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저번 앨범은 도중에 미국 일정이 추가되는 바람에, 준비부터 활동까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를 만큼 아주 바쁘게 지나갔다.
곧바로 다음 앨범 준비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마음에 여유가 있었다.
‘뮤비 촬영이 끝나 있다는 게 위안이다.’
예정대로 해외 로케 촬영을 순서대로 진행했다면 아마 지금쯤 정신이 하나도 없었을 터였다.
그러나 LA에서 촬영을 미리 완료했으니 타이틀곡이 나오는 대로 맞춰서 편집하면 될 일이었다.
활동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다음 타이틀곡은 이미 제법 얼개가 잡혀 있는 상태였다.
지금껏 어디에도 공개되지 못하고 폴더에만 잠들어 있던 우형의 자작곡 샘플들이 꽤 많았던 덕분에 뮤비 촬영 전부터 분위기가 대략 정해져 있었다.
거기다 모노크롬의 음악 방송 활동이 주 3회였던지라, 우형은 활동하면서도 틈틈이 작업을 진행했다.
지금은 그 진행된 버전을 들어보기 위해 작업실로 내려온 참이었다.
“이게 저번에 들려드렸던 첫 번째고요.”
우형이 재생 버튼을 누르자 스피커를 통해 음악이 흘러나왔다.
확실히 이전에 들었던 1차 시안보다는 사운드가 풍부해져 있었다. 멜로딕한 전자 피아노의 느낌으로 시작하여, 발랄까지는 아니지만 확실히 봄에 잘 어울리는 밝은 느낌.
“그리고 이건 멜로디를 조금 바꿔본 건데.”
첫 번째 버전 재생이 끝나고 우형은 다른 파일을 열어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처음 들었던 것과 비슷하게 진행되는가 싶더니, 중간에 다른 멜로디가 자연스레 섞여 있었다.
‘음? 이거 어디서 들어봤던 것 같은데.’
베이스가 되는 멜로디가 아니라, 추가된 멜로디 부분이 어딘가 귀에 익었다.
어디에서 들었더라…….
노래를 들으며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가다 보니,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오르는 풍경이 있었다.
“LA에서 기타로 치던 그거네?”
“들으셨어요?”
어쩐지 듣다 보니 LA의 풍경이 떠오른다 싶더니.
LA에 도착한 첫날, 관광을 마치고 돌아와 쉬고 있는데 발코니 너머로 들려오던 그 멜로디였다.
비슷한 부분을 수정해가며 몇 번이나 치는 걸 들었던 덕분에 기억에 익숙하게 남아 있었다.
‘미리 다녀왔던 게 오히려 다행이었네.’
일정은 급한 감이 있었지만 덕분에 좋은 영감을 얻은 듯했다.
“나는 그때 들은 기억이 떠올라서 더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가 뮤비랑 잘 어울릴 것 같아.”
“송 피디님도 두 번째가 괜찮다고 말씀하시긴 했는데…….”
우형은 내 평가에 안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뭔가 불안한 듯이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진짜 제 곡으로 타이틀 해도 괜찮을까요?”
전부터 타이틀을 맡기겠다고 여러 번 말했건만.
그럴 때마다 마음을 다잡고 작업에 몰두하던 우형도 정작 그 기회가 정말로 다가오니 자신이 없어진 모양이었다.
자기 곡에 뮤직비디오까지 붙어서 모노크롬의 앨범으로 발매된다는 게 아직 상상이 안 가는 건가.
하지만 그가 약한 모습을 보여도, 내겐 물러설 순 없는 이유가 있었다.
“이 앨범에 네 곡 아니면 누구 곡을 넣겠어.”
“그렇긴 한데…….”
이번 앨범의 타이틀은 .
저번 에서 모노크롬의 시그니처를 이었다면, 이번엔 모노크롬의 컨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다른 부분을 표현할 예정이었다. 타이틀 그대로 ‘컬러즈’이자 ‘색’을.
흑백과 색의 대비. 그 두 개념의 차이라기보다는 조화에 집중할 예정이었다.
‘그게 내가 팬덤명을 떠올릴 때 고려했던 점이었고.’
흑백과 색이 대비되면서 각자가 더 도드라지고 특별해지는 거니까.
그래서 외부 작곡가의 곡보다 우형의 자작곡을 고집한 것이다.
컬러즈들이 좋아할 테고, 또 무엇보다 우형의 자작곡 퀄리티가 좋았다.
공식으로 자작곡을 발매하면서, 내 핸드폰 속 마이 엔터에도 멤버들의 능력치란에 작곡, 작사 항목이 추가되었다.
‘이건 나도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본 적 없는 능력치라 어느 정도인지 감은 안 잡히지만.’
어쨌든 내 귀로 들어서 좋다고 느꼈던 것들이 실제로도 좋은 게 맞았던지, 작곡 능력은 우형의 능력치 중 최상위권에 있었다.
그리고 우형을 제외하면 의외로 한이가 작곡 레벨이 높은 편이었고.
‘한이는 전에 피아노도 배우다 말았다고 했는데.’
그런 것을 생각해 보면 아마도 메인 보컬이라 음악적 지식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녹음할 때면 우형의 옆에서 디렉팅을 맡기도 했으니까.
그렇다면 능력치는 정말 그 분야 하나만의 능력치라기보다는,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한 결과 같았다.
‘에휴. 게임을 그렇게 했는데 아직도 공부가 필요하네.’
게임할 때처럼 유저 커뮤니티라도 있으면 도움을 받았을 텐데. 현실과 결합되다 보니 수치를 그대로 활용하기는 녹록지가 않았다.
차라리 게임 지식보다 이 업계에 대한 지식이 많았다면 도움이 되었을 텐데 나는 음악에 문외한.
그래서 음악적인 부분은 멤버들이나 송준오 피디에게 맡기고 있었다.
‘이게 모노크롬 앨범 총괄 프로듀서의 현실이지…….’
어쨌든 이 회사에선 낙하산 이사란 것을 또 한 번 느끼는 순간이었다.
현실 지식이 없으니 내게 주어진 것들을 어떻게든 잘 활용해서 앞으로 헤쳐나가야 했다. 도움이 되는 듯 안 되는 듯 한 게임 정보라도.
나는 멤버들의 능력치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작사 레벨은 자작곡을 만드는 우형과 랩을 쓰는 해랑이 높았는데, 그 외에도 높은 숫자를 보이는 멤버가 있었다.
아직도 자신감 없는 표정으로 마우스를 딸각거리는 우형을 보고 나는 슬쩍 입을 열었다.
“준해 혹시 작사한 적 있어?”
“요즘 조금씩 연습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자작곡을 발매한 이후로, 멤버들도 가능성이 있는 부분은 주체적으로 하기 시작했던 듯했다.
우형은 어떻게 알았냐며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냥…… 똑똑하니까 잘할 것 같더라고.”
게임 화면으로 봤다고 할 수 없었던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그러나 우형은 마치 재능을 알아보는 프로듀서라도 보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괜히 찔리네.’
그 누구보다 재능을 몰라보고 방치했던 사람이 바로 나인데.
“이번 앨범에 참여해 봐도 괜찮을 것 같은데 너무 빠르려나?”
“아마 좋아할 거예요. 제가 한번 물어볼게요.”
자기 일은 빼고 보더니 멤버들 일은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이 리더의 모습……. 본인도 조금 더 자신 있게 나서면 좋으련만.
“너희가 할 수 있는 건 언제든지 말해도 돼. 물론 하고 싶으면.”
“그럴게요.”
이제 회사 차원에서 비싼 돈 주고 곡도 받아오고 투자할 수 있는데, 어째 점점 자체제작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우형은 오히려 이쪽이 좋았는지 밝게 대답했다.
“혹시 또 누구 준비하거나 연습하는 거 있어?”
멤버들 관련해선 리더인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어 그에게 물어보는 것이 가장 빨랐다.
우형은 내 질문에 생각나는 것이 있었는지 조금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해랑이가 작곡을 하긴 하는데요.”
작업실에 주로 있는 멤버가 우형과 해랑이긴 했다.
그런데 한이가 아니라 해랑?
아까도 말했듯이 작곡 능력치는 우형, 그다음으로 한이가 무난하게 높았다. 내 기억상 해랑은 크게 눈에 띄는 수치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냥 랩 쓰느라 작업실에 있는 줄 알았는데 작곡도 따로 하나?’
남에겐 한 적 없는 이야기였는지, 주변에 아무도 없는데도 우형은 자세를 낮추며 작게 말했다.
“제가 생각하기에 걘 천재인 것 같아요.”
“천재?”
뜬금없는 소리였지만, 왠지 작곡 레벨이 높은 우형이 말하니까 정말 사실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번엔 내가 재능을 알아보는 프로듀서 보는 눈으로 우형을 바라봤다.
나도 덩달아 작은 목소리가 되어서 말했다.
“어느 점에서?”
“작곡에 한정된 이야기라기보단, 해랑이는 뭔가 예술성이 있어 보여요.”
“얼굴이 예술이긴 하지.”
“…….”
우형은 순간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미안. 그냥 뻘소리였어. 잊어.”
최근에 계속 ‘검은후드선배 존잘’ 하는 글을 봤더니 그만.
다행히 우형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갔다.
“오랫동안 룸메여서 쭉 봐왔는데, 예체능에 전체적으로 감각이 있는 것 같아서요.”
예체능이라 함은 예술과 체육.
해랑은 메인 댄서였고 돌대회에서 금메달을 따온 전적도 있으니 체육을 잘하는 건 알겠고. 우형이 지금 말하려 하는 것은 예술적 감각일 터였다.
“그래서 피아노도 배워보라고 했는데 잘 배우더라고요.”
기억났다. 라이브클립 촬영 날 해랑이 피아노 치던 장면.
그때도 우형이 피아노를 배워보라고 권유해서 칠 줄 안다고 말했었지.
팬들은 처음 본다고 했으니, 아직 그쪽으로는 뭔가 공식적으로 선보인 적이 없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해랑이는 작곡으로도 나갈 마음이 있어 보여?”
“그것 때문에 말씀드리기 좀 망설였는데…… 본인은 별로 생각이 없어 보이는 게 아쉬워서요.”
우형도 한번 설득하려 했던 적은 있는 모양이었다. 해랑은 회의적이었던 듯하고.
그래서 지금 얘기가 나온 김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것으로 보였다. 나름 같이 고민할 상대로는 봐주고 있다는 증거일까.
“작곡에 생각이 없다기보다는, 공개하고 싶어 하지 않는단 말이지?”
작업실에 자주 있는 것을 봐선 뭔가 작업은 계속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예상이 맞았는지 우형도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음. 개인적인 이유 때문인 것 같은데…….”
거기까진 자신이 말하기 어려운 듯 우형은 말끝을 흐렸다.
개인적인 일이라면 나도 남의 입으로 듣는 건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아서 더 묻지 않았다.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 공개하긴 싫어한다고?’
그렇다면 확실히 아까운 일이었다. 아마도, 내 목표를 향해 나아가려면 멤버들의 재능을 최대한 살리는 게 답일 텐데.
머릿속에 그의 그저 그런 작곡 레벨과 피아노 치던 모습이 둥둥 떠다녀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송 피디님한테도 한번 의견을 구해볼까.’
우형의 자작곡에 관심을 가지던 프로듀스팀 직원은 송준오 피디가 유일했다.
애초에 그가 작곡을 가르쳐 줬다고 했고. 그러니 아마 그는 해랑이 작곡하는 것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비밀회담이라도 하듯이 숙덕거리고 있는데, 문 너머에서 뭔가 시선이 느껴졌다.
우형이 하는 얘기를 들으며 슬쩍 고개를 돌리니, 문에 달린 작은 창 너머로 누군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깜짝이야!”
내가 놀라자 얘기하던 우형도 덩달아 깜짝 놀랐다.
우리의 놀라는 반응을 확인한 재민은 헤헤 웃으면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왜 안 들어오고 거기 서 있어?!”
“저 빼고 둘이서 뭐 꾸미고 있는 것 같길래요.”
“엿듣고 있었냐……?”
“밖에선 안 들리던데?”
작업실이라 방음 설비가 되어 있어 밖에선 대화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 그냥 놀래키려고 서 있었던 거 아냐.
“우형이 찾아온 거야?”
“아뇨. 주인 님이요.”
“나?”
앨범 준비 시작 단계라 멤버들은 자기들끼리, 혹은 프로듀스팀과 의견을 나누는 게 주 일과였다.
나를 찾을 만한 일이 있었나? 하고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재민이 대답했다.
“단장 형, 누나 도착해서요.”
“아!”
재민이 말하는 건 팀 미로의 단장 부부였다.
핸드폰으로 시계를 확인하니 약속 시각이 가까워져 있었다. 아마 두 사람이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는지 재민이 먼저 만났다가, 약속 시각을 조금 앞두고 날 찾으러 온 듯했다.
“그럼 곡은 두 번째 버전으로 작업해 볼게요.”
“응. 송 피디님이랑 잘 상의해서 진행해 봐.”
우형도 할 말은 다 했는지, 다시 작업으로 돌아가려는 듯 의자를 돌려 마우스를 잡았다.
‘그럼 이제 우리 미로 선생님들 보러 가야지!’
새로운 모노크롬 팀이 순조롭게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