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 장 비중은비(秘中隱秘)
1
심화절이 엽혼의 일에 생각이 미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복잡한 일이 너무 많아 잠시 엽혼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엽혼이 필요했다.
심화절은 엽혼의 치료를 맡은 의원을 불렀다.
"엽혼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느냐?"
의원이 대답했다.
"며칠 내로 신지를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격잠지술(激潛之術)의
영향이 컸는지라 살아날 가능성은……"
무슨 말인가?
의원은 분명 엽혼이 일어나 사라지는 것을 보았는데…… "이제 흉수를 알았으니
그가 살아나고 말고는 중요하지 않다. 명심할 것은, 그는 쓰일 곳이 있는 자이니
필히 정신이 돌아오게 해야 한다."
심화절의 준엄한 말에 의원이 허리를 숙였다.
"존명(尊命)!"
의원은 천응각을 물러나와 다시 석실로 돌아갔다.
석실 안은 여전히 어두웠다.
엽혼과 같은 환자에게는 빛이 오히려 좋지 않으므로 일부러 택한 곳이었다.
석대 위에는 여전히 엽혼이 시체와 같은 몰골로 누워 있었다.
그러나 의원은 알지 못했다.
자신이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 시체가 석실 안을 걸어다니며 중얼거리고 있었
다는 것을.
또한 시체는 지금도 누워서 속으로 쉴새없이 욕을 퍼붓고 있다는 것을.
'빌어먹을! 천하의 복칠(福七)이 이게 무슨 꼴이람! 분타주님이 친히 명령하시기에
중요한 임무인
줄 알았더니…… 애고, 팔자에 없는 송장 행세라니……' 진소백의 명에 의해, 엽혼
을 대신하여 개방의 방도 한 명이 누워 있었던 것이다.
의원의 일시적인 기억은, 진소백이 생사의괴(生死醫怪)에게서 배운 망신단(忘神丹)
을 이용하여 제거했다.
망신단의 양을 조절하여 일시적인 기억만을 제거하는 기법(技法)! 생사의괴의 수법
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의원은 자신이 엽혼을 본 순간을 기억하지 못했으며 일부분의 기억이 사라진 것
에 대해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의원은 엽혼을 대신하여 누워 있는 복칠을 보며 또 혼잣말을 했다.
"과연 깨어날 수 있을까?"
엽혼이 깨어나겠느냐고?
* * *
새벽이 되자 엽혼은 물론 깨어났다.
우중충한 석실의 석대 위에서가 아니라 소화(小花)의 향긋한 침상에서 그는 깨어
났다.
엽혼에게 이날은 다른 어느 날과도 달랐다.
그는 침상 옆에 잠들어 있는 소화의 모습에서 어린 시절 병간호를 해주시던 어머
니의 모습을 보았다.
이 여인은 너무 착했고 너무 아름다웠으며 또한 너무 사랑스러웠다.
하나 엽혼이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의 최선의 선택은 가능한 빨리 소화를 떠나는 것일 게다.
엽혼은 최대한 소리를 죽여 침상을 빠져 나와 밖으로 나갔다.
목옥의 문은 잠겨 있으니 열면 소리가 나리라.
그는 부엌을 통해 뒷문으로 나가기로 했다.
엽혼은 체력이 회복돼 잠력(潛力)이 살아났으니, 그의 걸음 소리를 소화가 들을 수
는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그녀는 엽혼을 잡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엽혼은 소화의 집을 떠나지 못했다.
그는 부엌에서 하나의 그림을 보았다.
너무 놀라 그는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림은 인물의 전신을 그린 인물화였다.
그 솜씨가 대단하여 이런 사냥꾼의 집에 걸려 있는 게 어울리지 않기도 했지만,
엽혼을 놀라게 한 것은 그런 점이 아니었다.
그림 속의 인물!
그는 엽혼이 매우 잘 아는 인물이었다.
항상 자신을 화선에게 안내해 주던 소하루( 霞樓)의 점원! 자신이 이엽(李葉)의 신
분으로 건네 주던 은자덩이에 입이 함지박만해지곤 하던 소하루의 조삼!
어찌 그의 인물화가 소화의 집에 걸려 있단 말인가? 게다가 그가 입고 있는 옷은
결코 주루의 점원이 입을 수 있는 차림이 아니었다.
웬만한 재력(財力)으로는 꿈도 꾸지 못할 화려한 차림이었다.
조삼을 생각하자 비로소 엽혼은 가짜 화선이 어떻게 자신에게 청부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조삼이 관건(關鍵)이었다.
그는 다른 청부 살수는 진짜 화선에게 안내해 주었고 오직 엽혼만을 가짜 화선에
게 안내했다.
엽혼은 항상 조삼의 안내에 따라 소하루로 들어갔으니 충분히 그를 속일 수 있었
을 것이다.
조삼이 한패였다면, 가짜 화선이 엽혼에게만은 진짜 화선이 되는 일이 가능했다.
이런 복잡한 일을 꾸민 목적은 무엇일까?
엽혼은 자신의 잠력이 사라지며 고통에 몸서리치던 순간 떠올렸던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화선을 쫓으며 흑회(黑會)가 세상에 드러났다.
가짜 화선이 굳이 화선으로 행세한 이유는 흑회를 세상에 알리고자 함이었지도 모
른다.
그렇다면……
'진정한 범인은 흑회(黑會)가 아닐 수도 있다.'
그랬다. 이것이 보다 정확한 답에 가까울 것이다.
그에게 가짜 화선을 통해 살인을 청부(請負)했던 자는 일부러 화선이란 끈을 통해
흑회를 비응방에 알리고자 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조삼의 화려한 차림은 그가 이 음모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말해 주었다.
이제 엽혼은 떠날 수 없었다.
그는 떠나는 대신 소화(小花)를 깨웠다.
그림 속의 조삼에 대해 소화에게 물어야 했다.
소화는 두 눈을 비비며 기지개를 켰다.
엽혼이 말없이 그녀의 눈앞에 그림을 갖다 대자 소화가 빙긋이 웃었다.
"보셨어요? 솜씨가 없어서……"
그녀가 수줍게 말했지만 엽혼은 그녀의 수줍음을 감싸 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이 그림의 인물을 알고 있소?"
"그럼요. 그가 바로 제가 어제 말씀드렸던 성내의 거부이신 조(曺) 대인(大人)이에
요."
소화가 다시 수줍게 웃었다.
"저는 처음에는 주방에서 일했어요.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그림 솜씨가 있음이
알려져서…… 인물화를 그리는 일을 맡게 되었어요."
소화가 다시 웃었다. 그림 솜씨가 있다고 스스로 말한 것이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공자께서 잠들어 계시는 동안 밤새 그린 그림인데…… 어때요, 못…… 그렸죠?"
엽혼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아니오. 매우 잘 그렸소."
정신없이 말하며 엽혼은 생각했다.
인연이란 어쩌면 이렇게 묘할까?
찾을 가능성(可能性)이 희박(稀薄)했던 단서를 이처럼 우연히 찾게 되다니. 그는
운명(運命)의 힘에 내심 고개를 흔들며 소화에게 물었다.
그녀는 엽혼이 자신의 그림을 칭찬하자 얼굴에 가득 기쁨을 담았다.
"이 그림의 주인은 지금 어디 가야 만날 수 있소?"
* * *
아침의 산길은 추웠다.
그러나 피부를 잠식해 오는 냉기보다도 더욱 가슴을 쓰리게 하는 것은 이별의 무
정함이었다.
소화는 눈물을 글썽이며 마음 아파했다.
그러나 엽혼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적어도 소화는 그들이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엽혼은 알고 있었다. 지금 헤어지면 다시 보지 못할 것 그는 돌아보고 싶
었다.
산길 멀리서 아직도 그의 등에 쏟아지는 소화의 시선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그러나 엽혼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와 소화가 다시 볼 수 없다는 운명은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가 없음을 아는 까
닭이었다.
그의 감정은 흔들렸지만 그의 이성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흔들렸지만 그의 발길은 흔들리지 않았다.
엽혼은 다만 꾸준히 산길을 따라 내려갔다.
이윽고 나무 사이로 그의 모습이 완전히 가려지자 소화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 * *
엽혼은 마침내 성내로 들어왔다.
번잡한 거리와 성도의 소음(騷音)은, 엽혼이 마음의 번뇌를 삭이는 데 도움을 주었
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알아 낸 사실을 진소백에게 전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 곳곳에 있는 개방의
연락망을 이용하면 되었다.
엽혼이 성내의 한 거지에게 동전을 던졌고, 거지는 뭐라 중얼거리면서 그 동전을
받았다.
동전은 거지가 가졌지만 동전을 쌌던 종이는 진소백이 받아 보았다.
그 종이엔 엽혼이 만난 진짜 화선과 조삼에 관한 얘기가 상세히 적혀 있었다.
모든 정보는 하나의 중심축 아래로 모여야 했다.
지금 중심축은 다름 아닌 진소백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의 정보를 모아서 분석하고 누가 가장 뒤에 숨은 음모자인지를 가
려 내고자 했다.
표면적으로는 고숭무와 흑회(黑會) 같았지만, 뒤에 숨은 다른 음모가 있을 가능성
이 컸다.
2
진소백은 옆에 있는 섭수진을 보며 말했다.
"가짜 화선을 만든 이유가 뭐겠소?"
섭수진이 답했다.
"흑회의 종적은 그 은밀함에 비해 너무 쉽게 드러났어요."
그녀의 말은 대답이 아니면서도 대답이었다.
화선(花仙)이라는 끈과 구천의 천랑파(天狼派)라는 끈을 통해 흑회는 너무 쉽게 실
체를 드러냈다.
흑회가 비응방의 이인자와 방주의 부인을 첩자로 잡을 만큼 은밀한 음모와 힘을
보인 데 비하면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론은 누군가가 일부러 흑회를 세간에 알리고자 했다는 것! "그럼, 누가 그랬겠
소?"
진소백의 물음에 섭수진은 잠시 생각했다.
"두 곳이 가능성이 있겠군요. 백회(白會)란 집단과 심화절!"
진소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나의 문서를 들었다.
구천(仇賤)이 보내 온 문서!
그는 사부를 구해 준 은혜를 갚고 싶다는 구천에게 백회에 대해 더 조사하라고 지
시했었다.
문서에는 구천이 조사한 백회에 관한 여러 사항이 적혀 있었 "백회의 인물은 누
구라고 생각되오?"
"글쎄요…… 일전에 고숭무를 해치우는 자가 백회의 인물이라고 확신하셨잖아요?"
"고숭무는 독소명이 해치웠지. 하지만 그는 백회가 아니오."
"그럼……?"
진소백이 조용히 말했다.
"심화절 또한 백회라고 하기엔 앞뒤가 맞지 않고…… 난 사공두를 의심하고 있소."
섭수진이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사공두는 금사진에 대한 충성심이 지대했던 자예요. 그를 비응방이 아닌
다른 세력에 속한 자로 본다는 것은……"
진소백은 머리를 흔들었다.
"백회(白會)는 흑회와 성격이 다르오. 일전에 신주낭객에게서 금사진이 백회의 우
두머리임을 듣지 않았소?"
"그럼, 백회란……?"
진소백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난 금사진이 만든 세력이라 믿고 있소."
"무슨 목적이었을까요?"
"아마도 흑회에 대항하기 위함이었겠지. 금사진의 능력으로 보건대, 그는 흑회의
구성원이 정확히 누군지는 몰랐더라도 비응방의 주요 인물이 포함되어 있음은 알
았을 게요."
"때문에 기존의 비응방의 세력과는 다른 세력을 만들었다는 말이군요?"
"누구도 믿을 수 없었겠지. 그는 비응방을 키우는 것에만 주력하여 방의 내실을
다지지 못했소. 아마 그는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따로 찾았을 것이오."
"이제야 어떻게 사공두가 백회(白會)에 속할 수 있는지가 이해되는군요."
"오직 사공두 하나만 믿을 수 있었을 거요. 물론 확실한 건 아니지만!"
섭수진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금사진은…… 매우 외로웠을 거예요."
진소백도 동의했다.
"그는 어쩌면 불쌍한 사람이오. 그의 능력이라면 비응방이 아닌 다른 방파에 들어
갔더라도 충분히
두각(頭角)을 나타냈을 거요. 하지만 그는 비응방에 들어갔고, 그의 인생은 고난
(苦難)만이 가득했소."
"어쨌든, 공자가 말한 대로 백회의 성격이 그렇다면 그들이 금사진에 대한 청부를
했을 가능성은 없군요."
"그렇소. 남는 것은 심화절뿐이지."
"그 또한 백회의 인물일 가능성은 없나요?"
진소백이 머리를 흔들어 부인했다.
"만일 금사진이 심화절을 백회에 가입시킬 만큼 믿을 수 있었다면 무엇 때문에 따
로 백회란 것을 만들었겠소?
가능성이 없는 얘기요."
섭수진이 깨닫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심화절은 흑회의 인물 또한 아니니……"
"그가 야심이 있는 자임은 확실하오. 두려운 것은 혹시 그 또한 뒤에 세력을 업고
있지는 않나 하는 점이오."
"만일 그마저 세력을 등에 업고 비응방을 노렸던 거라면 정말 무서운 일이에요.
후`─ 금사진 주위에는 적들만 있었군요."
"아마 그랬을 거요. 그는 한시도 남에게서 사랑을 받아 보지 못했소. 오로지 시기
와 적의만이 있었소."
섭수진이 갑자기 생각난 듯 화제를 바꾸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에요. 틀림없이 오늘이 비응방의 전력(全力)이 흑회를 치
기 위해 출정(出征)하는 날이에요."
진소백도 그 일을 생각해 냈다.
"만일 심화절이 백회의 존재를 알고 사공두의 정체를 안다면……"
"사공두는 살아남지 못하겠군요."
진소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비응방의 다른 방도들도 별로 살아남지 못할 거요. 만일 심화절이 다른
세력을 등에 업고 있는 것이라면, 그들이 노리는 것은 비응방이란 강호의 세력이
아니라
광산이라는 구체적인 이권일 테니까 말이오."
섭수진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심화절은 무사들이 가능하면 많이 죽어 비응방의 전력이 줄어들기를 바랄
지도 몰랐다.
사람이 적어지면 그만큼 충신도 적어지는 법이므로.
그들을 죽게 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모든 전투는 선과 후로 나뉜다.
선봉(先鋒)은 사공두가 설 것이니 만일 뒤를 지원하는 심화절이 일부러 늑장이라
도 부린다면 그들은 살아나기 힘들 것이다.
심화절이 흑회와 사공두를 동시에 제거하고 싶다면, 단지 조금 시간을 늦추어서
지원군을 이끌고 나타나는 것만으로 족했다.
사공두가 이끄는 선발대를 모조리 무찌르고 힘이 빠진 흑회를 심화절이 상대하는
방법이었다.
사공두는 죽어 영웅이 되고, 심화절은 살아 칭송을 받으리라. "막을 방법이 없나
요?"
진소백이 머리를 흔들었다.
"이것은 세력간의 싸움이오. 개인이 나설 수는 없소. 내가 할 일은, 숨어서 음모를
꾸미는 자를 찾아 내는 것뿐이오."
그랬다. 세력간의 싸움은 강호에서 늘상 있는 일이었다.
이해 당사자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진소백이 끼여들 여지는 없었다.
진소백이 할 일은 금사진을 죽인 진범을 찾는 것이었다.
강호에서 벌어지는 힘의 전쟁은 또 다른 일이었다.
"좌우간 곧 금청청과 매일도가 돌아올 거요. 그때가 되면 뭔가 알 수 있을 거요."
"그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나요?"
진소백이 말했다.
"누군가를 만나러 갔소, 나를 대신해서."
"누구……?"
"나와 가장 가까운 분을 만나러 갔지!"
섭수진이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인의신개(仁義神 ) 노선배를 만나러 갔군요. 음, 이상한데……?"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들이 있는 곳이 개방의 사천분타인데 왜 굳이 금청청 등을 보내 인의신개와
연락을 취하겠는가?
진소백이 웃으며 말했다.
"그분은 의형이신지라 물론 나와 가깝긴 하지만, 가장 가까운 분은 아니오."
"아하, 알겠어요. 진 공자의 부모님을 만나 뵈러 가셨군요?"
"하하, 내가 혼인할 섭 소저가 생겼으니 부모님께 물론 아뢰야겠지만, 아쉽게도 난
어린 시절 고아(孤兒)가 되었소."
섭수진은 그가 자신을 가리키며 혼인(婚姻)할 여인이라 하자 화를 내려 했으나, 뒤
이은 고아란 말에 충격을 받고 얼굴이 어두워졌다.
"죄송해요. 전……"
"괜찮으니 어서 맞춰 보시오. 매 형 등은 도대체 누구를 만나러 간 것이겠소?"
섭수진이 일부러 밝게 말했다.
"아아, 알겠어요. 진 공자의 사부님을 뵈러 갔군요?"
진소백은 빙긋이 웃었다.
"이제야 겨우 맞추었군."
진소백의 사부는 누구인가?
* * *
옥산(玉山)의 천험의 요새(要塞)는 이미 진소백이 경험한 적이 있는 곳이다. 엽혼
또한 옆 계곡에 위치한 흑회의 총단을 잠입했다 나왔으니, 흑회의 경계가 몇 배
강화되지 않았다면 말이 되지 않았다.
경계는 강화되었고 사공두가 이끄는 비응방의 선발대는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이들은 백여 명에 이르는 대부대였다.
아무리 조심해도, 가까운 거리라면 흔적이 발견되지 않을 리 없었다.
그것이 독소명이 이처럼 삼백여 장 거리를 두고 일단 방도들을 정지시킨 이유였
다.
밤하늘은 어두웠다.
지금은 만물이 잠든 이경!
그러나 비응방의 무사들은 잠들지 못했다.
"여기서부터 조심해야 하오."
독소명이 사공두에게 말했다.
원래 그의 서열은 숭무당의 부당주였으니 순찰당의 당주를 맡고 있는 사공두보다
낮았었다.
하나 고숭무를 직접적으로 해치운 공과 무공 수위를 참작해 지금 그들의 지위는
동격이었다.
그리고 오늘의 작전은 독소명이 계획을 세우고 사공두가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하
기로 했다.
사공두가 비록 용감했지만 머리 쓰는 일에 약함을 감안할 때 이런 편제는 지극히
당연했다.
"그냥 당장 쳐들어갑시다. 난 한시도 참을 수가 없소."
독소명이 난색을 표했다.
"안 될 말이오. 심 방주께서 후발대를 이끌고 오경에 도착한다 하셨으니 우리는
반 시진 전인
사경 말에 공격해야 하오. 그 시간이 가장 깊게 잠드는 시간이기도 하니 기습이
성공할 확률이 가장 높소."
사공두는 비록 못마땅했지만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성질이 급하기는 해도 바보는 아니었다.
머리를 쓰는 일이라면 독소명이 자신보다 나음을 그도 알고 있었다.
사공두는 뒤를 돌아보며 나직이 군령(軍令)을 내렸다.
"지금 시각은 이경. 공격은 두 시진 반 후인 사경 말에 개시한다. 그때까지 모든
무사들은 최대한
휴식을 취하되 결코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사공두의 군령은 조용하지만 빠르게 백여 명의 비응방 무사들에게 전달되었다. 무
사들은 다시 한 번 저마다의 무기를 점검하며 제자리에 앉아 휴식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쉬지 못했다.
이제 얼마 후면 생사를 건 싸움이 시작되므로.
* * *
흑회의 밀실(密室)은 모두 어두웠다.
등잔이 있어도 방이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둠은 벽에 칠한 옻의 검은 칠(漆)에서 나왔다.
지금 그 검은 방에서는 존령(尊領)이 홀로 앉아 방금 전서구에서 빼내 온 서신을
읽고 있었다.
<간다. 조심하라. 사공두는 이용 가치가 있으니 사로잡도록 하라.> 글은 간단했지
만 충분히 내용을 전달했다.
존령 또한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는, 아니, 그녀는 곧 머리 위의 줄을 잡아당겨 밖에 선 존령 이호를 불렀다.
"주위의 경계를 십 배 강화하고 내일 아침의 기습에 대비하라."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굵고도 탁하게 변해 있어 누구도 존령(尊領)이 여인임을 알
수 없었다.
"명을 받듭니다."
이호가 복명하고 물러나가자 존령이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흥! 흑회가 힘이 약해 지혜로써 비응방을 손에 쥐려 했던 것이 아님을 보여 주
마!"
그 음성은 다시 앙칼진 여인의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잠들었고 깨어 있던 사람들마저 잠자리를 찾을 시간이었지만 흑회
내부에는 은밀한 움직임이 있었다.
흑회 곳곳에서 다른 장소를 향해 이동하는 무사들이 보였고, 철시를 갈고 화탄을
점검하는 무사들도 많았다.
그리고 삼백여 장 떨어진 한 숲에서는 비응방의 무사들이 철시와 화탄, 그리고 검
날을 다시 갈며 결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3
월광(月光)도 힘을 잃었다.
그믐이 가까워 미약해진 달빛마저 구름에 가려지자, 한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
다.
그러나 비응방은 분주했다.
후발대(後發隊)!
사공두와 독소명의 선발대(先發隊)를 지원하기 위한 후발대가 지금 막 출발하려는
것이었다.
무사들의 표정은 비장(悲壯)했다.
심화절의 연설은 모든 무사의 가슴을 격동시킬 만큼 탁월했었 심화절, 비응방의
심 방주가 말에 올랐다.
후발대는 그가 친히 지휘할 예정이었다.
한데,
"우웃`─`!"
말에 오르려던 심화절이 또다시 비틀거렸다.
억지로 입을 다물었지만 옆에서 심화절을 보호하던 동패(董覇)는 심화절의 입가로
흐르는 피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즉시 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또다시 내상(內傷)이 도지십니까?"
심화절은 대답을 못 하고 손만 내저었다.
괜찮다는 의미였지만 이런 상황을 괜찮다고 볼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안 되겠습
니다. 저희들만으로도 충분히 흑회와 싸울 수 있습니다. 다행히 화골장 집형전주님
께서 지휘를 하실 수 있으시니……"
동패가 말렸지만 심화절은 완강했다.
"방의 모두가 나섰는데 방주의 몸으로 뒤에서 편히 쉰다면 말이 되느냐? 내가 빠
진다면 방의 사기는
땅에 떨어진다. 잔말 말고 어서 나를 말에 태워라."
피를 토했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말에 오르려는 심화절을 본 동패의 눈이 붉어졌
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비응방을 위해 힘쓰는 이런 방주를 모신다는 게 영광으
로 느껴진 것이다.
하지만 그로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심화절을 말에 오르게 할 수는 없었다.
"안 됩니다. 정 그러시다면 잠시 의원의 응급(應急) 치료라도 받으신 후에나 오르
십시오. 이 말씀마저 거부하신다면 이 동패(董覇), 설혹 목이 끊어지더라도 방주님
의 내상을 방도들에게 알리겠습니다."
이런 충정을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의원은 속명술(續命術)을 응용하여 심화절의 내상을 미봉(彌縫)했다.
"그러나 하루빨리 제대로 된 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또 무리하셔서는 결코 안
됩니다."
의원의 말이었다.
기실 강호인의 내상은 의원의 치료보다 운기조식을 통한 자체 치유가 우선이었다.
하나 심화절에겐 조용하게 운기조식할 여유가 없었다.
동패가 걱정이 가득하여 말했다.
"내상을 숨기시느라 억지로 진기(眞氣)를 끌어올리셔서 내상이 더욱 악화(惡化)되
셨습니다. 방주(幇主)님, 부디 몸을 보중하십시오."
심화절이 동패를 보며 미소 지었다.
"고맙다. 네 충정은 잊지 않으마. 방에는 너와 같은 이들이 많으니 내 어찌 내 한
몸만을 아끼겠느냐!"
후발대의 출발은 심화절의 내상으로 인해 조금 지연되었다.
아마 도착하면 약속한 오경이 지나리라.
그러나 독소명은 예정대로 사경 말 공격을 개시할 것이다.
흑회가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기습해야 하므로.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후발대가 늦으리라는 것을.
또한 누군가의 전서구를 받고 흑회의 존령이 이미 기습 사실을 알고 대비하고 있
다는 사실을.
* * *
"이곳인가?"
엽혼은 한 장원(莊園)의 담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으니, 혼잣말이었다.
담장은 어른 키의 두 배가 넘어 장원의 소유주가 대단한 부를 지닌 자임을 알게
했다.
엽혼은 두 번 담장을 따라 돈 끝에 나무가 가장 높이 솟아 있는 곳을 택했다.
주위를 둘러보며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엽혼이 몸을 띄웠다.
하늘의 그믐달마저 구름에 잠겨 없으니, 엽혼의 검은 옷은 꽤 가까운 거리에서도
알아보기 힘든 보호색(保護色)이 되었다.
그는 밤까지 숨어 기다렸던 것이다.
장원의 내부는 매우 밝았다.
곳곳에 등을 달아 마치 대낮과 같았다.
가산(假山)과 인공 호수가 군데군데 있어 넓은 천하를 한곳에 모아 놓은 듯한 저
택이었다.
호수를 가로지르며 놓인 운교(雲橋) 위를, 화복(華服)을 단정히 입은 한 사람이 팔
자걸음으로 건너고 있었다.
걸음은 느렸으나 움직이는 속도는 의외로 빨랐다.
이는 한 걸음의 간격이 그만큼 넓다는 것이니, 곧 그가 강호의 고수임을 알게 했
다.
화복인은 운교를 건너 마침내 자신의 거처인 자하원(紫霞院)으로 들어갔다.
둥근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호피의자가 그를 맞았다. 호피의자에 앉으면 창
을 통해 가산(假山)을 볼 수 있어 그는 이곳을 아주 좋아했다.
의자에 앉아 한잔의 술을 독작(獨酌)하며 가산을 바라보다 잠이 오면 그대로 침대
로 가 자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방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는 호피의자에 앉아 술을 따랐다.
그의 명령에 의해 항상 의자 옆의 탁자에는 술과 잔이 준비되어 있었다.
영롱한 호박빛의 술이 잔에 가득 채워지자 화복인은 다시 한 개의 술잔을 더 꺼내
어 다시 한 잔을 더 따랐다.
그리고 호피의자를 들어 방향을 돌렸다.
이대로 의자에 앉는다면 가산(假山)이 아니라 방안이 보일 것이다. 그는 개의치 않
고 의자에 앉아 술잔을 들었다.
화복인은 조용히 말했다.
"비록 주인이 청하진 않았지만 이미 왔으니 어서 나오시오. 내 주인된 도리로서
술 한잔 권하리다."
화복인이 바라보는 휘장(揮帳)이 흔들렸다.
그 속에서 나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엽혼이었다.
호박주(琥珀酒)는 달고도 향긋했다.
술잔을 내려놓으며 엽혼이 말했다.
"무척 단 술이오."
화복인이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단 술도 결국은 취하니 마찬가지 아니겠소. 자, 한 잔 더 하시오. 우린 구
면(舊面)이지 않소, 이엽(李葉) 대인?"
엽혼은 놀랐다.
자신이 숨어 있음을 알아챈 것도 놀랍지만 자신의 본모습을 보고 이엽이란 이름을
단숨에 댄 것에는 더욱 놀랐다.
그는 이자의 앞에 한 번도 본모습으로 나타난 적이 없었다.
엽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내 심부름 값이 너무 후했던 모양이오, 조삼!"
화복인은 바로 조삼이었다.
주루의 점원이었던 그가 어떻게 이런 거부(巨富)로 나타날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원래 거부가 주루의 점원으로 나타났던 걸까? "하하, 이 대인의 심부름 값은 확실
히 과했지요. 부지런히 모은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게 됐소."
조삼은 엽혼의 옷차림을 보더니 다시 말했다.
"이 대인은 너무 손이 컸었나 보오. 사업이 모두 망했나 보구려?"
엽혼은 씁쓸히 웃었다.
"옛 친구를 만났으니 회포를 풀고도 싶으나 안타깝게도 내겐 시간이 너무 없소.
조 대인이 부디 협조해 주시오."
말과 함께 그의 손목이 한 번 휘어 감기자 오른손에 기이하게 생긴 검이 나타났
다.
아홉 개의 마디가 한 개의 검을 이루는 이것은 바로 구절검(九節劍)이었다.
치우웅`─`
검이 떠는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조삼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이런, 화가 나셨구려. 내 정신 좀 보게. 앉을 자리조차 아직 권하지 않았다니……
자, 우선은 앉으시오. 내 무엇이든 대답하겠소. 사실 이 대인이
베푼 은혜(恩惠)를 생각한다면 무슨 말인들 못 해드리겠소?"
엽혼은 조삼 맞은편의 의자에 앉았지만 결코 긴장(緊張)을 늦추지 않았다.
조삼이 그를 보더니 다시 웃었다.
"하하, 내가 의자에 독이라도 발랐을까 봐 의심하는 것이오? 이거 정말 섭섭하오."
엽혼의 몸을 보라.
의자에서 반 푼 정도의 거리를 두고 떠 있지 않은가? 무릎을 굽힌 채 온몸의 무
게를 다리로만 지탱하는 것이니 쉬운 자세가 아니었다.
"나는 이것이 편하오. 내 질문(質問)에 어서 대답이나 해주시길 바라오."
조삼이 더 크게 웃었다.
"하하, 청부자와 가짜 화선의 정체를 알려 주는 일이 무어 그리 힘들겠소. 다만 오
랜만에 만난 옛
벗이니 술이라도 몇 잔 더 한 뒤에……"
조삼이 한 잔의 호박주(琥珀酒)를 다시 따르며 말하자, 엽혼은 언성(言聲)을 높였
다.
"시간이 없다 이미 말했소!"
조삼은 태연했다.
"시간이란 무엇이겠소? 인간의 하루가 하루살이에겐 평생(平生)이기도 하니, 우리
가 마음먹는다면
늘기도 줄기도 하는 것이 시간이오. 시간의 속성이 이와 같은데, 어찌 시간이 부족
하다 하오?"
조삼은 스스로의 흥에 겨워 눈까지 감은 채 말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으니 한번 결심한다면 없는 시간도 만들어 질 수가 있을
게요."
조삼이 손을 들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이처럼 말이오."
순간,
파칭!
쇠와 쇠가 부딪는 파열음(破裂音)이 일며 믿을 수 없게도 엽혼이 앉아 있던 의자
의 양 손잡이에서 쇠줄이 튀어나와
엽혼의 양손을 결박(結縛)하는 것이 아닌가?
엽혼이 놀랐을 때는 이미 발목도 쇠줄에 잡혀 전신을 움직일 수 없었다. 창졸간의
일이라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원래 독(毒)을 조심하여 몸을 의자에 채 붙이지 않았지만, 이것은 예상치 못
했던 공격이었다.
호피(虎皮)로 싸여진 의자의 뒤에 기관이 있었음을 몰랐던 까닭이었다.
조삼이 술잔을 마구 흔들며 통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별수없이 시간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소? 하하하!"
"이, 이런 비열한……"
엽혼이 쇠사슬을 끊으려고 힘을 쓰는 모습을 보며 조삼(曹三)이 선언했다.
"안 되지, 안 돼! 당신의 기량(技倆)은 이미 충분히 오랜 기간 연구되었소. 그 사슬
은 당신의 힘으로는 끊을 수 없소."
그가 소리를 낮췄다.
"비밀 통로 안의 쇠창살은 아무 의미 없이 존재했던 것이 아니었소. 만에 하나 당
신이 비응방에서 죽지 않고 돌아올 때를 대비함이었지."
그는 자신에게 어떻게 그처럼 쉽게 비응방의 내부와 비밀 통로에 관한 정보가 들
어왔는지를 깨달았다.
의심하고 있을 때와 직접 확인했을 때의 느낌을 달랐다.
엽혼이 분노하여 외쳤다.
"역시 음모(陰謀)였나? 왜 하필 나였지?"
조삼이 말했다.
"강호에 살수가 많다 하나 당신이 아니라면 누가 비응방의 내부에 잠입이나 하겠
소? 금사진의…… 암살이야 다른 제이의 방법이 있었지만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
소."
조삼은 엽혼이 분노하면 할수록 더욱 기분이 좋은지 다시 한 잔을 더 마시고는 말
을 이었다.
"고숭무와 흑회에 모든 혐의를 씌워야 했지. 그러기 위해선 무공 외에도 당신의
영리한 두뇌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소."
엽혼이 물었다.
"가짜 화선을 내세워 청부를 한 것도 그럼……"
"옳소. 흑회의 진짜 화선이 소하루에서 살인 중개업을 하고 있었으니 당신에게 화
선이란 이름으로 청부를 한 것이오. 다시 생각해도 좋은 계책이었소."
조삼이 다시 한 잔을 마시며 웃었다.
"점소이의 권한이 이처럼 큰 것을 안다면 사람들은 앞으로 주루의 점소이를 함부
로 대하지 못할 것이오. 하하하!"
엽혼은 신음했다.
"내가 잡히는 것도 예정된 수순이었는가?"
조삼이 엉뚱한 질문이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금사진은 당신이 아니라도 제거(除去)되었을 것이니, 당연한 일 아니오? 당신이
잡혀 배후(背後)의 화선을 말하고,
다시 화선을 통해 흑회의 종적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당신의 의미가 무엇이겠소?"
엽혼의 두 눈에 분노가 어렸다.
"그렇다면 내 동생을 납치하려 했던 일도……"
"당연하오. 흑회의 명령을 가장해 구천에게 명령을 내렸지. 우리의 간세가 흑회에
도 있으니 어려운 일은 아니었소."
엽혼은 드디어 진실을 알 수 있었다.
동생 엽평이 어째서 그처럼 쉽게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화선의 종적도 금방
발견될 수 있었는지를……
모든 것은 이중(二重)의 음모였다.
금사진을 제거하고, 그 와중에 고숭무와 흑회마저 제거하려는 음모! 엽혼은 원래부
터 비응방에 사로잡혀 배후의 화선과 흑회를 찾아가는 끈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는 분노를 참기 힘들었다.
누굴까?
금사진이 죽고 고숭무가 제거되어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은? 엽혼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사공두의 도를 비도(飛刀)를 날려 제지했던 사람.
그리고 배후의 흑회의 존재를 천하(天下)에 알린 사람.
급기야는 방주의 지위에까지 오른 사람!
조삼은 다시 한 잔을 마셨다.
그는 엽혼이 포박당했음을 믿고 방심(放心)했다.
"하하하, 모든 일은 끝맺음 단계(段階)이니 이제 당신은 이용 가치가 없소. 시간도
충분히 줬으니…… 이제 죽어 줘야겠소."
그를 보며 엽혼은 자신의 생각을 확신했다.
"심화절이로군!"
조삼은 흠칫하더니 웃었다.
"하하, 누가 그렇게 말합디까?"
때로는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것이 긍정(肯定)보다 더욱 강한 확신(確信)을 주기도
한다. 엽혼은 마음이 다급했다.
그는 이 사실을 빨리 진소백에게 알려야 했다.
조삼이 그의 마음을 짐작한 듯 웃었다.
"벗어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거요. 그 쇠줄은 당신의 능력을 정확히 평가한 후
에 제작된 것이니까."
조삼은 이미 한 주전자의 호박주를 거의 다 비웠다.
그는 조금은 흐려진 눈으로 엽혼을 보았다.
"이제 시간이 다된 것 같소. 당신은 이미 내가 왜 이런 얘기를 모두 했는지 짐작
하고 있을 것이오."
물론 엽혼은 알고 있었다.
비밀을 간직한 자들은 그 비밀을 말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산 자에게 말할 수 있
는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지 않은가? 비밀은 죽은 자에게만 털어놓을 수 있었
다.
그리고 죽을 자와 죽은 자는 별반 다르지 않다.
지금 엽혼은 죽을 자였다.
엽혼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는 지금 죽을 수 없었다.
비록 며칠 안에 그의 목숨은 끊기겠지만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알려야 했다.
심화절에 대해 진소백에게 알려야 했다.
진소백이라면 어쩌면 어느 정도 심화절의 음모를 짐작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
만 증거가 없을 것 아닌가?
이런 확실한 증거를 엽혼 혼자만 알고 죽을 수는 없었다.
* * *
사경 말(末)은 지금의 새벽 세 시이니 아직 동천(東天)에는 미명(微明)도 없었다.
만물이 가장 깊이 잠드는 이 시간에 사공두의 손이 소리없이 허공을 갈랐다.
그 손의 의미는 이러했다.
"돌격!"
백여 명의 비응방 고수들이 그 손을 보고 야음을 갈랐다.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가는 탓에 속도(速度)는 그다지 빠르지 않았다.
최고 속력으로 전진할 시기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적의 보초에게 최초(最初)로 발견이 되거나, 효과적(效果的)으로 매복을 제거하지
못하여 적들이 동료에게 신호할 여유를 주게 되면, 그 순간이 바로 전력으로 흑회
의 총단을 향해 달려갈 때였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운이 좋았다.
흑회 총단을 사십여 장(丈) 아래로 둔 언덕에 도달할 때까지 일곱 개의 매복과
열두 곳의 동초(動哨)가 모두 성공적으로 제거되었다.
백여 명 무사들과 사공두, 그리고 독소명은 흑회의 검은 총단 건물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의 저 건물들은 이제 곧 칼바람[劍風]에 잠기며 혈해(血海)로 화할 것이다.
사공두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허공을 두 번 감고 앞을 가리키며 힘차게 내려가는 손! 그것의 의미는 이러했다.
"전속(全速) 돌격!"
다시 한 번 비응방의 고수들이 사공두의 손을 따라 달렸다.
이번에는 전력을 다한 것이라 그 속도가 가히 번개였다.
백여 명의 무사들과 백여 개의 검(劍), 도(刀), 창(槍), 시(矢)가 어둠을 가르며 흑
회(黑會)로 직격(直擊)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