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 장 비도광우(飛刀光雨)
1
시간은 흘렀다.
날이 밝고 드디어 엽혼의 처형이 공개적으로 행해질 때가 되었.
엄청난 구경꾼들이 비응방으로 모여들었지만 오직 출입표를 받은 사람들만 입장이
허락되었다.
지금 엽혼의 머리는 짚으로 둘러져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무릎을 꿇린 채, 아혈마저 짚혀 말도 못 하고 있는 엽혼.
지금 그의 마음은 끝없이 외치고 있었다.
'아이고, 부처님, 공자님! 이 복칠(福七), 온갖 복을 다 받으라고 부모님이 지어 주
신 이름인데…… 이렇게 죽다니요. 아이고!'
그의 애타는 마음을 무시하고 북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북 소리에 맞춰 심화절이 말했다.
"이 북 소리는 금사진 전 비응방주의 명복(冥福)을 기리며 팔백십 번을 울릴 것이
오."
둥, 둥, 둥, 둥`─`
"누구든 그사이 이자를 살려야 할 명분이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서시오."
둥, 둥, 둥, 둥`─`
"만일 아무도 없다면, 그는 정확히 태양이 중천하는 오시에 죽을 것이오."
둥, 둥, 둥, 둥`─`
북 소리가 울렸다.
심화절이 은밀히 독소명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모든 준비는 완벽한가?"
역시 전음으로 들려 오는 독소명의 대답!
"물론입니다. 제가 먼저 말을 꺼내면 모두 호응하여 초의 선사를 성토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둥, 둥, 둥`─`
* * *
북 소리는 이곳 지하에도 들렸다. 금청청이 한숨을 쉬었다.
"후! 재수가 너무 없군요, 또다시 여기에 갇히다니."
그녀의 말에 매일도가 쓰게 웃었다.
"너무 안이했다. 두 번이나 같은 실수를 하다니……"
그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런 실수를 한다면 나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겠다."
매일도는 일세의 기재(奇才)였다.
위기의 순간 교묘한 말로써 심화절이 자신과 금청청을 살려 놓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때때로 그는 너무 방심(放心)했다.
매일도의 그런 약점이 지금의 결심으로 제거(除去)된다면 아마 화산(華山)의 역사
는 앞으로 매일도에 의해 다시 씌어질 수 있을 것이다.
성공하는 자와 실패하는 자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어떤 사람은 작은 실패에서 배워 큰 성공을 낳고, 어떤 사람은 계속 성공하다가도
작은 실패 하나를 감당하지 못해 쓰러진다.
종국에 누가 웃는 자가 될지는 너무 뻔한 것이 아닌가? "일전의, 엽혼이 왔던 것
같은 기적이 다시 일어나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지금 엽혼은 없다.
분명 기적이 일어날 리가 없건만 금청청은 바라고 있었다.
만일 하늘의 뜻이 있다면 결코 심화절의 음모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므로.
기적의 기미(機微)가 보였다.
천장이 서서히 열리며 빛이 들어오는 것이다.
"소방주! 거기 있으시오?"
문을 연 사내가 조용히 물어 보자 금청청은 울음을 터뜨릴 뻔하였다.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말했다.
"설마…… 설마, 사공 당주! 그대인가요?"
* * *
심화절은 하늘을 보았다.
해는 어느새 높이 올라 남중(南中)하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둥, 둥, 둥`─`
북 소리도 숨가쁘게 종국(終局)을 향해 달려갔다.
심화절은 눈짓을 보냈다.
그의 신호를 받고 도수부(屠首夫)가 참수대(斬首臺) 위로 뛰어올랐다.
"푸`─`우!"
분명 사람을 죽이기 위한 의식이건만, 떨어지는 물방울이 만드는 무지개는 이 순
간, 기이하게 아름다웠다.
이제 최후의 일(一) 회(回)가 남았다.
팔십일 번의 북 소리가 더 울리면 엽혼의 목은 땅에 떨어질 것이다.
심화절은 초조했다.
아직도 그가 나타나지 않다니!
분명 초의(草衣)는 왔다. 한데 왜 아직 나타나지 않는가? 둥, 둥, 둥`─`
북 소리가 막바지에 접어들며 긴장을 고조시켰다.
이윽고 마지막 북 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쳐라!"
심화절의 손짓을 따라 도수부의 도가 빛살을 갈랐다.
쨍!
도수부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자신의 도를 보았다.
도의 중간!
마치 잘린 듯 매끈하게 부러져 있었다.
떼구루루`─
바닥에 도를 잘라 낸 돌멩이 하나가 굴러 떨어짐을 보자, 심화절은 보지 않아도
누구의 행위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급히 독소명에게 전음을 보냈다.
"왔다, 준비해라!"
돌을 던져 도를 끊을 수 있는 사람!
특이한 푸른빛 가사(袈裟)에, 허리에는 금빛 포승을 차고, 맨발로 조용히 서 있는
고승! 누가 또 있을까?
초의 선사의 출현이었다.
* * *
"정말 사공 당주세요?"
사공두가 부리부리한 눈에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예, 접니다. 구사일생(九死一生)!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금청청은 그의 오른쪽 소매가 힘없이 펄럭임을 보았다.
옷도 군데군데 찢어지고 얼굴도 초췌하여, 그가 얼마나 큰 고초를 겪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금청청은 예전에 자신이 그를 핍박했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사공두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사공 당주! 그 팔은 어떻게……"
사공두의 박룡도는 오른손의 강한 힘으로 전개하는 무공이었으니 오른손이 잘린
지금 그는 무공을 거의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
사공두가 억지로 웃었다.
"그까짓 팔 하나 없으면 어떻습니까? 심화절, 그놈을 상대하는 데는……"
사공두가 자신의 독두(禿頭)를 탁, 쳤다.
"이 머리도 있지 않습니까? 안 되면 몸통을 써서라도 그냥, 팍!"
금청청은 웃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웃지 못했다.
사공두가 그녀의 마음을 안 듯, 급히 말을 돌렸다.
"급합니다. 심화절이 초의 선사를 없애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게다가 만에 하나
실패할 때를 대비하여 비응방의 전원(前園) 전체에 화약을 묻었으니…… 어서 막
아야 합니다."
사공두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칫 잘못하면 방주님의 노고(勞苦)가 서린 비응방이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금청청도 마음이 급해졌다.
다급한 상황에 처하자 매일도가 진가를 발휘했다.
"어서 서두릅시다. 우선 암중에 화약의 도화선(導火線)들을 제거한 뒤……"
여기, 지하에서 심화절의 계획을 방해하는 첫 움직임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꼭 이것만이 첫 번째 움직임은 아니었다.
* * *
심화절의 목소리가 노기로 떨렸다.
"그래서, 지금 선사께서는 저희 방의 선(先) 방주님을 암산한 살수를 풀어 주라 하
시는 겝니까?"
그의 따지는 듯한 말에 초의 선사는 곤란한 듯 연신 불호를 외웠다. 그의 입장은
지금 매우 곤란했다.
"모든 잘못은 제자를 잘못 가르친 내게 있으니, 차라리 나를 벌해 주시오. 아미타
불!"
초의 선사의 불호는 나지막이 가슴을 파고들어 그의 공력이 절대임을 누구라도 느
낄 수 있었다.
심화절이 암중에 전음을 보냈다.
"이때다. 시작해라."
수많은 구경꾼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일어났다.
귀조 독소명이었다.
"무슨 말씀이시오! 아니 막말로, 선사께서 제자를 시켜 금 방주를 암산한 것이 아
니라는 보장도 없지 않소?"
여기저기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렇소. 제자의 잘못은 사부의 잘못이니 당연히 함께 책임을 물어야 하오."
"옳소. 만일 선사께서 딴마음을 갖고 제자를 시켜 금 방주를 살해한 것이라면 어
떡하겠소?"
"맞다. 초의의 행동은 뭔가 수상하다. 너무 수상하다. 우`─`"
꽁!
누군가의 머리에 혹이 나는 소리였다.
어쨌든 독소명은 득의 양양했다.
그가 출입표를 나눠 준 목적이 바로 이런 분위기 조성이었다.
각지에서 몰려든 풍림서(風林誓)의 인물들만을 모아 초의 선사를 타도하는 분위기
를 만드는 것이 원래의 계획이었다.
용기를 얻은 독소명은 다시 소리를 키워 외쳤다.
"만일 책임감을 느낀다면 선사는 스스로 공력을 폐하여 제자의 잘못을 강호에 사
죄하시오."
독소명은 우레와 같은 지지를 예상했다.
어차피 모두 짜고 하는 짓이니까. 그런데……
장내가 썰렁해졌다.
독소명은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원래 계획은 이것이 아니었다.
아까처럼 지금도 일제히 자신의 발언을 지지하는 외침이 나와야 정상이었다.
당연히 '옳소! 맞소!' 하는 말들이 사방에서 쏟아져야 하는데…… "저놈은 뭔데 저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
"저렇게 예의가 없어도 되는 거냐?"
"우우`─`"
"뭐 하는 떨거지냐?"
독소명뿐 아니라 심화절도 얼굴이 굳어 버렸다.
뭔가 잘못되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구경꾼 중 한 명이 천천히 일
어났다.
큰 갓으로 얼굴을 가린 인물!
그러나 심화절은 얼굴을 보지 않고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아미타불!"
장중한 불호 소리! 지공이었다.
심화절은 자신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음을 알았다.
"아미타불! 심 시주, 약속이 틀리지 않소?"
지공이 갓을 벗어 본모습을 보이며 말했다.
그러나 심화절을 더욱 놀라게 하는 음성이 있었다.
"원래 그런 사람이니 무얼 따지십니까? 아마 지금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를 테니 잠
시 생각할 기회를 주도록 하지요."
심화절은 이제 머릿속이 비어 버렸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의 뇌리에 유일하게 떠오르는 말은 매일도가 남겼던 말이었 ─`당신이 진소백을
다시 만난다면 무척 재밌을 것이오.
이것이 재미있는가?
심화절은 비로소 알았다.
남의 심계에 당하는 것은 전혀 재미있지가 않았다. 여태껏 자신의 꾀에 당해 죽어
갔던 사람들의 심정을, 심화절은 지금 느끼고 있었다.
비단 재미없을 뿐 아니라 아주 비참했다.
초의가 진소백을 보며 말했다.
"소백아! 네 일 처리 솜씨가 강호에 나와 꽤 늘었구나!"
진소백이 몸을 숙여 절을 했다.
"사부님을 뵙습니다."
강한 충격 속에서 심화절은 비로소 알았다.
진소백이 초의(草衣)의 제자였으니…… 진소백이 살아 있는데 어찌 자신의 음모를
초의 대사가 모를 수 있겠는가?
"출입표를 받았던 사람을 모두 개방의 인물들로 바꾸는 일은 정말 힘들었소."
진소백은 한 번 더 앞에 앉은 개방 제자의 머리를 쥐어박고는 말했다.
그는 아까 초의 선사를 야유할 때 반말하다가 진소백에게 군밤을 맞았던 자였다.
진소백의 말에 심화절은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는 다만 아래턱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중인들은 심화절이 저런 모습도 보일 수 있음을 처음 알았다.
2
이야기는 거슬러 올라간다.
진소백과 섭수진이 부여안고 절벽에서 떨어지던 때로.
귀를 스치는 바람이 칼과 같았다.
섭수진은 진소백이 걱정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가 실성이라도 한 양 빙긋이 웃는 게 아닌가? "그놈들은 좀더 세상을 믿
고 살아야 할 거요. 우리는 앞으로 믿고 살도록 합시다."
말은 좋지만 우선은 살아남아야 남을 믿든 의심하든 할 게 아닌가? 눈앞으로 절벽
중간에 튀어나온 돌출부가 확대되며 다가왔다. 사실은 자신들이 무서운 속도로 떨
어지는 것이지만.
절명의 순간,
"꽉 잡으시오!"
진소백이 외치며 손에 쥔 끈을, 멀리 보이는 절벽에서 자라는 나무를 향해 던졌다.
폭발로 인해 바깥의 칠이 벗겨진 포승은 검은 먼지 사이로 은은한 금빛을 토해 내
고 있었다.
순간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짧아서 도저히 나무까지 갈 수 없어 보이던 굵은 포승(捕繩)이 가늘어지면서 나무
를 휘감는 것이 아닌가!
"차앗!"
낭랑한 외침과 함께 진소백이 포승을 당기자, 섭수진과 진소백의 몸은 추가 흔들
리듯 움직이며 절벽의 돌출부를 피했다.
"사부님의 금포승(金捕繩)은 이런 묘용으로 인해 여의승(如意繩)이라고도 불린다
오!"
진소백의 말에 섭수진은 비로소 그의 사부가 누군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럼, 진 공자의 사부님은……"
그녀는 말을 맺지 못했다.
바닥이 눈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하나 그들은 무사했다.
출렁!
등을 타고 푹신한 침대 위로 떨어지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그녀는 왜 진소백이
옥산의 절벽 얘기를 했었는지 알았다.
솜에다 짚, 그리고 밧줄을 엮어 만든 구명구(救命具)의 모양은 옥산에서 본 것과
비슷했다.
또다시 절벽에서 떨어진 진소백과 섭수진을 구한 고마운 물건! "이건 도대체 누가
달아 놓은 거죠?"
진소백이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공동을 출발할 때 사종쾌에게 연락을 했소. 몇 군데의 절벽에 조치를 취하라고.
덕분에 목숨을 구했군!"
본래 진소백은 심화절이 음모를 꾸민다면 당연히 자신들이 비응방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짐작했다.
해서 사종쾌에게 전해 암습의 가능성이 큰 곳의 주위에 있는 절벽 곳곳에 이런 도
구를 달아 놓도록 했다.
진소백은 좀 전에 섭수진을 정확히 안내하여 도구를 달아 놓은 절벽으로 갔던 것
이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진소백의 안배가 그들을 구한 것이다.
"휴, 설마 그들이 그때에 벌써 화탄을 사용하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소. 정말 위험
했소."
섭수진은 그제서야 자신들이 서로 껴안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여유를 얻었다.
그녀는 놀라 진소백을 밀쳐 내었다.
"에구, 벌써 알아차렸소? 좋았는데!"
진소백이 힘없이 웃었다.
"도대체 당신, 내상을 당하기나 한 거예요?"
그녀는 자신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똑똑히 보았다.
"우욱!"
진소백이 검은 피를 한 사발 토해 내며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졌다.
화탄의 엄청난 폭발로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공력을 전개한 탓이었다.
울혈을 내뿜으며 진소백은 쓰러졌다.
* * *
진소백이 깨어난 곳은 엽혼의 집이었다.
그가 쓰러지고 얼마 있지 않아 사종쾌가 달려왔다.
폭발 소리를 듣자 자신이 설치했던 짚과 솜으로 만든 거대한 이불이 있는 절벽 아
래로.
우연히도 엽혼의 집이 가까움을 안 사종쾌는 급한 마음에 진소백을 여기로 옮겼던
것이다.
뜻밖에도 엽혼의 집에는 두 명이 있었다.
엽평과 바로……
진소백이 깨어날 때 그를 내려다보는 네 쌍의 시선이 있었다. 두 쌍은 진소백이
이미 짐작했었지만 나머지 두 쌍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눈이었다.
깨어나자마자 진소백이 고함을 질렀다.
"평아(枰兒)! 이 녀석, 건강해졌구나!"
이처럼 우렁찬 소리를, 도대체 누가 막 혼절에서 깨어난 사람의 것으로 믿을까?
그만큼 진소백의 반가움은 큰 것이었다.
섭수진과 사종쾌가 그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보았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의 여인!
그녀를 보고 진소백이 의아해하자 엽평이 먼저 말을 했다.
"형수님이십니다. 혼(魂) 형님께서 돌아가실 때 옆에 계셨다 하셨습니다."
바로 소화였다.
진소백은 엽혼과 소화의 얽힌 사연들을 알지 못한다.
그는 조용히 소화를 보았다.
그녀의 눈은 맑고도 맑아 엽혼이 좋아할 여인이었다. "그분…… 께서는 진 공자
님께 항상 고마웠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진소백은 그녀가 엽혼을 부를 때의 눈빛의 변화를 보았다.
그녀가 엽혼을 진정으로 사랑했음을 알았다.
또한 친구가 마지막 길에서 결코 외롭지 않았음도 알았다.
진소백의 눈에 습막(濕幕)이 차 올랐다.
"고맙소. 당신이 있었으니 그 친구는 전혀 외롭지 않았을 게요."
소화는 입술을 깨물더니 밖으로 나갔다.
두 손을 꽉 쥔 엽평도 심중의 격동을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것으로 되지 않았는가?
한 사람의 인생이 비록 고단했지만 결코 욕되거나 속되지 않았으니…… 이것으로
되지 않았는가?
남은 친구들이 모두 그를 그리워하고 있으니 진정으로 엽혼의 삶은 훌륭했다 말할
수 있지 않은가?
* * *
"평아! 사부님께서 다른 말씀은 없으셨느냐?"
진소백이 엽평에게 물었다.
하늘에는 별이 초롱초롱했다.
그들은 지금 별을 보고 있었다.
"예, 사형. 사부님께서는 여기서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만일 사형을 만나게 되면
모든 것은 사형의 지시에 따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부님께서는 먼저 비응방으
로 가시겠다구요."
진소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께서 이미 심화절의 음모을 알고 계시니 큰 위험은 없을 것이다.
"좋다. 평아, 너는 지금 맹으로 돌아가거라. 위치는 알 터이니 가는 즉시 무공 수
련에 정진(精進)하라.
네 자질은 최상(最上)이니, 무림에 일 년 안으로 절정고수 하나가 더 탄생함을 내
보장할 수 있다."
"지금 즉시 말입니까?"
진소백은 별을 보았다.
"하루라도 늦출 이유가 어디 있느냐? 즉시 떠나거라!"
늦은 밤에 길을 떠나라는 것은 모진 말이었지만 엽평은 군소리없이 따랐다.
진소백의 모든 말이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아는 까닭이었다.
때를 알면 과감히 움직이는 자만이 진정으로 성공할 수 있는 법이다.
엽평은 떠났다.
진소백은 혼자 앉아 별을 본 것이 이미 한 시진이 넘었다.
그는 문득 뒤를 돌아보더니 아름드리 나무를 보며 말했다.
"이리 나오시오.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소화가 나무 그늘에서 나왔다.
"알고 계셨나요?"
진소백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화는 조용히 말을 시작했다.
"꼭 아셔야 할 것이 있어요. 혼랑과 저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백회에 대해!"
* * *
별이 떨어졌다.
밤하늘을 가르며 유성이 떨어졌다.
유성이, 사실은 모래 먼지 하나에 불과한 작은 것들이 대부분임을 알고 있는 사람
은 많지 않다.
하지만 유성은 자신의 몸을 태움으로써 세상에 뚜렷이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그리고 세상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수많은 위인들 또한 유성처럼 미약한 알갱이에
서 자신을 태워 세상에 알려진 사람들임을 우리는 모를 때가 많다.
어쨌든……
진소백은 침중히 물었다.
"그럼, 아직 백회의 총단은 남아 있소?"
"예! 이전까지는 조삼(曹三) 오라버니가 대형으로서 모든 지시를 했지만 지금은 배
신한 셋째가 장악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셋째란 자에게 속고 있는 것이 아니오?"
소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만일 진실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기꺼이 제 편이 될 거예요."
"문제는 누구도 셋째의 정체를 모른다는 것이구려."
"맞아요. 금 방주님께서는 흑회를 상대할 마지막 인물이라 하여 그의 정체를 모든
회원들에게 숨기셨어요."
진소백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좋소. 내 반드시 그의 정체를 밝혀 백회의 총단으로 그를 보낼 테니…… 당신은
이렇게 해주시오."
한참 동안의 상의(相議) 끝에 소화는 떠났다.
진소백은 그녀로부터 들었던, 백회가 생기게 된 과정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금사진의 본심은 전혀 독하지도, 악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여리고 인정이 많은 성격이었다.
다만 비응방에 들어가 겪었던 모진 일들이 그의 심성(心性)을 삐뚤어지게 했던 것
이다.
방응향과 잔혹마도의 일이 때때로 그를 미치게 하여 항상 손에 피가 마를 날이 없
었지만, 간혹
제정신이 돌아오는 날이면 그는 남들이 모르게 많은 선행(善行)을 베풀었다.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 날과 이성을 잃으면 찾아오는 잔혹성에 대한 보상이었을까?
그는 많은 사람들을 도왔고, 많은 사람들을 고난에서 구했다.
조삼과 조소화 남매도 그 중 둘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금사진은 자신이 정신없이 키워 왔던 비응방 곳곳이 다른 세력에
잠식당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일세의 기재였다.
고숭무의 뒤에 흑회란 세력이 있고, 심화절 또한 딴생각이 있음을 암중 조사로 알
아 내었다.
그는 고뇌(苦惱)했다.
자신의 유일한 혈육!
한 번도 사랑해 주지 못했던 금청청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남길 것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비응방이 금청청의 외조부의 것이었으니
당연히 그녀에게 주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흑회에 대항하는 백회가 탄생되었다.
백회의 일 중 구체적인 실행 대부분은 조삼이 맡아 하였고, 금사진은 행동 방향와
실행 계획을 제시했다.
백회의 회주로서 금사진의 활약은 대단했다.
고숭무와 심화절의 세력을 섞어 서로를 견제하게 했고, 그 와중에 착실히 힘을 길
렀다.
그러던 어느 날.
금사진은 자신이 중독되었음을 깨달았다.
놀랍게도 용독(用毒)한 자의 정체가 자신의 처인 적염임을 깨달은 금사진은 또다
시 절망했다.
오랜 고민 끝에 그는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추운데 뭘 하세요?"
진소백이 자신의 생각에 취해 밤의 추위도 잊고 있을 때, 뒤에서 섭수진이 그를
불렀다.
"당신은 환자(患者)이니 어서 들어가세요. 밤바람은 좋지 않아요."
진소백은 일어서라며 잡아당기는 섭수진의 손을 잡아 끌어 옆에 앉혔다.
조용히 별만을 바라보던 진소백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사랑이 없다면 세상이 어찌 되었을까? 아무리 힘든 일도 사랑이 있다면 할 수 있
지 않겠소?"
진소백의 손이 섭수진의 어깨를 감쌌다.
섭수진은 무엇에 홀린 양 조용히 앉아 있었고, 하늘에는 별이 포도송이처럼 초롱
초롱했다. 향긋한 밤바람만이 그들의 머리 위를 조용히 스쳐 갔다.
3
다시 그날을 생각하자 섭수진의 양 볼이 저절로 붉어졌다.
비록 역용약을 발라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무안해진 그녀는
급히 일어나 역용을 지우고 외쳤다.
"난 아미파의 섭수진이에요. 저 사람은 외부와 결탁하여 전 방주이신 금사진을 암
살했을 뿐 아니라 음모를 꾸며 초의 선사를 살해하려 했어요."
비응방의 문인들이 웅성거렸다.
섭수진이 한 말 중 심화절이 금사진을 암살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름을 진소백은
알고 있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상황이 아니므로.
심화절이 즉각 반박하고 나섰다.
그의 얼굴은 이미 평정을 가장하고 있어 과연 뛰어난 인물임을 느끼게 했다.
"무슨 소리요, 내가 음모를 꾸미다니! 더구나……"
심화절은 입을 다물었다.
진소백이 몸을 날려 가짜 엽혼의 머리에서 짚모자를 벗기고 그의 아혈을 풀어 주
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입이 트인 복칠은 정신없이 떠들기 시작했다.
"아이고!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네. 이보시오, 난 엽혼이 아니라 개방의 복칠(福七)
이라고 그렇게 말을 했건만…… 아, 날 이용해 초의 선사를 잡겠다니, 그게 어디
쉬울 줄 알았소?"
한숨과 함께 심화절은 드디어 인정했다.
그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소. 내 사적인 원한을 갚기 위해 음모를 꾸민 것은 인정하겠소. 하지만 금 방주
를 내가 암살했다니. 난
나름대로 비응방에 충성을 다했소. 이건 모두가 인정할 것이오."
그랬다.
심화절의 처세가 얼마나 뛰어났던지는 비응방 문인(門人)들의 반응으로 알 수 있
었다. 그들은 누구도 심화절이 비응방에 충성을 다한 것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
았다.
적어도 그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난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오른팔이 없는 사내!
그가 나타나자 비응방의 군웅들이 다시 술렁대었다.
이 사내의 충성과 기개를 비응방의 누가 모를까?
사공두였다.
그의 뒤를 따라 금청청까지 들어오자 군웅의 술렁임은 극에 달했다.
사공두가 우렁차게 입을 열었다.
"좀 전에 한 섭수진 소저의 말은 모두가 사실이오. 이 사공두가 목을 걸고 증명하
오. 나 또한
심화절의 간계로 이렇게 한 쪽 팔을 잃어버렸소."
죽은 줄 알았던 사공두는 전비응방도의 영웅이었다.
그렇게 되는 것에는 심화절도 일조를 했다.
심화절은 앙천광소(仰天狂笑)했다.
웃을 수밖에 무슨 다른 방법이 있으랴?
한참을 미친 듯이 웃어대던 심화절이 진소백을 보았다.
"이들 또한 자네가 불렀는가?"
진소백이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그도 이런 상황에서 사공두가 나타나 금청청과 매일도를 구해 올 줄은 짐
작도 못 했던 것이다.
심화절을 고개를 끄덕이며 하늘을 보았다.
"내가 하는 일이 하늘의 뜻에 합당하지 않았나 보구나. 어쩔 수 없겠지. 그러나!"
심화절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것만은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을 게다. 이 땅바닥 속엔 십만 근의 화약이 묻혀
있다. 아무도 살아서는 이곳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심화절은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공두가 냉소했다.
"흥, 이미 모든 화약이 물에 젖었다. 백년이 지나가도 터지지 않을 것이다."
진소백이 나직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포기하시오. 당신의 뜻을 하늘도 막고자 하나 보오. 이미 노존(老尊)과 태청쌍수
(太靑雙搜)도 죽었으니, 이제 당신과 귀조 독소명만 남았소."
심화절은 비틀거렸다.
여기서 실패하다니……
모든 일이 그의 손아귀에 든 듯했었는데……
"넌 도대체 누구냐? 난 내 생에 단 한 번도 실패한 일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이
같은 비참함을 당하다니."
진소백이 조용히 말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언젠가는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만나게 되는 법이오."
심화절이 허탈하게 말했다.
"내가 초의 선사의 암살까지 한 번에 시도한 것이 실수였느냐?"
진소백이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마찬가지였을 게요. 당신의 계략은 이미 알고 있었소."
심화절이 한숨을 쉬며 체념할 때 독소명은 진소백을 보며 악을 썼다.
"이대로 당하기만 할 줄 아느냐? 우리들의 원한은 반드시 풍림서(風林誓)에서 갚
아 주……"
그는 외치다 말고 불신(不信)에 찬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천심비도(穿心飛刀)!
심화절의 비도가 자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이 박혀 있었 "너는 너무 말이 많
았다. 우리는 이미 졌으니…… 시인하도록 하자!"
심화절의 전음이 정신을 잃어 가는 독소명의 귀에 파고들었다.
심화절은 그를 보지도 않고 진소백만을 보았다.
"내가 졌다. 완전히 졌다. 그러나 누구도 나를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품에서 삼십삼 개 천심비도를 모두 빼내어 허공으로 던졌 중천(中天)한 태양
의 빛을 반사하며 비도(飛刀)들이 만드는 빛의 비는 아름답기조차 했다.
"하하하! 저승에서 다시 한 번 겨루자꾸나!"
심화절이 크게 웃으며 하늘로 날았다.
허공에 내리는 비도가 만드는 빛의 비와 웃으며 그 빗속으로 뛰어드는 심화절! 삼
십삼 개의 천심비도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그의 몸을 꿰뚫었 심화절은 자신의 말
대로 남에게 죽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손에 죽었다.
* * *
"어쩌면 그는 영웅의 기질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소."
진소백의 말에 섭수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영웅은 음모로써 윗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아요. 그는 음모를 꾸며 금 방주를 암
살했잖아요?"
진소백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금 방주를 암살한 사람은 심화절이 아니오. 심화절은 아마 고숭무가 암
살했다고 믿었을 거요."
섭수진은 의아했다.
진소백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 * *
"어서 방주의 자리에 오르십시오."
사공두의 권유에 금청청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무림의 번잡함에 빠지기 싫었다.
망설이던 그녀는 매일도를 보았다.
'방주의 권좌가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녀는 신형을 날려 매일도의 곁에 섰다.
방도(幇徒)들의 시선이 모두 모이자 그녀는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난 이분과 곧 혼인을 해요. 따라서 제가 방주가 된다는 건 어불성설(語不成說)이
에요."
사공두가 머리를 흔들었다.
"안 됩니다. 소방주께서 사양하신다면 우리 비응방의 장래는 어찌 됩니까?"
금청청이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저보다도 훨씬 훌륭한 분이 계세요. 여러분도 아시잖아요?"
모든 방도들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로 모였다.
가장 연장자이며 비응방의 오랜 충신인 화골장 노굉(魯宏)이 나서서 말했다.
"사공 당주! 당신이 맡아 주시오. 당신밖에는 없는 듯하오."
사공두는 놀라 급히 말했다.
"무슨 소리들을 하시는 겁니까? 난, 난 이제 한 쪽 팔이 없는 병신에 불과합니다.
난, 난……"
사공두가 아무리 사양을 하더라고 비응방의 방도들은 완강했 진소백은 사공두가
결국 비응방의 방주에 오르고 말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신뢰와 명망(名望)을 쌓는다는 건 결코 쉽지가 않았다.
진소백은 흘끔 바닥에 쓰러진 심화절의 시신을 보았다.
'당신은 나와 겨루기 전에 넘어야 할 벽이 또 있었소.' * * *
금청청은 아주 흡족한 얼굴로 비응방을 떠났다.
사공두가 방주가 된 일을 그녀는 진정으로 축복했다.
그는 자신의 부친 금사진의 유일한 충신이었으니, 금청청은 편안한 마음으로 화산
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떠나는 그녀를 보며 섭수진이 진소백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그녀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을 건가요?"
진소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때로는 아픈 진실보다 행복한 거짓이 나을 때가 있는 법이오."
섭수진도 그의 생각에 동의했다. 하지만,
"그럼 이 일을 그냥 이대로 넘길 건가요?"
진소백이 황급히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