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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죽음…… 그러나 남겨지는 인연 (32/32)

2. 죽음…… 그러나 남겨지는 인연

춘화(春花)가 만발한 벌판을 금청청이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매일도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렸다.

매일도는 금청청의 경공이 어느새 자신을 능가하고 있음을 알았다.

금사진이 남긴 비급을 금청청이 참오하기 시작한 것이 겨우 두 달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느새 이 정도의 경지라니!' 

자신도 더 노력하지 않으면 금청청에게 뒤진다는 위기감으로 매일도는  얼굴을 굳

히지 않을 수 없었다.

매일도가 금청청을 보고 말했다.

"방주(幇主)! 정말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 것이 확실한가?"

금청청이 이미 일방의 방주가 되었으니 아무리 사매라 해도 함부로  말할 수 없었

다.

금청청이 다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말을 하면서도 그녀의 신형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예. 서두르지 않으면 난 훗날 엽평을 볼 면목이 없게 돼요."

금청청은 금사진의 서신을 본 후, 비로소  엽혼을 이용했던 사람이 금사진임을 알

았다.

엽혼이 그들 부녀에게 빚을 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엽혼에게 갚을 빚이 

있었다.

엽혼이 이미 죽은 지금! 

금청청은 엽혼이 남긴 사랑했던 사람들이라도 돌보고자 했다.

매일도는 아침에 찾아왔다.

그는 비응방으로 오던 길에 소화(小花)가 굳은 표정으로 엽혼의 묘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 말을 듣자마자 금청청은 표정이 변하여 이처럼 달려가는 것이다.

 * * * 

무덤은 너무나 초라했다.

소화는 무덤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 무덤은 엽혼의 것이기는 했지만, 무덤 안엔 엽혼의 시신은 없었다.

자신에게 마지막 잠력마저 모두 몰아 주고 그는 시신조차 남기지 못한 채 재가 되

어 흩어졌다.

지금 소화가 울고 있는 무덤은  엽혼이 생전에 쓰던 물건들을  모아 만든 가묘(假

廟)였다.

"그 동안 많이 외로우셨죠?"

소화는 이제서야 겨우 백회의 남은 일을 모두 처리했다.

그리고 술 한 병과 잔 두 개를 들고서 여기 오른 것이다.

쪼르륵! 

술이 두 개의 취옥배(聚玉盃)를 가득 채웠다.

소화는 한 잔을 엽혼의 무덤 위에 두고 나머지 한 잔은 자신이 마셨다.

술은 썼지만 그녀의 마음은 포근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엽혼이 건네는 술잔을 받은 듯한 환상을 느꼈다.

그녀가 미미하게 웃었다.

"우리의 첫날밤은 합환주(合歡酒)조차 마시지 못하였으니  오늘 이 술로써 대신하

도록 해요."

그들이 가지지 못했던 것은 합환주뿐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들이 가졌던 초야(初夜)조차도 밤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소화의 마음은 누구보다도 행복했다.

그녀와 엽혼은 평생 자신을 위해  살지 못했지만 그 순간만은  자신들의 시간이었

다.

바위 틈! 

 그 어둠 속! 

누구도 그 시간을 그들에게서 뺏지는 못할 것이다.

또한 앞으로도 영원히 그들은 함께 있을 것이다.

소화는 엽혼이 남긴 술잔을 들어 무덤 위에 뿌렸다.

"이제 제가 갈게요."

품에서 작은 소도를 꺼내 들었다.

칼의 광채는 비록 섬뜩했지만 소화의 마음은 평화로웠다.

이제 이 칼날이 가슴을 파고들면 소화는 엽혼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두 손이 소도(小刀)를 잡고 위로 세워졌다.

이윽고 그녀가 두 손을 힘차게 당기자 소도가 허공을 가르며 빛을 뿌렸다.

그 빛과 무덤 위로 소화는 엽혼의 모습을 뚜렷이 보았다.

'그러지 마, 소화!' 

"안 돼요!"

소리는 처음 십 장 밖에서 들려 왔다. 

그리고 소리보다도 먼저 날아온 비도(飛刀)는 소화가 든 소도를 튕겨 내었다.

탕! 

하늘을 배경으로 호선을 그리는 자신의 소도를 보며 소화는 눈을 부릅떴다.

"왜 방해하는 거죠? 당신이 왜!"

금청청은 그제서야 땅에 내려서며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이래서는 안 돼요, 소화 낭자! 아니, 엽 부인!"

그녀는 엽혼의 가묘를 가리키며 말했다.

"엽혼 대협께서도 결코 부인의 죽음을 바라지 않을 거예요."

소화가 눈물을 뿌리며 외쳤다.

"당신이 왜 간섭하지요? 난 그분에게 오직  해악만을 끼쳤는데, 그분은 마지막 순

간 나를 살려 주셨어요. 내가 어떻게 그분 없이 살 수 있겠어요. 말리지 말아요."

소화는 절규했다.

이어지는 말은 혼잣말인 듯 잦아들었다.

"그분은 혼자 외로우실 것이니…… 내가 가겠어요."

금청청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다만 소화의 어깨를 안아 위로해 주고 싶었다.

소화는 금청청의 손을 뿌리치며 다시 외쳤다.

"이러지 말아요! 당신 가문과의 은원이 모두 끝났으니 제발 간섭하지…… 우욱!"

소화가 말을 잇다 말고 구역질을 했다. 

 속에 든 것을 모두 토해 내려는 듯 심한 구역질! 

금청청이 놀라 말했다.

"설마……?"

소화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구역질은 처음이었다.

금청청이 기뻐하며 말했다.

"입덧! 입덧인가요, 엽 부인?"

소화는 멍하니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태기(胎氣)라니! 

단 한 번의 인연에 하늘이 아이를 점지하시다니! 

하늘 한구석에 엽혼의 모습이 보였다.

'당신께 가지 말란 뜻인가요?' 

소화의 마음속 물음에 구름 속에 있던 엽혼이 답했다.

'아직! 아직이오. 비록 나는 죽었지만 새로운 생명으로 이어지니 우리의 사랑은 끝

난 것이 아니라오!' 

엽혼은 웃고 있었다.

소화는 비로소 느꼈다.

엽혼은 죽었지만 그의 생명은 또다시 소화의 뱃속에서 이어졌 인간은 비록 죽지만 

생명은 영원히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과 생명의 속을 영원히  흘러가는 것은…… '사랑이야. 사랑은 영원히 

흘러간다.' 

따뜻한 봄바람이 불었다.

소화는 배를 쓰다듬으며 하늘을  보았다. 옆에서 소화를  보는 금청청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그러나 더 이상 슬픔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살며시 매일도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매일도의 차분한 손길이 금청청의 등을 따뜻하게 안아 왔다.

끝내면서…… 

원래 이 글은 무림천추, 곧 난지사(亂之詞)의 속편으로 나오게 될  이야기의 앞 부

분으로 계획되었다.

그러나 따로 떼어 놓아도 별 무리가 없고,  또한 속(續) 난지사, 즉 무림천추는 그 

시작부터가 이로부터 일 년 후이니 

따로이 두 개의 글로 분류하고 싶은 것은 본 저자의 욕심이었을까? 어쨌든 무림천

추는 형태가 난지사와는 많이 다르다.

내용은 무림의 장악을 꿈꾸는 비밀 조직인 풍림서(風林誓)의 음모와 힘! 그에 대항

하는 젊은 영웅들의 용기와 좌절, 그리고 굽히지 않는 기상이 주 내용이다.

대단한 효웅으로 난지사에 등장했던 심화절도 풍림서의  다섯 개의 외단(外團) 중 

한 외단의 단주에 불과하다.

풍림서란 절대의 세력에 맞서 싸울 영웅들은,  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난지사에

서 모습을 보였다.

무협(武俠)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만큼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  장르가 또 어디 있으랴? 상상  가능한 모든 

종류의 인간이 여기에 있고, 우리가 한번은  꿈꾸었을 사랑과 호기 넘치는 영웅의 

삶 또한 여기에 있다.

끝으로 하나만 더!

무림천추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물론 현실의 시대가 아니다.

천년 만에 한 번씩 찾아온다는 천년 흥륭기(興隆期)란 시대를 나름대로 가정했다.

과거를 돌이켜보자.

어쩌다 한 번, 너무 많은 영웅과 기재들이  한 시대에 태어난 시기는 분명히 있었

다.

사마중달은 능히 천하를 경륜할  재목이었지만, 제갈량이 한  시대에 있음에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말았다.

삼국지연의란 소설 속의 어쭙잖은 상상이었다고 무시해  버리는 우(愚)는 부디 범

하지 말자.

인간 세상의 일이 소설과 무어 그리 많이 다르던가? 다만 한 순간의 꿈이다.

장자의 꿈인지 나비의 꿈인지를 굳이 가릴 필요가 있는가? 신문 속에 나타난 억과 

조를 외치는 인생들이, 소설 속의 현실인지 현실 속의 소설인지, 당신은 구분이 가

는가? 

인생이 소설이고 소설이 인생이며, 모든 것이  다만 꿈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나는 오늘도 다만 무림 속 영웅들의 치열한 삶만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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