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56화 (56/430)

# 56화

“내 것까지……?!”

사인 앨범을 받는 건 두 번째였다. 전에 뉴레인에 처음 구경하러 갔을 때, 그리고 오늘.

그때 아이리스 멤버들에게 나는 그저 처음 인사하는 회사 윗사람이었지만, 오늘은 정말 나에게 주려고 챙겨온 것이었다.

감격한 표정으로 앨범을 받아들자 이번엔 옐로가 뭔가를 건넸다.

“그리고 이것도요!”

그녀가 내민 것은 앙증맞은 작은 쇼핑백. 안을 보니 작게 포장된 쿠키와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이거 어디서 본 물건인데……. 아!

‘내 손수건!’

돌대회 촬영 때 옐로에게 묶어줬던 그 손수건!

꼭 돌려주겠다고 했는데, 그동안 바빠서 마주치질 못했으니 계속 가지고만 있었던 모양이다.

예상치 못한 선물에 나는 한 손에는 앨범, 한 손에는 쇼핑백을 들고 그대로 어정쩡하게 멈춰버렸다.

“진작 돌려드리려고 했는데 계속 출국 일정이 생기지 뭐예요.”

“으응. 나도 들었어.”

아까 인공지능 비서한테 아주 자세하게.

레드는 자세를 낮춰 나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희 사실 일본 투어 끝나자마자 잠도 거의 못 자고 컴백할 뻔했는데 덕분에 여유가 좀 생겼어요.”

“덕분에? 아아.”

내가 뉴레인의 컴백일 변경 요청을 거부하고 곧바로 티저를 내버린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아이리스의 컴백이 조금은 미뤄졌으니.

‘회사랑 아티스트의 사정은 꽤 다르구나…….’

뉴레인은 최대한 컴백 일정을 앞당기고 싶어 했는데, 실제로 활동하는 멤버들에겐 기간이 너무 촉박했던 모양이다.

결과적으로 도움이 된 부분도 있었다면 잘된 건가.

그나저나 활동 의상을 입고 있는 둘은 너무…… 너무나 아이돌이었다.

‘아까 무대 위에 있던 가수가 앞에서 나랑 대화 중이라니!’

그냥 일대일로 대화할 땐 편하게 대할 수 있었는데, 아직도 내겐 다른 세상 사람 같은 느낌이 남아있었다.

그나마 레드 외엔 따로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적도 없는데, 아이리스 멤버가 눈앞에 둘이나 있으니 내 시선은 어디를 향해야 할지 모르고 빙빙 돌았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고 어리바리 하고만 있는데 문밖에서 아이리스의 매니저가 두 사람을 불렀다.

“수연아. 소희야.”

“그럼 또 봬요!”

그렇게 두 사람은 까르르 웃음소리를 남기며 떠났다.

모노크롬의 대기실에서 들을 수 없던 높은 목소리가 사라지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그 정적을 가장 먼저 깬 것은 옆에 앉아 지켜보던 재민이었다.

“주인님단이 늘어난 것 같아.”

그게 뭔데.

옆을 쳐다보니 재민은 의미를 알 수 없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다시 자기 스마트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후후. 어쨌든 아이리스 전집 모았다.’

어쩌다 보니 아이리스 전집이 저절로 내 손에 들어왔다. 그것도 비매품 앨범이라 더 특별한 느낌!

뿌듯한 표정으로 앨범을 내려다보는데 이번에는 또 다른 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탈의실 문에 반쯤 가려져서 부럽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민형과 눈이 마주쳤다.

‘……멀리서 응원하지만 남이 계 타는 거 지켜보는 심정은 또 다른가.’

그리고 그 옆에는 복잡미묘한 시선으로 이 장면을 바라보고 있던 우형이 있었다.

‘앗. 전에 그 표정이다.’

예전에 이사실에서 내가 아이리스 앨범 구경하는 걸 보고 어쩐지 시무룩해졌던 그 얼굴.

“크흠.”

너무 헤벌쭉하면서 좋아했나.

나는 눈치를 보면서 받은 앨범과 쇼핑백을 가방에 고이 넣었다. 그래도 다행히 내 표정을 크게 신경 쓰는 건 두 사람 외엔 없는 것 같았다.

재민은 여전히 스마트폰에 빠져 있었고, 준해는 다시 시험공부에 들어갔고, 한이는 태평하게 이어폰을 꽂고 노래 감상 중이었다.

대기실을 둘러보다가 해랑과 잠시 눈이 마주쳤으나, 그의 시선은 남들이 눈치 못 챌 정도로 순식간에 한이에게 향했다가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아. 우리 비밀 있었지.’

호감이 대개 표정에 드러나는 레드였는데.

‘벌써…… 식은 건가.’

자기 입으로 마음 잘 줬다가 식었다가 하는 타입이라더니. 나도 한이를 슬쩍 바라보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대기실엔 각자 다른 의미의 시선이 복잡하게 오가는 듯했다.

***

모노크롬의 활동은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아이리스는 컴백 활동을 시작하니 조금 달라진 점이 있었다.

내가 뉴마 윗사람이란 소문을 들었는지 관계자들이 접근하기 시작한 것.

“허허. 아이리스는 일정 잡기가 영 힘드네요.”

그러면서 은근슬쩍 아이리스 스케줄을 내게 물어보는 것이 아닌가!

음악 방송이란 모든 가수가 무대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중간중간 인터뷰도 있고, 짧게 촬영하는 특별 코너가 있기도 하고.

그런 코너에 아이리스를 부르고 싶은데, 급하게 앞당긴 한국 스케줄이라 시간 잡기가 힘든지 나에게까지 질문이 돌아온 것이었다.

‘왜 우리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안 찾아줬는데?!’

영 다른 태도에 내심 속이 쓰렸지만 나는 비즈니스 미소로 응대했다.

“아~, 그래요? 아시다시피 이것저것 좀 바빠서……. 모노크롬도 불러주세요.”

나는 이런 식으로 대충 뉴레인의 사정도 잘 아는 척하며 모노크롬을 강조하고 넘겼다.

다른 사람들이 알면 끼워 팔기니 뭐니 한 소리 나오겠지만, 뭐 홍보란 게 다 이렇게 하는 거 아닌가.

‘어필해서 나쁠 것도 없고. 그러다 한두 개라도 들어오면 좋은 거고.’

모노크롬 불러주면 아이리스도 일정 잡아주겠단 소린 안 했음. 난 거짓말은 안 했음. 내가 먼저 말한 것도 아니고 그냥 먼저 물어보길래 대꾸한 것뿐임!

그런 마음으로 나는 광범위로 미끼를 뿌려놓고 다녔다.

그래도 양심엔 조금 찔렸기에 아이리스 스태프들이 보이면 슬쩍 피해 다녔다.

괜히 같이 있다가 뉴레인 관계자처럼 아는 척했던 것을 들키면 좀 민망하니까.

‘앗, 레드다.’

내가 열심히 피해 다니려 해도 같은 음악 방송에 출연하다 보니까 활동 범위도 겹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최대치로 활성화된 내 아이리스 관계자 레이더망에 또 목표물이 포착되었다.

통화를 하는지 복도에 나와 있는 레드. 나는 그녀가 뒤돌아있는 사이에 대기실로 가는 통로로 숨어들듯이 들어섰다.

“사람들이 스캔들 난 두 사람 투샷을 보고 싶겠냐고. MC가 질문을 안 할 수도 없고. 대본 어떡해?”

“하필 또 리더야.”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던 나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수군거림에 곧바로 멈춰 섰다.

‘리더? 스캔들? MC?’

내 귀를 사로잡는 몇몇 키워드에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지금 여기 음악 방송 MC가…….’

……아. 작년인지 재작년인지 레드와 열애설이 났던 그 아이돌 멤버다. 비주얼 멤버답게 MC 자리를 꿰찬, 한 보이그룹의 인기 멤버.

아무래도 저들이 말하는 것은 아이리스 컴백 인터뷰에 관해서인 듯했다.

MC의 멘트를 받으려면 아이리스의 리더인 레드가 가장 적격인데, 하필 예전 열애설 상대라서.

“팬들이 오렌지가 실질적 리더라고 하던데.”

“괜히 리더 제치고 멘트 몰아주면 또 말 나와. 으음. 아예 막내면 괜찮으려나?”

“아. 하긴 거기 소속사에서 퍼플 많이 밀어주는 것 같더라.”

“…….”

레드가 모르는 사이에 빠르게 돌아가려고 했는데 이 얘기를 듣고 있자니 그냥 지나갈 수가 없었다.

레드가 있는 쪽을 바라보자 그녀는 통화가 이미 끝났는지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대기실로 가려면 이쪽으로 가야 할 텐데.’

그녀가 등 돌리고 숨듯이 서 있던 이유.

상황 파악이 완료된 나는 통로로 들어가려던 발걸음을 다시 뒤로했다.

“수연아!”

나는 그들에게 들릴 만큼 큰소리로 레드의 이름을 불렀다.

남이 들으면 좋지 않을 소리를 하던 것은 자신들도 알았는지, 수군거리던 목소리는 내 부름과 함께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이사님…….”

“대기실로 가?”

“네.”

레드는 내가 갑자기 나타나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웃어 보였다.

“혹시……, 들으셨어요?”

레드도 그 수군거림을 계속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에휴. 이미지 때문에 뭐라 말도 못 하고. 연예인이 뭔 죄냐.’

굳이 안 건드리려고 했는데 레드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기에 나도 언급하고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트렌드에 민감해야 할 방송국 관계자들이 소식도 모르고 고리타분하기는. 그게 언제 적 소문이야?”

내가 구시렁구시렁하자 레드는 작게 웃었다.

“그러니까요. 이사님이 다 정리해놓으셨는데.”

“큼. 봤니? 아니, 봤겠구나.”

내 이름 석 자를 써넣은 것도 아니고 뉴마 엔터테인먼트의 이름으로 낸 입장문인데 왜인지 다들 내가 쓴 것을 알고 있었다.

보통의 엔터 업계 사람이 쓸 만한 글은 아니어서 업계 신입이 쓴 티가 났나.

어쩐지 당사자가 언급하니까 조금 민망한 기분도 들어서 나는 콧대를 슬쩍 긁으며 말했다.

“그때는 그냥 뭐, 좀 감정이 들어가서…….”

“저희 팬들이 좋아하던데요.”

그걸 왜 좋아해. 진짜 좋은 것만 보고 지내도 모자랄 판에.

입장문이 실린 기사를 퍼 나르던 것은 컬러즈나 무지개나 마찬가지였으니 그걸 얘기하는 게 아닐까.

그런 대화를 나누며 나는 아이리스 대기실까지 레드와 동행했다.

“이사님께는 도움만 받는 것 같아요.”

“서로 돕고 살아야지.”

내가 도움을 줬다고 하지만, 사실 도움 받은 건 내가 먼저였다.

‘우울할 때 잡생각 떨쳐버리는 데 얼마나 도움 됐는지 너흰 모를 거다.’

거리가 멀지 않았기에 아이리스 대기실에는 금방 도착했다.

만나려고 만난 것도 아니고 어쩌다 앞에서 마주친 것뿐이니 나도 곧장 갈 길을 가려는데, 어쩐지 레드가 내 소매를 슬쩍 붙잡았다.

“이사님, 혹시 메신저 추가해도…….”

“수연아. 어디 갔었어?”

레드가 뭐라고 말하려는데, 옆에서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잠깐 나간다던 레드가 한참 안 돌아오니까 매니저가 찾으러 다닌 듯했다.

아이리스 매니저를 마주하자 내 양심 레이더망이 위험신호를 보냈다. 아이리스 대기실 앞에 오래 있으면 위험하다!

나는 눈치를 보며 슬쩍 물러섰다.

“활동 열심히 해.”

“앗, 저…….”

살짝 파이팅 포즈를 해 보이고 나는 곧장 모노크롬 대기실로 돌아갔다.

***

주인이 자리를 뜨자 남은 두 사람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이리스의 매니저, 공다혜는 레드를 돌아보고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맡은 아티스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다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왜 이번엔 뉴마 이사님한테 꽂힌 거야?’

외출하는 주인이 멀어져 가는 것을 창문으로 지켜보는 강아지 같은 표정. 하필 상대방 이름까지 ‘주인’이었다.

멤버 중 연장자에 생일이 가장 빠르다고 리더를 맡은 레드. 이미 데뷔한 지도 3년이 지났건만 그녀는 아직도 이런 부분에선 서툴렀다.

“수연아, 넌 지금 뉴레인 소속이잖아.”

다혜는 현재 뉴마와 뉴레인의 관계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말했다. 어쨌든 줄을 타려면 저쪽은 아니란 얘기였다.

멀어지는 주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레드는 금세 샐쭉해져서 대꾸했다.

“대표님은 같은 분인데…….”

“그렇긴 해도.”

물론 잘 보여서 나쁠 것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뉴마와 엮인 이런저런 사건들로 기획실에서 구시렁거리던 것을 떠올리면, 가까이하기에는 눈치 보이는 사람이기도 했다.

레드는 리더라고 더욱 엄격한 평가를 받아왔으니, 자상하게 대해주는 사람에게 마음이 저절로 향하는 것은 이해가 갔다.

‘원래부터 워낙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열애설 건으로 미운털이 박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마음이 쓰이던 참이었는데, 그녀에게도 의지할 만한 사람이 생겼다면 좋은 일이기는 했다.

다만 그게 뉴마의 이사님이라고 한다면 마냥 좋은 일이라고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나도 언니가 무슨 걱정 하는지는 알아.”

“그래. 일단 지금은 본업부터 열심히 하자. 좀 더 자리 잡으면 이렇게 남 눈치 볼 일도 없…….”

“이사니임!”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복도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모노크롬 대기실로 돌아가던 주인을 마주친 옐로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나도 모르겠다.”

“푸핫.”

다혜는 그 활발한 목소리를 들으니 이렇게 어렵게 생각해야 하나 싶어 순간 맥이 빠져버렸다.

그 걱정을 알기에 진지하게 듣던 레드도, 이 상황이 재밌어 웃음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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