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55화 (55/430)

# 55화

우형은 민형이 그 말을 내뱉자마자 그를 붙잡고 입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민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늘 컴백 첫 사녹인데!”

모노크롬과 같은 날로 앞당기려다 우리가 선수 치는 바람에 원하는 날짜로 변경하지 못했던 아이리스의 컴백.

그래도 원래 날짜는 도저히 안 되겠는지 조금 바꾸긴 했다고 들었는데.

‘그게 벌써 오늘이야?’

다른 일들로 바빠서 대충만 파악하고 있던 나와 다르게 민형은 아이리스의 컴백일을 정확히도 알고 있었다.

“중간에 다른 가수 녹화 보러 가도 돼요?”

“저희 관계자잖아요. 뒤에서 살짝 보는 거라면야.”

그런 거야?

사전 녹화 참여를 위해 선착순 신청에, 새벽 집합에, 몇 시간이나 대기하던 팬들을 계속 봐 와서 방청은 어려운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나는…… 관계자였구나!’

민형은 시계를 보더니 딱 10분, 20분만 비우면 된다며 나를 설득했다. 나도 그를 따라 시계를 확인했다.

모노크롬과 녹화 순서 차이가 있고, 어차피 그 사이에 할 일도 없다면.

“그럼 저, 저도!”

“이사님……?!”

나도. 나도 보러 갈래!

***

“주인 님 어디 갔어?”

“…….”

잠시 잠 깬다고 음료수를 사러 다녀온 재민은 한 손엔 커피, 한 손엔 주인에게 받은 법인카드를 들고 그녀를 찾았다.

우형은 복잡한 표정으로 아까까지 주인이 앉아 있던 빈 의자를 보고 다시 재민의 얼굴을 보았다.

이건 이사로서 일하러 가신 건가? 아니면 취미 생활을 즐기러 가신 건가?

‘혹시 뉴마에 오신 게…….’

예전에 책상에 아이리스 전 앨범을 쌓아두고 보고 있던 주인의 모습이 지금 떠오르는 건 왜일까.

회사에 와서 모노크롬을 맡은 게 전혀 주인의 의지가 아니었고, 혹시……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거라면.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 봤자 자신의 추측에 불과했다. 어쨌건 리더로서 멤버들에게 할 말은 아니었기에 우형은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뭔데?”

우형의 표정이 복잡한 이유를 알 리 없는 재민은 그저 빨대를 물고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

“아이리스 사녹 시간은 어떻게 아셨어요?”

“팬클럽 공지로 올라오잖아요.”

……이 사람, 찐 무지개였구나. 공식 팬클럽까지 가입했을 줄이야.

아직 이른 아침이라 방송국을 바쁘게 오가는 사람은 대개 음악 방송 관계자들이었다. 그들 사이에 섞여 우리는 녹화 현장 구석으로 진입했다.

‘이게 정말 특권이지.’

대표 딸이란 설정이니 원할 때 보려면 볼 수 있었지만 이사로서 보고 싶은 건 아니었으니까.

이 정도의 위치면 딱 좋았다. 그냥 서로에게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정도.

시간에 딱 맞게 도착했는지 아이리스의 팬덤, 무지개의 입장도 마침 마무리되고 있었다.

평소에 컬러즈들만 봐왔던 나는 신기한 기분으로 그들을 구경했다.

‘컬러즈와 다른 점은…… 일단 남팬이 있다는 점.’

옆에 서 있는 민형 말고 정말 방청하러 온 남팬 말이다.

여성 팬이 확실히 더 많긴 했지만 남성 팬도 약 20퍼센트 정도 섞여 있었다.

방청을 신청해서 오는 컬러즈는 내가 본 바로는 여성 팬들이 백 퍼센트였다. 정말 팬덤의 성비라기보다는, 남팬이 있더라도 그 사이에 한 명 섞여 있으면 튀니까 분위기상 오기 힘든 것도 있겠지.

그에 비해 무지개는 성비가 섞여 있는 것이 색달랐다.

팬들 다음으로는 무대에 설치된 세트가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투자는 많이 하는 것 같단 말이지.’

무대를 감싼 LED 화면에는 귀여운 폰트로 영어 단어들이 흘러가고, 무대 아래엔 벤치나 조화 등의 소품이 놓여 있었다. 마치 외국의 공원 같은 분위기.

“이번엔 무슨 컨셉이래요?”

생각해 보면 아이리스가 연초에 활동하던 앨범이 내가 게임에서 마지막으로 기획한 앨범이었다.

그 이후로 같은 곡으로 일본 앨범을 내면서 일본 투어를 진행했다고 하고.

한마디로 아이리스의 데뷔부터 바로 이전 앨범까지는 전부 내 기획이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노크롬은 망……한 앨범도 다 내가 벌인 거였으니까.’

모노크롬도 마찬가지로 데뷔부터 지금까지 전부 내가 기획했고.

아이리스는 올해부터 내 손을 떠났기에 처음으로 내가 개입되지 않은 앨범을 만들었다. 과연 어떻게 완성되었을까.

내가 민형에게 아이리스 이번 앨범 컨셉에 관해 묻자 그는 마치 준비된 듯이 설명을 쏟아내었다.

“앨범 자체는 여행이 컨셉인데, 타이틀곡은 운명의 상대를 찾기 위해 각지로 여행을 떠나는 소녀라는 내용이요. 뮤비 촬영도 실제로 여러 나라에 직접 가서 촬영하느라 제작 기간이 꽤 길었다고 기사도 엄청 떴고…….”

“……뉴레인 마케팅부에서 나오신 거 아니죠?”

무슨 AI냐고. 키워드를 입력하면 1초 만에 대답이 돌아오는 인공지능 비서 같은 대답이었다.

무덤덤한 표정에 안경까지 끼고 컨셉 설명을 좔좔 읊고 있으니 더 기계 같았다.

“앨범 준비 기간도 길었고 일본 투어도 있어서 떡밥이 티저랑 기사밖에 없었다고요.”

……사람 맞네.

다음 활동기를 기다리며 그나마 뜨는 정보들만 계속 봐왔다는 그. 떡밥에 굶주린 팬덤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지금껏 봐와서 아니까 그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하긴 올해 아이리스 활동하는 걸 본 게 저번 앨범이랑 돌대회 정도였지.’

그동안 잘 안 보인다 싶더니 앨범 준비와 투어를 위해 해외를 왔다 갔다 하며 바빴던 모양이다.

그룹의 공백기를 기대감 하나로 버티던 건 컬러즈나 무지개인 그나 똑같았다.

“아이리스는 언제부터 그렇게 좋아하셨어요?”

“우형이 후배로 걸그룹이 데뷔한다길래 처음부터 알긴 알았는데, 결정적이었던 건 <레인보우> 앨범 때.”

“아. 수작이었죠. <레인보우>.”

알지. 게임을 하면서 처음으로 대성공이 뜬 앨범이었으니까.

그 앨범이 성공한 덕분에 아이리스가 신인상을 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때 멤버들 머리도 빨주노초파남보로 하고 나와서 처음엔 티저만 보고 사람들이 전대물 찍냐고 말이 많았잖아요.”

“크흠. 그, 그랬구나. 음. 그랬죠.”

그랬단 말이야……? 이 세상에선 그런 일이 펼쳐지고 있었단 말인가.

나는 모르던 이야기였기에 대충 아는 척을 하며 얼버무렸다.

“그런데 앨범 딱 나오고 보니까 컨셉이랑 잘 어울려서 그런 소리도 쏙 들어가고 오히려 인지도가 많이 늘었죠.”

“아, 다행……이 아니라. 그때 어울리는 메이크업 찾느라 얼마나 눈 빠지게 연구했는지.”

나는 뿌듯한 표정으로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룹 이름을 아이리스로 정하고 한 번쯤은 해 보려 했던 무지개색 머리.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헤어가 너무 성의 없나 싶어서 최대한 자연스러운 비주얼을 만들기 위해 어울리는 메이크업을 연구하고 또 연구했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좋은 결과를 얻었단 소리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하자, 민형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제가 예전엔 짧게 일하느라 윗분들은 별로 못 봤는데 혹시 그때부터 회사에 계셨어요? 그땐 못 뵀던 것 같아서.”

“……아니, 그, 얼마나 눈 빠지게 연구했는지! 전해 들어서 알고 있었어요.”

아차. 이 사람이 과거에 뉴마에서 일했던 사람인 걸 자꾸 잊게 된다. 또 뜨끔했네.

별로 중요한 얘기는 아니었기에 그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갔다.

“뉴마로 복직했는데 아이리스는 뉴레인으로 소속이 바뀌어서 좀 아쉬우셨겠어요.”

“아뇨.”

전담팀으로 같이 일하는 건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그룹이 같은 건물에 있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크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한 말인데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팬으로선 그냥 멀리서 응원하는 게 좋은데요. 같이 일하면 그냥 관계자잖아요.”

……진짜 찐팬의 마음이잖아.

좋아하는 가수와 가까워지기보다는 그냥 팬덤의 한 사람이고 싶다는 민형.

하긴 나도 아이리스를 좋아하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만나서 대화해보니 그냥 아이돌이란 직업을 가진 평범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모노크롬도 처음 본 날엔 신기했었지.’

살면서 아이돌을 그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라 생소한 느낌이 컸다.

그땐 다들 연습실에서 올라와 생얼에 프리한 모습이었지만 일반인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가 있었으니까. 얼굴도 작고, 키도 크고. ‘와, 연예인이다.’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는데.

‘지금은 그냥 ‘애들’이란 느낌에 가까워졌고.’

이런 것처럼 계도 가끔 타야 계라고 할 수 있는 법. 맨날 보면 사람은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팬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온전히 느끼고 싶어서 민형은 거리감을 두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닿고 싶고, 소통하고 싶고, 좀 더 가까워지고 싶고. 다들 그런 마음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다양한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겠구나.’

팬덤이란 게 한 인격체가 아니건만, 잘 모르는 사람들은 쉽사리 그렇게 생각하곤 했다.

누군가의 팬과 이렇게 일대일로 대화해 본 적은 처음이라 제법 좋은 공부가 되었다.

***

충실한 대기 시간을 보내고 모노크롬의 사전 녹화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와 또다시 대기 시간.

나는 아까 몰래 보고 왔던 아이리스를 예상치 못하게 곧바로 다시 볼 수 있었다.

“Your rainbow! 아이리스입니다!”

모노크롬이 선배여서 그런지, 같은 기간에 활동하는 후배 그룹이 종종 자신들의 앨범을 들고 찾아오곤 했다.

그리고 아이리스 또한 같은 용건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그, 그렇지. 소속사 선배였지.’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인데 왜 올 거란 생각을 못 했지. 직속 선후배 관계였는데 같은 시기에 활동하면서 인사하러 오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몰랐다.

멤버들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같이 인사했다.

그 뒤에선 대기실에 붙은 탈의실에 짐을 두고 나오던 민형이 아이리스를 보자 백스텝해서 다시 들어가는 모습도 포착되었다.

‘웃기는 사람이야.’

진짜로 멀리서만 응원하는구나.

“저희 새 앨범이 나와서 인사드리러 왔어요.”

“아, 예. 저희도…….”

후배들이 찾아올 때면 리더인 우형이 나섰다.

우리도 증정용 비매품 앨범들이 있었기에, 우형은 레드에게 앨범을 받으며 모노크롬의 앨범도 똑같이 건넸다.

아이리스의 리더와 모노크롬 리더의 투샷이라니. 내가 결성한 그룹이 이 대기실에 전부 모여있는 거잖아!

감격스러운 눈으로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둘 사이엔 그 이상의 의미 있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뭐야, 이 어색한 공기.’

보는 내가 다 숨이 막힌다…….

나는 공부하다 고개를 든 준해에게 소곤거리며 물어봤다.

“회사 후배였는데 별로 안 친해?”

“회사에서도 별로 마주칠 일이 없어서…….”

하긴 얘기를 들어 보면 모노크롬 팀과 아이리스 팀은 거의 분리되어 활동했던 것 같으니까.

‘게다가 해랑이는 레드 이름도 모른댔지.’

두 리더는 ‘활동 힘내세요. 아, 예. 감사합니다. 응원할게요. 네, 감사합니다.’ 같은 말만 남기며 연신 꾸벅거렸다.

메신저로 거래처 직원과 대화하다 용건은 다 끝났는데 누가 먼저 대화를 끝내야 할지 몰라 서로 눈치만 살피는 장면을 현실에서 보는 것 같았다.

아예 모르는 사이면 그나마 편하게 대할 수 있는데, 어색하게 아는 사이면 더 서먹한 거. 이해는 가지.

다행히도 아이리스는 이 뒤에도 인사하러 갈 곳이 더 남아있었는지 인사는 길게 이어지지 않고 끝났다.

내가 다 긴장돼서 참고 있던 숨을 내쉬는데, 우르르 나가는가 싶더니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저…… 이사님.”

응? 이사님? 나?

고개를 들어보니 나를 부른 목소리의 주인공은 레드였다. 그리고 옆에는 옐로도 남아 있었다.

“저희 이번 앨범 꼭 들어주세요!”

레드는 수줍은 얼굴로 앨범을 내게 건넸다. ‘신주인 이사님♡’이라고 내 이름까지 적힌 사인 앨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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