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24 장 풍운(風雲) (25/32)

제 24 장 풍운(風雲) 

 "어서 풍운 진인을 불러오지 않고 뭘 하는 게냐?"

거지가 감히 공동의 광성전(廣成殿)에 앉아 큰소리를 치다니.

그러나 이 거지만은 그것이 가능했다.

누구도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개방의 인의신개가 큰소리칠 수 없는 곳이 천하에 어디 있을  공동의 제자들이 난

감해할 때 문이 열리며, 네 명의 옹위(擁衛)를 받으며 한 인물이 들어왔다.

사람들은 그가, 아니, 그녀가 나타나자 즉각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인의신개만이 냉소했다.

"흥! 언제부터 공동에서 안사람이 장문인의 일을 대신하게 되었소?"

장단이괴(長短二怪)와 그들의 두 제자가 용고를 호위하며 나타난 것이다.

인의신개의 말은 그들의 눈에 살기가 서리게 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용고는 태연히 말을 받았다.

"호호, 인의신개께서 여자를 무시하는 성미이심을 내 오늘에야 알았군요."

화가 나기는 했지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천하대방 개방을 함부로 건드릴 문파는 강호에 별로 없었다.

"방주께서는 장문인과 무슨 볼일이 있으신가요? 혹시 좋지 않은 일이라도……?"

용고가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 같은 시기에 개방과 시비가 붙는다면 전혀 좋을 게 없었다. 인의신개는 평소 

화를 내는 법이 거의 없다고 알려졌다. 한데 지금 이처럼 화가 난 이유는 뭘까? 

무언가 아주 좋지 않은 사연이 있어 보였다.

만일 그렇다면 용고로서는 큰일이었다.

"흥, 이것은 적 장문인과 나와의 개인적인 일이니 어서 장문인께 나오시라 전하시

오."

그는 완강했다.

용고는 잠시 생각하다 방법이 없음을 알았다.

다른 대안이 없는 이상, 오래 생각하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암중에 그녀가 보낸 눈짓을 보자 한 명이 뜻을 알아차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일단 자리를 편하게 하시지요."

용고가 푹신한 모피의자를 다시 권했다.

인의신개는 지체없이 좌석을 바꾸었다.

"이게 더 푹신하구먼."

그는 몸을 몇 번 뒤척여 보더니 좌중을 둘러보았다.

"공동의 풍운 진인 문하에, 하나는 용(龍)과 같고 하나는 개와  같은 제자 둘이 있

단 말을 들었소. 

한데 어째 아무도 보이지 않는구려?"

그랬다. 

 대제자 파일청(巴一靑)은 그 자질이 용과 같고, 이제자 구자운(邱自雲)은 그 망동

(妄動)이 개와 

같다는 소문이 강호에 실지로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잘못 알려졌다.

이제자 구자운의 행동은 결코 개와 같지 않았다.

실제로는 개보다 훨씬 못했다. 

 용고의 미간에 노기(怒氣)가 일었다. 

 하지만 이내 노기는 어두운 안색 속으로 사라졌다.

"강호의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오히려 파일청의 악행이 심했지요."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파일청의 만행을 막다가 그만 구자운도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 뒤 파일청은 

행방이 묘연해졌고…… 어쨌든 이 일은  저희 공동의 비극이라 더  이상 거론하고 

싶지가 않군요."

용고의 표정은 매우 어두워 진심으로 슬퍼하는 것 같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완전히 속겠네, 아줌마!' 

이 말을 하고 싶어 인의신개는 입이 간질거려 죽을 지경이었  어쨌든 그녀가 말을 

마치는 순간, 입구에 도열한 제자들이 일제히 외쳤다.

"장문인께서 드십니다."

적일수의 얼굴은 창백했다.

"빨리 맞이하지 못했음을 용서하시오."

인의신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직접 보니 몸이 매우 불편하신 것 같소."

당연했다. 흑회의 일로 용고한테 잡혀 심한 고문을 당했으니.

급히 용고가 거들었다.

"자식을 갑자기 잃었습니다. 이해하십시오."

인의신개가 속으로 생각했다.

'흥, 적염이 어찌 이놈의 자식이더냐? 계부의  사랑보다 친모의 사랑이 더 얕다는 

말이지. 그것만 보아도 네가 악녀(惡女)임을 알겠다.' 

인의신개가 속으로라도 이런 생각을 할 리가 없다.

그는 변장한 진소백이었다.

인의신개, 아니, 진소백은 두 손을 모았다.

"드디어 십년지약(十年之約)이 끝나는 시점이 되었소. 어서 빚을 갚으시오. 당연히 

기억하고 있으시겠지?"

기억할 리가 없었다.

설령 진짜 풍운 진인이라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연했다. 진소백이 즉석에서 지어 낸 약속이므로.

풍운 진인, 아니, 가짜는 마른침을 삼켰다.

인의신개와의 사이에 무슨 십년지약이 있었는가? 

그는 필사적으로 추측했다.

등골로 땀이 흘러내렸다.

 * * * 

동굴 안은 어두웠다. 

 곳곳에 위치한 특이한 종유석(鐘乳石)과 석순들은 기묘(奇妙)한 분위기를  연출했

다.

섭수진과 풍호진은 조심스레 그 사이를 돌아 나갔다.

미성(微聲)조차 내지 않는 신법! 

그러나 종유석 어딘가에서는 반응이 있었다.

그토록 조심을 했건만 발견되고 만 것이다.

그림자는 진짜 그림자처럼 종유석 사이에서 나타났다.

수효는 모두 셋! 

동굴 안을 지키는 자들이었다.

믿을 수 없이 빨랐다.

나타난 즉시 섭수진과 풍호진을 덮쳤지만 일체의 질문도 없었.

예고없이 나타날 수 있는 자는 존령(尊領)에 불과했다.

존령이 아닌 자가 나타난다면 그림자들이 보이는 반응(反應)은 단  하나, 제거뿐이

다.

대화도 죽여 놓고 난 후에 하는 것이 그들이 평소에 받았던 훈련이었다.

"흡!"

급히 숨을 들이쉬며 풍호진의 회풍전(回風錢) 두  개가 돌개바람을 일으키며 날았

다. 동시에, 어느새 섭수진의 손에도 검이 들렸다.

미미한 바람! 

 섭수진의 검이 흔들렸다.

믿기 힘들게도 그녀의 미풍 같은 검세(劍勢)는  회풍전보다 늦게 발동했는데도 더 

빨리 세 그림자의 허리를 베어 갔다.

스걱! 

한 명의 허리에 긴 상흔(傷痕)이 새겨졌다.

하나 이런 상처에도 신음조차 흘리지 않음은 그들의 평소 훈련이 매우 혹독했음을 

뜻한다.

혹독한 훈련을 받은 자들의 무공이 녹록할 리가 없었다.

상처를 무시한 채 그대로 검을 휘두른다는 것도 이런 추리를 뒷받침해 주었다.

"차압!"

섭수진의 검이 변화(變化)를 일으켰다.

느린 듯 보였지만 어느새 이동하여 그림자의 검을 막았다.

이때 다른 두 복면인은 한번 쳐냈던 풍호진의 회풍전(回風錢)이 다시 돌아옴을 보

고 경악했다.

휘류루! 

회풍전이 공기를 감는 소리가 금방이라도 귓가에 들려 올 것 같았다.

섭수진은 한 명과 싸우고 두 명이 풍호진을 상대했다.

찰나지간 순간적인 판단으로 그림자들이  암중에 나눈 배치였지만 이것은  분명히 

실수였다.

그림자는 고수였다.

한 명이 검을 휘둘러 두 개의 회풍전을 모두 쳐냄과 동시에 다른 그림자는 풍호진

의 가슴 요혈을 노리고 찔러 왔다.

슉! 

풍호진의 손에서 다시 하나의 돌개바람이 더 솟아났다.

세 개째의 회풍전! 

지금의 풍호진으로서는 최대였다.

동시에 진기를 움직여 튀어오른 회풍전들도 다시 조정했다.

세 동전과, 아니, 세 바람과 두 그림자가 어울렸다.

섭수진의 검은 느린 듯 보였으나, 그림자는 피하기 어려웠다.

어느새 그는 전신에 일곱 개의 검흔을 입었다.

느린 듯 어깨를 노리며 다가오던 검을 몸을 숙여 피했다 싶었던 것은 그의 착각이

었다.

순간, 여전히 섭수진의 검세에 노출된 어깨가  찌릿한 느낌과 더불어 팔이 마비됨

을 복면인은 깨달았다.

영원히 열릴 것 같지 않았던 그의 입이 열렸다.

"옥허검(玉虛劍)?"

아미파의 옥허삼십육검(玉虛三十六劍)이 지금 섭수진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림자는 검을 알아볼 안목은 있었으나 피할 실력은 없었다.

섭수진의 검이 그의 오른쪽 어깨를 찔러 팔을 마비시키자 그는 검을 잡지 못했다.

어깨의 상처가 허리의 것과 어울리자  그림자의 동작은 더 이상  그림자가 아니었

다.

그림자들의 가장 큰 이점이던 경공이 무너지면서 섭수진의 검은 더욱 영활해졌다.

"우욱!"

급해진 걸까? 

그림자의 입이 계속 열리다니! 

섭수진의 검이 그의 왼쪽 어깨와 가슴의 요혈을 제압했다. 그가 쓰러질 때, 섭수진

의 몸은 어느새 삼 장(丈)의 거리를 날아 남은  두 그림자 중 하나를 노리고 있었

다.

풍호진이 고전하는 모습을 보았으므로.

세 개의 회풍전이 눈을 어지럽히며 쏘아 왔다.

그림자는 검을 삼점혈홍(三點血紅)의 식으로 휘둘러 다급히 쳐냈지만, 어찌 짐작이

나 했겠는가? 

회풍전의 뒤에서 그의 눈을 노리고 짓쳐 오는 하나의 검을! "우웃!"

그림자가 몸을 철판교(鐵板橋)의 자세로 눕혔다.

씽! 

검이 공기를 가르는 섬뜩한 소리가 그의 얼굴 앞에서 들렸다.

검을 쥔 여인의 날렵한 몸이 자신을 건너뜀을 보았다.

자신이 일검을 피하자 그대로 기세를 몰아 뒤의 복면인을 노려  감을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삼영(三影)이 위험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상황을 너무나 모르는 것이었다.

이영(二影)은 철판교 자세에서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허공을 맴돌아  내려오는 세 

개의 바람을 볼 수 있었다.

회풍전(回風錢)! 

자신의 가슴으로 직격하는 세 개의 바람! 

'피해야 한다'는 건 마음속의 외침일 뿐이었다.

몸을 우(右)로 돌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풍호진의 외침과 더불어, 이영(二影)은 왼쪽 허리와  등 쪽 세 군데가 불에  덴 듯 

화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이 그가 느낀,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감각이었다.

차차창! 

어지럽게 사방으로 검광을 뿌리는 마지막 그림자의 검을 섭수진의  느릿느릿한 검

이 여유있게 막아 내는 모습은 확실히 신기했 

하지만 허(虛) 속에 실(實)이  숨은 옥허검의 묘의(妙意)를  아는 사람이라면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리라.

"검을 놓아라."

섭수진이 날카롭게 외치며 옥허검의 제칠검  옥허회류(玉虛回流)의 식으로 그림자

의 검을 휘감았다.

경기(勁氣)가 회오리를 일으키며 자신의 검을 빼앗으려  함을 느낀 그림자는 최대

한의 내력을 일으켜 대항했다.

두 발도 반칠성(反七星)의 방위를 급히 밟으며  역회전하여 섭수진이 일으킨 인력

(引力)에 맞섰다.

매우 빠른 대응! 

하나 이것은 어떤 면에서 그에게는 불행이었다.

섭수진은 결코 싸움에서 상대방을 죽이는 법이 없었다.

결정적인 순간, 혈도를 제압하여 쓰러뜨릴 뿐이었다.

그림자가 만일 검을 빼앗겼다면 혈도가 짚히는  것으로 끝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반항한 지금, 사정은 달라졌다.

그를 공격할 수 있는 사람이 섭수진만은 아닌 까닭이었다.

풍호진의 회풍전이 놀고 있을 리 없다.

휘루루! 

회풍전이 공기를 감는 특유의 소리가 삼영(三影)의 귀를 두드릴 때는 이미 늦었다.

바람 소리가 너무 가까이 들린다는 생각을 끝으로 그는 땅에 쓰러졌다.

그의 등에는 세 개의 구멍이 나 있었다.

섭수진은 아미를 약간 찡그렸지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어차피 강호란 그런 곳이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곳! 

 독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 강호였다.

풍호진은 이미 오 년이나 이들에게 잡혀 모진 고난을 겪었으니  그의 손속이 잔인

함을 누가 책망할 수 있으랴? 

그림자 셋이 모두 쓰러지자, 병기(兵器) 부딪치는 소리와 호통 소리  가득 찼던 동

굴 안에 다시 적막(寂寞)이 찾아왔다.

한바탕 폭풍이 지난 후의 적막은 사람으로 하여금 기이한 느낌을 갖게 했다. 하지

만 그 적막도 잠시, 

 "우어어, 우어!"

동굴의 어디선가 들려 오는 짐승의 울부짖음! 

울부짖음 같았지만 섭수진은 곧 알 수 있었다.

그것이 극도의 분노와 절망을 느낀 인간이 내는 음성임을! 풍호진은 심지어 그 소

리를 내는 사람마저 알 것 같았다.

그의 입술을 비집고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형! 내가 왔소."

 * * * 

풍운 진인 적일수, 아니, 가짜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인의신개, 아니, 진소백이 십년지약(十年之約)의 내용을 먼저 말했기 때문이다.

"하하, 그런 일을 내가 잊었을 리가 있소. 여봐라, 어서 가져 오너라."

호기롭게 외치는 그의 눈이 용고(鏞姑)를 힐끔거렸다.

가짜의 귀에 그녀의 전음의 들려 왔다.

"곧 술 열 통을 보내겠다. 흥,  하지만 만일 파탄(破綻)이 드러나 인의신개에게 네 

정체를 들킨다면…… 흥!"

가짜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는 옥산의 흑회 총단이 무너져 용고의 심기가 단단히 틀어졌음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시기심을 품고 지령 고숭무의  죽음을 모른 체하지 않았더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흑회의 최고수라 할 수 있었던  고숭무가 있었더라면 어찌 심화절이  그토록 쉽게 

흑회를 공략할 수 있었겠는가? 

가짜는 금사진이 죽은 이상, 비응방이 쉽게 손에 들어올  것으로 생각했다. 자신이 

보다 쉽게 두각을 나타내려면 고숭무는 없는 것이 오히려 나았다.

게다가 그는 고숭무를 질투하고 있었으니…… 

고숭무의 위기에 그가 나서지 않았던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어쨌든…… 

 용고는 가짜에게 전음(傳音)으로 싸늘하게 말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수하들에게 지시하여 빨리 술 열 항아리를 모아야 했다.

인의신개가 말했던 십년지약(十年之約)은 열 항아리의 술을 준다는 것이었다.

인의신개가 술을 매우 좋아함은 공히 알려진 사실이었으니, 그가 서둘러 공동으로 

왔음이 이해되었다.

'빌어먹을! 하필 인의신개 저 늙은 것이 예전에 적일수(狄逸秀)  놈과 인연이 있었

다니…… 할 수 없지.' 

그녀는 가짜의 얼굴을 떠올렸다.

'흥, 네놈이 감히 그따위 돼먹지 않은 생각으로 일을 망치다니…… 이용 가치가 없

었다면 벌써 

없애 버렸을 것이지만. 일단 지금은 풍운 진인을 대신할  놈이 없으니 살려 둔다.' 

용고는 수하들을 급히 불렀다.

"여봐라! 어서 준비하여라."

아추(兒醜)가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얼굴의 화상(火傷)이 끔찍스러워 아무도 그를 제대로 쳐다보려 하지 않는 하인! 공

동의 잡스런 일들 대부분을 처리하는 부지런함이 없었다면 그는  문파에 하인으로 

붙어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는 삼 년 전 어디선가 나타나, 모든  제자들이 피하는 잡일을 도맡아 하기 시작

했다.

지금도 아추는 술 열 항아리를 구하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첫 번째 술이 구해진 즉시 그것은 광성전(廣成殿)으로 보내졌 

 "이건 운남의 묘묘주(苗苗酒)가 아니오? 이 귀한 걸……!"

인의신개의 말에 가짜는 웃음으로 답했다.

"천하의 개방 방주께 어찌 이  정도의 대접이 없겠습니까? 약조했던  술이니 어서 

드십시오."

진소백이 속으로 냉소하며 술잔을 들었다.

'요놈아, 무슨 약조가 있었단 말이냐? 네놈들은 인의신개께서 이 년 전 술을 끊었

음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속이는 기분은 통쾌했고, 술이 흐르는 목줄기는 화끈했다.

"하하, 이거 좋구려. 하하!"

드디어 마지막 열 통째의 술이 날라져 왔다.

"역시 마지막은 죽엽청(竹葉靑)의 향내로 장식함이 최고가 아니겠습니까?"

그 동안 공동 곳곳에 있었던 모든 과실주(果實酒), 꽃잎주, 뱀술 등등이 모두 소모

되었다.

'젠장할, 앞으로 십 년간 괜찮은 술은  맛도 보지 못하겠구나.' 가짜는 구시렁거렸

다.

이 소리가 진소백에게 들릴 리가 없지만 그는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었다.

이때, 진소백의 귀로 섭수진의 전음이 들려 왔다.

"준비가 모두 되었어요. 적 장문인은  무사히 구출되었고, 용고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어요."

진소백은 암중에 미소 지으며 마지막 술잔을 비웠다.

대나무 잎의 향내가 입 속을 가득 채웠다. 

 진소백은 입 안 가득 향기를 머금은 채 술잔을 내려놓았다.

가짜가 입맛을 다시며 그를 보았다.

'젠장할, 저 아까운 것을 모두 거지의 뱃속에 넣어 버리다니.' 진소백이 조용히 말

했다.

"이제 술도 다 마셨으니,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을 더 할까 합니다."

"무엇이든지 하시오. 방주님의 높으신 말을 경청하겠소."

진소백이 말했다.

"진인(眞人)의 제자 중에 구자운(邱自雲)이란 놈이 있었지 않소?"

가짜는 흠칫했다.

이놈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후, 우리 개방에도 구자운(邱自雲)처럼 어른을 몰라보고  존장을 무시하는 개망나

니가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모르겠소."

그제서야 가짜는 왜 인의신개가  구자운 얘기를 꺼냈는지 알았  "방주께서는 잘못 

알고 계시오. 구자운은 결코 개망나니가 아니라오. 그는……"

말을 하던 가짜는 움찔했다.

귓가에 용고의 전음(傳音)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잡소리 말고 어서 거지 놈의  물음에나 대답해라. 그를 빨리  보내야 할 게 아니

냐?"

가짜는 놀라 말을 서둘렀다.

"어쨌든 그런 놈이 있다면 일벌백계(一罰百戒)하여 문파의  기강(紀綱)을 세워야지

요."

진소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극히 타당한 의견이라는 듯.

"역시 그렇지요? 그렇다면 당신의 의견을 따르겠소."

'따르겠소'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소백의 입이 오무려졌다. 힘찬 내공을 타고 그

의 입에서 죽엽청(竹葉靑)의 주기(酒氣)가 앞으로 쏘아졌다.

주전(酒箭)이 가짜의 얼굴로 날았다.

독한 술의 정수가 모인 주기(酒氣)는 역용술(易容術)의 기초가 되는 역용약과는 천

적(天敵)이었다.

"무슨 짓이오?"

가짜가 크게 외치며 날아올랐을 때는 이미 주기가 그의 얼굴을 덮친 뒤였다.

"우욱!"

주기에 눈이 따가움을 느낀 그가 한 손으로는 눈을 비비며  나머지 손을 어지럽게 

휘둘렀다.

가짜의 손이 검은 경기(勁氣)를 토했다.

풍운조! 

 공동의 개천풍운조(開天風雲爪)가 펼쳐지고 있었다.

"어쭈! 제법 열심히 익혔구나, 구자운(邱自雲)!"

진소백은 냉랭히 말하며 허리를 흔들었다.

그의 몸은 취한 듯 흔들리며 가짜 풍운조를 피했다.

그가 어깨를 들썩이자, 유성이 은하수를 건너는  듯한 기세로 진소백의 몸은 단숨

에 삼 장(丈)의 거리를 좁혀 버렸다.

진소백의 손이 머리 위로 들렸다 내려오며 허공의 일곱 곳을 동시에 찍었다.

우워엉! 

용의 신음이 들리며 진소백의 용음십이수(龍音十二手)는  가짜 풍운조를 여지없이 

파괴했다.

창공을 오르는 용의 발톱에 자신의 풍운조가  무력화(無力化)됨을 느낀 가짜가 다

시 대항하려 했지만, 

"늦었다!"

진소백의 좌수(左手)가 가짜의 목덜미를 잡음과 동시에, 그가 마혈마저  짚어 버렸

다.

진소백은 강호에 나온 이후 처음으로 전력을 다했다.

용고(鏞姑)의 대응은 빨랐다.

"은혜를 악(惡)으로 갚다니! 저자는 인의신개를 가장한 살수(殺手)다.  공동의 전제

자는 공격하라."

설명은 길지만 진소백이 주전(酒箭)을 날려 가짜의 얼굴을 덮치고 다시 그의 목덜

미를 잡아챈 것은 거의 동시라고 할 수 있었.

진소백의 행동을 보는 즉시 대응한  용고의 말이 이제야 겨우  공동의 제자들에게 

전달이 되었음을 보면 그간의 

변화가 얼마나 빨랐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공동에는 네 명의 장로(長老)가 있다.

지금은 그 중의 두 자리를 장단이괴(長短二怪)가 차지했다. 원래는 자룡자(紫龍子)

와 오룡자(烏龍子)의 자리였으나 그들은 눈치가 너무 빨랐다. 그들이  이상한 눈치

를 채자, 용고는 둘을 없애 버리고 그들의 빈자리를 장단이괴로 채웠던 것이다.

용고의 말을 듣고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자들은 당연히 무공이 높은  네 명의 장

로들이었다.

가장 먼저 장단이괴가 뛰어올랐고, 그 뒤를 적룡자(赤龍子)와 노룡자(怒龍子)가 따

랐다.

이어 십여 명에 달하는 공동의 제자들마저 뛰어오르니, 진소백은 그야말로 사방에

서 적들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멈춰라!"

진소백이 냉랭히 외치자 공동의 제자들은 모두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풍운 진인의 몸을 앞으로 내밀어 위협(威脅)했기 때문이 그런데 장단이괴(長

短二怪)만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풍운 진인의 생명이야 어떻게 되든 안중에 없다는 듯 공격을 계속했고, 손

에는 어느새 쌍겸(雙鎌)이 들려 있었다.

두 개의 낫으로 사람을 찢어 죽이는 무공이 너무 잔인하여, 마침내 공동에서 쫓겨

나는 계기(契機)가 되었던 쌍겸식(雙鎌式)이 펼쳐지려는 것이다.

"오호. 네놈들은 장문인의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게냐? 아니면 이자가 보호할 필요

도 없는 가짜 장문인이기라도 하다는 것이냐?"

진소백이 말하며 뻣뻣이 굳어진 가짜의 몸을 잡아 돌렸다.

사람의 몸을 이용해 곤법(棍法)을 펼치는 것이다.

듣도 보도 못 했던 기문(奇聞)이었지만 진소백의 곤법 조예는 매우 높아서 쌍겸을 

이용한 공격에도 장단이괴는 득을 보지 못했 

휘잉! 

낫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귓전을 스쳐 갔다. 

 진소백의 곤법 조예가 권(圈)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절정에 이른 까닭에 아직 가

짜는 상처를 입지 않았다.

흉험한 듯 보이는 세 명의 대결은 아직 한 번도 병기끼리 부딪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광경을 바라보는 공동의 모든 제자들의 손은 땀으로 축축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초조한 사람은 역시 무기(武器)  대신 사용되고 있는 가짜 풍인 

진인이었다.

그는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입을 열어 이괴에게 외쳤다.

"나를 죽이려는 것이냐? 어서 물러나라!"

장단이괴는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눈앞의 풍운 진인이 가짜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공동 문인의 눈도 의식해야 

했다.

아직은 용고를 따르는 자보다 풍운 진인의 이름을 따르는 자들이 많았다.

"하하! 졌느냐?"

진소백이 웃으며 손의 무기, 아니, 가짜를 다시 땅에 세웠다.

빠르게 휘둘린 탓에 보이지 않았던 가짜의 얼굴이 드러나며 공동 문인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었다.

용고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기(酒氣) 때문에, 가짜의 얼굴 위에 발랐던 역용(易容)이 모두 녹아 내리고 있었

다.

용고가 얼른 기지(奇智)를 발휘했다.

"저자가 장문인께 독(毒)을 썼다.  장문인의 생명이 위험하니 어서  저자를 공격해

라."

그녀의 선동(煽動)에 공동의 문인들이 분분히 날아오르는 순간! "멈춰라!"

힘은 없지만 위엄(威嚴)을 가득 담은  음성이 그들의 행동을 제지했다. 모든  문인

(門人)들의 시선이 소리가 들려 온 곳을 향했다.

마른 몸을 옆의 여인에게 기대고 선 노인! 

비록 쓰러질 듯 위태(危殆)해 보였지만 강한 기도(氣度)만은 감출 수 없었다. 

 용고의 입술이 굳어졌다.

그녀는 믿을 수 없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지금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노인이 노여움을 띠고 공동의 

문인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진정 나를 알아보지 못하느냐?"

장로(長老) 중의 하나인 적룡자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노인과 진소백이 잡고 

있는 풍운 진인을 번갈아 보았다.

이제 가짜의 얼굴에 발라져 있던 역용약은 모두 녹아 본모습이 드러나 있었다.

입술은 얇고 가는 눈에, 오른쪽 눈썹  위의 사마귀가 특징적인 인물! 적룡자는  그 

사마귀만으로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구자운!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적룡자는 몸을 떨며 노인에게로 다가갔다.

"장문인(掌門人)! 도대체 이 얼굴이……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하신 게요?"

그의 음성은 떨려서 진심으로 격동(激動)한 듯했다.

노인이 섭수진의 손을 놓고 적룡자를 잡으며 말했다.

"난 지난 오 년간 지하에 갇혀 있었소. 이게 모두 다 저 탕녀(蕩女)의 짓이라오."

그가, 진짜 풍운 진인 적일수가 용고를 가리키자 적룡자의 장삼이 절로 펄럭였다.

노여움일까? 

 진기(眞氣)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다.

구석에 서 있던 아추(兒醜)가 풍운 진인 뒤로 다가왔다.

그는 하인으로서 본분을 다하여 풍운(風雲) 진인(眞人)을 보살피려는 것인가? 

 "호호호! 좋아, 아주 좋군!"

용고가 소리 높여 웃었다. 

 "이처럼 통쾌하게 당하다니…… 요즘은 계속 당하기만 하는구나."

중얼거린 그녀가 진소백을 보며 말했다.

"너는 인의신개가 아니로구나. 누구냐?"

진소백이 웃으며 되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용고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조용하자 진소백이 다시 말했다.

"흑회의 존령(尊領)임은 알고 있소. 하지만 도대체 언제부터 흑회에  속하게 된 거

요?"

용고의 눈이 이채를 띠고 그를 보았다.

"어떻게 알았느냐?"

이 말은 용고가 스스로 자신이  흑회의 존령임을 시인한 말이라  공동의 제자들은 

놀라 술렁이기 시작했다.

"천령이 풍운 진인을 가장한 가짜임을 알자  곧 깨달았소. 누가 있어 풍운 진인을 

암산할 수 있겠소?"

진소백이 진짜 풍운 진인 쪽을 돌아보고 다시 말했다.

"묻겠소. 풍운 진인을 암산하고  구자운을 풍운 진인의  대리로 세운 것은 당신의 

생각이었소? 아니면 다른 지시가 있었소."

다른 지시라면 당연히 흑회 회주의 지시일 게다.

용고가 의외로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회주(會主)의 지시였다."

그녀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천하에 회주와 맞설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들이 이리 많다니. 심화절에다가 또 

너! 넌 누구냐?"

진소백이 빙긋이 웃으며 얼굴의 분장을 지웠다.

"내 이름은 진소백이오."

 * * * 

장내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침묵이었다.

진소백이 침묵을 깼다.

"흑회의 회주는 누구요?"

용고가 소리내어 웃었다.

"호호, 내가 말할 것 같으냐?"

진소백이 지체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하지만 지금은 말하지 않더라도 곧 말하게 될 거요."

그가 담담히 말하자 용고는 왠지 가슴이 섬뜩했다. 그의 말이 사실인 듯한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을 떨쳐 버리기라도 하듯 그녀가 외쳤다.

"흥! 내가 이미 공동을 오 년이나  지배하고 있었다. 내 세력은 이미  곳곳에 심어 

두었다."

진소백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휴, 밖의 원조(援助)라면 기다리지  않는 것이 좋소.  흑회의 존령이 그들을 다른 

곳으로 데려갔으니까!"

"무, 무슨 소리냐? 내가 여기 있는데 어디서……"

진소백이 웃었다.

"가짜 존령이 나타나지 말란 법은 없지 않소? 당신 거처에서  복면을 발견하자 일

은 쉬웠소. 회풍전 풍호진 선배(先輩)가 

수고하고 계실 거요."

용고는 몸을 떨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보다 진소백이 더 무섭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은 선택은 하

나! 무조건 자리를 피해 도망치는 것이다.

가짜와의 대결에서 그녀는 진소백의 무공도 보았다.

정면 대결은 전혀 승산이 없었다.

"흥, 제법이다만 나 또한 최후(最後)의 수는 있다."

용고의 주위는 장단이괴와 그들의 제자 두 명, 모두 네 명이 호위하고 있었다.

그녀의 '최후의 수'는 이들 누구도 아니었다.

움직임은 의외의 곳에서 일었고, 다른 하나의 움직임도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이게 무슨 짓이냐?"

풍운 진인의 놀란 외침이 터졌다. 

 그의 눈앞에 쏘아져 오는 경력(勁力)은 오  년간의 고초로 힘을 상실한 그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믿을 수 없게도 좀 전까지 그를 부축해 주던 적룡자가 음산한 경기를 싣고 음풍조

(陰風爪)를 날려왔다. 

 너무 가깝고, 너무 의외였던지라 풍운 진인은 절대의 위기에 빠졌다.

멀리 있던 진소백이 놀란 건 말할 나위  없었고, 가까이 있던 섭수진조차 미처 막

을 수 없었다. 

 그만큼 적룡자의 출수는 빠르고 악독했다.

"호호, 오 년간 내가 놀고만 있었겠느냐?"

적룡자의 음풍조가 풍운 진인을 제압해 감을 본 용고가 소리 높여 웃었다.

풍운 진인을 인질(人質)로 잡고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그녀의 계획이었다.

그녀의 입가에 달콤한 만족의 웃음이 달렸다.

적어도 다른 하나의 움직임이 있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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