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댄스팀과 우리는 각자의 목적이 있으니 모든 일정을 함께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차 적응이고 뭐고 비행기에서 하도 잠을 많이 자서 정신이 말똥했던 우리는 주어진 자유시간을 만끽했다.
“저기 뭐라고 쓰인 거야? 읽어줘.”
“그냥 알파벳이잖아!”
“준해라면 뭔가 숨겨진 뜻을 알 줄 알았어.”
“요새 번역 어플도 잘 나오니까 그걸 활용하지 그래.”
“에이. 어플보다 단군대생이 믿음직하지.”
멤버들의 대화 중에 나오는 학교 이름을 듣고 나는 뒤돌아 물었다.
“준해 단군대 다녀?”
멤버 학적사항조차 모르던 나……. 단군대학교라면 서울 소재 대학교 중에서도 꽤 명문대였다.
“네. 준해가 공부는 진짜 잘해요.”
“똑똑이.”
멤버들은 진짜 친동생을 자랑하듯이 뿌듯한 표정이었다.
우형이 준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자 다른 두 사람도 손을 뻗어 같이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 중간에 서 있는 준해는 말리기도 귀찮은지 포기한 표정이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연습생이었을 텐데.’
준해는 18살에 모노크롬으로 데뷔했으니 대학은 그 후에 입학한 것이었다.
연습생 기간까지 치면 공부할 시간은 더 없었을 테고.
몰랐는데 보통 머리는 아니었나 보다.
“나 영문학과도 아닌데 자꾸 나한테 물어보지 마.”
“우리 중에서 제일 최근에 수능 봤잖아. 이 형은 영어를 놓은 지 몇 년 됐단 말이야.”
“수능이고 뭐고. 나도 이제 졸업반이거든?! 수능 본 게 몇 년 전인데.”
“준해가 벌써 졸업반이야? 우리 애가 이렇게 컸다.”
준해가 무슨 말을 해도 막내 우쭈쭈로 돌아오니 먹혀들지를 않았다.
막내 준해를 중심으로 형들이 치대는 상황은 식당에 가서도 이어졌다.
직원들끼리, 멤버들끼리 한 테이블씩 차지하고 앉아 있으니 자연스레 멤버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나 미디엄 레어로. 수프 너무 안 뜨겁게, 셰이크에 우유 들어가면 많이, 얼음은 80퍼만 넣어달라고 주문해 주라. 감자튀김에 치즈 얼마나 올라가는지도 물어봐 주면 안 되냐?”
“아, 대충 먹어.”
“어떻게 대충 먹으라고 할 수가 있어!”
출장에는 영어 소통을 담당할 글로벌사업부문 직원이 동행한 상태였다.
바로 옆 테이블이니 같이 주문해도 되는데 한이는 굳이 준해에게 요청 사항을 늘어놓으며 주문을 맡겼다.
귀찮다는 표정의 준해는 그래도 고분고분 멤버들의 주문을 취합해 조금 더듬으면서도 식당 직원에게 잘 전달했다.
일부러인지 한이의 요청 사항은 반 정도밖에 전달이 안 됐지만.
한 테이블에 모여 앉은 멤버들은 작은 캠코더로 자연스러운 모습을 촬영하기도 했다.
지금은 재민이 빠져 있어서 영상을 공개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전후 사정 설명 없이 네 명뿐인 영상이 업로드되면 팬들은 또 불안해할 테니까.
‘이 영상을 올리려면 재민이가 댄스 대회 나간 것까지 설명해야 하나?’
모노크롬 멤버가 아니라 팀 미로의 팀원으로서 참가하는 것이라 그와 관련된 부분은 뉴마가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이건 뭐…… 나중에 쓰게 된다면 당사자랑 말해 보고.
내 생각이 업무적인 부분에 가 있는 동안 멤버들은 자기들끼리 신나 보였다.
서로 장난치는 모습이 퍽 익숙해 보이는 것이 평소에도 이렇게 시시덕대는 게 일상인 모양이었다.
같이 지내온 세월이 있어서인지 멤버들끼리 정말 친형제처럼 잘 맞았다.
식사를 마치고는 산책 겸, 인도가 넓게 깔린 상점가를 걸었다.
“아하핰! 형 얼굴로 이 셔츠 살릴 수 있을까?”
한이가 걷다가 뭔가 발견했는지 웃으면서 해랑을 끌고 옆으로 빠졌다.
그리곤 한 상점에서 온갖 동물 얼굴이 크게 박힌 셔츠를 해랑의 얼굴 아래로 가져다 댔다.
“……왜 이게 잘 어울리지.”
“뭘 바라는 건데.”
“아니. 이렇게 보니까 옷이 이쁘네.”
한이는 크게 실망한 얼굴로 옷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내 눈으로 봐도 아무나 쉽게 소화하지 못할 옷이었는데. 이게 바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란 것인가.
저런 모습을 보니 풍경과 분위기만 즐기던 내 눈에도 옷가게의 옷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누가 입을지 상상하면서 구경하면 재밌는 법이지!’
좀 더 세세하게 거리의 가게를 둘러보다 보니 눈에 들어오는 옷이 있었다.
“한이는 이거 잘 어울리겠다.”
내가 한이를 지목하자 그는 자기가 아까 장난쳤던 것처럼 이상한 옷은 아니겠지 하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내가 말한 옷이 멀쩡한, 그것도 정말로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옷이라 “오~.” 하며 관심을 보였다.
“입어볼래? 내가 살게.”
“사주신다고요?”
모르니. 나 대표 딸이야.
난 대답 대신 웃으며 옷걸이에서 옷을 꺼내 내밀었다.
내가 고른 것은 티셔츠 위에 걸칠 만한 넉넉한 사이즈의 데님 셔츠였다.
갑작스러운 내 요구에 셔츠를 걸친 한이는 생각만큼이나 잘 어울렸다. 딱 현실에 없는 이상적인 대학 선배 스타일.
‘응. 마음에 들어. 결제.’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이건 딱 준해 스타일이다. 이건 해랑이 입어보면 괜찮겠는데. 이건 우형이 분위기랑 잘 어울려. 이건 재민이 입혀 보고 싶은데 하필 없네. 그냥 사갈까?”
난 멤버들을 이끌고 여기저기를 기웃대면서 본격적인 쇼핑을 즐겼다.
멤버들은 예상치 못한 내 옷 선물에 얼떨떨해하면서도, 함께 리액션을 보이며 구경했다.
“저 이런 스타일은 안 입어 봤는데.”
“오. 근데 형 잘 어울려.”
나의 찰떡같은 코디가 어떠냐.
내 스타일링 실력과는 별개로 다들 길쭉길쭉하니 뭘 입혀도 태가 살았다.
그래서 난 더욱 신이 나서 이 옷 저 옷을 구경했다.
이것도 잘 어울릴 것 같고, 저것도. 어머, 이건 사야 해!
“이사님. 모자는 아까도 샀…….”
“투자야, 투자.”
내가 거침없이 카드를 긁을수록 멤버들은 점점 말려야 하나 싶은 표정으로 변했다.
어차피 지금 카드 값으로 나갈 돈은 내가 5년간 힘들게 회사에서 버티면서 저축한 돈이 아니었다.
‘그 고생 하며 모은 돈이었으면 이렇게 펑펑 못 썼지.’
어떻게 설정된 건진 몰라도 이 세계의 신주인에게 배정되어 있던 금액과 월급이었다.
게임은 내게 힘든 상황을 던지는 한편 좋은 지원을 해 주기도 했으니까. 갑자기 얻게 된 내 집처럼.
‘그러고 보니 팬들 사이에서 뉴마 직원들 월급을 사이버 머니로 받으란 소리가 있었던 것 같은데.’
게임 세계관 속에 있는 내가 받는 월급도 사이버 머니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튼 내가 번 돈이 아니다 보니, 현실 돈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아서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탕진할 수 있었다.
게임에서나 하던 스타일링을 현실로, 실시간으로 하고 있으니 기분이 또 색달랐다.
쇼핑백이 쌓일수록 내 마음의 만족도도 함께 쌓여갔다.
정말이지, 너무 재밌어!
***
LA의 거리를 한 차례 돌고 후련하게 호텔로 돌아왔을 땐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 시각이었다.
한참 걸어 다녔으니 나는 다리도 쉴 겸 객실 발코니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직원들과 멤버들의 객실은 거의 2인, 3인실로 잡아둬서 나는 윤희와 함께 객실을 사용했다.
“출장 이렇게 즐기시는 분은 처음 봤어요.”
“출장 말고 관광이라고 쳐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의 업무는 뮤비 촬영부터가 시작이니, 그전까지는 출장이라고 하기엔 조금 모호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니 관광이란 말도 틀린 건 아니다.
윤희도 가벼운 차림으로 갈아입고 내 맞은편에 앉았다.
평소 회사에서 보던 모습과는 다르게 편한 차림으로 마주 앉아 있으니 정말 여행 온 기분이었다.
그렇게 조용히 여유를 즐기고 있는데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려 왔다.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보니 멤버들의 객실이 있는 쪽이었다.
‘기타 케이스까지 메고 오더니.’
누구 건지는 몰라도 준해와 우형이 번갈아 가면서 케이스를 메고 이동하던 것이 생각났다.
아마 객실에서 기타를 치는 소리가 열어둔 발코니 문을 통해 들려오는 모양이었다.
같은 부분을 반복하기도 하고, 멜로디가 조금씩 바뀌기도 하는 것을 봐선 또 작곡에 몰두하는 것 같았다.
해외로 나온 이유 중 하나가 색다른 분위기 속에서 영감을 받을 수 있길 바라서였는데, 도움이 되었을까.
“하아~. 청춘이다…….”
나는 다리를 쭉 펴고 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 기타 소리를 즐겼다.
***
팀 미로는 대회 전까지 임시로 연습실을 빌려 그곳에서 연습을 진행했다.
LA에 온 지 2일차. 나는 멤버들과 함께 연습실을 찾았다.
한창 연습하던 중이었는지 땀을 흘리던 미로 팀원들은 우리가 찾아온 김에 쉬는 시간을 가졌다.
사 들고 간 디저트와 음료를 내려놓자 환영이 이어졌다.
“와! 마침 당 떨어졌는데 잘 먹을게요.”
“쩨미 덕분에 호강한다.”
멤버들이 나눠 들고 온 간식은 한 번에 다 먹지 못할 정도로 넉넉하고 종류도 다양했다.
재민을 잠시 맡긴 학부모가 된 기분으로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커서, 나는 또 소소하게 탕진을 했더란다.
미로 팀원들이 “이게 회사의 자본이구나.” 하며 얘기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좋은 점수를 받은 거겠지?’
……그런데 왜 한편으론 양심에 찔릴까.
미로 팀원들은 재민이 이전에 뉴마에서 얼마나 수난을 당했는지 정확히 모르는 듯했다.
하긴, 알았으면 웃으며 인사할 수나 있었을까.
하루 떨어졌다가 만났다고 멤버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재민의 얼굴을 보니 나는 또 혼자 짠한 마음이 들었다.
각자 편한 자리에 아무렇게나 둘러앉은 팀원들은 모노크롬 멤버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와. 피지컬이 장난 아니네.”
“이 형이 우리 팀 메인 댄서야.”
“오~.”
세계 대회에 나가는 댄스팀 앞에서 메인 댄서로 소개된 해랑은 표정이 오묘해졌다.
“이제 네가 메인 댄서지.”
“그럼 나 메인 래퍼도.”
재민이 메인 래퍼 자리를 넘보자 해랑이 말없이 시선으로 응수했다.
“이쪽이 메인 래퍼야?”
“응. 해랑 형, 내가 전에 랩도 배웠다고 했잖아. 그게 이 형이거든?”
“에이, 난 잠깐 겉핥기로만 한 거고.”
재민 옆에 앉아 있던 팀원 또한 진짜 래퍼가 나타나니 랩 한다고 말하기가 쑥스러운 듯 얼굴을 가렸다.
“이참에 랩 배틀 한번…….” 하며 운을 띄우려던 재민은 두 사람의 험한 시선을 받고는 장난을 적당히 끊고 입을 다물었다.
화기애애한 팀 분위기 덕분에 모노크롬 멤버들도 자연스럽게 팀원들 사이에 녹아들 수 있었다.
연습실인 데다가 춤추는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인지, 자연스럽게 모노크롬 멤버들의 커버 댄스 시연으로 이어졌다.
새 앨범 타이틀 안무는 이미 나와 있었지만 아직 발매되지도 않은 곡 안무를 추기는 좀 그랬으니까.
‘이런 건 언제 연습했대.’
최근 나온 모노크롬의 앨범들은 음악방송 활동이 거의 없었고, 따라서 안무도 따로 나온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멤버들이 맨날 연습실에 있던 이유.
회사의 지원이 없으니 자기들끼리 영상을 보면서 독학했던 것이다.
멤버들이 춤추는 것을 보며 나는 또다시 혼자만의 죄책감에 빠졌다.
“사람들이 아이돌이라고 무시하고 그러는데 진짜 만능캐라니까.”
다행히 전문 댄스팀인 팀원들의 눈에도 나쁘지 않았던 듯 호평이 터져 나왔다.
쉬다가도 춤 얘기만 나오면 몸이 근질거리는지 휴식 중이던 팀원들은 어느새 일어나 멤버들과 섞여서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이렇게 돌아서, 이렇게 해 볼 수 있어요?”
“이렇게요?”
“이거 봐. 팔다리가 길쭉하니까 딱 느낌이 나오잖아.”
“우리 성장판은 진즉 닫혔는데 어떡하냐?”
“그건 키가 문제가 아니라 얼굴이 문제인 것 같다.”
“요새 TV 보면 이런 안무 많던데.”
“아, 그건 다리 중심을 이쪽으로 해서.”
나는 통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다들 자기들끼리 아는 얘기를 신나게 하기 시작했다.
미로 팀원들은 비슷한 듯 결이 다른 아이돌 안무에도 관심을 가졌다.
어쩌다 보니 거의 유사 댄스 트레이닝 시간이 펼쳐졌다.
단장 부부는 그런 팀원들과 멤버들을 지켜보며 얘기를 나눴다.
“재민이 팀이라 그런지 다들 잘하네.”
“쩨미는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재능 있었지.”
네. 그 재능을 못 살린 게 이 회사입니다.
그 생각을 하다 보니 나는 또 머릿속에 다른 발상이 떠올랐다.
“……혹시 아이돌 안무 시안도 가능하세요?”
내가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꺼내는지 두 사람은 대충 눈치챈 듯했다.
“시안은 아니고 트레이닝은 해 봤는데…….”
“전 예전에 여자 아이돌 안무만.”
재민의 재능을 꽃피워준 게 이들이라면.
“저, 단장님들 연락처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