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뉴레인은 바로 옆 건물이니 차를 타고 갈 것도 없이 그냥 걸어가면 됐다.
아이리스 대형 광고가 걸려있는 번쩍거리는 건물. 첫 출근 날엔 그리도 비교되어 보이던 그 건물에 드디어 입성한다.
최 비서의 안내를 받아 올라가니, 나를 초대한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뉴레인 허용석 기획실장입니다.”
“안녕하세요. 얘기 많이 들었어요.”
뻥이었다. 이 세상에 온 지 약 이 주밖에 안 지났는데 무슨 얘길 들었겠는가.
그래도 비즈니스 모드란 건 이런 거다. 나는 사회생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진작에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보시다시피 경황이 없었습니다.”
“저도 회사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서요.”
허 실장은 경황이 없었다며 직원들이 있는 사무실을 가리켰다.
뉴마에 처음 들어섰을 땐 우중충한 인상을 받았는데, 뉴레인은 아직 정리 덜 된 짐들이 쌓여있긴 해도 밝아 보였다.
‘이 사람들이 이전에 모노크롬이랑 일하던 사람들이구나.’
모노크롬 입장에선 알고 지내던 직원들 반절이 뚝 떨어져 나간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입맛이 썼다.
이 세상에 떨어져선 아이리스부터 찾은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이제 조금 부대꼈다고 같은 편이란 느낌, 함께 서 있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으니까.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새로 오실 분이 대표님 따님이라기에 직원들 사이에서 소소하게 화제였습니다. 이런 아름다우신 따님이 있는 줄 몰랐거든요.”
나도 놀랐어요. 갑자기 나보고 딸이라길래.
“혹시 관련 업종에서 일하셨습니까? 이번에 새로 홈페이지에 걸린 사진 잘 봤습니다. 안목이 훌륭하시더군요.”
“일을 한 건 아니지만…… 대충 보고 들은 건 많죠.”
게임에서 말이지.
이번 모노크롬의 새 프로필 사진에 대한 외부 반응은 물론 나도 확인했다.
특히나 뷰이라이브에서 해랑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던 덕분에 기대감이 응축된 것인지 팬들 사이에선 폭발적인 반응이 일었다.
만족스러운 촬영에 만족스러운 결과물. 반응 또한 만족스러웠다. 덕분에 조금은 자신감이 상승한 상태였다.
허 실장도 내 말을 듣곤 끄덕이며 웃었다.
“하하. 덕분에 회사의 미래가 기대됩니다. 그럼, 가실까요?”
잠시 인사를 나눈 후에는 회사 소개 시간이었다.
어떤 팀이 있고, 어떤 일을 한다는 등. 뉴마 엔터테인먼트와는 조금 다른 구조라 구경만 다녀도 참고가 되었다.
그러나 내가 기대한 것은 이게 아니지.
회사를 한 바퀴 돌고 드디어 연습실에 있는 층에 도착했다. 방음이 되었지만 작은 노랫소리는 흘러나왔다.
‘이 안에 아이리스 멤버들이 있단 거지.’
팬으로서 오래 좋아한 연예인을 영접하는 것처럼 떨리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허 실장이 연습실의 문을 여니 스태프들이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지금은 안무 영상 촬영 중이라 조금 어수선합니다.”
연습실이란 건 원래 이렇게 시끌벅적한 곳이었구나.
‘모노크롬은 대개 다섯 명만 덩그러니 있던데…….’
구경할수록 왜 자꾸 뉴마랑 비교가 될까. 크흡.
“여기! 도윤이 틀렸대요~.”
“이건 내가 맞는 건데?!”
“반 박자 빠르잖아. 따따 따 따따. 이렇게 들어가야 한다니까?”
한구석에서 여자애들이 꺄르르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고에 있다가 여고로 체험 온 교생이 된 기분이었다.
허 실장이 옆에 있던 스태프 한 명에게 얘기하자 그는 모여있는 소녀 무리에게로 다가갔다.
모여있던 여자아이들은 그제야 문 앞에 있는 우리를 알아챈 듯 뒤돌아 인사했다.
“실장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뉴마 엔터테인먼트에 새로 오신 신주인 이사님이시다. 인사드려.”
활발하게 인사한 아이들은 그 말에 일렬로 쭈르륵 서고, 한 명이 “둘, 셋.” 하더니.
“Your rainbow! 아이리스입니다!”
하면서 인사하는 것이 아닌가!
‘허억! 진짜 아이리스야!’
다들 활동하기 편한 사복을 입고 있었다.
게임에서 내가 스타일링하는 의상들은 대개 무대의상이었다. 그래서 이런 프리한 모습은 나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너무…… 너무 귀엽다!’
데뷔한 후로 연신 자체 최고 성적을 갈아치우며 승승장구할 만한 비주얼들이었다.
멤버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허 실장의 스태프 소개가 이어졌으나 사실 그의 목소리는 한 귀로 들어와서 한 귀로 흘러나갔다.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누는 와중에도 내 정신의 반쯤은 옆에서 휴식을 취하는 아이리스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렇게 스태프들과의 인사도 끝나자,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기다리고 있던 멤버 한 명이 다가왔다.
“이사님. 아이리스 리더, 레드입니다!”
높이 묶은 포니테일을 흔들며 다가오는 멤버, 레드였다.
‘내가 어떻게 못 알아보겠어.’
캐릭터로 숱하게 봐온 얼굴이다. 누가 누군지는 거의 바로 구별할 수 있었다.
“저희 이번에 새 앨범이 나왔는데 꼭 한번 들어주세요!”
레드가 활기차게 말하며 품에 안고 있던 것을 내게 내밀었다.
받아보니 각 멤버들의 사인과 ‘아이리스 많이 사랑해주세요♡’란 문구가 적혀 있는 사인 CD였다.
그런데 앨범 타이틀을 보니 낯이 익었다.
‘이거 내가 게임에서 기획했던 앨범이잖아?!’
게임 내에서도 앨범 제작엔 시간이 걸렸다. 제작 완료 전에 이 세상에 휘말리는 바람에 결과를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이렇게 나왔구나.
감개무량한 기분에 빠져있는데, 레드가 어째서인지 힐끔힐끔 눈동자를 굴리며 쳐다봤다.
내가 아니라 내 뒤를.
‘그러고 보니…….’
게임에 왜 이런 요소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마이 엔터에선 랜덤으로 찌라시, 즉 뒷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 찌라시가 돌기 시작하면 일정 기간 이벤트의 성공률이 낮아졌다.
‘그리고 그 찌라시의 주인공이 주로 레드였지.’
어이없는 것이 그 내용은 연애까지도 가지 못하고, 일방적 호감이었다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래도 연애에 각박한 연예계 아닌가. 텍스트로 보면 애교 수준인 찌라시도 게임 진행에 제법 방해되었다.
한두 번이면 모르겠는데, 그게 한 세 번쯤 반복되어서 거의 연례행사였다.
‘얘가. 얘가.’
레드의 시선 끝에 있는 건 최 비서였다.
최 비서가 일반인치곤 눈에 띄긴 하지만, 표정에 너무 드러나는 거 아냐?!
이러니까 자꾸 소문이 돌지.
“꼭 들어볼게요.”
내가 얼마나 애정 담아 키운 아이들인데, 연례행사 이벤트가 또 열리게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나는 최 비서의 앞을 살짝 가리고 서며 싱긋 웃었다.
그녀를 위해 비즈니스 모드로 돌아갈 수밖에.
레드는 몰래 훔쳐보던 것을 들켜서인지, 뺨을 붉히며 인사하고 후다닥 돌아갔다.
‘연예계에 있다 보면 잘생긴 애들 숱하게 볼 텐데 어쩌려고…….’
이렇게 이쁜 애가 연애도 못 하는 환경에서 금사빠라니.
걱정한다고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소속사가 잘해주길 바라야지.
직원들과 대화를 마저 나누는 동안 멤버들은 휴식이 끝났는지 다시 대형으로 돌아가 섰다.
‘와아.’
전주가 시작하고, 방금까지만 해도 아무렇게나 앉아 쉬던 아이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나비처럼 가벼워 보이는 동작이었지만 다른 각도에서 지켜보니 움직임이 웬만한 운동보다 거셌다.
멤버들은 노래가 끝나고도 잠시 그대로 표정과 포즈를 유지하며 대기하다가, 촬영이 끝난 것을 확인하고 바로 숨을 골랐다.
“괜찮게 보셨습니까?”
“와. 진짜 프로는 다르네요.”
나는 작게 박수를 쳤다.
이걸 본 것만으로도 오늘 뉴레인에 온 보람이 있었다. 활동 기간에 초대해 준 허 실장에게 마음속으로 감사를 건넸다.
다들 바쁘게 움직이는지라 방해되지 않도록, 우리는 연습실을 나와 회의실에 앉았다.
“저희가 지금은 아이리스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님의 안목으로 보시기엔 어떤지 의견을 여쭤봐도 될까요?”
뭐, 아이리스 영상 보는 것 정도야 나한텐 일도 아니니까.
내가 흔쾌히 수락하자, 허 실장의 옆에 있던 팀장이란 사람이 태블릿으로 무대 영상들을 짤막하게 보여줬다.
그리고 굳이 내게 의견을 물어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이고. 얘한테 이런 건 잘 안 어울리는데.’
뉴레인이 뉴마 엔터테인먼트의 산하 레이블이어서인지, 내 핸드폰 속 마이 엔터에는 아이리스의 설정창도 남아 있었다.
내가 관리하는 모노크롬과 달리, 마이 엔터 속 아이리스는 볼 때마다 의상이 자동으로 알아서 바뀌었다.
그러나 역시 내 손을 벗어났기 때문일까, 내가 꾸미던 스타일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지금 영상으로 확인해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단 하나, 신곡 첫 무대였다는 연말 무대는 내가 이곳으로 오기 전 마지막으로 골라서 저장해둔 의상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활동 영상들에선 하나씩 위화감이 느껴졌다.
‘훈수를 해도 되는 건가?’
잠시 고민했지만 윤희가 사직서를 내밀던 그날이 생각났다.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게 확실히 큰 도움이 됐다.
“있는 그대로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러면 저희야 감사하죠.”
“음……. 일단 오렌지. 예명 따라서 오렌지색 블러셔나 코랄 계열 립을 자주 쓰는 것 같은데 얘는 오렌지 섞이지 않은 핑크가 잘 어울려요. <레인보우> 앨범에선 헤어 색상에 맞추느라 화장이 코랄 위주긴 했는데 그땐 피부 톤도 조금 다르게 정돈했었거든요. 다른 앨범이랑 비교해 보시면 아실 거예요. 그리고 그린이는…….”
나는 보이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의견을 줄줄 읊었다.
보고 있는 영상에서 느껴지는 것만 말한 건데 생각보다 길어졌나 보다.
이렇게 세세히 말할 줄은 몰랐는지 허 실장이 입을 떡 벌리고 나를 쳐다봤다.
옆에 있던 팀장도 같은 표정이었지만, 바로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받아 적었다.
적는 걸 보면 도움이 됐단 거겠지……?
“아이리스에 관해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십니까?”
“……더, 덕후 아닌데요?”
나는 제 발 저려 이상한 변명을 내뱉고 말았다.
***
이번 뉴레인 방문은 쌍방에게 좋았던 시간이었다.
나는 사인 앨범에 이어 다른 앨범까지 받아왔다.
다시 옆 건물인 뉴마로 돌아오는 길. 난 기분이 좋아서 방글방글 웃으며 앨범이 든 쇼핑백을 안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었다.
그러자 뒤에서 최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전부터 아이리스를 좋아하셨습니까?”
일 외적인 얘기는 하지 않던 최 비서가 웬일로 사담을 꺼냈다.
예전이라니. 아마 내가 이사로 오기 전을 말하는 거겠지?
좋아한 건 맞는데 팬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의미로 좋아했다고 해야 하나, 뭐라고 해야 하나.
“그……럴걸?”
“부임하신 첫날에 아이리스를 찾으시기에, 사실은 조금 놀랐습니다. 대표님은…… 개인적으로 아티스트를 찾으신 적이 한 번도 없으셔서요.”
최 비서는 내가 모르는 대표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니, 이건 플레이어 시절의 내 이야기였다.
‘……당연히 개인적으로 찾을 리가 없지.’
멤버들과 직접 대화를 나눠보고서야 깨달았다.
내가 일방적으로 그들을 봐왔던 것은 이 세계관 내의 대표로서가 아니라, 스마트폰 화면 밖의 나로서였다는 것을.
그래서 처음엔 당연히 회사와 멤버들 간 대화나 교류가 있었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실상은 시스템이라는 거대한 벽이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는데.
“이사님이 오셔서…… 저희도 조금 바뀌려는 것 같습니다.”
눈 쌓인 길. 햇빛을 반사해 더욱 반짝이는 건물. 그런 배경 앞에 서 있는 최 비서.
비서 캐릭터였던 그를 볼 때면 이곳이 게임 속 세계임을 자꾸 상기하게 되어서, 어쩐지 비인간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었는데.
오늘따라 그가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물론 인간이지. 인간인데…….’
멤버들을 보고 자아가 없는 게임 캐릭터가 아닐까 의심했던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그에게도 거리감을 두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는 것에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나도 그에게 웃어 보이며 화답했다.
***
똑똑.
누군가 이사실 문을 두드렸다.
똑. 똑. 하고 두드리는 소리마저 차분한 최 비서의 노크 소리가 아닌 것을 보니 다른 이였다.
예상대로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우형이었다.
“이사님,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
“응. 왜?”
시간이야 많았다. 받아온 사인 앨범에 담긴 포토북을 구경하던 중이었으니까.
우형은 할 말이 있어 가까이 다가왔다가 내 책상에 뭐가 있는지 본 모양이었다.
순간 그의 눈썹 끝이 슬쩍 내려갔다.
마치 강아지처럼 꼬리와 귀가 있었다면 추욱 내려갔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다른 집 애들 이뻐하다 온 거 들킨 기분이네.’
나는 헛기침을 하고 앨범들을 구석으로 치우며 말했다.
“크흠. 무, 무슨 일인데?”
“이전에 말씀드린 자작곡 가이드본이 완성됐는데 들어주셨으면 해서…….”
얼마 전에 그가 작업했다는 자작곡을 한번 들려달라고 했었다.
제법 예전부터 준비해 온 듯해서 바로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우형은 좀 더 다듬어서 들려드리겠다며 또 결연한 표정으로 작업실에 박혀 있었더란다.
그리고 시일이 조금 지나 드디어 곡이 1차로 완성된 모양이었다.
“들어보자.”
내가 아이리스의 앨범을 꼼꼼히 구경하던 것은 내 사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제는 모노크롬도 본격적으로 이런 앨범을 준비해야 했으니까.
다섯 명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그런 앨범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