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팬들의 노래를 들은 준해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웃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이건 나도 감동이다.’
공연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 컬러즈는 오늘 처음 들은 신곡을 벌써 외워 준해를 위해 불러주고 있었다.
그들이 부르는 가사를 직접 쓴 준해에겐 더 감동으로 전해져 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감동이 눈물샘을 더 자극했던 모양. 준해가 여전히 목이 메어 제대로 못 부르고 있으니 조정석으로 무전이 들어왔다.
[저 먼저 올라가도 될까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음 순서로 예정되어 있던 한이. 역시나 돌발 상황에 대처가 빨랐다.
오케이 사인을 보내자 잠시 시차를 두고 한이가 올라왔다.
무대 왼편에 앉은 준해를 비추던 스포트라이트 조명.
그 조명 빛 안으로 한이가 들어오자 떼창을 하던 컬러즈가 반응했다.
준해도 덩달아 놀라서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한이는 준해 뒤로 지나가며 마이크에 들어가지 않게 표정만 움직여 뭔가를 말했다. 클로즈업된 송출화면으로 확인해보니.
‘울보래요~.’라고 한 건가?
짓궂은 표정에 준해 또한 장난스럽게 웃으며 입만 움직여 대꾸했다.
그리고 한이는 준해가 있는 자리를 지나 무대 오른편에 미리 설치되어 있던 다른 의자에 착석했다. 재빠르게 스포트라이트 조명이 하나 더 켜져 각각 두 사람이 있는 곳을 비췄다.
‘와……. 멤버들한테 맡긴 덕분에 넘어갔다.’
해랑의 요청으로 큐시트를 맡겼더니 완성된 것이 이 방식이었다.
한 멤버의 무대가 끝나고 다음 멤버의 개인 무대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라데이션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연출.
타이밍이 조금 빨라지긴 했지만 준해의 무대가 끝나기 전에 한이가 미리 들어오는 것도 예정되어 있었다.
마치 개인 무대 사이에 유닛 무대가 들어가듯이 이어질 예정이었으니까.
자신의 자리에 앉은 한이는 컬러즈가 부르던 노래를 대신 이어받았다.
‘역시 메인 보컬…….’
계획보다 먼저 나왔는데도 예정된 것처럼 자연스레 치고 들어가는 능력.
녹음실에 붙어 멤버들을 디렉팅해준 덕분인지 자신의 파트가 아닌 부분도 확실하게 숙지한 모습이었다.
한이의 깜짝 등장 덕분에 분위기 전환이 되어 준해도 곧장 감정을 추스르고 마이크를 들었다.
1절은 준해가 혼자 불렀지만 2절 후렴은 모노크롬의 보컬조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의 화음으로 전개되었다.
준해의 순서에서 잠시 위기가 있었지만 무사히 넘어가고 바로 다음으로 이어진 한이의 순서.
이번엔 아까와 반대로 두 사람이 초반부를 함께 부르다 한이의 솔로로 이어졌다.
한이의 선곡은 데뷔 초 앨범의 수록곡. 어쩌다 보니 오프닝부터 현재와 과거를 번갈아 가며 오가는 느낌으로 세트리스트가 완성되었다.
[와 이거 몇년동안 내 알람인데ㅠㅠㅠ]
[셋리 배웠다]
같은 발라드지만 한이가 무대에 서니 팬들의 반응은 또 달라졌다. 아까는 몽글몽글에 이어 아련한 분위기로 마무리됐는데.
‘멜로눈깔 강력해……!’
현장의 컬러즈도, 채팅창도, 점점 다들 한이의 멜로 눈빛에 취해가고 있었다. 아까는 새싹 트는 초봄의 아련함이었다면 지금은 마치 꽃놀이 시기랄까?
한이의 솔로가 끝나고 잠시 암전 후에 다시 조명이 켜졌을 땐 멤버 다섯 명이 무대에 전부 올라와 있었다.
다섯 명의 <기다림의 끝>까지가 오늘 쇼케이스 팬미팅의 발라드 파트였다.
“이렇게 <기다림의 끝>까지 마쳤는데요. 괜찮게 들으셨나요?”
“네에!”
“그리고 준해가…….”
우형이 준해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왜 그렇게 쳐다보시죠?”
“오프닝 때 우는 거 아니냐고 놀렸던 거 누구였죠?”
“전 아닌데요.”
그야말로 전세 역전. 그러나 준해는 뻔뻔하게 시치미를 뗐다.
“우는 건 눈물이 밖으로 나오는 거고, 아니면 그냥 눈이 촉촉한 것뿐이잖아요.”
“지금은 좀 덜 촉촉하네요?”
논리적으로 반박했으나 이미 멤버들은 귀엽다는 표정으로 볼 뿐이었다.
“하아. 여러분, 비밀이에요.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돼요.”
“네~.”
포기한 준해가 쀼루퉁하게 말하자 귀엽다는 듯이 받아주는 것은 컬러즈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사이에 비밀이 늘었네]
[비밀조아]
어차피 라이브 송출에 다시 보기 서비스까지 있어서 비밀이란 건 없지만. 비밀 지키기에 맛 들인 컬러즈는 또 지킬 비밀이 생겼다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채팅창 반응은 어떤지 볼까요? 음색 최고다, 방금 기억 조작당함, 음원 내주세요, 유유유…….”
채팅창을 읽자 웃기도 하고 동의도 하며 반응하던 컬러즈가 음원 내달란 채팅에는 “와아아~.” 하며 강렬하게 환호했다.
‘크흠. 나 들으라고 한 소린가?’
그래. 시간만 되면 전부 내자!
내가 또 소처럼 굴릴 계획을 머릿속으로 짜고 있는 줄도 모르고 멤버들은 계속해서 소통을 이어나갔다.
“기억 조작은 무슨 소리예요?”
채팅창을 읽다가 멤버들이 묻자 팬석에선 “한이!”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커뮤 중독 소리를 들은 나야 알지만 멤버들은 ‘기억조작 멜로눈깔’에 대해선 모르는 모양.
“한이가 기억을 조작한다고?”
“그건 영화에 나오는 거 아냐?”
재민이 “푸슝.” 하며 어딘가의 영화에 나오는 기억 제거 펜을 누르는 흉내를 냈다. 앞에 서 있던 우형이 거기에 맞춰 “윽.” 소리를 내더니.
“기억 조작은 무슨 소리예요?”
“여우 형 바보 됐다.”
또 뭔가 새로운 장난을 찾은 것인지 무대 위의 멤버들은 자기들끼리 기억 조작이 아닌 기억 삭제 상황극을 하면서 놀았다.
팬석의 컬러즈는 그런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즐겁게 보고 있었고.
‘정말 대본에 없는 소리로도 자기들끼리 잘 노는구나.’
개인 멘트를 잘 하지 않는 현장과 다르게, 멘트를 칠 수 있는 채팅창은 한이의 눈빛이 얼마나 그윽한지 온갖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한이 형 눈빛이 드라마 남주 같아서 설렌대요.”
“에이. 설마. 어디 봐.”
한이와 아이컨택을 한 우형이 모르겠단 표정으로 팬석을 쳐다봤다.
한이가 다른 멤버들과도 눈을 마주치자 해랑은 별로 하고 싶지 않은 듯 눈을 피하고, 재민은 눈싸움을 하고, 준해는 그저 끔뻑거렸다.
멤버들과의 교감에 실패한 한이는 이번엔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선배 기억나? 같이 조별과제하던 그때 참 즐거웠는데]
[여고 나왔는데 왜 내 기억속엔 짝사랑하던 선배가 있는거지?]
[크면 결혼하자고 했잖아 언제 아이돌이 되어버린거야]
[사랑해]
멤버들의 반응과 달리 채팅창에선 기억 조작을 간증하듯이 온갖 사연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건 우리 멤버들이 감수성이 없는 거야.”
“그런 거야?”
멤버들은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지만 아이컨택 짤을 얻은 팬들은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방금까지 했던 무대들의 감상 소통 타임을 한 차례 가진 후 다음 무대가 준비되는 동안, 이번엔 개인 무대를 준비하는 모습을 짧게 담은 VCR이 재생되었다.
순서대로 준해부터 한이, 그리고 이제부터 개인 무대를 진행할 나머지 세 명의 모습까지.
“헉! 피아노?”
“댄스?!”
“뭐야! 뭐 하는 건데?!”
마치 떡밥처럼 슬쩍 지나가는 영상에, 무슨 무대가 펼쳐질지 아직 알 리 없는 컬러즈의 기대감이 한껏 고양되었다.
‘방금까지 잔잔하게 분위기를 잡았다면 이제 몰아칠 시간이지.’
VCR이 끝나고 조명이 켜지자 무대 위에는 스탠드에 놓인 디지털 피아노가 설치되어 있었다.
피아노를 보자마자 컬러즈들은 모두 누가 다음 순서인지 알아챘다.
“우형이다!”
우형이 조명 속으로 걸어 들어와 피아노 앞에 앉자 “오오~.” 하는 호응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아련한 멜로디로 시작하여 절절한 가사로 이별을 앞둔 화자의 심정을 대변하는 우형의 또 다른 자작곡.
[헉 미공개곡인가?]
[앨범내자ㅠㅠㅠㅠㅠ]
컬러즈의 반응대로 모노크롬의 첫 번째 미공개 음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미리 들어봤지만 공연장에서 듣는 곡은 분위기가 또 달랐다. 컬러즈들이 응원봉 흔드는 것도 잊고 숨죽이고 들으니 나도 저절로 숨을 죽이고 집중해서 듣게 되었다.
(흐려지는 네 흔적에 내 발자국을 덧씌워……)
후반부엔 마치 화자의 내레이션 같은 랩 부분이 추가되었다.
우형이 한마디를 부르고 끊자, 곧바로 다른 목소리가 이어받았다.
(이 길의 끝에선 너에게 닿을 수 있을까……)
무대 반대편에 켜진 조명 아래에 앉아 있던 해랑이 우형의 피아노 연주를 깔고 나지막하게 랩을 시작했다.
조용하던 와중에 나타난 해랑의 모습에 팬석에서는 약간의 술렁이는 기운만 느껴졌다.
평소 같았다면 소리를 질렀을 텐데 이 분위기에 완전히 열중한 모습이었다.
우형의 연주가 끝나고 마치 이어지듯이 다음 곡 반주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이것 또한 미공개 곡, 게다가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 해랑의 자작곡.
바로 우형의 편곡이 들어간 그 곡이었다.
‘해랑이가 부르는 노래가 어떻게 완성될지 궁금했는데.’
마치 대사를 읊듯 하는 스타일의 노래를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불렀다. 메인 래퍼와 리드 래퍼, 둘이어서 할 수 있는 느낌의 노래였다.
우형을 비추던 조명이 꺼지고 해랑의 솔로가 시작되었다.
우형의 절절한 이별 노래 이후로 배치한 덕분에, 그 어두운 가사도 마치 사랑에 상처받은 내용처럼 들려서 너무 무겁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시작부에서 우형과 부르던 노래 파트를 2절에선 해랑이 혼자 불렀다.
그게 마치 혼자가 되어 더욱 쓸쓸한 느낌으로 전해져왔다. 무대 위에서의 해랑의 표정이 더해져서 더욱더.
‘이런 것까지 의도해서 만든 거면, 진짜 천재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메인 보컬 정도의 기교가 없어도 곡에 맞는 노래 스타일이 있으니 이러한 해랑의 노래도 더할 나위가 없었다.
해랑의 나지막한 랩이 끝나고, 다음 음악이 시작되었으나 조명은 여전히 해랑을 비췄다.
‘이제 남은 건 재민이 순서…….’
이전 순서들과 다르게 재민은 해랑의 순서에 먼저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음악이 흐르는 동안 해랑이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반대편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를 따라 움직이던 조명은 이내 의자에 앉아있는 재민의 뒷모습을 비췄다.
그의 옆에 교차하듯 반대로 놓인 의자에 해랑이 앉아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One.”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해랑이 “Three.”까지 천천히 숫자를 세어 나갔다. 그 박자에 맞춰 두 사람은 등을 맞대고 좌우 반전하듯 같은 포즈로 변화했다.
이게 바로 두 사람의 유닛 댄스로 시작하는 재민의 댄스 무대.
“와아아아아!”
우형과 해랑의 노래를 내내 숨도 안 쉬고 집중해 듣던 컬러즈들은 막혔던 숨을 토해내듯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짧은 유닛 댄스를 마치고 해랑이 퇴장한 후엔 재민의 독무대가 펼쳐졌다. 팀 미로의 팀원이 아니라 모노크롬 멤버로서 보여주는 춤.
‘……진짜 열심히 준비했지.’
앨범 준비 기간에 연습실에 가장 오래 남아 있었던 멤버는 재민이었다.
저번 앨범 활동 때 발목 부상을 입는 바람에 몸을 사려야 했던 것이 내내 마음에 남았던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전혀 위화감 없이 활동을 진행했지만.
그리고 오늘에야말로 진짜 저력을 보여줄 수 있었다.
[아니 의자 밟고 저렇게 움직이는 게 가능?]
[댄스실력 무슨 일이여;;;;]
열광하며 환호하던 컬러즈도 재민의 현란한 움직임에 다시 숨을 삼켰다.
마치 현장의 분위기를 잇듯이 폭발적으로 올라가던 채팅 속도도 점차 느려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채팅 수가 적어지면 하트가 올라가는 속도가 반비례하듯이 빨라졌다.
그것으로 다들 얼마나 집중해서 재민의 무대를 보는지 알 수 있었다.
무대에 압도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몸으로 체감하던 그때. 모노크롬 팀은 공연장으로 총출동했기 때문에 따로 울릴 일이 없던 내 스마트폰이 울렸다.
“……?”
[마이 엔터: 아티스트의 능력치가 올랐습니다. 확인해 보세요!]
나만이 알 수 있는 알림. 내가 멤버를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 능력치가 오르는 것은 해랑의 프로필 사진 촬영 이후로 처음이었다.
홀린 듯이 화면을 터치하자.
‘재민이 레벨…….’
10을 목전에 두고 회사로 복귀하며 멈춰있던 재민의 댄스 레벨. 내내 마음에 걸렸던 그 수치가 두 자릿수로 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