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우형이는 복사기 다루는 게 어려운 실수 잦은 신입 사원!”
“아…….”
“와하하! 신입, 빨리 앉아!”
“신입이 제일 늦으면 쓰나.”
우형은 실망한 얼굴로 터덜터덜 남은 자리에 가서 앉았다.
리더인 그가 신입으로 낙점되자, 다른 멤버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선배 행세를 하며 잔소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래서 간절해 보였구나. 이럴 걸 예상해서.’
다들 착석했지만 정말로 일하자는 것은 아니므로 자리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해랑부터 곧바로 개인컷 촬영에 들어가자, 스태프들은 사진 체크용 모니터 앞으로 모여들었다. 특히나 여성 스태프들이.
“와, 진짜…… 진짜 잘생기셨네요.”
해랑은 실물도 잘생겼지만 화면발도 지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카메라만 돌아가면 나오는 그 프로의 얼굴! 무대 위, 카메라 앞이 그의 전문이었다.
‘우리야 매일 보니까 좀 익숙해졌는데.’
오늘 스타일은 지금까지와는 또 달랐기에 눈길을 더 사로잡는 것도 사실이었다.
거기에 안경을 쓰고 냉미남 분위기를 풀풀 풍기고 있으니 더욱 이지적인 분위기로 비쳤다.
포토그래퍼 또한 조각상의 얼굴을 한 피사체에 신난 듯이 연신 “좋아요!”를 남발하며 셔터를 눌렀다.
‘많이 감상하세요! 우리 멤버입니다.’
그러다 또 불러주면 좋고! 나는 뿌듯한 얼굴로 이 촬영 현장을 지켜보았다.
다음은 재민의 개인컷 촬영.
고객사의 전화 응대를 담당하는 사원이란 설정처럼, 90년대쯤에나 썼을 법한 앤티크한 전화기가 재민의 촬영 소품으로 들어왔다.
“전화 이렇게 받으면 돼요?”
재민은 전화기를 무릎 위에 올려두고, 수화기를 들어 귀에 가져다 댔다.
수화기에 피어싱이 부딪히는지 이리 댔다, 저리 댔다 하던 그는 적절한 각도를 찾았는지 그대로 앉아있던 의자를 빙글 돌려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눈을 끔뻑이며 말하는 그를 보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직장인은 그렇게 밝게 전화를 받지 않아.”
지금은 친구 집에 전화 거는 느낌에 가깝다고 할까.
성인이 되기 전부터 사회생활은 해왔지만, 일반적인 회사 생활은 겪어본 적이 없으니 설정에 감이 안 잡히는 것도 이해는 갔다.
“예를 들면 클라이언트가 시안을 보낼 때마다 이건 이래서 싫다, 저건 저래서 싫다, 전화로 30분씩 불평하는 거야. 그래서 8차 수정본까지 보냈는데 결국 맨 처음 시안으로 해 달라고 하는 거지.”
내가 디테일한 상황 설명을 하자 주변에 있던 스태프가 “으, 싫어.” 하며 대신 괴로워했다. 역시 이런 고충은 회사원 공통인가.
그러나 재민은 역시나 와 닿지 않는다는 표정. 그러자 옆에서 보던 멤버들이 좀 더 재민이 공감할 만한 상황을 만들어냈다.
“새벽 한 시에 자고 있는데 우형이 형이 전화해서 끊지 말라고 한 시간 동안 징징대는 걸 생각해 봐.”
“아~.”
한이가 이상하게 현실적인 상황을 제시하자 재민은 뭔가 떠오른 듯 바로 반응했다. 내 시선은 저절로 옆에 있던 우형에게 향했다.
“너 그런 적도 있었니?”
“……딱 한 번 그랬는데…….”
“한 번?”
“에이, 무슨 한 번이야!”
우형의 대답에 멤버들이 동시에 야유를 보냈다.
‘진짜 그러긴 했나 보네.’
그것도 멤버들이 한 번 이상은 다 겪어본 일인 듯했다. 상상해 보니 우형이답기도 하고.
“재민아……. 항상 같이 지내지만 잠깐 이렇게 떨어져 있을 때면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고……. 흑흑.”
“야! 하지 마!”
“어어. 나 메이크업.”
한이가 손가락으로 눈물을 찍어내는 척하며 통화 내용을 재현해냈다. 과장됐지만 실제로 했던 말이었는지 우형은 그의 입을 막으려 했다. 메이크업 때문에 결국 입막음은 실패했지만.
갑작스러운 TMI에 주변에서 듣고 있던 스태프들도 웃음이 터지고, 우형은 부끄러움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우형만 빼고 화기애애한 현장.
재민은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얼굴을 장난스럽게 찡그리며 귀에서 수화기를 10cm 정도 떼어냈다.
“너 그런 표정으로 듣고 있었냐……?”
“아니, 그게. 좋은 얘기지만 같은 소리를 한 시간이나 하면 좀 그럴 수 있지.”
우형은 그런 재민의 표정을 보고 황당해했다. 한쪽은 새벽 감성에 젖어 있는데 한쪽은 그저 자고 싶었을 뿐이니.
상황은 좀 다르지만, 재민이 지어낸 표정은 어쩐지 진상 전화를 받는 시추에이션에 딱 걸맞았다.
즐거운 분위기 속에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다음 순서인 준해는 머리를 헝클이며 업무에 집중하는 모습을 연기했다.
안 그래도 요즘 한창 시험공부에 지쳐 있던 준해. 이곳에서도 펜을 잡고 책상 앞에 앉으니 역할에 금방 몰입한 듯했다.
그는 카메라를 향해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어내며 피곤한 회사원의 이미지를 잘 잡아냈다.
“귀엽다.”
“귀여워.”
연출된 상황과는 반대로 흐뭇하게 지켜보는 멤버들. 그래도 성인 남성인데 너무 귀여운 취급만 받는 게 마냥 좋지만은 않은지 준해는 또 쀼루퉁하게 흘겨봤지만.
“지금 표정 한 번만 더!”
포토그래퍼는 그 표정 또한 좋다면서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멤버들이 하도 ‘귀엽다, 귀엽다.’ 하니까 나도 어느새 동화되어 있었다. 어린 얼굴에 직장인 복장을 하고 있으니 아기자기한 그림체로 표현된 만화 속 회사원 같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다른 매력이 표현되는 게 또 좋았다.
‘팬들이 귀엽다고 좋아하겠다.’
이 화보를 보고 또 온화해질 컬러즈를 생각하니 나도 흐뭇한 미소가 절로 흘러나왔다.
다음은 한이의 촬영. 한이는 자신의 순서가 시작되기 전부터 책상에 앉아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이렇게 소품으로 쓰면 좋을 것 같아서요.”
잘 보니 그는 준비된 서류로 종이비행기를 접고 있었다.
따로 주문하지 않아도 설정에 맞는 캐릭터 연출을 척척 해내는 저 재능. 역시 한이였다.
“정말 일할 마음 없어 보인다.”
“와. 같은 사무실에 저런 사람 있으면 진짜 일하기 싫을 것 같아.”
감탄하고 있는데 옆에서 준해가 나와 비슷한 감상을 읊었다.
방금까지 서류에 파묻혀 있는 역할을 맡은 준해. 그 종이를 가져다가 비행기를 접고 있는 한이.
진짜 사무실이었으면 한이가 시말서를 내든지 준해가 못 참고 사직서를 내든지 할 상황이었겠지만 지금은 저런 연출이 필요했다.
한이는 의자에 기대듯이 앉아 다리를 쭉 펴고 나른하게 카메라를 응시했다.
“좋아. 직장 동료로 두고 싶지 않은 이미지를 잘 표현해냈어.”
“칭찬이죠?”
“그럼.”
인정을 받아 자신이 생긴 한이는 들고 있던 종이비행기를 팀장석, 그러니까 해랑의 자리를 향해 날렸다.
‘오. 낙하산 사원의 도발인가.’
앉아서 대기 중이던 해랑은 자기 앞에 툭 떨어진 종이비행기를 쳐다보다가, 말없이 손으로 목을 그었다. 저건 해고해 버릴 거라는 표시.
‘그래. 사내 권력 다툼은 이렇게 흥미진진하게 하는 거지.’
성공적인 역할 분담이란 생각에 나는 만족스럽게 끄덕이고, 한이의 개인컷 촬영도 무사히 종료되었다.
마지막 개인컷 촬영 순서는 우형이었다.
오늘 해랑의 스타일이 쿨시크 계열이었다면, 니트 카디건으로 부드러운 이미지를 강조한 의상의 우형. 실수 잦은 신입이라는 설정답게 복사기 앞에서 헤매는 장면을 촬영할 예정이었다.
먼저 복사기에 관심을 가지며 다가간 재민은 스태프에게 “이거 진짜 작동되는 거예요?” 하며 묻더니 사용 허락을 받아냈다.
“그거 알아? 이거 얼굴 이렇게 대고 있으면 얼굴 복사돼서 나오는 거.”
“아이돌이니까 하지 말자.”
재민이 우형에게 그런 말을 하며 정말 실행에 옮기려는 기미를 보이기에 나는 서둘러 말렸다.
유리판에 눌린 얼굴은 재미는 있을지언정 이쁜 얼굴은 아닐 테니까. 다행히 “메이크업 망가진다.” 한마디면 멤버들은 금방 하는 행동을 멈추고 얌전해졌다.
그래도 뭔가 아쉬웠는지 재민은 복사기에 손을 대고 복사하기 시작했다.
“오, 오오. 지문 나온 것 봐.”
생각보다 선명하게 찍혀 나온 지문에 멤버들은 신기해하며 모여들었다.
재민은 자신의 손이 복사된 종이를 옆 테이블에 올려두려다가 다시 집어 들었다.
“이거 아무 데나 버렸다가 내 지문 국제 범죄 악용돼서 FBI 수배되는 거 아냐?”
평소에 무슨 영화를 보며 지내는 건지는 몰라도 그는 상상력이 풍부한 편이었다.
재민은 종이를 들고 두리번거리더니.
“주인 님 가지실래요?”
“그, 그래.”
처리할 데가 마땅치 않으니 대충 떠넘긴 듯한 기분도 들었지만, 우리 소속 아티스트 지문이 진짜로 국제 범죄에 악용돼서 수배되면 안 되니까.
“누구 또 내 지문 가지고 싶은 사람.”
“그걸 누가 가지고 싶어 해.”
멤버들은 전혀 내키지 않아 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팬들은 가지고 싶어 할 텐데.”
사인지만큼이나 가지고 싶지 않을까. 아니, 이런 유니크한 물품이면 그보다 더 원할지도.
그 말에 옆에서 듣던 스태프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는 듯이 손뼉을 짝 쳤다.
“그럼 저희 추첨 이벤트로 팬분들께 증정할까요?”
“지문을요?”
“아, 아뇨. 보안을 위해 지문은 안 나오게 한다거나.”
“그럼 이거지.”
스태프의 설명을 들은 한이는 양손으로 하트를 만들어 복사기에 가져다 댔다.
‘오. 역시 프로 아이돌.’
컬러즈에게 증정한다고 하니 바로 하트를 떠올릴 줄이야.
새까만 배경에 하얗게 찍혀 나온 손은 어설프지만 하트의 형태를 정확히 그려내고 있었다.
그렇게 몇 번 개선을 거쳐 양산된 손 하트 복사지에 멤버들이 사인하러 간 동안, 우형의 개인컷 촬영이 시작되었다.
“저 이거 진짜 다룰 줄 모르는데요.”
멤버들의 사인지는 스태프가 빠르게 복사해 갔지만, 우형은 역할이 역할이니 설정에 충실하기 위해 직접 복사하기로 했다.
신입사원 우형이 손수 복사한 사인지 증정. 이런 식으로 이벤트 하면 팬들의 주목도가 높지 않을까 하고.
“그거 진짜로 고장 나면 수리비 30만 원이래.”
“아~. 지금 표정 좋아요!”
버튼을 눌렀다가, 용지함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복사기를 서투르게 살피던 우형은 내가 수리비 얘기를 꺼내자마자 행동이 한결 조심스러워졌다.
어쩐지 긴장된 표정이 포토그래퍼가 원하던 것이었는지 연신 칭찬을 내뱉었다.
자필로 컬러즈라고 적은 사인지를 복사해내는 미션과 함께 모든 멤버의 개인컷 촬영은 종료.
그리고 장소를 몇 번 옮겨가며 단체컷 촬영이 진행되었다. 단체컷은 캐릭터 설정에서 벗어나 모노크롬 다섯 명의 모습을 그대로 담았다.
제법 길게 이어진 촬영의 마지막 컷은.
“퇴근이다!”
퇴근 시간을 맞이하는 직장인의 모습. 신나게 서류를 날리는 장면으로 모든 촬영이 종료되었다.
***
사실 퇴근은 컨셉이고, 실제 멤버들의 퇴근은 아니었다.
사진 촬영이 끝난 후에는 잡지에 함께 실릴 인터뷰 시간이 마련되었다.
“회사원 컨셉으로 촬영을 진행해 봤는데 어떠셨나요?”
“직장에선 좋은 동료를 만나는 게 중요하겠구나, 하는 걸 실감했어요.”
완전히 컨셉에 몰입했던 준해가 먼저 대답했다.
누군가는 일에 파묻혀 있는데 누군가는 서류로 종이비행기를 접어도 잘릴 일이 없다는 것.
준해는 그 짧은 직장인 체험으로도 회사 생활의 진리를 깨달아 버렸다.
“우리 정도면 직장 동료로 완벽하죠?”
“아뇨. 형 보고 말한 건데요.”
한이가 능청스럽게 말하자 칼차단하며 대꾸하는 준해.
그런 모습을 보며 인터뷰어를 맡은 담당 에디터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멤버분들 같은 동료가 있으면 정말 즐거울 것 같아요.”
늘 투닥거리며 장난치는 멤버들이지만 그건 그만큼 친하다는 증거이기도 했으니까.
“만일 멤버분들이 정말 회사원이 되어서, 뭔가를 고객들에게 팔아야 한다면 어떤 물건을 가장 잘 팔 수 있을까요?”
오늘의 컨셉에 맞춘 상황 설정 질문에 멤버들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자신들이 잘 알고 많이 사 본 물건이어야 팔기도 잘 팔 것 아닌가. 멤버들의 평소 취향을 알아보는 질문이기도 했다.
여러 번 생각을 거쳐봐야 하는 질문에 멤버들이 곰곰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먼저 침묵을 깬 것은 한이였다.
“멤버들 옷을 가져다 팔아볼까요?”
패션 잡지임을 겨냥한 듯한 대답에 에디터는 반가워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오! 안 그래도 요즘 모노크롬의 출퇴근길 의상이 예쁘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전부 멤버분들 사복인가요?”
“전부 저희 옷은 아니었는데, 어느샌가 저희 옷장에 들어 있더라고요.”
분명 대여한 옷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정신을 차려보면 자연스레 옷장에 들어와 있었다.
숙소로 들어와 옷장에 옷을 걸고 있던 민형에게 물어보니, 회사에서 구매했다는 심플한 대답이 돌아왔다.
한이의 얘기에 그 기억이 떠오른 멤버들의 시선은 스태프들 사이에 섞여 있던 주인에게 향했다.
그녀는 흡족한 얼굴로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마치 LA에서 내일이 없는 것처럼 쇼핑하던 때와 같은 그 표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