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23 장 형제번명(兄弟飜命) (24/32)

제 23 장 형제번명(兄弟飜命) 

유유곡의 아침은 상쾌했다.

기지개를 켜고 밖으로 나온 소년의  얼굴은 어딘가 둔해 보였다.  얼굴에 비해 턱 

아래 살이 많이 붙은 탓이었다.

"후후, 이젠 제법 토실토실해져 잡아먹기 좋게 되었구나."

뒤에서 불현듯 노인의 음성이 들려 왔다.

작은 키에, 만면에 웃음을 띤 노인을 보며 소년 엽평도 미소 지었다.

"하하, 온통 비계뿐이어서 맛이 없을 겁니다."

생사의괴 종도(鐘塗)는 그의 치료는 특이하다면서, 이때까지 엽평에게 계속 영약과 

기름진 음식만 먹여댔다.

덕분에 엽평은 어느새 턱에 살이 토실토실하게 찐 뚱보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드디어 오늘이다. 준비되었느냐?"

"하하, 잡아먹히는 데 준비가 무슨 소용입니까? 잡아먹는 할아버지께서 준비가 필

요하시겠지요."

웃는 엽평을 바라보는 종도의 얼굴에는 정이 가득했다.

그는 엽평과 지내며 손자와 같은 정을 느꼈다.

엽평도 마찬가지였다.

이 노인은 장난기가 많으면서도 마음이 따뜻하여 부모의 정을 느끼지 못한 엽평을 

잘 다독여 주었다.

그의 성격은 종도의 영향을 받아 많이 밝아졌다.

종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따라오너라."

후원(後園).

약향이 가득한 후원 안에는 사철 쉬지 않고 한풍(寒風)이 몰아치는 동굴이 있었다.

그 한풍을 맞으며 종도와 엽평은 서 있었다.

"이곳이 없었다면 너를 치료할 생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곳의 한풍은 상처

를 더 이상 썩지 않게 해주는 효능이 있지."

종도는 말하며 옆에 있는 쇠침대 위의 하얀 천을 걷었다.

놀랍게도 그 속에 든 것은 전신이 갈가리 찢어진 사람 하나였.

두개골(頭蓋骨)도 산산이 부서져 뇌수(腦髓)가 흘러나왔지만, 믿을 수 없게도 가슴

에 기복이 지고 있었다.

호흡하고 있는 것이다.

그를 보는 종도의 눈에 뿌연 습막이 차 올랐다.

"또한 내 아들 수(秀)의 생명도 연장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종도(鐘塗)는 엽평을 보며 말했다.

"다시 한 번 약속해 다오, 꼭 내 아들 종수의 원한을 갚아 주겠다고!"

엽평이 급히 무릎을 꿇었다.

"할아버님의 원한은 곧 제 원한입니다."

종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소백에게 이미 금낭(錦囊)을 전했으니, 네가 힘을 합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자, 

이제 누워라!"

엽평은 발가벗은 채 한옥(寒玉)으로 만든 침상에 누웠다.

종도는 굳은 표정으로 옆에 서 있었다.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다.

종도가 그의 전신에 금침을 꽂아 가며 말했다.

"네 병은 심장에 혹이 돋아 혈행을  방해하여 생긴 것이다. 발병하면 지닌 내공도 

소멸되고 말지만 천행으로 완치된다면 큰 이점이 있다."

다시 전신의 대혈을 때리며 종도가 말을 이었다.

"이전의 내공이 피 속 가득 녹아들어 다시 무공을 익힐 때는 내공의 진전(進展)이 

범인에 비해 십 배는 빠르다는 것이다. 혈액 공급을 잘 받지 못했던 

전신의 기관들이 저마다 잠력을 개발한 덕분이기도 하다."

이어 종도는 호로병에 든 액체를 엽평의 전신에 붓고, 입으로도 흘려 넣었다.

천마산(天痲散)! 

전신의 혈행(血行)을 일시지간 정지시킨다. 

 엽평의 치료를 위해서는 가슴을 갈라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네 치료는 극히 위험하다. 또한 운이 좋아 성공하더라도 당분간은 음식을 섭취할 

수 없다. 네가 

살이 찌도록 한 것은 그런  이유였다. 능히 한 달간은 음식의  섭취 없이 견딜 수 

있으리라."

종도의 손이 마침내 날이 잘 선 소도를 들고 엽평의 가슴을 갈랐다.

심장 부위가 갈라졌지만 피는 흐르지 않았다.

천마산의 효험이었다.

종도는 이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무심한 의원의 눈으로 엽혼의 심장을 들어냈다.

사방에 혈관 곳곳으로 연결되는 곳이 거무스름하게 고사(枯死)하고 있었다.

이런 상태로도 버틸 수 있음은 무수한 영약의 힘이었으니, 약을 구하기 위한 엽혼

의 고생이 얼마나 심했을지 짐작되었다. 

 종도의 동작은 빨랐다. 어느새 그의 다른 손에는 반시체, 그의  아들 종수의 심장

이 들렸다. 그는 심장을 바꾸려는 것이었다.

종도의 손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로 움직이며 종수의  심장을 엽평의 

가슴에 넣고 봉합(封合)을 시작했다.

그의 눈은 무심했지만 가슴에는 말할 수 없는 회한이 깃들였 종수는 비록 뇌가 부

서져 죽었지만 심장만은 살아 있었다.

이 동굴의 한풍 탓에 가능한 일이었다.

엽평의 가슴을 절개하는 일도 한풍 덕분에 가능했다.

'비록 육신은 죽었지만 네 심장은 엽평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니, 엽

평이 너의 원한을 갚는 날, 너도 

그의 가슴속에서 같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찢어지는 부정(父情)이었다. 하나 종도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봉합을 끝낸 그는 빨리 다른 병을 들어 흰 액체를 엽평의 전신에 부었다.

천마산의 약효를 중화시키는 약! 

너무 오래 혈행이 멈추면 좋지 않다.

'이제 하나의 고비만 남았다. 다른 사람의 장기가  몸에 들었으니 거부(拒否) 반응

(反應)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종도는 하늘에 빌고 또 빌었다.

만일 거부 반응이 일어난다면 그의 염원은 물거품이 되고, 엽평도 살아남을 수 없

었다.

'하늘이여, 제발!' 

 * * * 

엽혼의 안색은 창백했다.

그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이 사실이 아니길 바랐다.

어떻게 소화가 이자와 같이 있을 수 있을까? 

지금 소화는 흰 옷을 입고 있었다.

옆에 선 사내도 똑같이 흰 옷을 입고 있었다.

수의(囚衣)가 아니다. 그들이 같은 조직에 속해 있다는 의미였 소화는 드디어 엽혼

을 보았다.

그녀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놀란 외침이 터져 나왔다.

"다, 당신이 어떻게……"

그녀는 엽혼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보고 싶었지만 볼 면목이 없었다.

그녀는 엽혼을 잘 안다. 그녀는 엽혼을 산속에서 처음 본 것이 아니었다. 삼 년 이

상 엽혼을 지켜봤었다. 

 그의 고독과 그의 고난과 그의 동생을 위한 정성을, 소화는 모두 보아 왔었다.

때문에 엽혼이 가장 좋아하는 모습으로, 엽혼이  가장 좋아하는 집을 꾸며 나타날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소화는 자신이 진정한 소화이길 바랐다.

소하루( 霞樓)의 가짜 화선이 아닌, 진짜 소화이길 바랐다.

어느새 엽혼을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기필코 엽

혼을 사지(死地)에 빠뜨려야 했고, 엽혼은 이제 며칠 후 죽게 되리라. 다만 자신이 

이런 처지로 엽혼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짐작도  못 했다. "당신마저 나를 속였소? 

당신마저!"

신음하듯 말하는 엽혼에게 소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만 고개를 숙이고 그의 처분만을 바랄 뿐이었다.

대신 옆에 있던 사내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정말 미안하오. 하지만 우리도 천벌을  받았소. 최선을 다했건만 최후(最後)의 순

간, 믿었던 셋째가 우리를 배신하다니……"

그 사내를 보고 엽혼이 막 뭐라 말하려는  순간, 통로를 타고 날카로운 외침이 전

해 왔다.

"이놈의 자식! 내가 완전히 죽었는지 확인하지 않은 것이 네  실수였다. 어디 죽어 

봐라."

사냥꾼의 목소리임을 안 엽혼의 눈이 다급해질 때, 통로가  진동(震動)하기 시작했

다. 쇠사슬에 묶인 사내가 외쳤다.

"만일을 대비해 만들었던 자폭(自爆) 기관을 발동시켰나 보오. 어서 피하시오."

엽혼은 피하지 않았다.

대신 구절검을 들어 소화를 묶은 쇠사슬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땅! 땅! 

그가 겨우 소화를 풀어 주었을 때, 이미 천장에서는 돌 무더기가 떨어져 내렸다.

소화를 안고 있는 엽혼에게 사내는 말했다.

"소화는 다만 내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니 아무 죄가  없소. 부디 그애를 구해 

주시오. 부디!"

이제 진동은 극에 달해 바로 서 있기조차 힘든 상태였다.

엽혼은 서둘러 가려 했지만 바닥의 진동으로 인해 곧 중심을 잃고 말았다. 더불어, 

슈악! 

공기를 가르며 화살들이 사방에서 쏟아진 것도 그때였다.

하지만 엽혼은 미처 보지 못했다.

그의 팔에 안긴 소화만이 그 화살을 보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렸다. 자신의 등으로 화살을 막아 엽혼을 보호(保護)하

려는 의도.

그제서야 엽혼도 화살을 보았다.

화살에 대한 위기감보다 마음속에 먼저 닿아 온  생각은 소화(小花)의 진심! 또한, 

비록 음모의 와중에 만난 사이였으나, 

그녀도 자신을 진심으로 생각했음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우두둥! 

땅이 무너졌다.

조금만 주저앉자 화살은 머리 위로 스쳐 갔다.

원래 복도가 무너질 때 몸을 날려 피하지 못하도록 안배(按配)된 화살이었다.

엽혼과 소화는 화살에 맞지는 않았다.

하지만 복도가 무너지며 생긴 빈 어둠 속으로 끝없이 떨어지는 것을 피할 수는 없

었다.

멀리서 사내의 외침이 아련히 들려 왔다.

"엽혼! 당신에겐 진정 미안하오. 당신에게 진 빚은 내  내세(來世)에서라도 갚겠소. 

이 조삼, 진심으로 맹서하오."

조삼(曹三)의 피 끓는 외침을 뒤로하고 떨어지는 엽혼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의 몸으로 소화의 허리가 당겨져 왔다.

비록 죽음에 이르렀지만 그는 소화를 놓고 싶지 않았다.

머리 위로 집채보다 큰 바위가 따라 내려왔다.

소화도 엽혼의 몸을 더욱 힘주어 안았다.

그들의 삶은 어찌 보면 비슷했다.

결코 자신을 위해 살지 못했고, 남을 위해 살았다.

하지만 죽는 순간만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이니 불행하지만은 않았다.

귓가로 공기가 스쳐 가는 소리도 점점 멀어졌다.

멀어지는 세상과 닮았는가? 

모든 것이 아득히 멀어져 갔다. 

 정신 또한 가물거리며 멀어졌다.

다만 꼭 껴안은 서로의 체온만이 가까이 있었다.

종도의 눈에 다급함이 서렸다.

엽평의 몸이 펄떡거리고 있었다.

"거부(拒否) 반응(反應)이다."

그는 급히 엽평의 단전에 손을 대고 진기를 흘리기 시작했다.

도도히 흐르는 진기가 엽평의 가슴에서 일어나는 거부의 기운과 어울려 싸우기 시

작했다.

종도의 내공은 능히 오십 년에 달했다.

하지만 믿을 수 없게도 엽평의 가슴에서 일어난 잠력이 오십 년 공력을 밀어 내지 

않는가? 종도의 얼굴에 땀이 맺혔다.

"영약의 기운이 급속도로 흡수된다. 이 아이의 내공이 벌써 나를 능가하고 있다."

마침내, 

"우웃!"

종도는 놀라 손을 떼내고 말았다.

엽평의 몸에서 일어난 반탄지력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엽평은 여전히 펄떡거리며 거부 반응의 고통을 호소했다.

하지만 이제 종도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오직 하나, 기도밖에는.

'하늘이여…… 제발!' 

 * * * 

소화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앞에서 엽혼이 웃으며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알았다.

"살아 있는 거예요?"

그녀는 가까스로 그 말만을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엽혼이 말했다.

"돌 틈 사이에 운좋게 끼었소. 보시오, 빛도 들어오고 있소."

정말이었다. 

 작은 틈을 따라 희미한 빛도 들어오고 있었다.

떨어진 돌들은 너무 컸다.

큰 돌들이 쌓인 틈 사이는 작은 아이라면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틈에 천우신조로 그들이 들어 있었다.

소화가 고개를 흔들었다.

"후`─ 하지만 저 틈으로 어떻게 사람이 나갈 수 있겠어요?"

"축골공(縮骨功)은 사람의 신체를 어린아이만하게 줄일 수 있소. 다행히 난 축골공

을 익혔소."

 소화의 얼굴에 기쁨이 떠올랐다.

"그럼 어서 밖으로 나가세요."

엽혼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당신은 어쩔 거요?"

소화는 고개를 숙였다.

"난…… 난, 당신을 볼 면목도 없어요. 다만, 난, 내 마음은……"

엽혼은 그녀를 다독였다.

"당신도 어쩔 수 없었을 거요. 내 인생도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많았으니

……"

정말이다. 인생에는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다.

"소혼단(消魂丹)은…… 그 약은 해독약이 없어요. 우린  처음부터 당신을 죽이고자 

했어요. 알고 있었나요?"

엽혼이 한숨을 쉬었다.

"나도 어쩔 수 없었지, 동생을 구할 돈이 필요했으니. 난 비응방에서 살아날 수 없

다고 생각했지. 지금의 삶은 어찌 보면 내겐 여분이오."

엽혼은 잠시 쉬며 소화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윽고 목소리에 힘을 담아 말했다.

"당신은 내게 빚이 있소. 그러니 나를 위해 세 가지 일을 해줄 것을 맹서하시오."

소화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무슨 일이든지요. 백 가지라도."

"첫째, 내 동생 평아를 잘 보살펴 주시오."

"둘째, 내 친구 진소백에게 내가 정말 고마워하더라고 전해 주시오."

"셋째…… 내 아내가 되어 주시오. 이건 염치없는 말인 줄은 알지만……"

소화는 앞의 두 부탁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다만 마지막 말만이 귀에 울릴 뿐이었다.

"염치가 없다니요. 다만, 다만 전……!"

소화가 엽혼의 품을 파고들었다. 바위 틈은 좁았지만  두 연인이 서로 안을 수 있

는 여유는 있었다.

둘이 어떻게 사랑을 나누었는지는 묘사하지 않기로 하자.

그들이 최후에 찾은 사랑은 지순(至純)했고 추호의 사심(邪心)도 없었다.

오직 죽음만을 앞에 둔 사랑, 그러나 그들은 행복했다.

이처럼 행복은 찾기 쉬운 것이건만 많은 사람들은 왜 물질에서  행복을 구하는 것

일까? 오늘도 탐욕스런 인간의 음모와 배신은 왜 끊이지 않는 것일?  소화는 정신

이 아득해졌다.

색(色)도, 욕(慾)도 아니었다. 

 다만 사랑 앞에서 그녀는 서서히 정신을 잃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린 것은 등을 통해 들어오는 강한 기운의 자극(刺戟) 때문이었다.

그녀는 엽혼의 손이 등에 닿아 있음을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그녀가 놀라 몸을 비틀려 하자, 엽혼의 말이 귓전을 두드렸다.

"움직이지 마시오! 둘 다 위험하오."

그녀는 입을 열 수 없었다.

등뒤로 들어오는 것이 엽혼의 마지막 남은 잠력임을 알았지만 말을  한다면 둘 다 

죽을 뿐이었다.

"내가 말했던 세 가지를 명심해 주시오.  난 어차피 사흘을 넘길 수 없었으니…… 

당신은 부디…… 어서 다음 구결을 명심하시오."

엽혼의 입을 통해 축골공의 구결이 흘러나왔다.

소화는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그가 하는 말들을 뇌리에 새겼  마지막 엽혼의 염원

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기에.

엽혼은 몸에 남아 있던 마지막 힘이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고통도 더욱 심해져 참기 힘들었다.

아득해지는 정신 한구석에 자신의 마지막만은 운이 좋았다고 느꼈다. 비록 고난으

로 가득 찬 삶이었지만 마지막에나마 소화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평생에 줄 운을 마지막 순간에 모두 주었던 걸까? 

두 눈에 동생 엽평의 환영이 보였다.

'하늘이여! 만약 내게 줄 행운이 아직 남아 있다면 부디 평아에게  주시오! 부디…

…' 엽혼은 정신을 잃었다.

마지막 잠력마저 모조리 빠져 나간 그의 몸이 급격히 풍화하며 먼지로 화했다.

엽혼은 세상에 뼈 조각 하나 남기지 못했다.

다만, 그의 앞에 눈물로 범벅이 된 여인 하나.

소화였다.

 * * * 

엽평의 몸이 다시 꿈틀거렸다.

초조한 와중(渦中)에도 종도는 엽평이 입술을 달싹이는 것을 보았다.

"뭐라고 하는 거지?"

입술 가까이 귀를 대어서야 그는 겨우 한마디를 들었다.

"혀`─`엉!"

엽평은 엽혼을 부르고 있었다.

"기적이다!"

정말 기적이었다. 

 엽평의 꿈틀거림이 약해지며 점점 안정을 찾아갔다.

믿기 힘들게도 거부 반응이 사라진 것이다.

엽평의 신색이 안정되어 갔다.

종도는 안도의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의 치료는 성공했다.

이제 강호는, 범인보다 공력 증진이 십 배 빠르고, 신체 각 기관의 발달이 극에 이

른 한 초인(超人)을 보게 될 것이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끝났다. 이제 사흘 후면 평은 정신을 차릴 것이다."

종도는 서찰을 꺼내 엽평의 옆에 두었다.

엽평을 보는 종도의 눈에는 정이 가득했다.

"평아! 난 이제 나름대로 종수의 원한을  갚기 위한 준비를 하겠다. 모든  것은 일 

년 후 진소백을 통해 네게 물려주마."

종도는 그야말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자신의 일이 끝났음을 알았으므로.

누워 있는 엽평의 숨은 골랐다.

그의 몸 속에서는 진기가 움직이며 상처를 저절로 치유하고 있었다.

새로운 심장은 힘차게 뛰며 피와 양분을  구석구석에 전해 주었다. 종도의 아들인 

종수의 심장! 

엽평은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 * * 

 사흘 뒤, 유유곡의 한풍동(寒風洞)에서 걸어나오는 인영이 있었 엽평! 

지난날의 파리한 안색은 찾을 수 없었다.

그는 가슴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어찌 된 걸까? 가슴이 약간 결리기는 하지만 별다른 통증은 없다. 의괴 할아버님

의 의술은 정말 묘하구나. 시간은 

얼마나 흐른 걸까?"

엽평이 혼잣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을 받는 사람이 있었다.

"너는 사흘이나 누워 있었단다."

엽평은 깜짝 놀라 소리가 들려 온 곳을 보았다.

푸른 옷을 입고 허리에는  금빛의 띠를 동여맨  승려(僧侶)! 맨발이었으나, 전신의 

기도(氣度)는 감히 범접(犯接)하기 어려웠다.

일시지간 엽평은 말을 잊었다.

그는 이 인자한 노승을 알고 있었다.

어디 알다 뿐이겠는가? 

형의 스승이었으며 어린 날 모진 고난에서 그들 형제를 건져 주었던 분! 불가제일

인이며 또한 천하제일인으로 손꼽히는 초의 선사를 엽평이  어찌 모르겠는가? "잘 

지냈느냐? 혈색이 좋아졌구나."

엽평의 무릎이 무너질 듯 땅에 닿았다.

"사부님!"

비록 그렇게 불렀지만 자신의 사부는 아니었다.

엽혼의 사부! 

 초의(草衣) 선사(禪師)가 나타났다.

초의 선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라……? 그래, 앞으로 그리 부르거라."

"예? 그건……!"

엽평이 얼굴을 들어 반문했다.

하지만 총명한 엽평이 어찌 초의  선사가 말한 뜻을 모를 것인가?  자신을 제자로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임을 엽평은 금세 알아챘 초의 선사가 자애롭게 웃었다.

"너를 내 두 번째 내제자(內弟子)로 받아들인다, 평아!"

엽평은 그의 형 엽혼이 초의 선사의 문하를 떠나 살수의 길을 걷기 전에 내제자의 

반열에 들지 

못하고 외제자(外弟子)에 머물렀음을 알고 있었다.

한데 자신이 초의 선사의 내제자가 되다니! 

"인연이 닿지 않아 혼아는 외제자(外弟子)에 머물다 떠났는데……  아미타불! 너와 

인연이 이어지는구나!"

엽평은 서둘러 배사지례(拜師之禮)를 올렸다.

천천히 이어지는 구배(九拜)는 엽평이 초의 선사의 문하에 들었음을 의미했다.

또한 그의 인생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함을 뜻했고, 오랜 기간 그를 괴롭혔던 지병

(持病)에서 벗어난 것에 대한 축복이었다.

"네게는 사형이 있다. 너는 그에게서 앞으로 네가  해야 할 일을 들을 수 있을 게

다. 네 사형은……"

찬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하(地下)의 폭발은 땅 거죽의 모양마저 바꾸었다.

그 모습을 보는 소화의 가슴속엔 겨울 바람보다 더욱 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풀어 대부분을 잘라 내었다.

공력도 끌어올리지 않고 바닥을 파내니 그녀의 손톱에 금세 핏방울이 맺혔다.

소화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정성껏 바닥에 묻었다.

"무덤이 너무 크니 어디에다 절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맹서(盟誓)해요, 

혼랑(魂郞)! 배신한 

셋째…… 그를 응징한 후 꼭 당신의 뒤를 따르겠어요."

소화는 천천히 이배(二拜)를 올렸다.

짧은 사랑이었지만 그녀는 평생을 그 사랑만을 위해 살아 갈 자신이 있었다.

 * * * 

바위산! 

오랜 시간 지각이 풍화(風化) 과정을 겪으며 최후로 살아남은 모습이었다.

만약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바위라면 지하수는 수만년을 두고 기괴한  모양의 동굴

을 형성하리라.

언젠가 지각이 변동하여 지상으로 모습을 드러낸 땅속의 동굴도 생길 것이다.

그 중 하나를 지금 섭수진과 풍호진이 보고 있었다.

동굴에서 백여 장 떨어진 이곳은 큰 바위가 정면을 막고 있는 고지대(高地帶)!  숨

어서 적의 동태를 살피기에는 더없이 좋았다.

앞에는 두 명의 경계병이 서 있었다. 

 게다가 여기서는 보이지 않지만 숲속에도 꽤 많은 수의 무사가 있을 터였다.

섭수진이 전음으로 말했다.

"경계가 많긴 하지만 침입은 가능할 것 같군요!"

풍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이미 이곳에 오며 두 명의 경계병을 해치웠다.

경계병들은 의외로 무공이 약했다.

아마 강한 무사들은 모두 동굴 안에서 직접 지키고 있을  것이 풍호진이 중얼거렸

다.

"문제는 신주낭객과 구천이 제시간을 맞추는 것인데……"

그의 말을 들자 섭수진은 사흘 전의 일이 생각났다.

화화루에서의 일이…… 

 * * * 

 "그런데 어떻게 탈출하신 겁니까?"

진소백은 풍호진에게 오 년이나 갇혀 있다가 탈출한 방법을 물었다.

"나도 확실히 모르겠네. 아마 문파 내에서도 용고의 행동이 수상함을 눈치챈 자들

이 있는 것 같네."

그는 말과 함께 품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선배의 무고를 알고 있습니다.  부디 탈출하셔서 장문인을  도와 주십시오. 공동 

내부에는 용고의 배파(背派) 행위를 아는 세력이  있으니 우리가 안에서 호응하겠

습니다.> 

"내게 은밀히 전해진 상자 안에는 서찰과 함께 복마환(伏魔丸) 한 알이 들어 있었

네. 난 겨우 공력의 일부를 찾아 탈출했지."

진소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회풍전 같은 고수가 동심사걸 정도를 피했던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지

금 풍호진의 공력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런 상태에서도 회풍전 셋을 날려 동심사걸을 상대했다는 것은 그가 상당한 고수

임을 뜻했다.

진소백이 풍호진에게 물었다.

"아까 선배를 쫓던 네 명 중 두 늙은이들은 장단이괴(長短二怪)가 아니었습니까?"

풍호진이 진소백의 안목에 감탄했다.

"그렇네. 그들은 외도(外道)로 빠진 탓에 공동에서  추방당했었는데 지금은 돌아와 

호법직을 맡고 있다네. 오래 전의 일이라 아는 사람이 적을 텐데,  젊은 자네가 알

고 있다니……"

말을 하던 풍호진이 곧 한숨을 쉬었다.

"큰일이네. 이리 되다가는 공동의 수백년 영명(英名)이 씻기 힘든  치욕을 당할 수

도 있겠네."

진소백도 고개를 끄덕였다.

공동은 전통적인 명문정파! 

 이대로 음모의 희생물이 되게 할 수는 없었다.

한참을 생각한 진소백이 입을 열었다.

"마침 제가 천랑파와 연락이 되니 그들의 힘을 빌립시다. 그리고…… 풍운 진인이 

갇혀 있는 곳을 아신다 하셨지요?"

천랑파 사제(師弟)의 힘을 빌린다면 일은 보다 쉬워질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풍운 진인의 구출에 매달릴 수는 없었다.

적일수를 구출하더라도, 만일 용고가 대책을 세운다면  모든 일은 헛수고가 될 수 

있었다.

누군가 용고의 주의를 끌어 그녀의 정신을 산란시킬 사람이 필요했다.

"제가 공동으로 가겠습니다. 그사이 풍 선배와 섭 소저께서는……"

진소백은 모든 계획을 설명한 뒤 눈을 돌렸다.

그곳에는 혈도가 짚힌 채로 온몸을 괴롭게 뒤틀고 있는 일걸(一傑)이 있었다.

"이봐. 공동으로 들어가는 길을 네가 좀 설명해 주어야겠다. 알겠느냐? 엥? 이놈이 

그래도 대답이 없네."

진소백이 다시 고함을 지르자 일걸의 눈에 절망의 빛이 스쳤.

섭수진이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린지 아니면 장난을 치는 것인지.

"아혈(啞穴)을 풀어야죠!"

그제서야 생각이 난 듯 진소백은 머리를 쳤다.

"아하, 그렇지! 이 자식, 말을 해야 할 게 아니냐? 아혈을 풀어 달라고."

진소백이 오른손으로는 일걸의 뒤통수를 치며 왼손으로는 아혈을 풀었다.

일걸이 자지러지게 웃었다.

"하하하…… 무슨 말이든지, 하하, 들을 테니, 하하, 제발, 하하하……"

진소백이 인상을 썼다.

"넌 뭐가 그리 좋다고 웃는 게냐?"

일걸은 겁에 질려 울상을 하고서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하하하…… 아이고 하하, 제발!"

그제서야 진소백은 빙긋이 웃으며 다시 말했다.

"이제야 네 생각을 말하겠느냐? 어떠냐, 본  공자가 이분 소저와 어울린다고 생각

하느냐?"

섭수진이 피식 웃으며 그때를 떠올리고 있을 때 옆에서 풍호진의 말이 들렸다.

"이봐,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는가? 이제 날이 어두워졌으니 어서 시작하세."

풍호진의 말은 섭수진을 현실로 되돌렸다.

"소란(騷亂)을 일으키기로 한 시각이 얼마나 남았나요?"

"이제 일 각 남았네."

"좋아요. 그럼 가요."

그들의 신형이 작은 개울을 건너뛰고 큰 바위들을 넘으며 동굴로 접근했다.

동굴의 입구를 지키는 자들은 가정(價定)과 감이동(甘伊董), 둘이었다.

그들은 한껏 인상을 쓰고 있었다.

"이런, 밖을 지키는 놈들은 도대체 뭘  하기에 저런 자들이 들어오는 것도 모른단 

말인가?"

감이동이 참지 못하고 툴툴거렸다.

저 멀리 이십여 장 떨어진 곳! 

두 명의 광인이 자신들을 보며 욕설을 퍼붓고 있지 않은가? 옷은 찢어진 누더기를 

대충 걸쳤는데, 속에는 빨지 않았는지 검은 빛깔의 속옷이 비쳤다.

두 미친놈이 가정과 감이동에게 손가락질을 해대는 것이다.

"헤헤, 저놈들이 검은 옷을 입고 동굴을  지키는 것으로 보아 말로만 듣던 마귀의 

귀졸들이 아닐까? 헤헤."

"히, 맞다. 생긴 것도 흉악한 걸 보면 틀림없구나. 히, 정말 꿈에 볼까 두려운 얼굴

이다."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하는 말이 모두 속을 뒤집는 말뿐이었  "아마 왼쪽 놈은 마

누라 뺏기고 뒈진 놈일 거다. 생긴 걸 보니 틀림없다. 헤헤."

"그럼 나머지는 틀림없이 남의 마누라 뺏다가 맞아서 뒈졌을 게다. 히, 생긴 게 꼭 

사흘 밤낮 얻어터진 것 같잖아? 히."

글쎄, 어느 놈이 더 나은 걸까? 

 좌우간 이런 말을 듣고 있는 가정과 감이동의 속에서 불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박살을 내고 싶었다.

하나 근무 중에 장소를 이탈할 수는 없었다.

저곳이라면 숲속에 숨어 밖을 지키는 여덟 명이 해야 할 일임이 당연한 곳인데.

'이 자식들은 뭐 하는 거야? 어디 모여서 마작이라도 하나? 좌우간 근무만 끝나면 

너희들은 죽었어!' 

 이미 여덟 무사들은 제거된 지 오래임을 가정은 몰랐다.

그들이 어쩌지 못하고 속만 태우고 있을 때, 기회가 생겼다.

"히, 난 가까이 가서 구경할래."

광인 하나가 동굴 가까이로 다가왔다. 

 그 뒤를 따라 나머지도 오는 것이 아닌가? 

가정과 감이동은 신이 났다.

'옳지, 어서 오너라! 가까이 오기만 하면 내 너희 놈들을 박살내 주고 말겠다.'  이

런 생각을 모르는 광인들은 점점 가까이 왔다.

마침내 일 장 안으로 광인들이 들어오자 가정과 감이동은 손을 치켜 들었다.

단 한 번의 주먹으로 끝장낼 생각이었다.

이때, 

"이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까부느냐?"

우렁찬 외침과 함께 자신들과 똑같은 옷을 입은 무사 둘이  허공을 가로질러 광인

(狂人)들을 잡아챔을 가정은 보았다.

검은 옷에 검은 복면! 

흑회(黑會)의 복장이 아닌가? 

새로 나타나 광인들을 잡은 복면인이 가정을 보며 말했다.

"미안하네. 바깥에 급한 일들이 많이 생겨 지체되었네."

가정은 물었다. 

 "급한 일이라는 것은?"

"웬 미친놈이 공동 광성전(廣成殿)에 난입하여 풍운 진인 나오라고 난리라네."

"엥, 그 미친놈이 도대체 왜 그런다던가?"

"하하! 좋은 질문일세.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나만은 그 이유를 안다네!"

그의 목소리가 음산해졌다.

"그건 말야…… 바로 나와 같은 이유다!"

나타난 복면인 둘이 벼락같이 외치며 가정과  감이동을 제압했다. 놀랄 새도 없었

다.

둘이 쓰러지자 광인들은 서둘러 옷을 벗었다.

놀랍게도 가정과 감이동과 똑같은 복장이 안에서 나타났다.

복면인 중 하나가 광인(狂人)에게 말했다.

"다른 변화가 없도록 잘 지켜 주게. 부탁하네."

광인 하나가 말했다.

"염려 마시오, 둘째 형! 내가 빨리만 알았어도  이런 고생을 시키지 않는 건데. 꼭 

큰형을 구출해 오시구려."

그는 두말할 나위 없이 신주낭객(神州狼客)이었다.

옆에 선 구천도 말했다.

"동굴 안이 오히려 더 흉험(凶險)할 겁니다. 부디 주의하십시오, 사숙!"

풍호진과 섭수진은 동굴로 들어갔다.

바깥은 신주낭객과 구천이 지켜 줄 것이다.

종유 동굴의 내부는 얼마나 험할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