만 했다.
그런데…… 듣다 보면 이상하게도 그 의도가 자연스레 이해가 갔다.
‘이게 그 ‘잘 통할 것 같다’는 증거 중 하나인가.’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작은 목소리로 계획을 꾸미고 있으니 그 옆, 잊혀 있던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나도 끼워줄래……?”
뒤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서다봄이었다.
처음에 재민이 윤환을 불렀을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식겁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뒤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두 사람은 말을 몇 마디 나누지도 않은 것 같은데 갑자기 의견이 합치했는지 머리를 맞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걱정할 만한 상황은 아닐지도.’
둘이서 해결할 일이 있는 듯하지만, 어쨌든 지금 촬영에선 자신을 포함해 세 사람이 한 팀이니까.
자신을 잊은 게 아닌가 하여 슬쩍 운을 떼자 두 사람은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두 사람 사이에 끼워주었다.
“누나, 아니, 누나라고 불러도 돼요?”
“당연하지.”
다봄은 비장하리만큼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원래 같은 방송에 출연하거나 친한 아이돌 동생들을 귀여워하며 잘 챙겨주던 그녀였기에 이런 친근한 호칭은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저희 좀 도와주세요.”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싱긋 웃으며 말하는 두 사람을 보니 방금까지 쌓여 있던 걱정은 사르르 녹아 사라지는 듯했다.
아, 이게 정말 양손의 꽃이구나.
***
“저희는 ‘서다봄과 양날개’ 팀입니다!”
촬영이 재개되고 각 팀은 각자 정한 팀명을 소개했다.
다봄, 재민, 윤환은 1번 팀이었기에 가장 먼저 소개에 나섰다.
수심 가득했던 다봄의 얼굴에는 싱글벙글한 미소가 자리했다.
“너무 사심 들어간 팀명 아닌가요?”
“에이. 사심이라뇨.”
“네. 줄여서 양날개 팀으로.”
“제 이름이 제일 중요한데 생략하시면 어떡해요?!”
밝은 분위기 속에 팀명 소개 순서는 다음 팀으로 넘어갔다.
시작이 좋다. 그녀의 코미디언 선배인 나윤철이 그녀를 보며 슬쩍 엄지를 세웠다.
걱정되던 촬영 분위기를 살렸다는 칭찬이겠지만,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온 건 다봄보다는 재민과 윤환, 두 사람이었다.
‘폭탄이 아니라, 반등의 기회일 수도 있지.’
많은 말이 나올 것은 감안해야겠지만, 잘만 하면 사람들의 기억에 제법 인상 깊게 남는 방송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제 겨우 새 시작을 맞이하는 두 사람의 계획을 도와주고도 싶었고.
그녀가 그런 결의를 다지는 동안 세 팀의 소개가 전부 끝나고, 본격적인 게임의 설명이 이어졌다.
<최고의 팀메이트>는 체력, 지구력, 순발력 등 ‘력’이 붙는 다양한 능력치를 게임 형식으로 알아보는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이 모든 것이 팀전으로 진행되다 보니, 각자의 능력치로 팀의 순위를 얼마나 끌어올릴 수 있을지, 혹은 다른 팀원의 부족한 부분을 얼마나 채워줄 수 있을지가 촬영의 관건.
매 회차 비슷하게 활용되는 게임도 있고, 달라지는 게임도 있어서 게스트가 미리 준비할 만한 것은 없었다.
재민과 윤환은 다른 이들보다 급하게 출연하게 되었지만, 일단 촬영장에 들어서면 준비가 안 된 백지상태인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저희가 준비한 첫 번째 게임은!”
MC 나윤철이 큐 카드를 들고 신호를 보내자, 스태프들이 세트 중앙으로 바퀴 달린 커다란 테이블을 밀고 들어왔다.
그 위에는 50가지의 제품들이 종류를 가리지 않고 올라와 있었다.
마치 슈퍼마켓 매대에 있는 제품들을 골라서 가져온 듯한 구성이었다.
“기억력 게임입니다. 다들 편의점에 자주 들르시죠?”
요약하자면 몇 가지 상품을 골라 그 가격을 더하여 제시하는 금액대에 맞추는 게임.
힌트라고는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각 제품의 정가를 짧게 보여주는 것뿐.
이름은 기억력 게임이었지만 상품의 가짓수를 보면 감으로 맞추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와. 저 이런 거 진짜 못해요.”라며 어려울 것을 예상하는 출연진들 사이에서 홀로 자신만만한 표정인 게스트가 한 명 있었다.
“이건 내가 또 잘 알지.”
재민이 마이크에 들어가지 않을 만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이돌이니 몸 쓰는 게임에 더 나설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자신감을 보이는 그에게 다봄이 물었다.
“오오. 기억력에 자신 있나 봐?”
“아뇨. 얼마 전까지 편의점에서 알바 했거든요.”
“알바를……?”
윤환과 다봄은 귀를 의심했다.
아이돌이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건 살면서 듣도 보도 못한 소리였다.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두 사람과, 달리 재민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