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26 장 겁겁위기(劫劫危機) (27/32)

제 26 장 겁겁위기(劫劫危機) 

 1 

태양은 중천(中天)에 떠올랐다.

이제 정오의 햇살은 제법 따스했다.

하지만 길을 서두르는 진소백과 섭수진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비응방을 향해 급히 달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사종쾌가 소식을 전해 온 것은 아침이었다.

'매일도와 금청청이 비응방에 들어갔다가 실종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나흘 

후 엽혼을 공개 처형한다는 방이 곳곳에 나붙었습니다.' 소식을 들은 진소백은 곧 

서찰을 보내 사종쾌에게 지시(指示)를 내리는 한편 자신들도 서둘러 출발했다.

둘 다 큰 문제였다.

금청청의 실종도 문제였고 엽혼에 대한 거짓 공고(公告)도 문제였다.

왜 심화절이 이런 일을 꾸민 걸까? 

섭수진이 나름대로의 의견을 말했다.

"혹시…… 그래요! 틀림없이 초의 선사를 유인하기 위한 계략일 거예요."

섭수진의 말에 진소백은 머리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소?"

"지금 엽혼에게 연고가 있는  사람이라곤 엽평…… 이란 동생과  초의 선사밖에는 

없어요. 만일 심화절이 냉설(冷雪)이 

말했던 분면음마(扮面淫魔)의 후예라면…… 복수를 하기 위해?"

진소백도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한 추리였다. 하지만…… 

"일전에 심화절의 뒤에 큰 세력이 있다는 말 기억나오?"

"예, 기억나요."

"분면음마의 제자들은 세력을 만들기에는 너무나 사악했소. 누구도 믿지 못했지."

"하지만 셋째란 자는 다를 수도 있지 않아요. 전 냉설 선배가 셋째가 가장 무섭다

고 했던 말을 기억해요."

진소백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군. 어쨌든…… 정말 좋은 일이오."

섭수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좋다는 말이죠?"

진소백이 크게 웃으며 말에 채찍을 가했다.

"하하! 당신이 이처럼 똑똑하니 우리들의  이세(二世)는 머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게 아니겠소. 하하!"

"뭐예요?"

진소백은 이미 멀리 앞서 달렸다.

섭수진도 얼굴을 붉히며 발끈해서 그의 뒤를 쫓았다.

흙먼지를 가득 피워올리며 멀어지는 두 마리의 말!  진소백은 비응방의 일에 대한 

부탁을 받았다. 하지만 섭수진은 왜 따라다니는가?  진소백을 보는 그녀의 눈빛으

로 알 수 있으리라.

 * * * 

상여(喪輿)를 메는 상여꾼! 

소복을 입은 남과 여! 

 그들이 길바닥에 주저앉은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상여는 길  한켠에 버려 두고 

앉은 그들의 모습에는 어디에도 상(喪)을 당한 슬픔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무언가를 기다리는 비장한 결심만이 보였다.

이들은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멀리서 소성(簫聲)이 들렸다.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소성의 의미를 이들은 알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일어섰다.

우두머리인, 요령을 든 요령꾼이 가장 앞에 섰다.

상여꾼은 무거운 상여를 어깨에 멨고 소복(素服)을 입은 남녀들은 뒤에 나란히 섰

다.

일단 자리에 선 그들의 표정은 바뀌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이 얼굴을 가득 메웠다.

"어아`─ 어아`─ 북망산천 어데런가! 어이아`─ 어이`─`"

상여꾼들의 구성진 후렴구에 맞춰 요령 소리가 딸랑딸랑 울려 퍼졌다.

곡 소리는 멀리 멀리 울려 나갔다.

 * * * 

상여 행렬에서 오(五) 리(里)쯤 떨어진 곳! 

일단의 사람들이 한 명을 쫓고 있었다.

쫓기는 사람은 혈의(血衣)에 비쩍 마른 노인이었다.

노인답지 않은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뒤를 쫓아오는 자들  또한 신법이 

대단했다.

일정한 격식을 가진 호각 소리와  연이은 호통 소리가, 노인의  도주 방향을 쫓는 

사람들에게 일러주고 있었다.

노인은 어느 방향으로도 추적을 피할 수 없었다.

절망(絶望)의 빛이 그의 눈에 스쳤지만 노인은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 한 순간이라도 기적이 일어날 수는 있으므로.

적어도 누군가를 만날 수만 있다면…… 

그의 핏빛 죽창이 앞을 막아 서는 두 명의 미간(眉間)을 노리며 뻗었다.

혈고죽(血枯竹)! 

냉설(冷雪)의 혈고죽이 좌우의 검사(劍士) 둘을 찌르며 길을 뚫었다.

하지만, 뒤쪽에서 혈고죽을 쫓아오는 이(二) 인(人)의  무공은 결코 냉설에 못지않

았다.

길을 뚫느라 등뒤에 허점이 드러난 바늘 같은 순간! 냉설 또한 무사할 수 없었다.

펑! 

"우욱!"

처음 일장은 겨우 피했지만 동시에 날아온 다른  자의 일권(一拳)은 그의 등을 갈

겼다.

냉설이 입으로 피를 뿜으며 날아갔다.

하지만 그가 여태껏 이런 자들을 피해 가며 도망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남

다른 신법 조예에 있었다.

비틀거리던 몸이 균형을 잡으며 다시 땅을 박차고 날았다.

"지독한…… 어서 쫓아라!"

호각 소리가 다시 냉설이 도주하는 방향을 지시했다.

사방의 숲에서 어지러운 소리가 나며 풀들이 흔들렸다.

사사삭`─` 

수많은 자들이 풀숲을 스치며 냉설을 쫓아갔다.

이제 냉설을 쫓기는 훨씬 수월했다.

그가 흘리는 피가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으므로.

이곳은 상여꾼들과 오(五) 리(里) 가량 떨어진 곳! 이제  그 거리가 서서히 좁혀지

고 있었다.

 * * * 

딸랑딸랑! 

멀리서는 요령 소리가 먼저 들렸다.

귀기울이고 들어 보니 이윽고 상여꾼들의 호곡 소리가 이어졌  "상여가 나가나 봐

요?"

섭수진이 말하고 이 각 정도의 시간이 지나, 그들은 상여를 볼 수 있었다.

꽃으로 장식한 거대한 상여를  여덟 명의 상여꾼이  메고 걸어왔다. 나무받침대를 

힘있게 붙잡은 그들의 손은 매우 굳건해 보였다. 누구나 무거운 상여를 들고 다니

다 보면 굳은 마디의 

손을 가지게 되리라.

뒤를 따라오는 소복 차림의 열 명 남짓의  남녀들은 설움을 이기지 못하는 듯, 고

개를 푹 숙인 채 걸음을 옮겼다.

누구의 죽음이건 죽음은 경건하고도 슬펐다.

그들의 조용하던 걸음은 언덕 위에 오르자 깨어졌다.

상여꾼 중 한 명이 돌을 잘못 밟아 비틀거리며 균형을 잃고 있었다.

한 기둥이 무너지자 무거운 상여 전체가 휘청거렸다.

경사가 가파른 언덕 위에서 휘청이는 상여는 확실히 위험해 보였다.

언덕 아래에서 상여 행렬을 쳐다보던 섭수진이 불안한 어조로 진소백에게 말했다.

"저거 잘못하면 떨어지겠어요."

만약 상여가 땅에 떨어진다면 언덕을 타고 바로 진소백 등이 서 있는 곳으로 미끄

러져 올 게다.

자신들이야 피하는 게 문제가  아니지만 말들은 문제가  달랐다. 경공술을 모르니 

뛰어 피할 수도 없었다.

불안한 예감은 잘 적중한다던가? 

섭수진의 예감이 적중했다.

"아이고! 이를 어째!"

놀랍고 안타까운 탄성(歎聲)과 더불어 상여꾼들은 그만 상여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사자(死者)의 마지막 걸음을 놓치다니……  이런 불경(不敬)이 어디 있을까?  몇몇 

남자들이 절박하게 외치며 잡으려 했지만, 이미 미끄러지기 시작하는 상여를 멈추

지는 못했다.

"잡아! 제발 잡아!"

대개 관의 재료는 가장 좋은 나무를 사용하니  무척 무겁고, 저승 가는 노자로 쇠

붙이를 넣기도 하니 더욱 무겁다.

무거운 상여는 언덕의 급경사를 타고 가속이 붙었다.

상여가 미끄러지는 방향은 진소백이 서 있는 곳과 일직선(一直線)! 말은 상여가 다

가오기도 전, 상여와 바닥 사이의 마찰로 일어나는 굉음(轟音)에 놀라 동요했다.

쿠르릉! 

진소백과 섭수진이 급히 몸을 날려 피할 때,  상여가 그들이 타고 있던 말들의 다

리를 쓸어 갔다.

미처 피하지 못한 두 필의 말이  애처롭게 울부짖으며 땅바닥으로 쓰러지고, 상여

가 몰고 온 흙먼지는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진소백과 섭수진이 허공을  한바퀴 맴돌아 바닥으로  내려섰을 놀란 소복(素服)의 

남녀노소들이 저마다 울부짖으며 달려왔다. 비탄과 애절한 울음! 

 진소백의 주위는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불쌍하군요. 도와 주는 것이……"

섭수진이 진소백을 보고 말했다. 

 소복을 입은 남녀들은 모두 달라붙어 진창에 박힌 상여를 빼내려 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고, 그 모습을 본  섭수진은 이미 자신들의 말이 죽는 피해를 

입었음을 까맣게 잊었다.

"좋소! 내가 나서 도와 주지."

진소백이 시원스레 말하며 앞으로 나섰다.

소매를 둘둘 걷어붙이고 나선 진소백은 우선 사람들을 일렬로 쭉 서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뒤에 섰다.

"자, 어서 힘을 내시오. 내가 영차 하고  외치면 모두 당기시오. 시작합시다. 영차! 

영차!"

그는 말로만 외치고 있었다.

일당의 우두머리는 요령을 흔들던 자였다.

그는 속으로 화가 났다.

'이런 젠장, 계획대로라면 이놈이 안으로 들어가 상여를 당겨 주어야 우리가 공격

을 할 텐데…… 밖에서만 저러고 있으니.' 

하지만 이왕 기다린 것! 

'조금만 더 기다리자.' 

하여튼 그도 열심히 줄을 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한 눈치를 채게 해서는 안 되었다.

섭수진은 의아했다. 하지만 진소백의  장난은 항상 뜻이  있었으니 조용히 있기로 

했다.

다만, 언덕 위에 막  나타나서 아래로 내려오는  노부부(老夫婦)가 마음에 걸렸다. 

걸음 하나하나가 모두 위태위태해 잘못하면 급경사에서 넘어질 것처럼  무척 불안

해 보였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녀는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왜 운구 행렬에 어린애나 노인은 하나도 없고 이삼십 정도의 장정들만 많은 것이

지? 게다가……' 

그녀는 상여를 나르던 일당 중 누구의 눈두덩이도 부어 있지  않음을 비로소 깨달

았다.

과연 진소백의 장난에는 뜻이 있었다.

"자, 자, 힘을 내시오. 모두 최선을 다해 당겨 봅시다."

진소백이 말하며 맨 뒤의 사내 등을 툭툭 쳤다. 사내는  몇 번 더 힘을 쓰다가 털

썩 쓰러졌다.

"어이, 이런! 당신이 힘을 덜 쓰니까 그런 거 아뇨?"

진소백이 말하며 이번엔 쓰러진 사내의 바로 앞 사내의 등을 쳤다. 진소백이 등을 

치는 자세는 너무 자연스러워 요령은  셋이 쓰러지고 나서야 어떻게  된 일인지를 

깨달았다.

"이런 빌어먹을, 들켰다. 덤벼라!"

요령이 급히 외치며 달려들었지만 이미 진소백은 준비하고 있었다.

줄을 당기던 소복들이 몸을 돌리기도 전에 진소백이 줄을 잡아 돌리자, 줄이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단번에 다섯을 바닥에 쓰러지게 했다.

몸을 왼쪽으로 쓰러질 듯 뉘였다가  곧바로 튕겨 내며, 요령과  대응이 빠른 소복 

일당 넷의 공격을 피했다.

동시에 그의 발길에 튕겨난 돌멩이 두 개가 어느새 소복 두 명의  이마를 깨며 피

가 흐르게 했다.

몇 초의 변식도 제대로 일어나지 않아 장내에는 소복 일당 중 그나마 강한 여섯만

이 남았다.

두목 격인 요령이 이를 갈았다.

"이놈의 자식! 이처럼 잔인하다니…… 읍!"

그는 말을 다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입 안 가득 주먹을 물고서 말하기는 불편했던가 보다. 주먹이 빠진 후에

도 그는 이빨 

예닐곱 개를 다시 뱉어 내고서야 말을 할 수 있었다.

"이 아식(:자식), 이거아게 마아느데(:비겁하게 말하는데)……"

그는 이번에도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진소백의 왼손에 감겨진 줄이 영교한 뱀처럼 머리를 들고 주위를 휘감았다.

요령은 급히 머리를 숙여 피했지만 나머지 다섯 명은 뱀의 세력권(勢力圈)을 벗어

나지 못했다.

따따`─ 딱! 

손바닥 두들기는 소리 같은 음향이 잇달아 일며 다섯 소복인이  사방으로 튕겨 나

갔다.

믿기 힘들게도 진소백은 한 줄기 끈만을 사용하여 다섯 명의  혈도를 짚었던 것이

다.

채찍의 끝을 사용하여 혈도를 짚는 것은 비록 어려우나 가능했다. 채찍의 끝은 납

덩이나 철편을 넣어 다루기 편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끈은 다르다. 끝의 무게가 특별히 무겁지 않으니 오히려 불편했다.

하지만 지금 진소백은 끈의 끝 부분으로 다섯 명의 혈도를 동시에 점하는 신기(神

技)를 보였던 것이다.

"우아아`─`!"

요령이 달아나며 외치는 소리는 분명 뜻이 있는 말이겠으나, 앞니가 다 빠진 그의 

말은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진소백이 씁쓸히 웃으며 줄을 던져 그의 발을 묶으려 했는데, 돌연 문제가 생겼다.

고갯길을 위태하게 내려오던 노부부! 

그만 그들 쪽으로 요령이 달려가고 있었던 것! 

부딪친다면 노인들이 위험하리라.

진소백이 급히 몸을 날리고, 섭수진 또한 동시에 움직였다.

요령이 간발의 차로 스친 노부부가 손을 흔들며 뒤로 넘어졌다. 그들의 손은 허공

을 저으며 균형을 잡아 보려 애썼지만 헛수고였다.

진소백과 섭수진의 손이 선후를 가리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그들의 겨드랑이로 다

가갔다.

산길에서, 먼지를 날리며 뛰어간 젊은이들의 손이 노인 둘의 겨드랑이를 파고드는 

모습은 확실히 보기 쉬운 광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넘어질 듯 위태위태하던 노인들의 손이 경기(勁氣)를 동반한 채 자신을 도

와 주려던 젊은이들의 목젖을 노리게 되는 상황은 더욱 보기 어려웠다.

게다가 전혀 방비가 없어 보이던 젊은이들의  손이 속도를 배가(倍加)하여 겨드랑

이 아래의 요혈에 일장을 가함으로써 노인들이 부득불 물러나게 만드는 상황은 평

생에 보기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 

그 세 가지의 보기 힘든 상황이 모두 일련(一連)하여 일어났다.

파박! 

몸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귓전을 스칠 정도로 네 명의  신형이 어지럽게 휘감겼

다가 다시 떨어졌다.

그러나 일시적인 떨어짐이었을 뿐이다.

두 노인의 몸이 젊은 사람보다 더욱 탄력있게 움직였다. "어떻게 알았느냐?"

늙은 남자가 외치며 진소백을 향해 일장을 다시 날려왔다.

진소백이 낭랑하게 웃으며 대응했다.

"하하! 노인치고는 손이 너무 곱지 않소?"

늙은 여자의 두 손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거의 동시에 섭수진의  전신(全身) 요혈

(要穴)을 압박했다. 

 네 곳의 방위(方位)가 모두 한 손 아래 들어가는 착각(錯覺)을 부르는  기이한 손

의 움직임! 섭수진은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며 급히 손을 들어 마주쳤다.

보라! 

 그녀의 손 변화도 늙은 여자와 비슷하지 않은가! 

퍼벙! 

서로 일보씩을 물러설 때, 섭수진이 날카롭게 외쳤다.

"금정산수(金頂散手)라니…… 당신은 누구요, 도대체!"

그녀는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늙은 여자의 손이 다시 좀 전보다 더욱 강한 변화를 일으키며 다시 다가왔으므로. 

음산한 기운이 전신을 노리자 섭수진은 비로소 깨달았다.

늙은 여인이 펼치는 것은 분명 금정산수(金頂散手)이면서도  금정산수가 아니었다. 

금정산수의 노수(路數)를 정확히 따라가는 무공이긴  했으나, 어딘가 달랐다. 금정

산수 어느 곳에 이처럼  음산한 변화가 있으랴?  섭수진은 마음속에 의문(疑問)을 

담은 채 자신의 금정산수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정통(正統)과 이단(異端)의 두 가지 금정산수가 격돌하며 전무후무한  대결이 펼쳐

졌다.

사정은 진소백도 마찬가지였다.

늙은 남자가 쏟아 내는 장력들을 막아 내던 진소백이 외쳤다.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

그랬다. 

 늙은 남자의 장법은 대력금강장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하나 어찌 소림의 금강장

(金剛掌)에 이런 음산한 기운이  서린단 말인가? 진소백이  무슨 생각인지 스스로 

끈을 버렸다. 

 그리고 낭랑한 외침! 

"좋아. 어울려 보자꾸나! 나도 간다."

믿을 수 없게 그의 손에서도  늙은 남자와 똑같은 대력금강장이  펼쳐지기 시작했

다.

하지만 웅장한 기세와 장엄한 서기가 서리는 이것이야말로 정통의 금강장! 퍼펑! 

여기에 또 다른 정통과 이단의 대결이 벌어지고 있었다.

 * * * 

혈고죽(血枯竹)은 완전히 지쳤다.

편안한 휴식, 죽음에의 유혹이 그를 수시로 찾아왔다. 하나 쉴 수는 없었다.

아무리 무의미한 도주라도 그는 해야 했다.

어쩌면 이 말을 전할 사람을 만날지도 모르지 않는가? * * * 

시간이 갈수록 섭수진은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정통이 이단과 싸워 밀리다니! 

원래 모든 무공은 기초부터 하나하나 익히는 것이, 비록 정진(精進)은 늦지만 끝내

는 대성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런데도 상대방이 시전하는 변화된 금정산수에  밀리다니! 섭수진은 마음이 어지

러워지며 더욱 큰 위기로 빠져 들었다.

진소백의 전음이 들린 것을 이때였다.

"초식에 연연(連延)하지 마시오. 무공 본래의 오의(奧意)를 생각하시오."

진소백도 싸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전음을 보내는 여유를 부릴 수 있다니! 하지만 놀라고만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섭수진은 황급히 정신을 수습했다. 

 영리한 그녀는 진소백의 말을 듣자 곧 깨달았다.

아미의 옥허검(玉虛劍)을 전개하면서 이미 어느 정도  깨닫고 있었던 무공의 깊은 

뜻! 어떤 변화를 통해 이 늙은 여자가  전개하는 이단의 금정산수가 탄생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이 변종(變種)은 확실히 초식 구사 면에서 정통의 것보다는 나았다. 그러나 

왜 정통이 잡다한 변화를 버렸겠는가? 

섭수진은 곧 알았다.

기이하게도 여태껏 흐릿한 안개 같았던 깨달음들이 지금의 대결에서  하나둘씩 뚜

렷한 형상을 갖추며 지혜로 흡수되었다.

그녀의 손이 오히려 느려졌다. 

 여태껏 초식에 연연하던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숨은 오의에 눈을 돌렸던 것이다.

이런 것은 어쩌다 찾아오는 하나의 기연(奇緣)이었다.

깨달음은 결코 긴 세월을 두고 천천히 오는 것이 아니다.

어느 한 순간! 

우연한 깨달음이 무인을 한 단계 더 높은 경지로 인도하는 것이다.

느린 손은 늙은 여자의 빠른 변화를 오히려 압박했다.

그 손은 단순히 느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무수한 변화의 가능성이 내재(內在)한 손! 

 외부의 자극을 받으면 산산이 흩어지는 민들레  꽃씨처럼, 무수한 초식이 쏘아져 

나올 손이었다.

늙은 여자는 태만하지 못하고 뒷걸음질쳤다.

그녀는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짐작도  못 하였다. 늙은 남자는  더 큰 위기에 

몰려 있었다.

진소백의 금강장(金剛掌)은 이미 전개 때부터 자신의 금강장을 압박해 왔으므로.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믿기 힘들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손을 마주쳐 나가는 늙은 남자! 펑! 

일장의 교환이 있자 다시 뒤로 세 걸음 물러나면서도 그의 눈에 떠오른 불신은 가

시지 않았다.

'우리 조직의 두뇌(頭腦)들이 수년간의  검토 끝에 다시 만든  금강장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그가 생각하며 계속 물러나는 사이, 진소백의  두 발은 땅위에서 미끄러지듯 그를 

따라붙었다.

그리고 늙은 남자의 귓전을 울리는 전음! 

"왜, 풍림서의 새 초식이 낡은 초식에 밀려나니 놀랐느냐?"

늙은 남자는 까무러칠 듯 놀라 외쳤다.

"너, 너는 도대체……"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리와 양쪽 가슴을 향해 삼점붕괴(三點崩壞)의 식으로  쏘아 오는 삼장을 막으며 

입을 열 만한 고수는 아니었으므로.

퍼퍼펑! 

"우`─`욱!"

세 개의 파열음이 연결되며 늙은 남자는 다시 칠 보를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진소백의 미끄러짐은 더욱 빨랐다.

"다른 무공은 없는가? 어서 보여라!"

진소백이 외치며 발을 향해 일장을 가하자 늙은 남자가 몸을 솟구쳤다.

곤륜의 신법이 가미되었음을 본 진소백이 낭랑히 외쳤다.

"오늘 많은 소득을 얻는구나. 누워라!"

진소백의 손이 허공을 가르며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늙은 남자를 감았다.

용음이 일었다. 

 개선비학 용음십이수(龍音十二手)! 

늙은 남자는 감당할 수 없었다.

이 무공은 처음 보는 것이기에.

그가 땅으로 쓰러질 때! 

 늙은 여자 또한 절명의 위기에 몰려 있었다.

섭수진의 금정산수가 더욱 느려짐에 따라 한층 두려운 기세가 늙은 여자를 압박해 

갔다.

섭수진의 싸움을 보는 진소백의 눈이 빛났다.

'역시 그녀는 자질이 있다.' 

지금 섭수진의 무공은 일순간의  깨달음으로 하나의 경계를  넘었다. 손이 천천히 

휘둘러질수록 깨달음이 더욱 완숙해졌다.

이윽고, 

"우욱!"

거의 아무런 변화도 없이 내밀어진 섭수진의  일수를, 늙은 여자는 감당하지 못하

고 가슴에 얻어맞지 게 아닌가? 

늙은 여자는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고, 섭수진은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방금 넘었던 무학의 경계(境界)를, 나름대로 가슴속에 정리하고  있는 것이

다.

 * * * 

두 노인은 손이 꽁꽁 묶인 채 꿇어앉아 있었다.

그 앞에 선 젊은 청년은 뒷짐을 진 채 매우 거만한 자세로  그들을 닦달하고 있었

다.

그다지 보기 좋지는 않았지만, 진소백이 사로잡은 노부부를  신문하는 모습이었다. 

진소백은 단지 한 가지를 물었다.

"심화절의 풍림서(風林誓) 내부 서열(序列)은 어찌 되오?"

늙은 남녀는 극도로 놀랐다. 

 단지 놀랐을 뿐 아무 대답도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진소백은 만족했다.

비록 대답은 없었지만 한 가지 질문으로 원하는 두 가지를 모두 알았던 것이다.

첫째 이들을 심화절이 보냈음과, 둘째 심화절의 배후가 풍림서란 집단임을!  두 노

인은 무공이 폐지되었다. 하지만 풀려나지는 못했다.

진소백은 신호전을 올린 채 그 자리를  떠났고, 어딘가에서 나타난 사람들이 그들

을 데려갔다.

진소백의 신호를 받고 온 사람들이.

개중에는 개방의 신법을 쓰는 자도 있었고, 다른 신법을 쓰는 자들도 있었다. 심지

어 좀 전에 늙은 남자가 시전했던 것과 비슷한 신법을 쓰는 자들도 있었다.

"진 공자! 도대체 그 풍림서(風林誓)란 뭐죠?"

"강호 집단의 이름이오!"

"하지만 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름인데요?"

"당연하오. 그들의 행사는 매우 무섭지만, 또한 매우 은밀히 진행되오."

"그럼, 진 공자는 어떻게 그들을 알고 있나요?"

"나와 인연, 아니, 악연이 있기 때문이오."

"좀더 자세히 말해 주세요."

"휴, 아직 때가 아니오. 이 일이 해결된 뒤에……"

"심화절의 일 말씀인가요?"

"그렇소. 암중으로 숨은 흑회 회주와 분면음마 제자의 일도."

"궁금하군요."

"아마 곧 알게 될 거요. 섭 소저도 역시 인연이 있으니……"

"……"

말[馬]이 없으니 경공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신형이 멀어졌다.

 * * * 

만일 진소백 들이 심화절이  보낸 살수(殺手) 때문에 말을  잃지 않았다면 산길을 

택하지 않았을 게다.

말은 산길을 달릴 수 없으므로. 

 하지만 말이 없는 지금, 보다 빨리 가려면  산속의 지름길을 택해 경공을 전개해

야 했다.

어쩌면 세상의 일이란 하늘의 안배를 하나도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사람이 영리하더라도 곳곳에 돌출하는 운명의 변수들을 어찌  모두 짐작하

겠는가? 순천자(順天者)만이 흥(興)한다는 진리의 속뜻이 여기 있었다.

때문에 항상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삶이 중요한 것이다.

신음은 바위 사이에서 들렸다.

냉설은 숨어 있었지만 바깥의 사정은 볼 수 있었다.

두 남녀가 다가오고, 둘 다 본 적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게다가 그 중 아미옥녀 섭수진은 결코  자신을 쫓는 이들과 한편이 될  수 없음도 

알았다.

그의 눈에 생기(生氣)가 돌아왔다.

비록 살기는 글렀지만 적어도 자신이 알아 낸 비밀만은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 자신을 쫓는 적들은  포기한 걸까? 그토록 악착같던  자들이 정말 포기하고 

돌아선 걸까? 아닐 것이다. 

 냉설은 급히 섭수진을 부르려 했다.

이 비밀은 한시 바삐 알려야만 한다.

바닥의 흙이 미동(微動)하며 무언가 뾰족한 것이 자신의 가슴을 찔러 온다고 느낀 

것은 바로 그때! 

냉설의 눈빛이 급격히 꺼져 가면서 머릿속에는 오직 한 생각만이 떠올랐다.

'알려야 하는데, 이 일을 알려야……' 

신음을 들은 즉시 몸을 날렸지만, 진소백은 냉설이 마지막 숨을 내쉼을 보았을 뿐

이었다. 주변의 풀숲 사이에서 뱀이 기어가는  듯한 소리가 들리자 진소백은 망설

이지 않고 몸을 날렸다.

"섭 소저, 그를 돌보시오."

진소백의 신형이 튕기듯 앞으로 폭주해 갔다.

궁신폭(弓身爆)! 

빠르기로는 천하의 일절이라는 신법이었다.

하지만 진소백이 발견한 것은 한 명의 복면인뿐이었다.

그 복면인은 도망가지 않고 진소백을 덮쳐 왔다.

오른손이 아닌 왼손에 검을 잡고 휘둘러 오는 기세가 매우 악독했다.

진소백이 놀라 고함쳤다.

"음마문(陰魔門)! 음마문의 좌수검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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