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25 장 암중동모(暗中動某) (26/32)

제 25 장 암중동모(暗中動某) 

"어림없다."

웅장한 외침에 이어 아추(兒醜)의  우수가 권(拳)도 아니고  장(掌)도 아닌 형태로 

적룡자의 음풍조에 대항하며 쏘아졌다.

음풍조의 기세에 비해 아추가 뻗은 경력은 매우 미약해 보였.

그러나 당사자인 적룡자(赤龍子)는 바로 알았다.

자신이 도저히 아추의 적수가 될 수 없음을.

그는 공동의 장로였으니 아추의 공력을 알아볼 수 있었다.

느린 듯 약한 듯, 은은한 칠채광(七彩光)이  아른거리는 아추의 손바닥! "육합구소

공(六合九 功)……! 너는 누구냐?"

적룡자가 놀라 외치며 아추의 일초에 밀려  정신없이 물러났다. 일장의 교환에 다

섯 걸음! 그는 눈앞의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아추는 풍운 진인을 부축하며 감회 어린 어조로 말했다.

"무사하셨습니까, 사부님!"

풍운 진인이 그제야 그를 알아보고 격동(激動)했다.

"일청! 정녕 청아(靑兒)가 맞는 게냐?"

아추, 아니, 파일청이 눈에 습막을 치고 말했다.

"제자입니다. 용서하십시오, 제자가 무능하여……"

공동일룡( 一龍) 파일청(巴一靑)! 

 그의 출현이었다.

 가짜 풍운 진인, 아니, 구자운이 신음하듯 말했다.

"사형! 당신이 살아 있었소?"

파일청이 외쳤다.

"닥쳐라. 아직도 사형이란 호칭이 나오더냐? 네놈이 용고, 저 악녀(惡女)와 결탁하

여 사부님을 해치고 나 

또한 죽이려 하였지만…… 흥, 하늘이 나를 다시 보내셨다."

파일청은 위기를 가까스로 벗어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비록 불바다 속에서 원래의 영준했던 얼굴은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으나…… 그는 

아추란 이름으로 공동에 잠입하여 때를 기다렸다.  암중 조사를 통해 적룡자가 이

미 용고의 편에 섰음을 알고 

있던 그가 사부인 풍운 진인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음은 단순히 운만은 아니었다.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나며 그는 우연히 실전되었던 공동 최고의  무학인 육합구소

공을 얻었던 것이다.

그 위력이 엄청나, 따로 신(神) 자를 붙여 육합구소신공이라고도 불리는 절정의 신

공! 남몰래 신공을 연마하며 참고 기다린  그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어느  정도 

무공에 자신을 얻은 그는 암중에  풍호진을 탈출시켜 오늘의 결과를  낳았던 것이

다.

진소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태껏 다른 사람들을 몇 번 도와 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도움으로 모든 사람이 좋은 결과를 얻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직 스스

로 노력하고 자구(自救)하는 사람만이  좋은 결과를 얻었다.  지금도 그랬다. 만일 

스스로 노력한 파일청이 없었다면 결과는 좋지 못했을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진리임을 다시 한  번 깨달으며 진소백은 

입을 열었다.

"용고, 아니, 존령(尊領)! 당신은 마지막 패(牌)마저 잃었소. 이제 당신은 회주의 정

체를 말해 줄 준비가 되었소?"

용고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심화절에게 당해 다시 공동을  발판으로 세력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또 네가 

나타나다니…… 하늘도 무심하구나."

풍운 진인이 일갈했다.

"간부(奸婦)! 어찌 하늘이 무심한 것이냐? 모든 것이 악행을 행한 네 잘못이거늘!"

용고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 당신도 꽤 괜찮은 사람이었지. 하지만……"

그녀의 눈이 몽롱해졌다.

"회주에 비한다면…… 흥, 누구도 회주에게 해를 끼치지 못한다. 세상 누구라도!"

그녀의 마지막 말은 거의 발작에 가까웠다.

용고가 발악적으로 외치며 풍운 진인을 노리고 날았다.

검은 경기가 손을 휘감으며 날카로운 소성을 질렀다.

"풍운조가 대성(大成)의 경지로구나!"

파일청도 놀라 외치며 육합구소신공을 자신이 익힌 최고 수준인 칠(七) 성(成)으로 

끌어올렸다.

파일청의 전력이 용고의 십이 성 풍운조와 어울리며 어지럽게 돌아갔다.

팡! 파팡! 

우열은 금방 드러났다.

십이 성의 개천풍운조가 칠 성의 육합구소공을 당하지 못하고 밀리고 있었다.

뾰족한 용고의 웃음이 장내에 가득 찼다.

"오호호!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생각했지. 하지만 난 멈출  수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당하고 있지만은 않는다."

그녀가 외치며 전력을 다해 파일청의 가슴을 노리며 짓쳐 갔  파일청 역시 육합구

소공을 담은 이지(二指), 일장(一掌)으로 그녀의 손톱을 옆으로 쓸어 갔는데, 

파팍! 

파일청의 지력(指力)이 이번엔 너무 쉽게 용고의 조력이 일으킨 방어막을 뚫어 버

리지 않는가! 

"우욱!"

파일청의 두 눈에 의혹이 떠올랐다.

그는 용고가 일부러 내력을 거두며 자신의 지력에 몸을 던짐을 보았던 것이다.

용고가 힘없이 웃었다.

"후후, 음모가 들통이 난 이상 내가 살아남는다면 이상하지."

진소백이 급히 달려왔다.

"존령! 어서 말해라, 어서! 누가 흑회의 회주인가?"

용고가 그를 보고 힘없이 웃었다.

그녀의 눈에는 득의(得意)의 빛이 있었다.

"말했었지. 넌 알아 낼 수 없다고. 넌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눈이 아련해지며 서서히 고개가 아래로 수그러졌다.

진소백은 그녀의 눈빛을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더라? 어디서 이런 눈을 보았더라?' 

 진소백의 의문과는 무관(無關)하게 장내에서는 네 명을 상대로 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장단이괴와 그의 두 제자는, 비록 무공이 낮지는  않았지만 공동의 수 많은 제자

들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아니, 파일청 하나도 감당할 수 없었다.

육합구소공을 익힌 지금, 그는 공동의 최고수라 할 수 있었다.

적룡자도 노룡자와 더불어 싸웠다.

어제는 사형제였던 그들은, 이제는 적이 되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이런 일들은 어째서 일어나는가? 

 * * * 

이곳은 광성전(廣成殿)이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이전과는 확연히 틀려 다른 곳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태사의에는 풍운 진인이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앉아  있었 "이제 미염(美髥) 

진인(眞人)이란 이름은 영원히 들을 날이 없겠구나."

옆에 서 있던 파일청이 고개를 저었다. 

 하인의 옷을 벗고 무복으로 갈아입은 그는, 비록 얼굴은 추괴했지만 기도만은 늠

연(凜然)했다.

"언젠가는 다시 자랄 것입니다. 언젠가는요!"

그의 말에 동의하는 음성이 있었다.

막 광성전으로 들어오던 폐의청년! 

"맞습니다. 공동이 입은 상처도 언젠가는 다시 아물 게구요!"

진소백이었다.

그가 들어서자 풍운 진인과 파일청이 동시에 외쳤다.

"진 공자!"

그들의 눈에는 감사의 염이 가득해 진소백은 오히려 무안함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풍호진과 구곡인! 

풍운 진인의 두 의형제인 그들을 보며 진소백이 말했다.

"제가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모두 이분들이 하셨지요."

하지만 그의 말이 겸손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진 공자! 은혜를 갚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소."

일동이 입을 맞추어 한 말이었다.

진소백은 미소 지었다.

"여러분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제가 언젠가 부탁할 일이 있을 겁니다."

풍운 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진 공자의 일은 곧 우리 공동( )의 일이오."

풍호진이 말했다.

"그럼 먼저 진 공자와 섭 소저를 엮어 주는 일부터 시작함이 어떻겠소?"

진소백이 그를 쳐다보았다.

"상당히 좋은 생각이긴 합니다만, 아직 때가 아닙니다. 제가 스스로의 앞가림도 못 

할 것 같습니까? 그보다는 풍  선배에게 좋은 아줌마를 하나 소개시켜  드려야 할 

것 같은데…… 

오 년이나 갇혀 지냈으니…… 그곳이 이미 썩지 않았겠습…… 읍!"

진소백이 입을 다물었다.

섭수진이 들어옴을 봤던 까닭이었다.

"어디가 썩는다는 것이죠, 진 공자?"

섭수진이 알아듣지 못한 것은 행운이었지만, 계속해서 묻자 진소백은 당황했다. 뭐

라 대꾸하지도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로 있을 때! 풍호진이 지원 사격에 나섰다.

"목이 썩을 지경이라네. 오 년이나  술 구경도 못 했으니  어찌 목이 썩지 않겠는

가?"

풍운 진인이 이때다 싶어 크게 외쳤다.

"어서 술을 가져 오너라. 내 오늘 마음껏 마시겠다."

섭수진이 고개를 끄덕일 때야 비로소 진소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하!"

웃음 소리가 퍼져 나갔다.

공동을 찾아들었던 암운(暗雲)은 걷히고  웃음 꽃이 활짝 피었  고난 끝에 찾아온 

평화는 더욱 소중했다.

어둠은 음모의 기운(氣運)이다. 

 지금 그 어둠이 괴인(怪人)의 분노로 굽이치고 있었다.

주위의 어둠만큼이나 어두운 분위기의 인물! 

"진소백! 그리고…… 심화절!"

괴인의 손이 땅을 치자 땅에서 두 개의 돌이 날아올라 전면의 벽을 향해 날았다.

벽에는 두 사람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진소백과 심화절의 전신(全身)이었다.

돌은 두 그림의 머리 부분에 정확히 부딪쳤다.

퍽! 

돌가루가 튀며 그림은 모두 머리 없는 형상으로 변했다.

"처음 고숭무와 적염을 이용해 비응방을 손에 쥐려던 계획은 심화절과 진소백, 게

다가 멍청한 구자운(邱自雲)의 질투로 실패하고 말았다."

괴인이 냉소했다.

"흥! 적염이 자신의 것이라 여겼다니! 구자운, 그놈이  암중에 정보를 흘리는 바람

에 고숭무가 제거되고 말았다."

그랬었나? 

옥산의 흑회 위치와 고숭무의 파황권이 그렇게 쉽게 노출된 배경에는 구자운의 입

김이 있었던가? 

원래 구자운과 적염은 깊은 관계에 있었다.

그것을 흑회의 괴인이 갈라  놓고 적염을 비응방으로  들여보냈던 것이다. 적염이 

비응방에서 고숭무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자 구자운은 은근히 정보를 흘려 고숭

무의 제거를 시도했던 것이다.

"흥, 그러나 난 자신이 있었다. 옥산에 있는 흑회의 힘만으로도 심화절의 비응방을 

삼킬 자신이 있었다. 더불어 광산도 내 것으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괴인은 또 실패했다.

심화절의 능력 또한 상상 밖이었기 때문. 

 옥산의 흑회(黑會) 세력은 심화절에 의해 지리멸렬했다.

무엇보다도 심화절의 배후에 다른 세력이  있음을 몰랐던 것이 가장  큰 패인이었

다.

"그 세 늙은이의 무공은 상상 밖이었다. 하지만……"

괴인이 돌을 하나 더 들어 심화절을 향해 던지자 심화절의  몸통이 날아가며 팔과 

다리만이 남았다.

"난 여전히 자신이 있었다. 옥산의  흑회가 아니더라도 다른 방법이  있었지. 나는 

존령을 급히 후퇴시켜 후일을 

도모케 했다. 공동파를 움직여 심화절과 양패구상(兩敗俱傷)시키는  작전은 최후의 

수단이긴 했지만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괴인은 화가 치미는지 좌수(左手)를 날렸다. 

 우지직! 

돌이 두부처럼 부서지며 진소백의 그림이 뭉개졌다.

"네놈이 모든 일을 망쳐 버렸다. 진소백!"

어느새 뽑아 든 걸까? 

 괴인의 좌수에는 어느 틈에 칼이 쥐어져 사방의 벽을 몰아치고 있었다.

돌가루가 날리며 벽에는 그림이 있었던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가공할 쾌! "하지만 

변하는 것은 없을 게다. 내가 전면(前面)에 나서는 시간이 늦춰졌을 뿐!"

그의 칼이 사방을 휘감으며 날아올랐던 돌부스러기마저 가루가 되어  바람에 날려

갔다.

"숨어 있어야 하는 시간이 는다는 얘기는 무공을  익힐 시간도 늘어난다는 뜻! 언

젠가는 내가 모든 걸 가지리라."

 괴인은 생각했다.

힘을 가져야 한다. 사문의 원한을 갚을  힘을! 자신이 익히는 무공은 충분한  힘이 

될 것이다.

괴인은 또 생각했다.

돈도 가져야 한다. 

 비응방의 광산! 

 그보다 돈이 될 일이 또 있으랴? 

 * * * 

강호의 소문은 빠르다. 

 금사진의 죽음은 금방  소문이 나서, 강호에서는  비응방의 금사진이 사망했음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엽혼의 죽음은 누구도 모르고 있었다.

강호인들 대부분은 비응방의 비사(秘事)에 엽혼이란  자가 관계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지공(知空) 대사는 물론 엽혼이 금사진과 관련이 있음은 알았다. 하지만 엽혼이 이

미 죽었음은 몰랐다. 

 그가 매우 편안한 마음으로 생을 마쳤다는 사실을 지공은 전혀  몰랐다. 아니, 짐

작도 못 했다.

만일 알았다면, 그가 지금 심화절과 면대(面對)하고  있을 까닭이 없었다. 지공 대

사가 알고 있는 것은  다만 소림방장 현공(玄空) 대사가  엽혼을 구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지시했다는 사실! 

─`그가 진정 초의 선사의 제자라면…… 초의(草衣) 선사(禪師)께서는 비단 소림의 

어른이실 뿐 아니라 

전무림의 은인이시기도 하셨소. 그분이 붙잡으신  무림 공적들이 어디 하나둘이었

소……? 지공도 알고 있었다.

해서 그는 급히 돌아왔다.

그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고숭무가 원흉으로 밝혀져 흑회가 심화절에 의해 멸망했

으며, 엽혼은 

죽고 없었지만, 지공은 엽혼에 관한 것만은 전혀 듣지 못했다.

아니, 엽혼의 일은 강호 누구도 몰랐다.

안다면 진소백과 섭수진, 금청청과 매일도 정도? 

이처럼 사실이 새나가지 않은 이유는 분명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사실의 누설을 막고 있다는 것! 지공은 비응방의 새 방주로 심

화절(深化絶)이 취임했다는 사실은 알았다.

'그는 군자이니 엽혼을 살려 줄지도 모른다.' 

지공의 생각이었고, 또한 그가 지금 심화절과 면대(面對)한 이유였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엽혼을 살려 줄 수는 없습니다."

심화절이 굳게 말했다.

지공이 그를 설득했다.

"물론 방주의 입장은 아오. 하지만 듣기로 고숭무가 이미 원흉으로 밝혀졌다 하였

소. 따져 보면 엽혼 또한  희생자라고 할 수 있으니…… 방주가  인정을 베푸시오. 

더구나 초의 선사가 무림에 행하셨던 많은 업적을 고려해 주시오."

지공의 말에 심화절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초의(草衣)! 

이 이름의 위력은 그만큼 컸다.

한참을 생각하던 심화절이 곤혹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대사! 그가 초의 선사의 제자라는 확증(確證)은 없지  않소이까? 만일 

그를 살려 주려면 명분(名分)이 필요합니다. 그가 진정으로 

 초의 선사의 의발(衣鉢)을 이었음이 증명된다면……"

심화절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눈을 빛냈다.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초의 선사께서 직접 나타나 엽혼의 사면(赦免)을 요청하신

다면 제가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심화절이 힘차게 말했다.

"이렇게 하겠습니다. 닷새 후, 엽혼의 처형(處刑)을 공개적으로 행하겠습니다. 만일 

그때 초의 

선사가 나타난다면 엽혼은 사면받을 것입니다."

지공으로서도 더 이상 양보를 종용할 수 없었다.

"좋소. 모든 방법을 동원해 초의 선사를 찾아보도록 하지요."

초의 선사는 거처가 없이 천하를 떠도는 사람이었다.

닷새라는 기간은 짧긴 했지만 지공은 반드시 연락을 취해 보리라 결심했다.

"대사를 모시거라."

심화절의 지시에 따라 수행인이 지공 대사를 수행해 나감을 보고 심화절이 고개를 

돌렸다.

"어서 나오시오."

심화절이 말하자 어둠 속에서 한 인물이 걸어나왔다.

"자네의 무공은 나날이 늘어 이젠 내가 당할 수가 없네."

"과찬이오, 노존(老尊)!"

노존은 어깨에 한 인물을 메고 있었다.

혈도가 짚힌 듯 축 늘어진 자를 노존은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얼굴이 드러났는데…… 이럴 수가, 엽혼이 아닌가? 하지만 불가능했다.

옥산의 목옥에서 소화의 손을 잡고 죽은 엽혼이 어찌 여기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인

가? 그는 엽혼일 수가 없었다.

석실에 누워 엽혼을 가장하고 있던 개방의 복칠(福七)! 그의 정체가 탄로났던 것이

다.

"어이쿠!"

노존이 땅에 내려놓으며 아혈을 풀어 주자  복칠이 외쳤다. 내려놓는 기세가 강렬

하여 엉덩이가 아팠기 때문이다.

심화절이 그를 보더니 말했다.

"엽혼! 며칠 후면 네 사부가 오실 게다."

복칠이 말했다.

"이런 제기, 내가 엽혼이 아님은 당신이 더 잘 알지 않소?"

심화절이 고개를 저었다.

"안 될 말이지. 자신을 부정하다니. 계속 거짓말만 한다면 네 입을 봉해 버리겠다."

심화절이 정말 아혈을 봉했으므로 복칠은 말을 못 하고 눈만 데구루루 굴렸다.

"네가 엽혼이 아니면 또 어떠리. 초의(草衣)는 이미 한 번 비응방에 왔으니 반드시 

너를 구하러 올 것이다. 그때는…… 후후!"

노존이 심화절을 보고 물었다.

"자네는 정말 초의 선사를 죽이려는 겐가? 그가 이 가짜 엽혼에게 속을까?"

"왜 속지 않겠소? 진소백, 그 녀석이 우리를  위해 이렇게 가짜 엽혼을 만들어 주

었으니…… 고마운 일이잖소?"

노존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아직 흑회의 존령이란 자를 없애지도 못했고, 또 회주는 나타나지도 않았

네. 그들도 조심을 해야……"

심화절이 웃으며 말했다.

"이미 존령이 공동의 용고(鏞姑)임을 알아 냈소. 내가 여유가 없어 존령을 놓친 줄 

아시오?"

노존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을 어찌 대처하려는 건가? 더불어 초의 선사까지 감당한다는 건 너무 

무리가 아닐까?"

심화절이 웃으며 말했다.

"만일 우리가 초의를 없애는 일에 성공한다면 서(誓)의 요직에 단번에 오를 수 있

을 거요. 서에서 특별히 삼공까지 보내 주질 않았소?"

그래도 불안을 감추지 못하는 노존을 보며 심화절이 말했다.

"공동의 일은 걱정하지 마시오. 나 대신  공동에서 흑회의 뿌리를 뽑아 줄 사람이 

있으니까!"

노존이 놀라 물었다.

"누구 말인가?"

심화절이 말했다.

"진소백과 섭수진 말이오. 그들은  틀림없이 공동에 숨은  흑회의 뿌리를 뽑을 수 

있을 거요."

노존은 비로소 안심했다.

"자네 말을 들으니 마음이 편해지는군! 자네는 참 대단한 사람이네."

"후후! 진소백이 나를 의심하는 눈치를 챘음에도 그를 그냥 둔  것은, 그를 이용해 

흑회를 상대하고자 함이었소."

심화절이 웃으며 다시 말했다.

"만일 공동의 흑회 제거가 끝이 난다면 진소백은 내가 보낸 암살자들에 의해 제거

될 거요. 후후, 우리 풍림서(風林誓)에서 보낸 삼공(三公) 중 둘이라면 그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무사할 수 없을 거요."

노존은 비로소 알았다.

심화절이 생각보다 더욱 뛰어나고 무섭다는 것을! 

노존은 그가 왜 아직 풍림서의 핵심부로 들어가지 못했는지가 궁금할 지경이었다.

매일도와 금청청은 지공 대사가 서둘러 비응방을 떠나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매우 급한 듯, 주위에 금청청과 매일도가 있음도 알아보지 못했다.

"어딜 저렇게 서둘러 가는 걸까요?"

궁금함을 느낀 금청청이 물었지만 매일도라고 알 리 없었다.

"글쎄, 어쨌든 지금은 우선 심화절의 일부터 해결하기로 하지. 우선 어떻게 들어갈

지 생각해 보자구!"

"무슨 말이에요? 그냥 들어가서 한바탕 해보면 되지!"

금청청의 말에 매일도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 않아. 심화절이 마각을 드러내어  우리를 공격한다면 매우 위급한 처지에 

빠질 수도 있어. 사매는 그의 무공을 잊었나?"

옳은 말이었다.

금청청은 심화절이 고숭무와 싸우던 모습을 생각했다.

만일 그가 본색을 드러내어 덤빈다면 둘이서 당해 낼 자신은 없었다.

"좋아요. 그럼, 어떻게 할까요?"

"글쎄, 진 형의 말대로 유품(遺品) 핑계를 대고 들어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아무래

도 일단 몰래 들어가서 

정탐(偵探)부터 해보는 게 어때?"

자신의 할아버지가 세우고 아버지가 방주로 있던 분파에 숨어들게  되다니…… 금

청청은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많지 않았다.

"좋아요. 그렇게 해요! 제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 * * 

 "제기랄! 어떻게 된 게 꼭 나만 밤에 일을 시켜요. 지들이 하면 어디가 덧나나?"

아패(阿覇)는 하인들 사이에서 서열(序列)이 높지 않았다.

때문에 밤에 할 일이 생기면 거의가 그의 몫이었다.

오늘도 그는 투덜거리며 마당을 쓸고 있었다.

한참 마당을 쓸고 있을 때,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헤에, 또 요놈의 자식들이 장난을 치려는구나.' 이전에도 밤중에 고참들의 장난에 

몇 번 당한 적이 있던 아패는  이번에도 누군가 자신을 골리려고 부르는  줄 알았

다.

'당할 줄 알고!' 

자신에게 걸어오는 그림자를 보지 못한  척하면서 열심히 마당을 쓰는  아패는 곧 

몸을 돌려 고함을 질러 오히려 상대방을 놀래 주려고 벼르고 있었다.

이윽고, 상대방이 자신에게 가까이 왔음을 느끼자, "왁! 어이쿠!"

고함을 지르던 아패가 뒤로 나동그라졌다.

상대방이 갑자기 그의 뺨을 때렸기 때문이다.

강호인의 일격을 무공도 모르는 그가 당해 낼 리 없었다.

아패는 정신을 잃었다.

"이런! 무공을 모르는 자를 그렇게 세게 때리면 어떡하나, 사매!"

뒤에 오던 매일도가 나직이 금청청을 나무랐다.

"이놈이 갑자기 고함을 지르기에……!"

금청청이 입이 나와 말했다.

'여긴 어디지?'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아패는  눈앞에 선녀처럼 예쁜 처녀가  앉아 있음을 

보았다. '내가 죽은 건가?' 

헛생각을 하던 아패(阿覇)는 눈앞의 선녀가 낯이 익음을 알았 "아이구! 아가씨께서 

어쩐 일이십니까요?"

정색을 하며 아패는 몸을 일으켰다.

금청청이 나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조용히 해라. 몇 가지 물을 게 있다. 혹시 최근에 새로 들어온 노인 셋이 어디 묵

고 있는지 아느냐?"

아패는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저야 잘 모릅지요. 아마 노대, 아니, 장육삼이라면 잘 아실 텐데요. 하인들

을 단속하느라 항시 돌아다니니……"

좋은 생각이라고 금청청은 느꼈다.

"어서 장육삼을 데려오너라. 한데…… 명심해라. 절대 딴 사람에게 내가 왔음을 알

려서는 안 된다."

아패가 고개를 숙이며 장육삼을 데리러 나갔다.

금청청은 매일도를 돌아보며 말했다.

"일단 하인들과 접촉하는 건  좋은 생각이었죠, 사형?  하인들이야 강호의 인물이 

아니니 배신할 리가 없지요."

매일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 아패와 장육삼이 달려왔다.

장육삼은 버선도 제대로 신지 않고 왔다.

"아이고, 아가씨! 어서 오십시오.  뭐 하는 게냐? 어서  차라도 내오지 않고. 아니, 

아니다. 내가 내올 

테니 너는 방에서 아가씨를 잘 모시거라."

그는 호들갑을 떨더니 나갔다.

장육삼이 너무나 반갑게 맞이하자 금청청은 고향에 온 듯한 따뜻함을 느꼈다.

장육삼이 내온 차도 따뜻했다.

"물론 그들의 거처를 알고는 있습니다. 한데 왜 그러시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금청청은 심화절에 관해 밝혀진 일들을 모두 얘기해 주었다.

하인들이 우두머리에게 말해 무슨 소용이  있겠냐마는, 답답한 마음이나마 풀려는 

것이었다.

다 듣고 난 장육삼의 표정이 심각했다.

"정말 예상도 못 했던 일입니다."

아패가 거들고 나섰다.

"정말입니다요. 심 방주가 그런 사람이었다니…… 난 이때까지 방주를 존경했었는

데, 앞으로는 바꾸기로 

하겠습니다. 휴, 그런데 앞으로 누굴 존경하지? 이거 고민이네."

장육삼이 아패를 보고 차게 말했다.

"넌 고민할 필요가 조금도 없다."

아패가 물었다.

"엥! 그게 무슨 말입니까요?"

의문은 곧 풀렸다. 

 아패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을 뿐 아니라 아예 고민할 수조차 없었다.

장육삼의 중지(中指)가 경기를 가득 담고 아패의 가슴팍에 박히자,  아패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손가락 하나로 사람을 죽임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매일도와 금청청은 크게 외치며 공력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네놈은 누구냐?"

매일도와 금청청은 장육삼의 일초를 감당하지 못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장육삼이 머리를 흔들었다.

"쯧쯧, 네 아비는 우리가 십 년간이나 공을 들였어도 제대로 독을 쓰지 못했다. 적

염(狄艶) 고것이 대신 독을 써주지 않았다면 영원히 성공 못 했을 것이다."

그는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런데 너는 같은 독에 두 번이나 당하다니…… 쯧쯧!"

금청청과 매일도는 치솟는 노화(怒火)를 참기 어려웠다.

오보산(五步散)에 두 번이나 당하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장육삼이 금청청의 뺨을 톡톡 치며 말했다.

"잘 알아 두거라, 아가야. 강호상에서 가장 조심할 상대는, 힘없고 착해 보이고 네

게 잘 대해 주는 사람이란다. 명심하거라."

금청청이 노하여 고함치자, 그녀의 아혈(啞穴)마저 막아 버리며 장육삼이  말을 이

었다.

"네가 비응방에 있던 것이 얼마나 된다고 내가 그처럼 반갑게 맞았겠느냐?"

방문이 열리고 심화절이 들어왔다.

"그만 하시오. 그들은 똑똑하니 충분히 알아들었을 게요."

심화절은 지금 비응방의 방주를 상징하는 금응이  선명(鮮明)한 장삼을 걸치고 있

었다.

금청청의 눈에는 불꽃이 일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혈이  짚힌 상태가 아닌가? 심화절이 매일도를 

보더니 물었다.

"자네는 왜 입을 열지 않는가?"

매일도가 금청청을 보고 나서 쓰게 웃으며 말했다.

"혈도를 눌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오."

심화절이 껄껄 웃었다.

"하하! 정말 아까운 젊은이로군, 이처럼 똑똑하다니.  자넬 죽일 수밖에 없으니 유

감(有感)이로세!"

매일도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우릴 죽이지 않을 거요."

심화절이 놀라서 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가? 난 손짓 하나로도 자네들을 죽일 수 있다네."

"휴! 당신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 어떤 변수(變數)가 일어날  지 모르지. 흑회

의 회주는 아직 나타나지도 

않았고, 진소백의 능력  또한 대단하여 언제  당신의 뒤통수를  칠지도 모르지 않

소?"

매일도가 숨을 고르더니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인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소."

심화절이 유쾌하게 웃었다.

"자네는 정말 똑똑해. 난 너무 유쾌하다네. 내가 자네를 어찌하면 좋겠나?"

"우선 따뜻한 방과 따뜻한 음식을 주시오. 우린 배가  고파 쓰러질 지경이오. 인질

이 쓰러진다면 가치가 없어지질 않겠소?"

심화절이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말이 옳네. 그럼 우선 급한 대로 그 따뜻한 차나 마저  들도록 하게! 몸이 

훈훈해질 걸세."

매일도는 지체없이 마셨다.

금청청도 매일도의 눈짓을 받고 할 수 없이 마셨다.

차를 마시지 않으면 심화절이 안심하지 않을  테고, 심화절이 안심하지 않으면 자

신들을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심화절이 껄껄 웃었다.

"앞으로 자네가 이끌어 갈 화산의 앞날이 궁금해지는군. 난 똑똑한 젊은이를 좋아

한다네."

그는 소리를 죽여 말하며 매일도를 쳐다보았다.

"부디 죽지는 말게. 난 머리 좋은 사람과의 대결을 좋아한다네……"

노존은 비로소 왜 심화절이 아직 풍림서(風林誓)의 핵심부로 들어가지 못했는지를 

알았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과신(過信)하여  다른 사람과 지혜 대결을  벌이는 것을 너무 

좋아했다.

하지만 강호의 일은 도박이 아니었다. 생존이었다.

아득히 멀어지는 정신의 한쪽 끝을 애써  잡으며 매일도가 가까스로 말을 남겼다. 

"그렇다면 진소백을 다시 만나면 더욱 즐거울 것이오."

비단 즐겁기만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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