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바닥 뚫리겠다.”
패딩의 후드를 푹 눌러쓰고 바닥만 내려다보던 재민이 내 목소리에 고개를 슬쩍 들었다.
무대 의상은 재킷만 벗으면 평범한 셔츠였기에 눈에 띄지 않았지만, 메이크업과 헤어 세팅이 되어 있는 그는 누가 봐도 연예인이었다.
병원을 오가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우리는 사람 없는 대기실 구석에 자리했다.
누구보다 화려한 외양으로 누구보다 초라하게 앉은 재민.
“이제 표정 좀 풀어. 의사 선생님이 큰일 아니라잖아.”
재민은 표정을 푸는 대신 다시 고개가 아래로 향했다.
안심시키려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었다.
‘위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버티다 들어올 정도였으니…….’
아무래도 재민은 마지막 녹화 중에 발목을 삐끗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팬들과 인사를 마치고 들어올 때까지,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티를 내지 않았다.
그 정도의 부상.
다만 의사의 말로는 이틀 정도는 푹 쉬고 1~2주는 조심해야 한다고.
다른 멤버들과 직원들은 방송 시간까지 방송국에 매여 있어야 했기에 매니저는 잠시 이쪽 상황을 알리러 통화하러 나간 상태였다.
단둘이 남았는데 재민은 내내 묵묵부답이고.
따로 할 일도 없어서 나는 재민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맨날 밝던 애가 말이 없으니까 이상하네.’
지금 이게 밝을 상황은 아니다만, 재민은 마치 심각한 선고라도 기다리는 듯이 잔뜩 기가 죽어서 앉아있었다.
‘지금은 그렇게 아파하는 것 같지도 않고…….’
눈높이를 맞춰 앉아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잘 보니 뭔가 상태가 이상했다.
“재민아.”
손끝이 하얘질 정도로 꽉 잡은 두 손.
나는 걱정이 되어 그의 한쪽 손목을 붙잡았다.
“!”
피가 안 통할 정도로 강하게 붙잡고 있었던 것에 반해 힘없이 딸려온 손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게다가 손목 피부 너머로 느껴지는 비정상적인 맥박 수.
확연히 괜찮은 상태는 아니었기에 나는 재민이 푹 눌러쓴 후드를 살짝 들추고 그의 숙인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내내 무표정하다고만 생각했던 그 얼굴에 복잡하게 얽혀있는 감정을 눈치챌 수 있었다.
‘……트라우마…….’
그 정도로 심각하지 않은데도 주저앉아서 잠시 움직이질 못하던 이유를 그제야 깨달았다.
하필 다리를.
하필 또 다리를 다쳐서.
“재민아. 너 괜찮아. 아파도 무대 잘 끝내고 왔잖아.”
“제가 또…….”
“뭐가 또야. 너 잘못한 적 없어.”
재민은 귀에 아무 얘기도 들어오지 않는 듯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입술 화장의 옅은 붉은색이 그 손에 생채기처럼 묻어났다.
다쳤음에도 몸 걱정보다 자책을 먼저 하는 모습에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3년 전, 멤버들 몰래 종적을 감췄을 당시 그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해서.
정말로, 내 손에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던 당사자였던 것이다. 재민은.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두 눈으로 마주하고 있으니 마음이 쓰라려 왔다.
‘……정말로 전부 내 책임이잖아, 이건.’
어쩐지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내가 받은 하나의 퀘스트 속의 무수한 퀘스트.
‘어쩌면 이것도…….’
이번엔 재민 대신 내가 내 손을 꾹 쥐었다. 아득하게 늘어선 벽 앞에 선 느낌이었다.
실상이 어떠하건, 여기서 나까지 덩달아 우울한 모습을 보였다간 끝도 없이 바닥을 파고들어갈 것 같아서 일단 그의 상태를 돌보는 것을 우선하기로 했다.
“하루 이틀만 쉬면 괜찮아질 거래.”
“…….”
“우리 시간 있잖아. 응?”
다행히도 지금 잡혀 있는 다음 음악 방송 스케줄은 3일 후.
이렇게 말하려니 씁쓸하지만, 공중파 방송이 안 잡힌 덕분이었다.
‘뭐 이런 빈익빈 부익부가 다 있냐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고마울 정도네.’
다음 음악 방송 녹화까지 회복하고 나머지 활동 기간은 몸에 무리 가지 않게 조심하면서 진행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재민의 걱정은 그보다 앞에 있었다.
“본방…… 나가면 안 되겠죠?”
“……그건 허락 못 해 줄 것 같다.”
오늘 스케줄은 사전 녹화가 끝이 아니고 본방송이 있었다.
음악 방송이 생방송으로 진행되다 보니, 사전 녹화 영상이 송출되는 동안에도 가수들은 현장에서 무대를 해야 했다.
TV로 보는 시청자들은 못 보지만 현장 관객들이 있었으니까.
원하는 건 최대한 들어주고 싶지만, 아무리 그래도 몇 시간 후에 바로 무대에 서겠다는 건 들어줄 수 없었다.
‘오늘 본방은 네 명이서 서야겠지…….’
눈앞의 재민에게 정신이 팔려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본방을 준비하고 있을 네 명 또한 걱정이었다.
아무리 TV로 송출되지 않는 무대라도 아무렇게나 넘길 수는 없는 일.
갑작스러운 사태에 아마 재민의 동선은 그대로 비워두고 진행하게 되겠지만 한 명이 빠지면 부담감이 다를 터였다.
게다가 멤버 부상으로 인한 4인 활동에 안 좋은 기억이 있을 텐데.
재민도 아마 같은 걱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컴백 첫날을 자신이 망쳤을까 봐.
위로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재민은 이번엔 아예 상체를 숙여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하아……. 어쩐다.’
괴로운 마음이 이해되는데 억지로 마음 풀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대로 둘 수도 없고.
어쩌지 못하고 재민의 뒤통수만 쳐다보고 있는데 통화를 끝냈는지 매니저가 다가왔다.
“재민이는 숙소로 바로 데려다줄까요?”
“으음…….”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재민을 돌아봤다.
그는 일하는 멤버들을 두고 혼자 돌아가야 할 상황이라 더 땅굴을 파고 있었다.
가만히 놔뒀다간 머리가 바닥까지 내려가 닿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점점 자세가 쭈그러들기만 했다.
계속 병원에 있을 순 없으니 가긴 가야 하는데.
“숙소까지 업어다 줄까?”
대뜸 그런 말을 내뱉으니 이번엔 그래도 재민이 반응했다.
그는 상체를 숙인 상태에서 고개만 돌려 나를 쳐다봤다.
“……이사님이 저를요?”
아래로 쏟아진 앞머리에 가려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든 숙이고 있던 머리는 들었다.
“진심이세요?”
“아니, 농담이지.”
이 상황에 웬 농담이냐 싶겠지만 내 나름대로 주의를 환기하려는 노력은 통했던 모양.
잠시 날 쳐다보던 그는 고개를 앞으로 돌리며 웃는 건지 토라진 건지 모를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진짜 해주실 것도 아니면서.”
“진짜로 업히려고 했어?”
“저 사람 말 쉽게 믿는단 말이에요.”
그건 알지. 계약서를 주러 다녀왔더니 다음 날 바로 들고 왔을 때부터 조금 느끼던 바였다.
그런데 스스로 사람을 쉽게 믿는다는 걸 인정하는 말에 어쩐지 내 마음이 쿵 내려앉는 건 왜일까.
‘……예전에도 회사에서 하는 말을 그대로 믿고 버텼을지도 모르는데.’
회복되면 다시 활동시켜주겠다는 회사의 말을.
결국 회사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재민은 그 책임을 혼자 져야만 했다.
그때와 비슷한 상황에 회사의 높은 위치에 있는 내가 아무 말이나 내뱉으면 안 됐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실없는 농담이어도.
“그럼 농담 취소. 몸이 부서져도 업어다 줄게.”
“이사님 몸이 부서지시면 어떡해요.”
“나야 아무도 신경 안 쓰니까 그냥 집에서 쉬다 일어나면 되고.”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다고요?”
그야 난 지금 가족도 없고 이 세상에 혼자 덜렁 떨어졌으니까.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재민은 이상하단 표정을 지었다.
주제도 이상했지만 대화가 허공에서 빙빙 도는 느낌이었다.
“아니, 그냥 튼튼하단 소리야. 아무튼 너 정도면 업을 수 있어. ……아마도.”
그래도 여전히 걱정 담긴 내 표정을 보고 땅굴 파기는 그만둔 것인지, 재민은 심호흡을 하곤 숙였던 허리를 다시 폈다.
“그럼 다음에 업어주세요.”
“그, 그래. 운동하고 있을게.”
업느니 마느니 하는 이상한 대화가 갈무리되자 재민은 어쩔 수 없이 혼자라도 돌아가기 위해 일어섰다.
매니저의 부축을 받아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로 나가는 뒷모습이 안쓰러웠다.
재민은 숙소로 돌아가고, 나는 또 나의 할 일을 하기 위해 회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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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더라 엔딩에 왜 네 명밖에 안 보이는 것 같지?
나만 못 찾겠어? ㅠ
└나도 네 명밖에 못 봤어ㅠㅠ
└앞에 여돌분들 있어서 키 때문에 가려진건 아닌 것 같은데 왜 안 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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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민이 없는 거야?? 무슨 일 있었어?
└사녹 때까지만 해도 아무 일도 없었음ㅠㅠ
└그냥 다른 일 있어서 먼저 간 거 아냐…?
└잉 컴백 첫날인데 스케줄을 그렇게 잡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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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방 방청 들어간 사람은 없는 거지?
그때도 혹시 네 명이었나 ㅠㅠ;;;
└뉴마가 원래 본방 자리는 잘 못 잡더라
└본방 들어간 다른 팬덤쪽에선 혹시 말 나온 거 없나?
└자기돌 무대 말고는 잘 기억도 못하던데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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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 있나? 괜히 걱정..
└222..
└아무 일 없길 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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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방송은 다행히도 무사히 넘어갔다.
사전 녹화야 정해진 인원만큼 팬들이 들어올 수 있었지만, 본방송은 자리를 얻을 가능성이 희박하여 신청을 받지 않았기에 현장에 컬러즈는 없었다.
본방송에 참여한 관객들은 모노크롬이 네 명인지 다섯 명인지까지는 별로 관심이 없었는지 방송이 끝난 후에도 별말이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넘어갈 수 있었다. 마음 한구석은 씁쓸하지만.
다만 모든 무대가 끝나고 전 출연진이 무대 위에 올라왔을 땐 라이브로 방송에 송출이 되었다.
당연히 거기에 재민의 모습은 없었고.
그걸 발견한 팬들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으으……. 컬러즈, 미안합니다…….’
그 걱정하는 글들을 눈앞에 두고도 뉴마는 묵묵부답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보고 재민의 부상은 최대한 숨기는 것으로 당사자와 멤버들과 회사의 의견이 모였기 때문이다.
당장 오늘 아침에만 해도 같이 고생하고 같이 기뻐했는데.
벌써 회사와 팬의 입장에 간극이 생겨버렸다.
‘뭔가 묻히길 바라야 한다니 찜찜한 일이라도 벌인 기분이야…….’
그래도 부상 사실을 밝히면 더 시끄러워질 테고, 당사자인 재민이 멤버들한테도 팬들한테도 더 미안해할 게 뻔하니 그냥 넘어가는 게 최선이었다.
하늘이 우릴 도와주는 것인지 시험하는 것인지, 의사가 말한 회복 기간은 가질 수 있으니 다행이라 여기기로 했다.
재민의 안무 파트는 발목에 무리가 덜 가는 방향으로 수정해야겠지만.
뮤비에는 댄스 파트가 전부 담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적절히 티가 나지 않게 수정할 예정이었다.
오늘 사전 녹화는 원래 버전으로 진행됐지만 컴백 첫 무대라 특별했던 거라고 받아들여지길 바라면서.
안무 수정에 더해 재민의 회복을 위해 안무 영상 촬영도 보류.
‘……오랜만에 특기를 보여줄 수 있어서 기대하고 있었을 텐데.’
무리하지 않으려면 이번 활동 기간엔 조금은 몸을 사려야 했다.
댄스 레벨 9의 진면모를 다 못 보여주다니 이렇게 안타까울 데가.
어쨌든 지금은 회복이 우선이고, 댄스 실력은 다음에 정말 제대로 보여줄 일이 있겠지.
멤버들이 퇴근하여 돌아올 때까지 숙소에 혼자 있을 재민이 또 땅굴을 파고 있지 않을까 걱정되어, 나는 리더인 우형에게 먼저 메시지를 남겨 놓았다.
재민의 멘탈이 걱정되니 잘 좀 보살펴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