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29 장 혈조재현(血爪再現) (30/32)

제 29 장 혈조재현(血爪再現) 

지금은 비응방이 아주 바쁜 시기였다.

새로운 방주 사공두가 방주로 취임하는 날인 것이다.

이렇게 바쁜 때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해야  하다니…… 아주(阿珠)는 뾰로통해서 

입이 나왔지만 이들은 방의 귀하신 손님들이니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다.

진소백이 아주에게 다시 물었다.

"자, 들어 보거라. 네 이놈`─ 네가 감히, 어때 비슷하냐?"

아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예, 거의 비슷해졌어요. 하지만 조금 더 굵은 목소리셨어요."

"좋아, 다시 해보마."

진소백이 다시 목을 험험, 하고 가다듬더니 말했다.

"네 이놈. 네가 감히`─`, 어떠냐?"

아주가 손뼉을 치며 대답했다.

"똑같아요. 이젠 제가 들어도 분간하기 어렵겠어요."

섭수진도 옆에서 박수를 쳤다.

"대단하세요. 반나절 만에 해내시다니."

아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런데 왜 전 방주님의 목소리를 흉내내려고 하세요?"

진소백이 웃으며 대답했다.

"응, 그건 말이다…… 사공 방주님의 취임 때 깜짝  놀래켜 주려는 것이다. 그러니 

너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야 한다."

진소백이 품에서 구슬 노리개를 꺼냈다.

아주는 이제 열네 살이니 한창 이런 것을 갖고 싶어할 나이였다. "그리고 이건 네

가 고생했으니 내가 선물로 주는 거란다."

"아! 너무 예뻐요."

아주가 깡총거리며 뛰어가는 모습을 보며 진소백이 말했다.

"저 정도의 선물에 저렇게 기뻐할 수만 있다면 인간 세상에 무슨 풍파가 일겠소?"

* * * 

천응각(天鷹閣)! 

금사진의 거처(居處)였었다.

심화절은 방주가 되고 나서도 사양하며  끝내 거처를 옮기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계획된 행동이었음이 드러났다.

사공두는 그러지 않았다.

당당히 천응각의 집무실(執務室)로 들어갔다.

수하들이 모두 물러갔다.

사공두는 홀로 남게 되자, 집무실의 한쪽 벽으로 가서 섰다.

벽에는 천응이 백수(百獸)를 제압하는 모습이 생동감있게 그려져 있었다.

그는 지체없이 천응의 날카로운 발톱에 등을 찢기고 있는 사자의 두 눈을 눌렀다.

우우웅`─` 

미약한 기관음이 일며 벽의 한쪽이 서서히 열렸다.

사공두는 알고 있었다는 듯, 놀라지도 않고 지체없이 벽 속으로 들어갔다.

그르`─ 릉! 

사공두는 천천히 기관에 의해 빠져  나오는 돌로 된 서랍을,  희열에 들뜬 눈으로 

지켜보았다.

"흐흐, 내가 이날을 위해 얼마나 참았던가?  어차피 힘으로 비응방을 얻는다면 모

든 이권이 내게 돌아올 수 없다. 또한 앞으로의 무림 진출을 위해…… 흐흐."

무슨 소리인가? 

 사공두는 비응방의 충신이 아니었는가? 

"흑회를 만들어 놓고도 안심할 수 없었다.  멍청한 구자운 자식 때문에 틀어진 일

은 끝까지 꼬여 갔지."

흑회! 

그것을 사공두가 만들었다니.

사공두는 서랍 안의 서찰을 던져 버리고는 한 권의 책자만을 꺼냈다.

서찰의 표지는 이랬다.

<애녀(愛女) 금청청(金靑靑) 전(前).> 

그러나 사공두는 오직 책에만 관심이 있었다.

"흐흐, 그러나 나는 이제 비응방의 당당한 방주다. 사람들은  모두 나 사공두가 금

사진의 유일한 충신이라 

여기며 열혈대한으로 존경한다. 흐흐…… 밖으로 존경을 받고 안으로 실리(實利)를 

모으니 그 동안의 고생은 실로 보람이 있었다."

이럴 수가! 

 사공두가 가장 뒤에 숨은 원흉이었다니.

사공두는 금사진을 생각했다.

생각만으로도 그는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다.

아마 그를 속이기 위해 사공두가 썼던 노력이 흑회를 만들기 위해 들인 공보다 컸

으리라.

흑회야 간단했다.

풍운 진인의 부인인 용고(鏞姑)를 유혹하여,  자신의 성의 노예로 만든  뒤 약간의 

지원을 하자, 그녀는 존령으로서의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

무공에 자질이 뛰어난 고숭무를 꾀어 오 년간을 암흑동신공(暗黑銅身功)을 익히게 

하여 무력도 키웠다.

문제는 그 와중에 생긴 천령 구자운의 질투였다. 

 때문에 위험해진 흑회를 그는 과감히 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성공했다.

사공두에게는 아직 금사진이 남긴 백회가 있었다.

백회의 인물들은 모두 사공두를 금사진의 절대 충신으로 알고 있으니 그들을 다루

는 건 쉬웠다.

사공두는 책을 뒤적이며 다시 말했다.

책의 표지에는 '파천혈조(破天血爪) 총해(叢解)'란 글씨가 뚜렷했다.

"후후, 금사진은 죽어서도 모를 것이다.  그가 가장 믿었던 내가  배신자였다는 것

을!"

이때 어디선가 냉랭한 코웃음 소리와 더불어 사공두로서는 꿈에도 잊지 못할 음성

이 들려 왔다.

"흥! 천만에,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사공두는 전신의 피가 싸늘히 식어 감을 느꼈다.  이 목소리를 그가 어찌 잊으랴? 

비응혈조 금사진! 

사공두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바, 방주시오?"

"네가 감히 나를 속일 담량이 있었단 말이냐?"

사공두는 저절로 꺾이려는 두 무릎을 애써 폈다.

"누, 누가 장난치는 것이냐?"

사공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금사진의 목소리가 냉랭히 말을 받았다.

"네가 내 목소리도 못 알아듣다니. 흥! 내가 스스로 꾸민 죽음의 함정에서 빠져 나

오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진정 금사진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연무실의 함정이  자신이 스스로 꾸민 것임을  알겠는가? 

사공두는 급히 좌수에 공력을 실어 그에 대항하려 했다.

한데 기이했다.

전혀 공력이 모이지 않는 게 아닌가? 

금사진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흥! 네가 음마문의 도법을 익히기 위해 스스로 오른팔을 잘랐음도  알고 있다. 하

나 알고 있느냐? 잔혹마도조차 내게 감히 맞서지 못했다. 셋째, 감히 네가 나와 조

삼을 배반하고 백회의 뜻을 농락하다니…… 너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더냐?"

사공두가 부들부들 떨었다.

생전의 금사진의 모습을 기억했다.

하늘을 가르던 그의 혈조가 뇌리에 선명했다.

"네 공력은 이미 모이지  않을 것이다. 심화절이  오보산을 남기고 죽었으니 내가 

써먹어야지."

금사진의 목소리가 음산해졌다.

"난 기다렸다. 독이 해소되기를…… 후후! 이제  보여 주마, 내가 어째서 비응혈조

로 불렸는지."

목소리만 들려 오던 벽이 서서히 진동했다.

절세의 내공에 밀린 두꺼운  벽이 무너지려 하는 중임을  사공두(司空斗)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쿠앙! 

벽이 무너지면서 일어나는 바람에 혈포를 휘휘 날리는  저 낯익은 모습! 사공두는 

감히 대적하지 못했다.

그는 무너지는 벽 사이로 금사진의 혈포의 붉은빛이 보이자마자 달아나고 있었다.

비록 내공의 대부분을 잃었지만 사공두의 경공은 여전히 대단했다.

조용한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음마문(陰魔門)의 경공은 과연 일류군요!"

섭수진의 말에 금사진, 아니, 진소백이 대답했다.

"더 무서운 건 금사진이오. 이미 죽은 그의 목소리만으로도 사공두가 놀라 도망치

고 있으니 

생전의 그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지 않소?"

"하지만 그가 공력이 소실되는 와중이 아니었다면 도망가지는 않았을 거예요."

진소백도 동의했다.

"음마문의 무공도 만만한 것은  아니지. 아마 그의  공력이 온전했다면 우리는 꽤 

고생을 해야 했을 거요. 그리고 이 석실도 온전하지 못했겠지!"

진소백이 품에서 하나의 서찰을 꺼냈다.

"더불어 이 서찰의 신빙성도 의심을 받을 테고."

"사공두는 어디로 달아날까요?"

진소백이 잘라 말했다.

"백회의 총단으로 갈 거요.  그는 자신이 이미  백회를 완전히 장악했다고 생각할 

테니까."

진소백은 말과 함께 서찰을 바닥에 놓았다.

서찰은 사공두가 금사진의 의리를 잊지 못하여 도저히 비응방의  방주직을 수행할 

수 없다는 뜻을 절절이 적은 것이었다.

이 가짜 서찰이 발견되면 사람들은 사공두의 실종에 대한 의문을  가지지 않을 것

이다.

마음 같아선 그의 악업을 밝히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이것이 나았다.

이미 비응방 무사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으니, 굳이  사공두마저 악인임을 밝혀 

더 사기를 떨어뜨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 진소백의 생각이었다.

섭수진은 바닥에서 사공두가 떨어뜨린 서찰과  서책을 발견했 "어머, 이건 금청청

에게, 금 방주가 직접 쓴 글이에요."

그녀가 서찰과 비급을 집어 들었다.

서찰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사랑하는 나의 딸에게……> 

사공두는 열심히 달렸다.

금방이라도 그의 뒤통수에 금사진의 혈조가 떨어지면서 자신의 뇌수(腦髓)를 땅바

닥에 뿌릴 것 같았다.

조금의 여유라도 있었다면 지금 금사진이 쫓아오지 않음에 주의하고  이상함을 느

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극도의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조금씩, 그러나 꾸준하게 사라지고 있는 그의 공력은 그를 공포에 질리게 했다.

그는 악인이었다.

악인은 일단 불안을 느끼면 극도의 공포도 같이 느끼는 법이었  악인은 자신의 악

행을 잘 알기에 자신이 힘을 잃었을  때 남들도 자신에게 똑같은 행동을  할까 봐 

겁이 나는 것이다.

그는 눈에 익은 흰 의자가 보이자 안도의 숨을 쉬었다.

예전에 그는 저 의자에 앉아 자신에게 명령을 내렸었다.

하지만 이제 의자는 사공두 자신의 것이었다.

"따뜻한 술 한 병 내어  오고 주위의 경계를 최대한 강화하라.  어서 의원(醫員)도 

들이거라."

한바탕 고함을 지르자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사공두는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 * * 

"그런데 어떻게 사공두가 분면음마의 마지막 제자인 걸 알았어요?"

섭수진이 묻자 진소백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냉설에게 들었소."

"하지만 우리가 갔을 때 그는 이미 죽어 있었잖아요?"

"때로는 죽은 자도 말을 한다는 강호의 속담이 진실임을 모르시오? 조금만 생각한

다면 당신도 곧 알 수 있을 거요."

섭수진은 생각했다.

냉설이 쥐고 있던 머리카락! 

 고통을 못 참아 스스로 뽑았다고 여겼던 그 머리카락! "냉설은 가슴에 검을 관통

(貫通)당해 곧 죽었소.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고수였기 때문이었

지."

섭수진은 바로 알 수 있었다.

"가슴을 관통당하면 확실히 죽지만, 심한 고통을 오래 느끼며 죽지는 않아요!"

"그렇소. 그는 이미 우리를 보았소. 또한 당신이  아미옥녀임을 알고 있었으니…… 

그는 최후에 자신이 남긴 말을 우리가 반드시 알아줄 것으로 믿었을 게요."

머리카락! 

한 움큼이나 뽑혀 마치 대머리의 그것인 양 피부를 드러냈던 냉설(冷雪)의 머리! * 

* * 

사공두의 독두(禿頭)가 꿈틀거렸다.

한번 나갔던 수하는 돌아오지 않고, 의원도 오지 않았다.

화가 나 여러 번 외치자, 한 여인이 소반에 술과 잔을 들고 조용히 들어왔다.

기다리던 술이 왔지만, 사공두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여인의 얼굴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 너는?"

그녀는 소화였다.

사공두는 외치며 일어나려 했지만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사공두는 자신의 손과 발이 어느새 단단한 쇠줄에 감겨 있음을 느꼈다.

철컹! 

조삼이 엽혼을 상대로 썼던 의자! 

 그 의자를 지금 소화가 다시 사용했던 것이다.

사공두는 전신의 피가 식어 싸늘한 한기가 온몸을 채우는 것을 느꼈다.

지금 그의 처지는 일전의 엽혼과는 완전히 달랐다.

조삼은 일부러 엽혼이 달아날 수 있도록 취한 척했지만 소화는 그러지 않았다.

극도의 분노가 담긴 눈! 

 차가운 눈으로 사공두를 바라보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과연 당신이었군요…… 당신이  회주(會主)를 배신하다니,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요?"

사공두는 입을 떨었다. 극도의 놀라움! 

"네가 어찌 살아 있단 말이냐? 분명 조삼(曹三)과 더불어 죽었어야 정상인데……"

소화의 눈에 아픔이 서렸다. 

 조삼과 엽혼의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사흘 전이다.  그 동안 네가 오염시켰던 음마문의 주구들은 

모두 백회에서 제거되었다."

사공두가 절망하여 몸을 떨 때, 소화는 지풍을 날려 벽의 한쪽을 쳤다.

기이잉`─` 

천장에서부터 거대한 천이 서서히 내려왔다.

한 인물의 전신상이 그려진 천! 

천이 내려오며 전신상이 점점 드러났다.

"이제 음마문의 잔당으로는 네가 유일하게 남았다."

사공두는 그녀의 말을 들을 여가가 없었다.

그림! 

천장부터 바닥에 이르는 거대한 그림! 

그림의 한 쪽 손에는 핏빛을 띤 거대한 날이 달려 있었다.

전체적으로 손톱을 닮았다. 핏빛 손톱을.

두 눈에서 금방이라도 불길이 쏟아질 것 같은 생생한 그림! 사공두의 눈에 공포가 

어렸다.

"바, 방주!"

그림은 금사진이었다.

금사진이 내려오자 손에 달린 손톱 날도 따라서 내려왔다.

방향은 정확히 사공두의 머리를 향하니, 쇠줄에  전신이 묶인 사공두는 피할 수가 

없었다.

붉은 손톱! 

 파천혈조(破天血爪)! 

사공두는 금사진의 환영을 보았다.

금사진의 신형이 천응비(天鷹飛)로 허공을 날며, 손에서 펼쳐지는 파천혈조가 자신

의 두개골을 쪼개 오는 환상을! 

"우아악!"

머리가 쪼개지는 아픔 속에서 사공두는 비로소 알았다.

자신 때문에 죽었던 여인들의 한맺힌 눈에 담긴  뜻을! 그것은 원망이었고 후회였

으며 고통이었다.

이때까지 그는 오직 다른 사람의  고통만을 보며 살아 왔다.  그리고 이제야 겨우 

자신의 고통을 느꼈다.

고통은 끔찍했으며 또한 잔인했다.

사공두 자신의 삶처럼! 

사공두의 머리가 그림의 혈조에 의해 둘로 갈라졌다.

그의 머리에서 피가 떨어질 때, 소화의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졌다.

"회주님! 이제 직접 원한을 갚으셨으니 부디 편히 가세요."

사공두는 죽었다.

금사진의 혈조에 의해! 

소화는 드디어 자신에게 얽힌 모든 은혜와 원한을 갚았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 

한 사람에 대한 사랑만이 남았다.

소화는 밖으로 나왔다.

모든 원한을 갚고 바라보는 하늘은 이전과 변함이 없었다.

이것은 당연했지만 또한 이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하늘을 보는 그녀의 마음은 변해 있었다.

그녀는 한편으론 통쾌하였고, 한편으론 허탈했다.

하늘 한구석으로 엽혼의 모습이 보였다.

소화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곧 갈게요.' 

그녀가 지금 당장 엽혼을 따라 갈 수는 없었다.

목적이 달성되었으니 백회는 해산되어야 했다.

애초 금사진의 의도에도 이것이 합당했다.

하지만 조삼이 없는 지금, 누가 백회의 일을  처리하겠는가? 두 달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두 달만, 갑갑하시더라도 두 달만  더 기다려 주세요. 소화가 꼭  갈게요.' 하늘을 

가득 덮었던 구름이 서서히 걷혔다.

햇살이 땅을 비추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고 있었다.

아무리 긴 겨울이라도 반드시 지나기 마련이었고,  아무리 먼 봄이라도 반드시 오

고야 말았다.

파릇파릇한 새싹! 

곧 모든 벌판이 꽃으로 덮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소화는 엽혼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사공두가 사라졌다는 소식은 곧 화산의 금청청에게 들어갔다.

그녀가 급히 말을 달려 비응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진소백과 섭수진도 떠나고 없었

다.

화골장 노굉이 조용히 그녀에게 금사진이 남겼던 서신과 비급을 건네 주었다.

언덕 위! 

바람이 강했다.

금청청은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의 뒤에 덩그러니 놓인 봉분은 금사진의 무덤이었다.

불어오는 바람! 

 이 무덤을 누가 지켜 줄 것인가? 

그녀는 자신이 비응방을 맡아야 할 이유를 찾았다.

금청청은 몸으로 바람을 막으며 손에 든 비급을 보았다.

비급의 전반부는 파천혈조에 관한 내용이었다.

여자가 익히기 쉽도록 변형된 파천혈조! 

후반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천응비(天鷹飛)와 다른 몇 가지 신법들의 장점을 따서 여인의 날렵한 몸에 적합한 

새로운 신법을 설명했다.

누가 이것이 금청청을 위한 비급이라는 것에 이의를 달 수 있을까? 금청청은 다시 

눈물을 훔쳤다.

아버지에게 무례했던 순간들이 그녀의 눈앞에 떠올랐다.

과거를 돌이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누구도 그럴 수는 없었다.

어쩌면 신(神)조차 과거는 바꾸지 못할지도 몰랐다.

금청청은 금사진이 남긴 서신을 폈다.

서신(書信)은 금청청이 미처 알지 못했던 여러 사실들을 담고 있었지만, 주된 것은 

역시 금사진이 딸에게 갖고 있었던 애정(愛情)이었다. 

 <사랑하는 나의 딸에게! 

이 아비는 한 번도 너를 따뜻하게 불러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역시 한 번이라도 너에 대한 애정을  버렸던 적도 없었다. 네 어머니에 대

한 미움을 결코 너에게 투영(投影)시키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어린 너를 멀리 했

던 나의 행동에 대한 변명 아닌 변명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中略…… 

아비는 위기감을 느꼈다.

네게 이처럼 위험한 비응방을 남길 수는 없었다.

위험한 와중에 네가 화산으로 떠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中略…… 일

순간의 부주의로 적염에 의해 중독된 독이 해독의 가능성이 없는 절독임을 알았을 

때! 아비의 절망을 너는 이해할 수 있겠느냐? 

나는 최후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아비는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백회의 소화를 통해 엽혼이란 책임감이 강한 살수를 골랐다.

소화를 흑회의 화령인  화선(花仙)으로 가장시켜 엽혼에게  나의 죽음을 청부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조삼이 많이 애썼음은 물론이다……中略…… 

아비의 갑작스런 죽음에 고숭무와 심화절은 당황할 것이다. 그들은 서로 상대방이 

아비를 암살했다 여기고 나름대로 살수의  배후를 밝히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

다.

화선의 종적을 따라간 사람들은 흑회(黑會)를 발견할 것이고, 진짜 화선이 속해 있

는 흑회는 심화절의 세력과 충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누가 살아남을지는 알 수 없다. 살아남는 자의 제거는 조삼이 맡는다. 엽혼이란 책

임감 강한 살수를 

오랜 기간에 걸쳐 골랐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엽혼이 살아남는다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청부자의 배후를 알아 보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청부자의 정체를 알아 내려는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엽혼의 동생에 대한 

형식적인 공격도 

계획했다. 이것 역시 흑회 내부의 첩자를 움직여 

흑회의 종적을 드러내는 일에 이용한다. 엽혼이  청부자의 배후를 알아 내는 일에 

실패할 염려도 있다. 이에 대비해 화선으로 분장했던 

소화를 그의 주위에 심어 두기로 한다.

소화는 엽혼의 기호를, 삼 년간의 조사로 모두 알고 있으니, 충분히 엽혼을 아비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소화는 은연중에 엽혼을 조삼에게 유도하고, 조삼은 청부자의 정체를 엽혼에게 흘

린다. 물론 조삼이 

엽혼에게 알려 주는 청부자는 고숭무와 심화절 중 살아남는 자가 될 것이다. 최후

에 살아남았던 반도(叛徒)마저  제거된다면 자연 비응방의  후계자는 너밖에 남지 

않을 게다.

이것은 너무 길고 어려운 계획이다. 하나 내겐 다른 길이 없다.  주위는 모두 적이 

둘러쌌고, 아비가 

믿을 사람은 백회의 회원들과 사공두밖에 없다.

그러나 가능할 것이다.

조삼과 사공두가 힘을 합쳐 암중에  대국을 주지한다면…… 아비는 부디  네가 이 

글은 보게 되길 바란다.

그것은 네가 비응방의 방주가 되었음을 뜻하며 또한 아비의 오랜 심고가 완성되었

음을 뜻하기에.> 

결과적으로 금사진의 계획은 성공했다.

하나, 사공두의 배신과 소화가 엽혼을 조사하는  도중 그를 사랑하게 되는 변수를 

금사진은 예측하지 못했다.

인간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어떻게  모든 일을 다 대비할 수  있겠는가? 하지

만, 비록 먼 길을 돌아오기는 했으나, 금청청은 비응방의 방주가  되었다. 아니, 이

제 곧 될 것이다.

그녀는 이제서야 왜 고숭무와 심화절의 말이 서로 달랐는지 알았다.

금사진은 스스로 죽음으로써 그들 모두를 속였다.

고숭무와 심화절은 서로 상대방이 금사진에게 손을 썼다고 생각하며 싸웠다.

그 결과 그들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금청청은 사공두의 배신만은 몰랐다.

사공두가 백회의 총단에서 소화에 의해  죽었다는 사실도 몰랐 금청청이  아는 건 

그녀의 아버지가 자신을 지극히 사랑했었다는 사실! 사랑이 아니라면 어떻게 자신

의 목숨을 던지겠는가?  그처럼 무례하게 대했던  아버지였건만, 금사진은 자신을 

위해 기꺼이 죽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죽기 전날, 전원에서의 일을 기억했다.

그때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자식에게 혈조를 쏘아 낼 때 그의 마음은……! 

 금청청은 금사진의 서신을 가슴에  안았다. 다시 바람이 불어  금사진의 묘 위를 

맴돌았다. 금청청은 

자신의 몸으로 바람을 막으며 외쳤다.

"제가 지키겠습니다, 아버지. 제가요!"

그녀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멀리 퍼졌다.

금사진이 있는 구천까지도 들릴 수 있을까? 

"아버님이 키우신 이 비응방을 제 손으로 다시 일으키고 말겠어요."

* * *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곳! 

진소백과 섭수진이 서 있었다.

둘은 아무 말도 없었고, 다만 침묵만이 흘렀다.

섭수진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길은 저쪽이 분명하건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아미산은…… 저쪽으로 가야 해요."

진소백이 말없이 그녀를 보았다.

그의 눈도 조금 떨리는 듯했다.

섭수진은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아무 할말도 없었다.

그녀는 겨우 한마디를 했을 뿐이다.

"전 불문의 제자예요."

그랬다. 진소백은 물론 섭수진이 아미산(峨嵋山) 금정 신니의 제자인 것을 알고 있

다.

아미의 장문인은 불제자이니 그 제자인 섭수진이 남자를 가까이 할  수 없음은 당

연했다.

진소백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섭수진이 다시 말했다.

"제가 갈 길은 이쪽이니 공자께선 어서……"

그녀는 손을 들어 진소백이 가야 할 오른쪽 길을 가리켰다.

진소백이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내가 먼저 가겠소!"

진소백은 굳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섭수진도 왼쪽 길로 조용히 걸어갔다.

그들의 뒷모습은 꿋꿋했다.

하지만 마음만은 폭풍우에 시달리고 있음을 누가 알랴?

우연히 만났던 두 사람은 그처럼 헤어졌다.

섭수진은 불문에 들 몸이니, 어쩌면 이것이 영원한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臨別殷勤重寄詞 詞中有誓兩心知 

七月七日長生殿 夜半無人私語時 

在天願作比翼鳥 在地願爲連理枝 

이별에 즈음하여 거듭 당부하니 

말속에 숨은 맹서는 두 사람이 알 일이다 

일곱째 날 일곱째 달 장생전에서

깊은 밤 사람 없을 때 은밀한 속삭임이 있다 

하늘에서 나면 비익조 되어 살고,

땅에서 나면 연리지 되어 살겠다.

종장 `─` 풍운지서(風雲之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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