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 장 옥산탈출(玉山脫出)
1
금사진은 강호상에 무섭다고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소문보다도 훨씬 더했다. 지닌
바 무공도 무공이려니와, 그에게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지혜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비응방의 두 기둥이랄 수 있는 고숭무와 심화절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음을
알고는, 편제를 정할 때 일부러 오명과 독소명을 서로 섞어 둘을 견제하도록 했다.
오명은 원래 고숭무의 편이었고 독소명은 심화절의 편이었으니, 둘의 정보가 서로
에게 들어가, 그들이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려던 금사진의 계략(計略)은 성공했다.
"만약 두 마리의 호랑이를 한 번에 잡고자 한다면 두 마리를 싸움 붙이는 것이 가
장 쉬운 방법이겠지. 그런 의미에서 금사진의 계략은 매우 훌륭했다."
심화절의 눈에 은은한 감탄마저 어려 있었다.
"만일 그가 젊은 시절의 일로 정신이 가끔씩 불안해지는 병(病)이 없었더라면 아
마 우리가 끼여들 틈이 없었을 것이다."
심화절이 말을 이어 갈수록 앵아의 눈도 흥미를 더하는 듯 빛이 났다.
이런 것은 모두가 윗사람들의 일이므로, 이전의 그녀로서는 감히 들어 보지 못했
을 얘기였으므로.
"그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게다. 정신없이 비응방을 키우는 데만 주력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위가 온통 적뿐이었으니……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실수를 했다."
"무슨 실수였나요?"
앵아가 더욱 흥미를 느끼며 물었다.
심화절은 그녀의 모습이 귀여운 듯,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의 실수는 고숭무의
흑회(黑會)만 알고, 나, 심화절에 대해서는 너무 방심했다는 것이다. 그는 내 뒤에
오히려 흑회보다 무서운 세력이 있음을 몰랐다."
그랬다. 심화절 또한 세력이 있었지만 금사진은 알지 못했다.
만일 그가 알았다면…… 사태는 어떻게 변했을까?
"금사진은 흑회(黑會)에 대항하여 백회(白會)란 조직을 만들었지. 그리고 암중에
고숭무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심화절이 자신의 뒤에 숨은 세력이 있음을 말하자 노존과 앵아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졌다.
그는 오늘, 왜 이처럼 말이 많은 것일까?
노존이 심화절의 말을 막았다.
"당신은 오늘 왜 그리 말이 많소?"
노기가 서려 있었으나 심화절은 노존을 무시했다.
노존은 화를 내려다 문득 무슨 생각이 든 듯 노화를 삭였다.
"어쨌든 백회의 등장으로 고숭무와 적염은 위기를 느꼈나 보다. 그가 금사진을 암
기로써 제거했던
일은 너무나 멍청한 짓이었지. 하지만 우리에겐 더할 수 없이 좋은…… 우리 풍림
서(風林誓)에겐……"
그가 자신들이 속한 세력의 이름까지 말하자 노존은 마침내 참지 못했다. 그의 외
침에는 노기가 서렸다.
"심화절! 말을 아끼시오."
하지만 심화절은 여전히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시작은 고숭무가 했으나 성공한 것은 나다. 아니, 우리 풍림서(風林誓)다. 하지만
백회도 쉬고 있지만은 않았지."
심화절이 노존을 제지하며 말을 이었다.
"백회의 중심 인물인 사공두는 방의 고위직에 그대로 남는 것에 성공했지."
사공두! 그가 바로 백회(白會)의 인물이었단 말인가? "언젠가 나를 제거하고 금사
진의 정통(正統)을 이으려 하겠지만, 흥,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앵아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이 사람은 왜 평소답지 않게 이렇게 말이 많은 걸까? 심화절은 그녀의 굳은 미소
를 보며 다시 말했다.
"백회(白會)는 나를 이용해 흑회(黑會)를 제거하고 그 와중에 나마저 제거하려 하
겠지만……"
심화절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어려운 일이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이상. 이 심화절(深化絶)이 하찮은 차도살인
지계(此刀殺人之計)에 당할
리 없지 않느냐?"
이제 앵아의 얼굴에는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심화절이 그녀의 뺨에 손을 대며 말했다.
"얼굴이 차구나. 어쨌든…… 넌 무척 영리하구나."
앵아는 영리했다.
그녀는 이미 심화절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까지 알았다.
노존도 그의 의도를 알고 조용히 있었다.
"넌 항상 흰 손이 갖고 싶다고 했지 않느냐? 이분, 노존께서 그리 만들어 주실 것
이다."
심화절의 말은 담담했지만 앵아는 담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매우 희었다.
핏기가 모두 사라져 파랗기까지 했다.
손 또한 이처럼 희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바랐던 손은 결코 이런 흰 손이 아니었다.
노존의 손이 그녀의 목으로 다가왔다.
노존의 손은 검었다.
* * *
엽혼은 어찌 되었을까?
그는 화선(花仙)을 심문했고, 화선을 죽였다.
죽일 수밖에 없었다. 만일 그녀가 살아 있다면 자신이 죽게 될 것이므로.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다만 그는 자신의 일을 자신의 손으로 매듭 지은 뒤 죽고 싶었 엽가의 빚을 세상
에 남길 수는 없었다.
그가 죽은 후 빚이 남는다면 그것은 모두 엽평(葉枰)의 몫으로 돌아갈 테니까.
게다가 그녀는 엽혼이 극도로 싫어하는 음탕한 여인이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에 엽혼은 음탕한 자들에게 극도의 혐오를 갖고 있었다.
화선의 시체는 다음날 아침 발견되었다.
흑회(黑會)의 대응은 신속했다.
무수한 호각 소리 가운데 사방으로 흑회의 인물들이 퍼져 나가며 추적해 왔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엽혼은 이미 그들의 추격권(追擊圈)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다.
안전한 거리였다.
이 정도의 위치라면 설사 악마(惡魔)가 쫓아와도 엽혼은 도망갈 자신이 있었다. 평
소 그의 신법으로 보아 흑회가 그의 흔적을 찾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물론 평소라면 말이다.
"우욱!"
온몸으로 갑자기 참기 힘든 고통이 밀려왔다.
삼시충(三屍蟲)이 내장을 갉아먹는 고통이 이럴까? 엄청난 고통에 비틀거리던 엽
혼은 문득 진소백의 말이 떠올랐 ─`지금 자네를 지탱시키는 힘은 진기가 아닌 잠
력(潛力)이니, 부디 조심하게. 만일 과도하게 진기를 사용한다면 한동안 격심한 고
통과 함께 무기력(無氣力)에 빠질 걸세. 게다가…… 자네의
생명 또한 점점 짧아지게 되네.
진소백은 엽혼이 일을 한다면 반드시 무리할 것임을 알았다. 그럼에도 엽혼에게
일을 맡긴 것은, 엽혼이 비록 몸이 괴롭더라도 빚을 지고 싶어하지 않음을 알았던
까닭이었다.
엽혼은 그 점이 고마웠다.
더불어 금사진과 그의 딸 금청청에게 진 빚도 반드시 갚고 싶었다. 몸이 부서지
더라도 그는 알아 내야만 했다.
'어떻게 화선, 아니, 가짜 화선이 나를 감쪽같이 삼 년이나 속이고 청부를 할 수
있었을까?'
고통을 조금이라도 잊기 위해 엽혼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가짜 화선은 삼 년이나 그에게 청부를 했다.
진짜 화선이 청부 중개업을 하고 있던 바로 그 장소, 소하루에서 어떻게 삼 년이
나 다른 사람의 이목을 속였을까?
또, 왜 하필이면 화선으로 변장을 했던 것일까?
화선을 찾기 위해 그가, 아니, 진소백이 백방으로 수소문하던 중에 흑회(黑會)라는
세력의 종적이 발견되었다.
만일 그들이 화선이란 여인의 대역을 내세우지 않았더라면 흑회는 발견되지 않았
을지도 모른다.
혹 그들은 화선으로 변장함으로써 흑회를 세상에 알리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우
욱!"
다시 한 번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고통은 사고(思考)의 기능(機能)마저 범하며 전신을 무기력 속에 빠뜨렸다.
엽혼은 몸을 지탱해 주던 잠력이 급격히 사그라짐을 느꼈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흑회는 추격망(追擊網)을 점점 넓혀 왔고, 만일 조그마한 흔적이라도 발견이 된다
면 한 점을 향해 그 거대한
추격망을 집중시킬 것이다.
그리 되면 지금의 그로서는 도저히 피할 방법이 없었다.
안간힘을 쓰며 걸어가는 엽혼은, 자신이 이미 힘을 상실하여 온몸이 더할 수 없이
무겁다는 것을
미처 계산(計算)에 넣지 못했다.
풀잎 하나 넘어뜨리지 않고 걸어왔던 그의 걸음이 무거워지며 몸에 닿는 나뭇가지
들이 뚝뚝 부러져 나갔다.
흔적은 너무나 뚜렷했다.
하나, 엽혼은 인식하지 못했다.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는 그의 머리에는, 다만 앞으로 가야 한다는 본능(本能)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흔적은 이제 누구라도 찾을 수 있을 지경이 되었다.
천령(天領) 아래에 속한 무사들은 위세(威勢)부터가 현령이나 황령의 무사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둘이 모인다면 능히 현령주나 황령주와 자웅을 결할 수 있는 자들이 천령 휘하에
있었다.
특히 천령 일호(一號)는 개인적으로도 현령주 등에게 무공에서 뒤지지 않았다.
풀잎이 뒤로 누워 있음을 주목한 사람도 그가 처음이었다.
"이것을 봐라."
그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본 천령 칠호는 의아했다.
"풀잎이 누운 자국은 좀 전에도 많이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유독……"
"이 자국은 다르다."
칠호가 영문을 몰라 하자 일호가 자세히 설명했다.
"이전(以前)의 자국들은 모두 연속적이었다. 즉,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갔는지를
흔적을 따라가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흔적은……"
칠호는 비로소 흔적이 하늘에서라도 떨어진 것인 듯, 갑자기 나타나고 있음에 주
의했다.
"아마도 경공술에 일가견(一家見)이 있는 고수가,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실수(失
手)를 한 듯하다. 아니면…… 모종의
원인으로 내공이 약해졌거나……"
뒤의 말은 가능성이 희박하여 일호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나……
"흔적이 점점 뚜렷해집니다."
칠호가 기쁨에 들떠 말했다.
그의 말은 사실(事實)이었다.
처음에는 풀잎이 약간 누워 있는 정도의, 극히 미세했던 흔적이 이제는 주위의 나
뭇가지마저 마구 부러뜨리며, 흡사 고의(故意)로 유인하고 있는 느낌마저 들게 했
다.
일호는 잠시 생각했다.
이처럼 뚜렷한 흔적이라니…… 어딘가 이상했다.
"다른 곳으로 나간 동료들을 어서 불러라. 아무래도 예감(豫感)이 좋지 않다."
엽혼이 고통으로 무의식중에 남긴 흔적을 일호는 잘 따라왔지만, 너무도 의외의
상황 전개에 미심쩍어 동료를 부르는 것이다.
그의 이런 반응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하지만 이 약간의 지체!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지금의 엽혼에게 이 시간은 더없이 소중했다.
엽혼은 자신이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음을 느꼈다.
몸은 힘을 완전히 상실해, 한걸음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았다.
다만 잠력이 사라지자 고통도 일단락되어 정신이 맑아짐은 불행중다행이었다.
엽혼은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오자 자신이 흔적을 너무 뚜렷이 남겼음을 깨달았
다.
흑회(黑會)가 멍청이들의 집단이 아닌 이상 재빨리 추적해 오리라.
하지만, 자신이 어떻게 도망간단 말인가?
이미 손 하나 움직이기도 힘에 부쳤다.
어딘가 숨으려 해도 흔적을 없앨 방법이 없었다.
누군가 도와 주러 올까?
어차피 며칠 안에 죽을 몸이니 당장 죽는 것도 나쁘지는 았았다. 하나…… '빚을
진 채로 죽고 싶지는 않다.'
여기서 살아남아 화선에 얽힌 비밀을 밝혀, 금청청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고 싶었
다.
이때, 숲에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흑회(黑會)인가? 벌써.'
그러나 아니었다.
둔탁한 이 소리로 미루어 결코 강호인이 아니었다.
풀숲을 헤치고 그의 가까이 다가온 사람은 소녀였다.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옷!
아마도 근처에 사는 사냥꾼의 딸인 듯했다.
엽혼을 발견한 그녀는 놀라기는 했지만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사냥꾼의 딸이라
면 사람이 다친 것도 많이 보았을 것이므로.
게다가 그녀는 매우 용기있어 보였다.
이것은 엽혼에게 매우 좋은 징조(徵兆)였다.
용기있는 사람만이 위기에 처한 타인을 도울 수 있으므로.
"혹시 다쳤나요?"
그녀가 걱정스레 말을 걸어 오자 엽혼은 하늘에 감사하고 싶었 그녀는 용감할 뿐
아니라 인정까지 있었다.
그는 살아날 방법이 생겼다.
또한 빚을 갚을 수도 있었다.
그는 자신을 쫓고 있는 흑회의 인물들이 지극히 영리하기만을 바랐다.
영리한 자만이 그를 구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엽혼을 쫓아오는 자는 일호였다.
그는 매우 영리했다.
2
비응방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앵아(鶯兒)!
비록 시녀(侍女)였다고는 하나, 그녀는 비응방에 중대한 공을 세웠다.
금청청은 그녀가 자신과 매일도에게 오보산을 먹였던 일이 자의(自意)가 아닌 강
요에 의했던 것임과, 나중에
심화절에게 자신의 납치를 목숨을 걸고 알렸음을 감안해 용서했었다.
새로 방주가 된 심화절은 그녀의 공을 치하(致賀)하여 노비의 적에서 빼주기까지
했다. 그런데……
앵아(鶯兒)의 시신은 하수가 흘러가는 도랑에서 발견되었다.
그녀는 전신의 피가 빠져 나간 채 발견되었다.
온몸을 난자당하고 아랫도리는 피투성이였다.
전신의 피가 빠져 나간 사람의 손은 희다 못해 푸르렀다.
그리고 그녀의 시신을 지켜보는 심화절의 얼굴도 파랬다.
분노로 인해 그의 얼굴에도 피가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처음 발견한 사람이 자네인가?"
그의 질문에 노대 장육삼이 허리를 굽혔다.
"예, 제가 아랫것들이 일을 잘 하고 있나 둘러보고 있었사온데…… 어찌나 무서웠
던지……"
노대는 몸을 움츠린 채로 아직도 떨고 있었다.
심화절이 뒤에 선 사공두에게 굳은 어조로 물었다.
"누구의 짓으로 생각되오?"
사공두가 지체없이 대답했다.
"흑회의 짓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녀 때문에 흑회의 짓거리가 들통났다 할 수 있
으니……"
옆에 선 독소명도 거들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음모가 발각되자 노골적으로 덤벼 오는 것으로 사료됩니
다."
심화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두 눈 가득 분노를 담고 힘있게 말했다.
"앵아(鶯兒)의 장례는 성대히 치르도록 하라. 그녀는 일등 공신이었으니 비응방의
기록에도 이름을 남겨 그녀의 충과 절을 오래 기리도록 하라."
심화절의 목소리가 진기를 타고 전 방(幇)을 울렸다.
그의 목소리는 우렁차 며칠 전 생사의 악투(惡鬪)를 치른 사람 같지가 않았다. 설
마 그런 상황에서조차 자신을 숨겼단 말인가?
"더불어 악적들의 집단인 흑회(黑會)와는 더 이상 한 하늘을 지고 살지 않으리니,
이 순간부터
비응방의 모든 방도에게는 술과 고기를 금한다. 이 조치는 흑회를 이 세상에서 없
애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니, 이는 전 방주의 원한을 갚음과 동시에 앵아의 원혼
도 풀어 주는 의미이다. 모든
방도는 추호의 흐트러짐도 없어야 하리라."
심화절의 말에 누가 이의를 달겠는가?
주위에 있던 비응방의 방도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존명(尊命)!"
심화절은 그들을 보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앵아는 일등 공신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살아서뿐 아니라 죽어서도 비응방에 공헌
했다. 아니, 어쩌면 심화절에게 공헌했다 함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지도 몰랐다.
심화절은 겉으로는 신중하게 흑회에 대항하는 척했지만, 앵아의 죽음을 빌려 무작
정 싸움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고숭무의 비밀을 밝히고, 다시 흑회와 무작정 전투를 벌이는 일이 모두 앵아의 공
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앵아는 흰 손을 갖게 되었다.
비록 원했던 것과는 다른 형태였지만.
* * *
산속. 엽혼의 종적을 쫓던 천령 일호는 동료들이 어느 정도 모이자 다시 추적을
시작했다.
그는 흔적이 너무 갑작스럽게 나타났고, 또한 비상식적(非常識的)으로 뚜렷함이 마
음에 걸렸다.
일호는 매우 신중한 성격이었고, 그런 성격은 언제나 그가 일을 함에 있어 도움을
주었다.
지금의 예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흔적을 찾자마자 허겁지겁 달려들었겠지만 그는 달랐다.
"왜 이렇게 신중하십니까? 이렇게 흔적이 뚜렷하니 빨리 추격하여 공을 세워야 했
지 않습니까?"
일호는 설명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우리 흑회의 총단에 들어와 흔적도 없이 화령(花領)을 살해하
고 달아난 자다. 너는 그가 갑자기 무공을 모두 잃어버린 듯 이처럼 뚜렷한 흔적
을 남길 수 있다고 보느냐?"
칠호는 일호의 날카로운 분석에 감탄했다.
"그럼, 이것이 함정이란 말씀입니까?"
"그럴 가능성이 크다. 만일 우리를 유인하려는 함정이라면 십분 조심해야 한다."
칠호는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며 일호가 다른 동료들을 불렀던 이유를 수긍했다.
일호는 상황을 보는 눈이 남달랐다.
칠호는 그가 일호의 자격이 있음에 충분히 공감했다.
그러나 살아 가며 겪는 일은 한 면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
어쩌면 칠호가 엽혼을 쫓는 우두머리였다면 엽혼은 지금의 위기를 넘길 수 없었으
리라.
세상의 일이 단순한 지식만으로 된다면 어찌 세상사가 그처럼 복잡하겠는가? 때로
지식은 우리의 눈을 흐리게도 하니, 다만 맑디맑은 마음만이 소중할 뿐이다.
* * *
흔적이 갑자기 끊어졌다.
뚜렷하던 흔적이 사라져 일행이 당황하고 있을 때, 칠호는 나무 그루터기에 붙어
있는 종이를 보았다.
핏빛으로 쓰여진 글씨도.
<多謝從志 滅黑之處.
내 뜻을 따라 주어 대단히 고맙네. 흑회를 멸하는 곳이라네.> 칠호의 손짓에 따라
일호가 글을 읽음과 동시에 사방이 폭발하며 대나무창이 사방에서 날아왔다.
"역시 함정이었다. 급히 물러나라."
일호가 다급하게 외치며 물러나고 다른 사람들도 뒤를 따랐다.
화약 연기 속을 빠져 나와 주위를 둘러보며 몇 명이나 다쳤는지를 알아 보는 일
호! 다행히 죽거나 다친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함정의 흔적을 찾았다.
'아무래도 함정이 약했나 보다.'
숲의 나무 아래, 바닥을 파고 숨은 엽혼은 가슴이 뛰었다.
나뭇잎으로 가린 위장은 훌륭했지만 흑회의 인물들이 발견할지도 몰랐다.
자신이 직접 설치할 수 있었더라면 흑회의 인물들을 없앨 수도 있었겠지만, 그의
지시로 여인이 하기에는 기관이 너무 어려웠다.
몇 개의 대나무를 묶고 진소백이 전한 화약을 놓아 가까스로 함정을 만들었을 뿐
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약한 함정에 적들이 속을까?
만일 함정이 너무 약하다고 의심한다면!
그가 흑회의 인물이 영리하기를 바랐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영리한 자라면 이미 자신의 흔적을 따라오면서 의문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엽혼의 흔적은 너무 뚜렷하여 도저히 무공을 지닌 강호인이 남긴 것이라 볼 수 없
었다.
영리한 자는 그것이 혹시 함정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예상외의 약한 함정은 그런 의심을 가중시킬 것이다.
이것이 엽혼이 노리는 것이었다.
상대편이 주저하기를 그는 바랐다.
어차피 지금 이곳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상대방이 주저하는 동안 운이 좋게 그의 잠력이 돌아와 준다면 그는 이 위기를 넘
길 수 있었다.
엽혼의 등으로 여인의 미미한 호흡이 들렸다.
생면부지의 자신을 위해 여러 가지를 해준 사냥꾼의 딸.
산골에 무슨 향분이 있을까마는 그녀에게선 좋은 냄새가 났다.
여자 나이 열일곱에는 뒷물한 물에서도 향내가 난다 하였으니, 이것은 여인의 순
수한 살 냄새였다.
앞에서는 자신을 잡고자 하는 적들이 돌아다니는데 이런 상황에서 향기에 정신이
동하다니……
엽혼은 스스로 생각해도 웃음이 났다.
하지만 사람은 그런 것이다.
절벽에 매달려서도 위에서 떨어지는 꿀물의 달콤함에 정신을 잃는다 하지 않는
가? 일호는 더욱 의구심이 들었다.
이건 함정이라고 하기엔 너무 허술했다.
한 명이 죽창에 스쳐 피를 흘렸을 뿐,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화약 또한 소리뿐이었는 듯, 큰 폭발음에 비해 주위의 진동이 약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의구심만 짙어졌다.
이것은 상식에 너무 어긋났다.
'어쩌면 고도의 심리적인 함정인지도 모른다.'
망설이는 그에게 한 사람이 말했다.
"뭘 그리 망설이시오. 겁내시는 게요?"
항상 자신의 신중함을 못마땅히 여기는 이호임을 안 일호는 인상을 구겼다. 이호
는 아까 자신의 신호를
받고 온 후로 계속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용기가 있다면 자네가 먼저 가보게."
일호의 말에 이호가 냉소하며 들어갔다.
'이것이 고비다.'
엽혼은 생각했다. 그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고, 뒤의 여인도 느꼈는지 호흡이 가빠
졌다.
이윽고,
꽈`─ 꽝!
이번에는 소리만이 아니었다.
일호는 이호의 몸이 허공으로 솟아올라 갈가리 찢어지는 것을 보았다.
무서운 위력의 화기(火器)였다.
진소백에게서 받은 단 하나의 폭화탄(爆火彈)!
엽혼이 준비한 최후의 계략이었다.
"역시 함정이었다."
일호는 신음하며 물러났다. 덩달아 다른 사람들도 물러났다.
게다가, 하늘이 도운 것일까?
멀리서 흑회의 신호가 올랐다.
수상한 자를 발견했음을 알리는 신호(信號)였다.
'모든 일에 우선하여 적을 섬멸하라.'
이것은 흑회의 지상(至上) 명령이었다. 일호를 위시한 모든 흑회의 인물들이 급히
신호가 올라온 곳으로 달려갔다.
누군가 산에 나온 사냥꾼이라도 발견한 걸까?
조금 후 나뭇잎을 헤치고 엽혼이 나왔다.
사냥꾼의 딸도 모습을 나타냈다. 한참을 얼굴도 모르는 사내의 등에 붙어 있던 그
녀는 얼굴을 발그레 물들이고 서 있었다.
엽혼은 그녀로 인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하늘에는 어느새 태양이 중천하여 양광(暘光)을 온 누리에 뿌리고 있었다.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있더라도 한 줄기 희망(希望)이 비추이는 세상의 이치와 같다고 그
는 생각했다.
햇빛 아래 선 여인은 예뻤다.
뽀얀 피부에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 배어 있었다.
처음으로 여인 앞에서 가슴이 뛴다고 엽혼은 생각했다.
그의 지금 처지를 생각할 때 이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3
태양이 이글거린다는 표현은 지금과 같은 겨울에는 맞지 않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태양은 이글이글 타올랐다.
하늘의 태양은 비록 겨울 한풍(寒風)에 힘을 잃었지만 지금 심화절의 두 눈에 비
추이는 태양은 타오르고 있었다.
"어차피 치를 전쟁이라면 한걸음이라도 앞서는 자가 유리할 것이오. 흑회의 본단
위치를 아는 지금, 난 한시라도 미룰 의향이 없소."
그는 지금 흑회와의 전투를 선언하고 있었다.
"싸움은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오. 기세와 사기가 전황(戰況)을 좌우하니 두 분
은 방도들의 사기(士氣)를 진작시킴에 힘을 써주시오."
독소명과 사공두는 동시에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셋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본 방도들이 환호했다.
심화절은 손을 들어 환호에 답하고, 방도들을 진정시켰다.
"이제 결전의 날이오. 단지 하루의 준비가 짧다면 짧을 것이나 한시라도 늦추는
것은 적에게 시간을 주는 셈이니, 결전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소."
심화절은 어조를 강하게 했다.
"전 방주님을 시해하고, 우리 비응방을 농락한 자들에게 우리의 힘을 보일 기회가
왔소. 적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오. 하지만……"
심화절이 조금 소리를 낮추었다.
"여러분의 피와 땀은 곧 나의 것이니, 부디 무사하시오."
심화절의 마지막 말은 방도를 걱정하는 진정(眞情)이 배어 있어 무사들은 감격했
다.
심화절이 일반 무사와 아랫사람을 생각하는 것은 이미 광문당주 시절부터 알려져
있었으니, 누가
이것이 심화절의 깊은 속셈임을 알랴?
'내가 걱정해 줌으로써 무사들은 감격하고, 마음이 동한 무사는 오히려 자신의 생
명을 아끼지 않게 된다.'
돌아서는 심화절은 득의양양(得意揚揚)했다.
이제 흑회(黑會)는 제거될 것이다.
더불어 백회(白會) 또한 살아남지 못하리라.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선봉은 내가 선다."
사공두가 크게 외치며 말을 달렸다.
그의 충정은 모두 알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앞에 나선 것을 당연시(當然視)
했다.
뒤는 독소명(獨蘇冥)이 받쳤다.
비응방의 일백여 무사들은 먼지를 피워올리며 방을 떠났다.
옥산(玉山)을 향해.
심화절은 그들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누가 보아도 걱정이 가득한 모습이지만, 한 사람만은 알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는 것이 비응방 방도들의 목숨이 아니라는 것을.
"자네는 뒤따라갈 생각인가?"
뒤에서 전음(傳音)이 들려 왔다.
심화절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고 있는지라 즉시 전음으로 응답했다.
"당연한 일 아니오? 그들의 뒤를 지원하겠다 약속했으니 방주로서 약속을 지켜야
지요."
"정말인가? 위험을 무릅쓸 각오를 했는가?"
"후후, 그들이 간 곳은 사지(死地)이니 방주인 내가 도와 주기는 해야겠지요. 하지
만 도와 주는 시기는 내가 정하오."
"자네는 흑회가 사공두 등과의 싸움에 지친 틈에 나타나려는 것인가?"
"사공두는 제거할 수도 없고, 곁에 두자니 거추장스러운 존재요. 흑회가 나를 대신
하여 제거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그러나 비응방의 모든 전력이 손상된 뒤에는 어찌하려는가?"
심화절이 한숨을 쉬었다.
곁에서 그를 보는 사람들은 방주가 근심이 많음으로 생각하고 송구스러워했다.
고숭무와의 흉험(凶險)했던 일전에서 당한 내상(內傷)이 아직 완쾌되지 않아, 싸움
에 나서지도 못하고 방도들만 보낸 방주의 마음이 얼마나 쓰리겠는가? 그러나……
"후후, 어차피 비응방의 가치는 광산(鑛山)의 개발권에 있지, 방(幇) 자체에 있지는
않소. 그들이 모두 죽더라도 흑회와 백회가 공사(共死)한다면 억울한 일은 아니지.
아니, 오히려 좋은 일이라 할 수 있소."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비응방의 누구도 모를 걸세."
심화절이 침통(沈痛)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걸으며 전음(傳音)을 보냈다.
"그만 하고, 어서 그 사람에 대한 얘기나 하시오. 금사진의 장례식에 모습을 보였
다고 했지요?"
"그렇네. 분명히 그였네. 그런데 잠시 모습을 보인 후 어디론가 사라져 종적을 찾
을 수가 없네."
"하지만 나타났다면 어딘가 있을 게요. 우연히 그의 제자가 걸려든 것은 운이었지
만, 후후…… 이번
기회에 그 또한 제거해 버리고 말 거요."
"무리 아닌가? 흑회와 백회 또한 상대하기 쉬운 자들이 아니네. 거기에다가 그까
지……"
이제 심화절은 멀리 사라져 뒷모습만이 보였다.
그러나 전음은 여전히 또렷하여 그가 내상을 핑계로 흑회와의 전쟁에 불참한 것은
거짓임을 알 수 있었다.
"어렵겠지요. 하지만 운이 좋다면 제거할 수 있을 거요. 우리 풍림서(風林誓)로서
는 큰 수확이 아니겠소?"
노존의 전음은 동의(同意)를 담았다.
"그렇네. 그는 우리 풍림서(風林誓)의 큰 우환(憂患)이지."
이들이 말하는 '그'란 누구인가?
그리고 풍림서란 어떤 집단인가?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그'는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이들이 흑회나 백회 같은 하나의 세력과 '그'라는 개인을 동급(同級)으로
올려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또한 '그'는 풍림서(風林誓)라 불리는, 심화절이 속해 있는 세력(勢力)과는 적대 관
계에 있다는 점도 확실했다.
'그'의 제거가 풍림서로서는 큰 수확이라지 않는가? 멀리 보이는 심화절의 신형
이 비틀거렸다.
주위의 수행원들이 급히 그를 부축하는 모습이 보였다.
심화절이 손을 들며 무어라 말하고 있음도.
아마 이런 말일 게다.
"괜찮다. 내상이 잠시 도졌구나."
그리고 수행원들의 눈에는 걱정과 감격이 가득할 것이다.
이렇게 심한 내상을 입고서도 방의 일에 애를 쓰다니…… 멀리서 이 광경을 보는
노존(老尊)의 귀로 심화절의 전음이 다시 들려 왔다.
"어떻소, 방주로서 아주 훌륭하지 않소? 수하들은 수족(手足)처럼 나를 따르고 있
고……"
노존은 씁쓸하게 웃었다.
같은 편이지만 심화절은 가끔 너무 무서운 구석이 있었다.
* * *
산길을 걷는다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었다.
특히 지금처럼 미인과 함께 걷는다면 더욱 기분이 좋으리라.
다만 엽혼의 마음에는 여유가 없어 산행(山行)의 즐거움을 만끽(滿喫)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은 따뜻함을 간직한 겨울 바람이 다시금 여인의 향내를 몰고 왔다.
엽혼은 또다시 가슴이 뜀을 느꼈다.
앞서 걸어가는 여인의 날씬한 종아리가, 고개를 돌릴 때마다 그의 시선으로 들어
왔다.
겨울의 찬 날씨에도 불구하고 맨살을 드러낸 옷을 입었다는 것은, 그녀가 산속의
생활에 매우 단련이 되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흑회의 인물들이 곳곳에 있으니 그는 여인을 집까지 바래다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따져 보면 여인에게 새로운 은혜를 입었으니 그 또한 갚아야 할 빚이 아니던가? "
소화(小花) 낭자, 아직 멀었소?"
여인의 이름은 소화라 했다.
엽혼은 이제 어느 정도 힘이 회복되었지만 소화는 부득불(不得不) 자신의 거처로
같이 갈 것은 주장했다.
소화를 바래다 주는 의미도 있어 엽혼은 두말없이 따라 나섰 "거의 다 왔어요. 아,
저기예요."
그녀의 손이 가리키는 곳은, 낮아지는 산자락이 다시 구릉을 이루며 흘러가는 언
덕이었다.
아름드리 나무 몇 그루 사이로 숨겨진, 나무로 지어진 집이 하나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대호(大虎)를 잡으러 가셨으니 아마도 보름 이내에는 돌아오시지
못할 거예요."
엽혼은 머리를 끄덕이며 소화의 뒤를 따라 언덕을 올랐다.
아무 장식도 없었지만 잘 정리된 실내의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
엽혼 자신의 담백한 성격과 잘 맞는 집이었다.
소화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너무…… 초라하지요?"
엽혼은 머리를 흔들어 부인했다.
"아니오. 정말…… 깔끔하오. 아마도 주인의 성정(性情)을 잘 나타내는……"
엽혼은 말끝을 흐렸다. 자신이 소화란 아가씨에 대해 잘 알지 못함을 깨달았던 까
닭이다.
"자, 우선 그곳에 좀 앉으세요. 아니, 누우세요. 이래봬도 사냥꾼의 집이라 원기를
돋울 약재(藥材)가 조금 있답니다."
소화는 엽혼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얼른 부엌으로 나갔다.
잠시 후 들어온 그녀의 손에는 사기로 된 그릇에 검은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저희 집안에서 전해 오는 비전(秘傳)의 처방에 따라 만든 약이에요. 아버지께서
사냥감을 쫓다 지치시면 항상 드시곤 해요."
그릇을 내미는 그녀를 엽혼은 다시 한 번 보았다.
그녀의 눈은 맑아, 속까지 모두 들여다보이는 듯했다.
엽혼의 눈은 깊고 힘이 있었다. 그는 누구와도 눈싸움에서 져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지금 힘이 없는 소화의 눈을 엽혼은 바라보지 못했다.
시선(視線)을 피한 엽혼은 소화의 손에 들린 그릇을 얼른 받아 바라보았다.
검은 약물!
먹어도 자신에겐 도움이 되지 않음을 엽혼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화의 눈! 자신이 그릇을 받아 가자 기쁨의 빛을 내던 그녀의 눈을 그는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꿀꺽! 꿀꺽!
약이 엽혼의 목을 넘어가는 모습을, 흡사 자신이 먹는 양 진지하게 바라보던 소화
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엿!
"맛이 쓸 거예요."
엿은 달았다. 하지만 입 안에 감도는 감미(甘味)보다도 가슴에서 올라오는 따뜻함
이 더욱 엽혼을 행복하게 했다.
그는 살아 오면서 남에게 이처럼 따뜻한 대접을 받아 본 적이 별로 없었다.
부친의 사문에서 축출(逐出)된 이후,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이제
죽음을 며칠
앞둔 지금에 와서, 그것도 처음 본 여인에게서 이런 따뜻함을 맛보다니.
엽혼은 소화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녀는 엽혼이 엿을 달게 먹는 것을 보고 두 눈 가득 기쁨의 빛을 담고 그를 보고
있었다.
"달죠? 항상 제가 아버지를 위해 엿을 만들어요. 아버지는 제가 만든 엿을 무척이
나 좋아하셔요."
엽혼은 내심 탄식했다.
이런 여인과 평생을 조용히 살아 가는 삶은 얼마나 행복할까? 그녀는 항상 자신이
무의식(無意識)중에 꿈꿔 오던 이상형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마음의 바람을 모두
이룰 수는 없었다.
지금 엽혼은 떠나야만 했다.
"난 이제 떠나겠소."
엽혼의 말투는 자신조차 놀랄 만큼 무뚝뚝했다.
소화도 엽혼의 말에 놀란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쉬시다가…… 가시면……"
엽혼은 그녀의 말에 약해지는 마음을 추스리며 다시 말했다.
"이미 시간이 많이 흘렀소. 오늘의 고마움은 잊지 않겠소."
이번의 말은 처음보다 더욱 냉정하여 소화는 고개를 숙였다.
한참이 지난 후, 고개를 드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음을 엽혼은 보았
다.
"전, 아버지가 사냥을 가신 후엔, 때로는 한 달 이상을 혼자서 지내요. 제발, 가시
더라도 하룻밤만 보내신 후에…… 산속의 밤은 매우 무서워요."
그녀의 말은 애절했다.
여인의 애절한 말은 남자의 가슴을 무너지게 한다.
그리고 말보다 더욱 가슴을 저며드는 것은 바로 여인의 눈물이었다.
엽혼은 가슴이 철렁했다.
왜 처음 보는 이 여인이 이토록 자신의 마음을 부여잡는 걸까? 왜 자신은 지금 냉
정하게 돌아서지 못하는 걸까?
갈등하던 엽혼이 마침내 말했다.
"하룻밤이라면…… 하지만 날이 밝으면 나는 곧 떠나야 하오."
그의 말이 떨어지자, 눈물을 흘려 내던 소화의 눈이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으로
뒤덮였다.
"좋아요. 잠깐만요, 곧 식사를 준비할게요. 제가 한때는 성내의 거부(巨富) 밑에서
주방 일을 한 적도 있어, 요리 솜씨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답니다."
엽혼은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돌아오자 순간적으로 온 세상이 모두 웃고 있는 환
상(幻想)을 느꼈다.
그의 심장이 떨렸다.
이런 것이 혹시 사랑이 아닐까?
어쨌든 그는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중 단 하루를 자신을 위해 쓰고자 결심
했다.
또한 소화(小花)란 여인을 위해 쓰고자 결심했다.
이 결심은 어떤 결과를 낳을까?